카잘스 영감님.

때로는 모노시대를 살다 모노 음반들만 남기고 가버린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또 어쩌다 보면 모노 음반만 남기고 가버린 것이 다행스럽기도 한 낡은 영감님.


갑갑하고 둔해빠진, 순 시대 착오적인 모노가 그렇게 다행스러운 이유는

모노답게 투박하고 깊은 그의 첼로에
더러더러 그가 피던 빨뿌리 곰방대 담배 연기처럼 묻어있는 늙은 할배의 탄식 같은 중얼거림 때문이지.

침침한 골방에 쩔어 있는 담뱃진 냄새 같은 모노 톤의 그 신음소리가
첨단 기술의 입체 음향으로 나발에서 쏟아져 나온다면
어쩌면 소스라쳐서 닭살이 돋을 듯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가 연주한 음반이면 거의 빠짐없이 군데군데 묵은 먼지처럼 묻어있는 그 중얼거림은
그 자신의 음악 속에서 희유하는 굴드의 흥얼거림과는 달라.
그의 중얼거림은 너무 아프고 너무 짙어서
어떤 때는 간혹 나를 따뜻하게 보듬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름끼치게 하며,
더러는 아득한 낙심과 무기력 속으로 빠져들게도 하는데
이왕에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판이나 하나 얹어 놓고 듣고지고... 하고지고...


이제는 거의 삭아빠진, 흑백의 모노톤으로 인쇄된 자켓의 카잘스 트리오의 백악관 연주실황.
여기도 역시 빠짐없이 영감님의 탄식 같은 신음소리는 묻어있지만
쿠프랭의 연주회용 소품을 잘 들어 봐.
저것 봐,
판을 뒤집고, 바늘을 얹고, 엉덩이 걸음으로 잽싸게 뒤로 물러앉아 숨을 고르기도 전에
첫 음표보다 더 먼저 불쑥 배어나오는 저 신음소리.


‘첫 음표보다 먼저’ 그의 감성이,
그가 껴안고 앉은 낡은 첼로보다도 먼저 그의 늙은 몸뚱아리가 울린다는 것. 
이것 봐,
게으른 머리를 흔들어 털어 내고 잘 들어 보라니까!
 

연주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쿠프랭은 일찌감치 저 한 쪽에 밀쳐 둔 채로 잊어버렸는지도 몰라. 
거기다가 중간 중간 탄식처럼, 혹은 음표나 숨표처럼 묻어나오는 저 중얼거림들을 봐.

그 신음 소리들은 귀에 들어와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뒤통수를 때리고 들어와 등골을 타고 흘러 벼락 맞은 듯 내 몸을 관통해 버린다는 말이야. 
귀로 듣고 곰곰히 머리로 새길 시간이 없다니까!
그 심사를 짐작하려 애쓸수록 가닥은 더더욱 흐트러져 버리고.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울림만 남아서 영감님의 담배연기처럼 방 한 가운데 쯤을 조용히 떠 돌 뿐이지.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한없이 가라앉는 그 고요한 아다지오 사이사이에
적재적소 에 묻어 나오는 신음소리들. 정말 마치 악보에 표기된 음표나 쉼표들 같지 않아? 
어쩌면 사람에 따라서는 쿠프랭의 소품보다 이곡의 신음소리가 더 훌륭하게(?) 느낄지도 몰라.


아아, 새의 노래다. 영감님이 그리도 사랑해 마지않아 연주회마다 빼지 않고 집어넣었다는 새의 노래다.

고향은 짐승이건 사람이건 숨질 때면 머리를 향하는 애닯은 곳이라는데
그 동네 새들이 모두가 저리 아름답게 노래하는지 내사 알 도리는 없지만,
영감님의 고향 카탈로니아에는 대체 어떤 새들이 저리 비통한 울음을 하는지도 내사 알 도리는 없지만,
영감님은 어쩌자고 저 새소리보다 더 슬픈 목소리로 새를 노래하고 말았는지.
어쩌자고 저리도 우울한 중얼거림으로 날 마저 울리고 말았는지. 어쩌자고...
 


그 옛날, 사나운 겨울 바람에 덜컹거리는 페인트 칠 벗겨진 낡은 나무창틀,
그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겨울 오후의 식은 햇살.
닳고 닳아 나무 결이 맨질거리는 마루바닥에 그 햇살 깔고
세수도 안한 얼굴로 수세미 머리를 한 채 한껏 게으름을 피면서
뜨거운 차 한 잔으로 소파에 파묻혀서 듣다 보면 
그렇게 뼈마디가 저릿저릿할 만큼 행복하기만 하던 저 탄식과 신음 소리가 이제는 왜.
 


난 잘 모르겠네. 그건 메누리도 모를 걸. 당신은 그걸 알고 있을까? 
아니, 글쎄, 요즘 들어 깜빡이는 횟수가 자꾸 잦아지다 보니 기억을 못하는지도 몰라.
혹시 내 수첩 속 어딘가에는 잘 메모해 둔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
뭐든 생각 날 때 갈겨 써 두지 않으면 그나마 영영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니깐.
그러게 말이야,  난 이제 중년이거든.


그렇지.
지나간 것들이 그리워지고 다가 올 것들은 두려워지지.

지나간 것들은 뭐든지 그리워지고 다가 올 날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두렵기만 하고.
그렇게 이제는 천천히 조금씩 낡아가는 것일까.
아니, 그래도 한 해가 넘어갔으니 나도 영감님의 저 깊은 탄식 소리에 조금은 더 가까워진 걸까.
그럼 그것으로 오늘 하루는 행복해져도 무방한 것일까.



.........
아니, 그런데 당신의 오디오에서는 영감님의 중얼거림이 들리지 않는다고?

아아.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오디오를 좀 더 나은 것으로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도 명분 없이 하이엔드에 맹종하는 무리들은 싫어하지만
그래도 이 음반을 들으면서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래도 못내 좀 억울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하,
물론 당신이 이 음반 속에 먼지처럼 묻어있는 늙은 영감의 신음소리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나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듣지 않는다.
아마 안 듣기 시작한지 이십년은 족히 되었을 거다.


물론 예전에는 들었다. 들어도 꽤 많이 들었지.
음악을 듣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비창 교향곡은
몇 장 되지 않는 내 장서에 끼어들기 시작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초보의 당연한 순서였으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베토벤의 5번, 3번에 뒤이어 교향곡으로는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던 걸로 기억한다.


첫 번째 음반은 번스타인의 뉴욕 필. 그리고 두 번째 들어온 음반이 비엔나 필과 연주한 문제의 마젤 판이었다. 아주 두터운 시꺼먼 표지에 마젤이 해골 같은 흑백 실루엣으로 박혀진 판이었다. 소장하고 계시거나 기억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을 듯싶다. 그 뒤로도 몇 몇 지휘자들이 들어온 후 마지막으로 므라빈스키의 음반이 들어오고는 나의 장서에 비창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이십대의 나는 곧잘 마음을 휩쓸리곤 했고 당연히 그럴싸하게 우울한 악상으로 덕지덕지 발려진 비창은 그런 나에게 역시 그럴싸하게 우울한 마음을 포장해주곤 했었다. 그리고 비창을 들을 때면 나는 거의 마젤의 음반에 손이 갔고 일 악장 도입부의 그 끈적하고 서늘한 느낌의 마젤에 중독 되어 급기야는 마젤을 제외한 판들은 그냥 판꽂이에 꽂힌 채로 그냥 곰팡이만 슬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 언제부터인가 그 곡을 들은 날이면 어쩐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었다. 스스로에게 좋지 않은 일도 생기긴 했지만 주로 사람과의 사이에서 예사스럽지 않은 대미지를 입곤 했다. 그것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더.


예외 없이 그 때 열애 중이던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그 곡을 들은 날이면 꼭 뭔가 트러블이 생겼다. 사소한 것으로 출발한 것이 종래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날카로운 대립으로 이어져 결국 꽝꽝 얼어버린 마음으로 서로 돌아서곤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비창 교향곡이 끔찍하게 느껴질 무렵, 결국 서로에게 누적된 상처만 안겨주고 둘은 어느 칼바람 부는 겨울날 모래바람 요란한 낯 선 강변에서 그 뜨거웠던 이십대의 여덟 해를 파묻어버리고 시퍼렇게 띵띵 얼어버린 몸처럼 마음도 그렇게 닫아버린 채로 차갑게 언 손 꼭 잡는 것으로 그 숱한 날들의 기억들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내 딴에는 깊은 상처였지만 남 보기에는 오갈 데 없는 신파가 분명하므로 일단은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누구나가 대개 그렇듯이 그 당시만 해도 이 세상에 태어나 오로지 그 사람만 안고 살아가리라는 매우 어리석은 생각으로 충만하던 이십대 후반 얼치기 로맨티스트는 그 일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고 그렇잖아도 시원찮던 세상살이를 아주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정말 칵 죽어버리고 싶었던 때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깨끗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 때때로 나를 우울하게 하기도 한다.


하여간에 결정타였다. 그리고 비창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비창의 탓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마젤의 연주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비창이든 비창 교향곡은 내게 기피대상 1호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가슴 가득히 비창에 대한 적의를 품고 만나는 이들 마다에게 그 곡을 내팽개치기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아 물론 지금은 좀 순화 된 편이다..... 그때에 비하면 나도 꽤나 나이를 먹었으니까. 나이가 들면 이렇게라도 나이 값을 해야 하는 건지.


하여튼 그리하여, 그렇게도 즐겨 듣던 4,5,6번 중 6번은 내 장서에서는 물론이고 내 기억에서도 점차 사라져 갔다. 그래서 지금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하면 4번을 제일 먼저 꼽는다. 무슨 음악적, 이론적, 이런 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기호로.

6번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세워놓고 비교해도 4번이 나아 보인다. 물론 그 일 이후로 비창을 다시 들어본 기억이 없어 정확한 비교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 일로 비창 음반들은 하나하나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어떤 판은 제정신을 잃은 나의 광란에 뽀개지기도 했다. 물론 다시 사들인 음반은 당연히 하나도 없었고. 그게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비창을 듣지 않는다. 엘피건 시디건 내 장서에 비창은 이제 없다. 혹 그 지난날의 망령이 다시 살아 돌아올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말이다. 이건 진심이다.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기억이었으니까.


그래, 언젠가는 다시 비창을 들어 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진 않지만 그 때는 아마도 내가 소중한 것들과 소중하지 않은 것들의 미망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편안하게 손바닥을 펴고 바라 볼 수 있을 때쯤 일 것 같다. 그래, 그 모든 것이 다 내 탓이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수긍하면서 오래 된 기억들로 눈물도 조금 흘리면서 제대로 한 번 들어보게 되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듣고 싶지 않다. 지금도 뜻하지 않게 라디오에서 비창이 흘러나오면 당장에 라디오를 꺼 버릴 만큼 혐오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일들이 정말 비창 때문이었을까? 아니었을까? 만약 그게 정말 비창 때문이었다면 그 로린 마젤 지휘의 데카 반 속에는 무슨 귀신이 붙어있었던 것일까? 이젠 더 잃을 것도 없겠다 싶은 지금은 정말 그런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아, 그래도 아직은 그 판을 다시 들어보고 싶지는 않아. 정말 진심으로 그래.



 

1. 개

집 뒷산 중턱에 개막사가 두 개 있다.

습하고 컴컴한 도랑을 건너 있는 탓에 귀찮아서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에 막사 하나에 예닐곱 마리의 못생긴 놈들이 멍멍거리고 산다. 올라가서 그 놈의 개 머릿수를 세어 볼일이야 없겠지만 간혹 자리다툼 하느라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그리 짐작한다. 술독으로 코 끄티가 빨간 딸기코 이장 영감이랑 배 나무집 중늙은이 하나가 조석으로 짠밥 깡통을 지게에 달고 각기 자기 소유의 개막사로 오르내린다.


사나흘에 한 번씩 대낮에 ‘개애~ 삽니다아~’ 하는 확성기를 달고 트럭들이 오고간다.

내 집이 동네 끄트머리 산길 길목에 있다보니 때가 맞으면 내 집 앞에 트럭 대 놓고 개 목줄 끌어 올리느라 부산을 떨기도 한다. 보신탕용 비육견(?) 이다. 요즘은 알지 못하나 몇 해 전에는 마리당 이삼십을 오갔으니 농사짓는 틈틈이 부업거리로는 괜찮은 듯 하다.


그러니 짐작으로도 뻔 한 것이 무슨 대단한 농장이라고 울 치고 담 치고 했겠는가 말이다.

대충 비닐하우스 뜯어 낸 뼈대 서너 개 둘러치고 판자때기 몇 개 얽어 놓은 위에 깨진 스레트 두어 장 얹어서 삭은 그물로 덮어씌운 이름만 막사다. 이름 하여 ‘영세 양견(?)업자’.

자,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이런 허름한 울쯤이야 송아지만 한 도사 잡종, 성질나면 뜯어 발기고 나서기야 식은 죽 먹기지. 가다 한 번씩 목줄만 감은 채로 허옇게 침 빼어 물고 동네 어귀나 논밭 사이로 대중없이 어슬렁거리는 험상궂은 인상의 도사 잡종을 보노라면 일순에 꼬리뼈 께가 찌릿 한 것이 기분이 썩 편치 않다. 그러니 어른도 그럴진대 아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바람 쐬러 간다던 큰 놈도 화들짝 놀라서 ‘아빠, 목장 개 풀렸던데요.’ 땀이 송글송글 얼른 뛰어 들어오고 마당에서 모래장난 하던 작은 놈은 아주 기겁을 하면서 거의 경기를 한다. 대문도 없이 사는 남의 집 마당에도 불쑥 들어와서 지 멋대로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고 하니 깜짝 놀라고 말고지.


개 주인들에게 항의도 해 보고 참다못해 범 군청 차원에서 조치를 취해달라고 방견 신고도 몇 번 했었지만 ‘예에~ 자알 알아서 조치 하것습니다아~. 매번 말만 비단이다.

비단이고 공단이고 간에 일단 풀린 개를 그럼 당장에 어찌 하냐고.
그 때마다 파출소에서 총을 빌려다가 쾅 쏴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떼 지어 짠밥 먹여 몇 달 길러서 어지간하면 팔아먹는 놈들이다 보니 길들이기는커녕 이름조차 있을 턱이 있나. 하다못해 끈 풀린 똥개 찾드끼 ‘워어리, 이리 오너라.’ 라든지, ‘독구야 끌끌’ 이런 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우습지도 않다. 그런 상황이면 딸기코 이장 영감이며 중년의 사나희는 작대기 하나 꼬나 든 채로 말 한 마디 없이 얼굴이 시뻘거러니 산 중턱이며 논밭 사이를 헐레벌떡 쫓아다니는 게 다다. 목 놓아 부를 이름이 있어야 말이지.

우습게보니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덩치 큰 이름 없는 개는 간헐성 맹수에 다름 아니다. 여차하면 사람을 해꼬지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2. 대문

그래서 담장만 대충 둘러치고 대문도 없이 살아 온지 어언 십여 년, 비장한 결심을 하고 대문을 짜서 달기로 했다.

말이 대문이지 기와지붕 얹어서 소슬 대문 세울 일이 있나. 피죽 먹고는 문고리도 달싹 못할 쇠대문 해 달 일이 있나. 그저 오가는 개만 못 들어오게 하면 만사형통인 울타리 수준의 사립문이다. 큰 맘 먹고 줄자 하나 꼬나들고 나서서 좌우의 폭을 재자하니 사 미터 수십 센치에 그나마 앞길이 비탈이라 마당어귀까지 조금 기울었다. 이런 젠장.

맨들맨들 시멘트 기둥에 여차저차 문을 달아 맬 궁리도 예삿일이 아니고 사 미터 남짓한 폭을 얽어 놓을 목재도 가격이 갑자을축 만만치가 않다. 하릴없이 줄자만 부여잡고 사립 어귀에서 서성거리기를 수삼일, 공언 후에 목을 늘이고 기다리던 애 엄마가 참지 못하고 묻는다.


‘담이 아부지, 대문은 은제 짜요?’

‘그저 궁리 중이로구만.’


코가 석자나 빠져서 시지부지 말 끝에 힘이 안 들어간다.

뻔한 쌈짓돈 통수에 목재며 각종 자재를 꼽아 보니 갑자는 을축이라 일이 십 만원이 우습게 넘어간다. 작업에 필요한 공구까지 챙겨보려니 여간한 부담이 아니었다. 날이면 날마다 사립께만 쳐다보자니 급기야는 대문 노이로제...

이러다가 밤중에 목재에 깔려 허덕이는 꿈을 꾸는 건 아닐까. 또는 목재 울타리에 짐승처럼 갇혀서 밤낮으로 슬피 우는 처량한 꿈은 꾸지 않을까, 각종 망상에 헛꿈까지 오락가락. 에라, 외통순데 일단 밀어나 보자. 한참 집 짓느라 몇 달 간 눈 코 뜰 새 없는 해빈이네 집에 전화를 넣었다.


‘이렇구저렇구 해서 집 짓고 남은 요만 조만한 나무 판때기 여나무 개 없것소?’


버섯 농장을 하는 진영이네 집에는 일전에 다녀오던 길에 언뜻 눈에 띄었던 화물용 파레트 판때기를 눈독 들이고 또 전화를 넣었다.


‘놔두고 불 때는데 쓴대매요? 그거 몇 개 나 주소.’  

이웃이 보배라 트럭까지 빌려 쓰며 목재를 확보했다. 덤으로 회전 톱까지 빌려다가.


마당에 얻어 온 나무를 재 놓고 보니 이게 원래 쓰던 용처가 아니다보니 이걸 어쩌냐 얼른 궁리가 서질 않아서 뒤적뒤적 망서리기를 또 수삼일.

안팎으로 꼬이는 일들에 이래저래 심사가 편치 않아 훌쩍 길 떠나서 사나흘.

죽자하고 내리는 비에 넋 놓고 앉은 채로 사나흘. 안 되겠다 머리 굴리다가 철 지나가겠네.

그리하여 나흘 전부터 작심하고 팔 걷어 부치고 무작정 망치를 들긴 했는데 태생이 헐랭이 삼촌 격이라 도무지 일머리가 안 잡힌다. 에라 모르겠다. 모조리 뜯어 발겨서 명실 공히 울타리나 둘러치고 말자.

그리하여 근 일주일을 살팎에 매여서 패대기를 쳐서 만든 물건이 남새밭 울타리 같은 대문이다. 뭐, 그런대로 생각보다 모양은 잘 나왔으니 사실 몹시 마음이 흡족하기 한정 없어 저으기 만족이다. 밥 먹고 나면 담배 하나 물고 감상하러 나가기도 했다.

못 삼천 원어치에 경첩 여섯 개 구천 원, 뼁끼 한 깡통에 신나 한 통 삼만 원. 싸다!

 

3. 수타면

7번 국도를 북상하다보면 우리 동네 조금 못 미쳐 수타면 집이 있다.

촌구석 짜장면 치고는 꽤 맛이 쓸만하여 아쉬울 때면 한번씩 애용을 하는데 며칠 간 대문 짠답시고 노가다를 하다보니 집구석이 어수선하여 끼니 챙겨먹을 일이 태산이다.

에라, 짜장면이나 먹자, 그래서 찾아간 집이 바로 그 집이다.

작은 놈은 무조건 짜장면, 큰 놈은 국물이 맛있다고 우동, 죽으나 사나 밥을 먹어야하는 나는 짬뽕 밥이다.

맛있다. 그런데 작은 놈이 먹던 짜장면을 조금 뺏어 먹다보니 어쩐지 면발이 예전 같지를 않다. 자세히 살펴보니 질이 썩 나쁘지는 않되 이건 분명히 동글동글한 기계 면이 분명하다.


‘아주머니, 인자는 수타면 안 해요?’

‘에그머니, 맛이 이전만 못하지요?’

‘조금..... 그런데 왜 안한대요?’


7번 국도 근동에서는 수타면의 원조라고 자부심 꽤나 빵빵했던 집이라 조금 의아했다.


‘부자간에 수타면 하느라 어깨가 고장 났대요. 그래서 주방장을 들였는데 월급이 삼백에다 걸핏하면 빼 먹고 배짱을 튕기는 바람에 내 보내고...... 그래서 고만 수타면을 접고 그 대신 가격을 내렸어요.’


언즉시야라, 메뉴판이 몽땅 바뀌었는데 삼천 오백 원하던 짜장면이 이천 원이다!

세상에, 라면 한 사발에 이천 오백 원 하는 세상인데 그래도 명색이 짜장면이 이천 원이라니.

그래도 하던 가락은 있어 볶은 짜장의 맛은 그대로라 썩 먹을 만 한데 말이지. 각박한 세상에 그래도 제 고집으로 승부하는 쟁이를 본 듯해서 맛있게 먹은 저녁에 기분까지 뜨뜻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짜장면이 이천 원, 우동이 삼천 원, 내가 먹은 짬뽕 밥이 사천 원. 셋이 먹은 저녁 식사가 구천 원이다. 돈 벌었다. 만세!


4. 부역.

이맘 때 쯤이면 풀베기 부역이 있다.

그런데 무슨 놈의 부역이 새벽 다섯 시란 말이냐고. 얽어 맨 대문에 뼁끼 칠을 하느라 쪼꼬만이랑 붓 들고 패대기를 치자니 지나가던 혜금이 아부지가 한 마디 거든다.


‘방송 못 들었노?’

‘방송은 못 듣고 어제 영이 할아부지한테 말은 들었소.’

‘자주하는 것도 아인데 나오지 그랬노.’

‘아따, 안 나간게 아니라 못 나갔다니까. 눈 뜨니 여섯신데 나가면 뭐하노.’

‘선생네 집은 부역 나오는 꼴을 못 봤다고 더러 주끼드만, 다음에는 나오것지 하고 말은 막아놨네.’

‘고맙소.’


리듬이 안 맞아서 못 살겠다. 새벽 세시나 되어 잠자리에 드는 내가 무슨 수로 다섯시에 일어나서 낫 들고 나선단 말이냐는 거다. 그나마 생활 패턴이 다르면 그 또한 웬만큼 이해를 해 주면 좋으련만,

하기사 싫은 놈은 업어 줘도 싫고 좋은 놈은 업고 다녀도 좋은 게 인지상정인데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야 말려서 될 일인가. 그렇다고 내가 나 몰라라 그 놈의 부역이란 걸 한 번도 안나간 것도 아닌데 말씀이야.... 앗따 그 놈의 말 많은 영감 할마이들 같으니라고. 에라 떠들라면 떠들어라 배짱으로 튕겨내고 말았다.


5. 끝

그래서 대문을 만든답시고 온 마당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던 그 대 역사가 인자사 끝이 났다는 싱거운 이야기다. 

 

이웃에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어질고 살갑기가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대문 밖 스무 걸음 쯤 저만치 바로 마주 보이는 낡은 집입니다. 내가 이 마을에 들 때 할머니네 밭을 사서 집을 지었지요.

집 짓고 이사 왔더니 입에 달고 하시는 말씀이, 동네 맨 윗집이라 밤이면 헛헛했는데 빈 터에 집이 들어서고 밤이면 불이 환하게 보이니 담이네가 들어와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늘 치사를 하셨습니다.


어질고 살가운데다 성정은 또 얼마나 깔끔하신지 나이 들어 눈이 어둡고는 해 지면 채소를 안 만진답디다. 혹 티끌이나 벌레를 못 볼까봐 늘 밝은 햇살 아래서만 음식 장만을 하시는 분이지요.

할아버지는 수 삼년 전에 일찍 돌아가셨지만 건실하니 아들농사 삼형제 번듯하게 잘 지어 효성 지극하고. 그러고도 아들네 며늘네 업혀 살기 불편타고 늘 혼자 사시지요. 욕심 없고 경우 바르니 책잡는 사람도 없지요. 너도나도 저런 어른이 없다고들 입을 모으고.


이 날까지 십년이 넘도록 명절이면 잊지 않고 늘 음식 나눠주시고 모내기철이면 모밥이며 갓 담근 김치며 한 양푼씩, 가을걷이 때면 갓 찧은 햅쌀 자루 이고지고, 시시 철철이 채소며 곡식이며 갖다 주시는데

아이고 품앗이할 소출도 없는데 자꾸 받기만 해서 어쩌냐고 쩔쩔매노라면 아이고 담이 아부지는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촌에 늙은이가 손 댄 거라 혹 깨끗하지 못할까봐 그것만 늘 걱정하십니다.


나는 이 할머니 김치만큼 맛있는 김치를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할머니가 갓 담근 김치는 냄새만 맡아도 입에 군침이 돌고 대번 뜨거운 밥 생각이 절로 나지요. 정말 맛있습니다. 어디서건 김치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자랑할 만큼 정말 맛있는 김치였습니다. 서슴없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분이라고 내세웠지요.


몇 년 전인가 어느 해 모내기철에는 우리 식구 모두 방금 점심 밥 먹고 막 일어섰는데 모밥 해서 가져왔다며 팥 밥 한 양푼에 김치 두어 포기 그래 주셨지요. 기왕에 밥은 먹었고 배는 잔뜩 불렀으니 맛이나 보고 아껴뒀다 저녁에 먹자, 밥 한 술에 김치 한 조각 입에 넣었다가 웬걸, 그 자리에서 밥 한 양푼을 김치 한 가지 반찬으로 꿀꺽 단숨에 해 치우고는 동산같이 부른 배를 끌어안고 숨을 못 쉬어 한나절을 식식거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일단 맛보면 안 먹고는 못 배기는 그런 마법으로 버무린 김치.


봄가을로 우리 집 어린 놈 소풍이며 운동회며 가방 싸들고 대문 밖 나서면 얼른 달려와서 천원 이 천원 손에 쥐어주시며 우리 담이 운동회 날인데 못 가봐서 어쩌냐고 정말로 미안해  하시고 여름이며 겨울이며 내 집 마당에 낯 선 차 들어서면 손님 오셨는데 반찬이라도 보태라고 수시로 김치며 채소며.


자랄 때 겪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나는 누가 날 챙겨주면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렇게 따시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내 집에 마실 오셔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에미 없는 자식이 제일 불쌍하다며 담이 아부지는 엄마가 기러바서 우째 이래 사셨냐고 안타깝다 답답하다 하시더니 달포 전 책 한 권 냈다하고 인사 드렸더니 아이고 담이 아부지 기어이 큰 일 하셨다고, 당신 아들 일처럼 그리도 기뻐하고 좋아하시더니, 엊그제 설 전날 식용유 한 꾸러미 갖다 드리고 세배를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니미락 내미락 하고 있었더니 어제 새벽 주무시다가 자는 듯이 혼자 돌아가셨답니다. 

설 쇠고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떠나고 혼자 이불 펴고 조용히 주무시다가 그냥 그대로 혼자 저세상 떠나셨답니다.


사람이 무섭도록 깔끔한 성정도 탈이 되는지라 어찌 가시기 전에 얼굴 한 번 보여 주시지도 않고 당신 입을 수의 어느새 깔끔하게 손질해서 다려 놓으시고 그나마 가시는 날도 정월 초사흘, 아들네들 설에 모여 제사까지 한 번에 지내라고 돌아가시면서도 아들 생각하신 것인지.

어제 읍내 병원 빈소 가서 잘 가시라 인사드리는데 모질고 독한 성깔이라 좀체 눈물 없던 이 놈의 인사가 엎드려 핑 도는 눈물 감추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빈소에 놓인 영정을 돌아서서 또 보고 또 보고 굴건제복 막내아들 손 한 번 잡고 그저 허랑하니 집으로 돌아 들어오는 길에 어째 얼굴도 한 번 안보여주시고 그리 가셨는지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아서 애꿎은 한숨 끝에 눈물을 몇 번이나 삼켰습니다. 


나야 늘 어른 손이 그립고 아쉬운 터라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처럼 그리 생각하고 기대어 살았었는데 집에 돌아와 들어서는 길에 문 닫힌 채 적막한 할머니 집을 보자 하니 그만 억장이 무너지고 허전한 마음을 가누기가 힘이 듭니다. 뉘라서 남의 자식을 그만큼 따시게 다독거려 주실 것인지,

내, 팔자에 없는 복을 얻어 할머니 같은 분을 이웃으로 두고 사는구나, 늘 그리 기꺼워했었는데 이제는 그 기억을 지팡이 삼아서 버티고 살아야 할 모양입니다.


지금도 할머니 보고 계신다면 아이고 담이 아부지는 촌 늘그이를 갖고 별 소리를 다한다고 손사래를 치시겠지요. 김치 양푼 건네주시면서 ‘짠지 기러블 때 아무따나 잡수소’ 허둥지둥 대문 나서시던 뒷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어머니보다 더 살갑고 자상하시던 할머니, 이제는 굽은 허리 펴시고 극락 가시는데 나는 받기만하고 드리지를 못해 늘 겨워하던 마음 그냥 그대로 지고 살랍니다.


사는 꼴이 허망해집니다.

모레 아침 하관이라는데 날씨라도 봄날처럼 푸근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욕을 갔습니다.


‘큰 애 때를 좀 벗겨 줄라면 이제는 나도 힘이 부쳐요. 작은 아이는 당신이 데리고 갔으면.’
‘그러지 뭐.’


나는 오동통한 작은 아이를 데리고 목욕하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아서 선뜻 동의를 하는데 큰 아이가 엄살을 핍니다.

‘앗! 엄마가 때 밀면 나는 아파 죽는데.’
‘음. 그렇겠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랑 목욕 가는 게 정말 무서웠거든. 좀 살살 해주지.’


엄마들은 정말 아이들이 질겁할 만큼 알뜰하게도 벗겨내지요. 아빠들은 상대적으로 좀 느슨한 편이고. 이야기 중에 작은 아이도 나섭니다.


‘나도 여자니까 엄마 따라 갈래.’

어릴 때부터 더러 나를 따라 남탕을 가곤 했던 작은 아이였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좀 그렇다 싶어서 결국은 둘 다 제 엄마를 따라가기로 하고 나는 혼자 가방을 따로 챙겨들었습니다. 

‘그럼 그래라. 작은 애부터 씻겨서 한 시간 있다 내보내요.’


덕분에 나는 혼자입니다.
우리 식구가 자주 가는 목욕탕은 남탕이 2층에 있습니다. 밤새 찜질방을 열어놓는 집이지만 아무래도 밤늦은 시각이다 보니 목욕탕 안은 조용합니다. 나 말고는 한사람밖에 없네요. 게다가 늦은 밤인데도 물이 깨끗하여 나는 썩 흡족했습니다.

목욕탕 물이 더러운 것을 무척 싫어하셨던 아버지는 목욕을 꼭 새벽에 가셨습니다.
늦게 가면 물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 거의 반드시 꼭두새벽에 나를 깨워 앞세우고 목욕을 가시곤 했었지요. 거기다가 강 아랫쪽 목욕탕은 강물을 끌어 쓴다던가 어쩐다면서 굳이 강 건너 시내에 있는 목욕탕으로 갔었습니다. 한겨울 동도 트지 않은 꼭두새벽에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목욕 가방을 들고 강을 건너가노라면 귀가 아주 떨어져나가는 듯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도록 싫고 귀찮은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 시절 목욕탕은 아침나절이 지나고 나면 목욕탕 아저씨가 수시로 뜰채로 때를 건져내야 할 만큼 물이 더러워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 때도 뜨거운 물에 잘 들어가지 못하던 나는 정강이까지만 담그고 노닥거리고 있는데 구십 킬로그램의 배를 가진 아버지는 살이 아주 쇠가죽인지 우람한 몸을 펄펄 뜨거운 탕에 담근 채로 얼른 안 들어오고 뭐하냐며 연신 채근입니다. 이리저리 요령을 피며 미지근한 물에서 찰박거리다가 아버지한테 붙잡혀 큰 탕으로 들어가노라면 아주 고문이었지요. 펄펄 끓는 탕 속에서 으으으 버티는데 어쩌다 다행히 조금 견딜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손뼉을 두 번 칩니다.

'남탕에 뜨신 물!'

이내 팔뚝만한 빨간 색 파이프에서는 펄펄 끓는 물이 쏟아져 나오지요. 아아, 그 뜨거운 물이 슬금슬금 몸을 휘감아 오는 그 끔찍함이란.

‘아부지, 나는 고만 나가께요.’
‘가만히 있어! 땀이 바짝 나야제!’

요행히 아버지의 마수를 피해 탕 밖으로 달아나면 다행이지만 아버지의 큰 팔뚝에 붙잡히는 날이면 끝장입니다. 그럴 때면 나도 손뼉을 짝짝 두 번 치면서 '남탕에 찬 물!' 로 반항하고 싶은 생각이 꿀떡이었지만 참말로 그러지는 못하고... 벌겋게 익은 채로 겨우 탈출했다 싶으면 '이리 오니라' 이제는 수건 뚤뚤 뭉쳐서 겨드랑이며 사타구니를 사정없이 박박 밀어댑니다. 발갛게 불고 익은 여린 살이 아프고 따갑고... 그나마 뭉친 수건은 양반이었습니다. 더께 앉은 손등은 조약돌로 때를 벗겨야 했지요. 그 시절 목욕탕에는 동글동글한 때밀이용 돌들이 여럿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초록색 신비의 때수건 이태리타올이 나오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거울 앞에 앉아 몸을 씻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다 언뜻 깨어보니 그 사이에 욕탕 속에 들어앉아있던 중년도 나가고 나 혼자밖에 없네요. 귀 기울이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말고는 괴괴한 정적입니다. 얼렁뚱땅 씻어내고 황토방에 땀을 빼러 갑니다. 그렇잖아도 목욕 시간이 빠른 나는 한 시간이면 목욕을 끝내는데 혼자 가도 두 시간을 넘게 채우는 아내는 아이들까지 씻겨 내보내느라 늘 늦습니다.
땀을 빼면 건강에 좋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히 인물은 한 인물 더 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구중중해지는 얼굴이 이 때 만큼은 잠시나마 회춘을 하는 듯해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그럭저럭 땀범벅으로 졸고 있노라면 작은놈을 위시하여 큰 놈과 아내가 차례로 나옵니다. 아이들 등쌀에 밤늦은 국수도 사 먹고 달걀도 사 먹고 재미있게 노닥거리다가 땀 한 번 더 빼고는 늦었으니 이젠 집에 가자, 다들 가서 땀 씻고 나오너라, 줄줄이 여탕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혼자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남탕은 여전히 고요합니다.
..........!.

일순간 비어있는 목욕탕과 순식간에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 그 때의 그리운 시절이 범벅이 되면서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주 맘먹고 힘차게 손뼉을 두 번 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남탕에 찬 물!'  

목 놓아 큰 소리로 외치고 나서는 바보같이 혼자 즐거워져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습니다. 드디어 사십년 묵은 소원을 풀었네요. 웃음 끝에는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가 보고 싶어져서 공연히 콧날이 시려오는 것을 참느라 잠시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만. 



2005. 01. 22
 

/바다

아침저녁으로 지겹게 보는 바다. 그래서 그 존재감마저 희미한 바다를 오늘도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짙은 남색으로 투명해 보이는 모범적인 바다였습니다.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가고서는 바다 밑이 휘딱 뒤집어졌는지 눈 닿는 데까지 온통 누런 황토 물이었는데 어느새 다 가라앉았나 봅니다.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겠네.
어부들은 고기가 잘 안 잡힐 때 곧잘 이렇게 투덜거리지요.

'괴기가 씨가 말랐는갑다. 물밑이 한 번 뒤비씨져야지....'

진짜로 물밑이 뒤집어지면 고기가 많이 잡히는지 어떤지 나는 모릅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간에 요 며칠 사이에 밤바다엔 한 동안 뜸하던 오징어 낚시 배들이 훤하게 불을 켜놓고 있기는 합니다.


/갈매기

읍내 도서관 가는 길에 지나친 바닷가에서는 근사해 보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갈매기 떼들이 그럴듯하게 무리 지어 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놈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사실 아주 지저분하고 사나운 놈들입니다. 이놈들은 선창가에서 썩어빠진 생선 내장이니 찌꺼기들을 탐욕스럽게 쪼아 물고 다니며 먹을 게 모자란다 싶으면 저그들끼리 아우성치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갈매기의 부리는 어물전 생선 아지매들의 갈고리마냥 아주 매끄럽게 휘어져 있지요. 저렇게 사납게 구는 걸 보면 혹시 맹금류는 아닐까요?
이 부근에서 갈매기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바닷가에서 제법 떨어진 수산물 가공 공장의 덕장이나 쓰레기 더미입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꽤 낭만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갈매기들은 알고 보면 어디 주워 먹을 게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웅크리고 앉은 배고픈 놈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긴 좀 건방진 갈매기가 있다면
‘지구상에서 너희 인간이란 족속보다 포악하고 더러운 종족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보라’며 혀를 찰 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 할 말 없지요 뭐.


/시장

도서관 다녀오는 김에 대파를 사 오라길래 오일장에 들어섰습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대파를 사지 못하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무슨 일인지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아지매들을 보았습니다. 요즘에 시골 장이라고 뜨뜻하고 푸근하고 자질구레한 재미만을 찾다간 뒤통수 얻어맞는 수도 있습니다. 살아 가야할 절박함에서는 촌 아지매들이 더 그악스럽지요. 도덕책 펴 놓고 나무랄 형편도 아닙니다. 장날 나가보면 장바닥 한 바닥은 대부분 차떼기로 끌고 온 전문 장똘뱅이들이 거의 장악했습니다. 올망졸망 남새 푸성귀 뜯어 온 동네 할매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무공해 논두렁 표라고 애호박 한 개 삼천 원!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값을 태연히 부르는 할매들도 적지 않습니다. 애호박 아니라도 이제는 국산품은 죄 비쌉니다. 동네 할매들도 중국산 수입 참깨니 곡식들을 어디선가 받아서 전을 벌이지요. 재미없는 세상입니다.



/보건소

작은아이가 열이 올라서 동네 보건소를 찾았습니다. 애매한 시각이면 어지간한 병원들은 문닫아 걸 시간이니 믿을 건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 의료기관 뿐입니다.


보건지소.

'의사 선생님이 개인적인 볼일로 출타 하셨습니다.'

여긴 걸핏하면 출장에 툭하면 출타입니다. 간헐성 무의촌에 살고 있습니다.


면 소재지 보건소.

'무의촌에 왕진 가셨는데요....'

뭐, 답답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군 보건소.

'어린이는 소아과로 가세요....약이니 주사니 용량이 달라서 어쩌고.... 의사 선생님들이 어린애들은 안 보실라고 저쩌고.'


결국 못된 성질머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규정에 보건소에선 애들을 안 보게 그리 되었냐니 그건 아니랍니다. 그럼 의학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 여기 와 있는 거냐니 그것도 아니랍니다. 꾸부정한 목소리로 아주 조용히, 뒤집어 엎어버리기 전에 빨리 진료하고 약 처방하라고 을러댔습니다.


고래로 나는 이런 일에는 아주 싸움패입니다. 주먹이 오고 가고 날고 뛰는 싸움이면 또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이건 틀렸다 하고 결심만 섰다하면 옳든 그르든 상대방은 일단 나랑 사이좋게 뻘 구덩이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아주 못된 성질머리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

근래 들어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원래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요즘의 이 생각들은 나를 몹시 상하게 합니다.
선 곳은 선 곳대로 앉은자리는 앉은자리대로 성글다가 배다가 스름스름 제자리 찾아 가라앉습니다.
무슨 선문답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나는 다혈질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과하게 차가운 편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서투른 탓에 더러더러 허방다리를 짚습니다. 살다보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허방다리도 때로는 짚어볼 만도 하지만 이 나이쯤 되어서 한 번 휘청거리고 보면 참 입맛이 쓴 것이 기분이 더럽습니다. 이러구 변설은 풀어 쌓지만 기실은 다 내 탓이지요. 누가 날 개 목줄 걸어 끌어가기라도 했단 말인지 원.

지붕이 바람 타는 소리를 냅니다. 밤마다 내내 흐리고 바람 불었는데 지금은 별이라도 몇 떴는지.


/산

갑자기 산에 들고 싶어 허둥거렸었습니다.

하긴 우리 집 뒤에도 병풍 같은 산들이 버티고 서 있으니 딱이 꼬집어 말하자면 지리산입니다. 지리산에 들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지리산이 멉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당연히 멀지만, 사적으로도 지금은 너무 멉니다.
재삼 새삼 떠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십 여 년 전 칠선 계곡 어느 폭포 벼랑 끝에 혼자 천막 치고 벼락 치듯 요란한 물소리에 둥실 떠 오른 듯 누워서 그 미치도록 맑은 별빛보고 산 짐승처럼 목 놓아 소리소리 지르며 보았던 별빛. 그거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불현듯 어찌 세상을 잘못 살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엿 같은 날에.



2003. 07. 19
 

우선 한마디로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단어입니다.
꼰대라는 말 자체가 다분히 뒤틀려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워낙에 부정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참 곤란한 단어지요. 도대체 그 어원을 짐작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어쩐지 빈정거리는 듯한 어감도 그렇고 글자로 써 놔도 참 품위가 없습니다. 

뭐, 그 이유가 어쨌든 나는 이 단어를 잘 쓰지는 않습니다. 부러 위악적인 말이나 글, 아니면 따 와서 인용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입에도 잘 안 담는 편입니다. 쓰는 말이 거칠면 심상도 거칠어진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젊은 날은 있었고 또한 누구나 그렇듯이 꼰대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참 불편하고 거북한 존재였습니다. 그 꼰대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걸핏하면 잘 쓰는 말이 있지요. 흔해빠진 싸구려 금언록에나 나올법한 뻔한 이야기. 


‘사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이니라...’
'모름지기 나이가 들어봐야 세상을 알고...'
'옛말 하나도 그른 거 없나니...'
'그저 成家를 해야 어른이...'
'머리 꼭지에 쇠똥도 안벗겨진 어린 놈들이란....'


귓바퀴에 딱지 않을까봐 들을 때마다 털어냈지요. 가슴 가득히 적개심을 품은 채로

집에서건 바깥세상이건 구태를 몰아내고 개혁해야 하며 너희들은 바로 그 개혁의 대상이며...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케케묵은 책장이나 넘기며 수염 쓰다듬는 소리들이냐는 것이었지요. 

마음을 도사리고 독사 대가리같이 고개를 꼿꼿이 치켜든 채 대들고 따지고 덤볐습니다. 만만찮은 세상에 채이고 꺾이고 넘어지면서도 오로지 그것은 낡은 세상 탓이라는 굳은 일념으로 초지일관이었지요.

그 생각은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겼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느 사이에 내가 한 번 멋지게 살고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새 내 자식들이 물려받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바뀌어 갔고, 그러던 그 어느 날, 나는 입이 한 자나 튀어나온 어린놈을 앞에 앉혀두고 답답한 가슴을 치며 방바닥을 두드리는 꼰대로 변해있었습니다.


‘애비 마음도 모르는 괘씸한 놈!’

‘천지 분간도 못하는 어린놈들!’

‘그저 요즘 젊은 것들이란!’

‘이놈들아, 너희들도 나이가 들어봐라!’


그 신념대로 산답시고 기를 쓰고 살다보니 어느새 나도 꼰대가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외형만 그런 게 아니라 생각조차 이미 그리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그래! 내가 생각해도 참 눈부시게 변신했습니다. 

세상이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는 몰라도 나도 잔소리라면 어디 빠지지 않을 중늙은이로 근사하게 현신해버린 것이지요. 

이제는 이고지고 가야 될 짐들이 생겼다는 겁니다. 부서지거나 깨지더라도 훌훌 날려버리면 그만일 혼자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만만찮은 것은 세월의 무게였습니다. 수백 수천 년 누적되고 퇴적되어 온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세월의 무게가 사실은 알고 보니 결코 만만하게 생각할 그것이 아니었더라는 겁니다.


그랬었구나, 세월 이기는 장사도 없지만 세월만한 장사도 없구나, 딴에는 대오각성 한 셈이지요. 

젊어서 약관의 나이에 대오를 이루고 뜻을 실어 펴는 대단한 이들도 없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착실히 나이 먹어 슬쩍 돌아보는 그 평범한 무게만큼은 결국 그만큼 세상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실을 수 없는 무게였더라는 거지요. 세상에 남겨져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지혜와 철학들이 몇몇의 뛰어난 천재나 위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피고 진 그 모든 이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이루어놓은 삶의 퇴적이었더라는 겁니다. 

생활이건 예술이건 또 그 어떤 것이든 거장이나 대가의 그것조차도 꼭 특별한 누군가이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라는 걸 왜 몰랐을까요. 그 특별한 이들의 재능조차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세월의 풍상이 바탕을 깔아주지 않았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만한 경지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왜 알지 못했을까요. 


늙수구리 적당히 세파를 헤치고 지나 온 그저 그런 이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들이 주는 그 그윽하고 평범한 경지에는 신동이며 천재들이 제아무리 반짝거리며 발버둥치고 밤낮으로 발사심을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심연이 있었던 겁니다. 결국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가치들은 정작 지나간 ‘꼰대’들이 빚어 놓은 것들이더라는 말씀이지요. 

등신같이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심신의 양식을 채우리라고 그 긴 세월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당연하려니 하면서 정작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삶에서는 그걸 대입할 줄을 어찌 그리 까막같이 몰랐다는 말인지.    


쉰 고개 언저리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내 생각에 조금 끼어 들 틈을 보았는지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넌지시 묻습니다. 나이 들면서 모가 많이 깎이고 둥글어 진 거 아냐고.


‘...  내사 원래가 원만하고 그랬지 뭘 그래.’


누구한테라고도 아닌 핑계 비슷한 소릴 애매하게 던져놓고는 얼렁뚱땅 외면을 하고 일어나버렸습니다. 뭐, 그래도 아주 모르쇠로 잡아떼지는 않았으니 모쪼록 양해를 바랄 뿐입니다.


꼰대, 웬만큼 나이 들어보니 그거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모르긴 하지요.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면 또 뭐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꼰대라는 단어는 참 그렇네요. 아무리 별로 쓸모없어진 나이 든 수컷이라 해도 그렇지 뭐 그럴싸한 다른 말은 없을까요. 세상에 그래도 그렇지 '꼰대'라니.


20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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