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테크닉이나 전율하는 명인기는 없습니다.

절절히 후벼 파는 심오함도 없이 음질도 대부분의 모노가 그렇듯이 갑갑합니다.

그나마 sp 복각반 까지도 드물지 않으니 음질로야 내 세울 일이 절대 못됩니다.


연로한 영감님 늦은 아침 자시고 공원 산책하듯이 느릿느릿 볼 거 다 보고 참견 할 거 다 참견하고

그네 타는 아이들 이놈들아 위험하다고 잔소리도 하고

아무데서나 뽀뽀하는 젊은이들 상스럽다고 꾸지람도 하고

햇빛이 따끈하면 벤치에 앉아서 잠시 졸기도 하고.

그러다가 산책 나온 동무 영감 만나면 말세야 말세 주먹도 흔들다가

옆 동네 사는 곱게 늙은 할머니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가 배고프면 며느리 눈치 밥 얻어먹기 싫어서 꼬깃꼬깃 주머니 뒤져서 막걸리나 한 사발씩 나누고.

그럭저럭 해 저물면 그럼 내일 또 보세, 동무랑 헤어져 가다말다 아쉬워 슬쩍 뒤돌아보기도 하는. 한마디로 볼 장 다본 늙은이의 음악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저 깊이 가라앉아 깜빡 조는 듯한 고즈넉한 명상을 건네주기도 하고

아닌 척 슬쩍 가슴팍을 파고들어 요지부동으로 웅크리기도 합니다.

한 참 듣다보면 모노반의 답답한 음질도 거슬리지 않지요. 할아버지 손등같이 거칠거칠하지만 또 그처럼 편안하고 따뜻하기도 합니다. 

신예들의 예리하고 화려한 연주에 잡티하나 없는 CD에 비기겠습니까만 예리한 칼날에만 몸을 베는 것은 아닙니다. 둔탁하고 진지한 시게티의 연주에 다치면 그 흔적은 더 오래 갑니다.


광속으로 달려가는 디지털 시대에 잡음투성이의 느려터진 아날로그가 무슨 말이냐고 손부터 저을 일도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눈 돌릴 틈 없이 바쁘게 달려왔다면 이윽고 잠시 숨을 가다듬어 멈추어 보는 건 어떨까요. 방은 약간 어질러진 그대로도 좋습니다. 그리고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앰프에 스위치를 올리고 LP 플레이어를 돌리고 스크래치 투성이의 시게티의 모노 음반을 걸어봅시다. 시대가 디지털이라고 가슴까지 디지털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입니다. 일 분에 서른 세 바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돌아가는 느릿한 턴테이블에 오늘 하루를 얹어 놓지요. 때로는 공연한 늙은 티도 삶에 자양이 되는 법입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바다로 나가는 작은 고기잡이 배.



 


우당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에 작은 아이와 수평선에 걸린 무지개를 보러 나갔다.
거짓말처럼 선명한 무지개였다.
무지개는 과연 빨주노초파남보로 만들어져 있는지 셀 수 있을만큼 크고 짙은 무지개였다. 


지난 가을 큰 아이를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어느 마을 어귀에서 이 나무를 보고 차를 세웠다.
한 참을 구경하다가 주변을 보니 그 동네 사람들은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저걸 다 따 먹긴 따 먹었을까?



그 마을을 떠난 뒤 어느 고갯길 비탈에서 만난 주인 없는 돌감나무.
산에 사는 나무들은 거름도 안하고 물도 안주고 그래도 저 혼자 피고 지고 잘도 자란다.


 

바하의 미사 B 단조의 글로리아를 듣다가 눈물이 핑 돌았던 날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다가 또 같은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유치하나마 연속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베를리오즈의 그라티아스를 듣고 한껏 고양된 정신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르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눈물이 핑 돌고 코빼기가 시큼할 그런 곡을 리스트를 뽑아다가 것만 줄창 들어대면 감동의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내릴까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산해진미를 삼시 세 때 곳간에 재어두고 먹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느끼하지 않습니까? 생긴 대로 이것저것 김치 깍두기 벗 삼아 잡식을 즐기다가 생일날이나 명절쯤에 어렵사리 진미를 맛보는 것이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아주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나는 매일 먹습니다. 물론 입맛이 토종이기 때문에 당연히 밥과 국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큰 애가 사 들고 들어온 과자도 뺏어먹고 더울 때는 코카콜라도 한 병 들이킵니다. (때때로 가벼운 소화불량에는 아주 그만이지요.)

거리를 지나다가 허기가 질 때면 평소 질타해 마지않는 느끼한 햄버거 냄새에 군침을 삼키기도 합니다. 밥을 좋아 한다고 해서 숭늉만 들이키고 살아서야 그건 영 재미없는 일입니다.


나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빚어내는, 눈물나게 흠모하는 이들이 내게는 많습니다.

하지만, 돼지기름 지글거리는 화덕과 흘러내린 된장 뚝배기가 뒹구는 만찬이 끝난 뒤에, 게다가 더러 소주 한두 잔까지 곁들이고 난 구린내 나는 입에 바하의 칸타타나 슈베르트의 가곡은 그리 썩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흠뻑 젖은 가슴으로 뽕짝이나 한 곡조 구성지게 뽑으면 그게 그만이지.

중요한 것은 음악의 꼴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마음을 움직이고 감성을 건드려주는 선율은 모두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음악이란 되잖은 가사에 콩나물 대가리만 붙여놓은 것들까지 빠짐 없이 모두 망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소 떫더라도 오해는 하지 맙시다.)


바하건 모짜르트건 괴팍스런 베토벤 선생이건 그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자나 조용필이라도 역시 상관없습니다. 나훈아면 어떻고 마이클 짹슨이나 해리 벨라폰테면 또 뭐 어때요.

마찬가지로, 음악을 듣고 말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입니다. 감성이 촉발되고,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수록하고, 듣고, 발광하고, 눈물 흘리는 것도 모두 사람입니다. 좋아서 하건, 돈벌이로 하건, 영혼을 세척하기 위해서건, 체 하고 싶어 그렇건, 하여간 사람도 가지각색이듯 생각은 자유지요. 내 몫의 인생 역시 내 자유고. 다만 내 것이 옳고 네 것은 틀려먹었느니 박박 우기지는 말아야합니다. 그건, 아주 못난 짓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말라버린 고아함은 기실은 격리감에 불과하지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턱시도와 함께 턱을 높이 치켜든, 그들이 향유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수준 높은 음향과 화음의 즐거움이 아니라 대중과 격리된 일견 매우 청결한(사실은 온기 없는 그림자에 불과한)지역적 공간적 차별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모든 예술은 인간을 앞지를 수 없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에만 파쇼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예술 역시 파쇼입니다.

향유하는 문화의 방향에 따라 인간의 급수까지 임의로 매기고 평가하는, 그래서 저으기 눈을 내리 깔고 안으로 밖으로 인간을 업신여기는 행태는 또 다른 편 가르기이며 마땅히 타도되어야 할 백주대로의 괴물입니다. 향유하는 문화를 도구 삼아 인간을 편 가르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심각한 오류입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이라고는 한 잔 걸친 관광버스에서 되는대로 내지르는 쌍쌍메들리 밖에 모르는 이웃집 할머니의, 그러나 그 뜨시고 훈훈한 심성이, 우아하고 격조 높은 그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할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나는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사람의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또한 세상은 유기체입니다. 나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나랏일을 개떡으로 만들어놓고 안락의자에 앉아 게트림 꺽꺽 해 대는 정상모리배들을 보고 비분강개 허옇게 거품을 물어봤자 다수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짱 공염불 아닌가요. 민중은 꼭 그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독설적인 기색이 완연하긴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예리한 지적이지요. 그게 개살구 민주주의 아닌가요?


그런 만큼,

개체의 질은 개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질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잘생겼건 못생겼건 생긴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울퉁불퉁 불거져 나오더라도 종양 덩어리가 아니라면 구태어 칼을 들이대어 도려낼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미용을 위한 성형수술이라면 또 모를까.

나 역시 그럴싸한 분위기로 포장한 음악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느끼한 감상주의의 배경음으로 전락한 바하를 듣고 싶지는 않지요.


몇 해 전 씨랜드에서 아이들이 참혹하게 죽어갔을 때 며칠 지난 뒤의 어느 프로그램은 그 막막한 아비규환의 흔적을 화면에 깔아두고 그 아래로 제 딴엔 매우 슬픈 음악을 깔아 두었었습니다. 토할 뻔 했지요. 얼마 전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때도 역시 매스컴은 그 더러운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건 음악에 대한 도살이지만 그에 앞서서 이미 인간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지만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적절한 음악을 깔아두고 향기로운 차 한잔에 공연히 스스로 도취됨도 그 음악을 소유한 이의 권리이자 그 사람에 한해서는 그 음악의 한 가치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근히 내비치며 나름대로 향유하는 것도 그 사람의 몫입니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습성과 깊이(?)에 잣대를 들이대고 우열을 가리고자 한다면 나는 일찌감치 십리나 백리나 도망질을 하고 싶습니다.

우수한 문화인들에 둘러싸여 물주전자나 나르는 급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그보다는 나 스스로 썩 엘레강스한 체질이 아닌 줄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있어서의 음악은 도락으로서의 음악이요 벗으로의 음악이지요. 나 같은 마당쇠 체질은 엄숙주의나 경건주의 근처에서 얼찐거리다 득을 볼 확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는 아쉬케나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잡지에 실렸던, 팝송은 몽땅 쓰레기라는 허튼소리 때문입니다. (기사에는 팝송으로 나왔지만 아마도 대중음악을 털어 이야기 한 것으로 압니다.)

어느 한 편으로는 옳은 이야기지요. 나 또한 쓰레기 같은 대중음악이 많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상해 빠진 아쉬케나지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스스로 흐트러진 모습을 부둥켜안고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몸부림 쳐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예단합니다.(뭐 그렇다고 내가 흐트러지고 쥐어뜯고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 좋습니다. 그럼 한번 뒤집어 봅시다. 클래식은 몽땅 우아하고 거룩한가요? 거기에는 쓰레기가 없을까요?

한 번 더 뒤집습니다. 나는 얼마만큼 우아하고 거룩합니까?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뒤집어 봅시다.

우아하고 거룩한 것은 번질번질 기름칠 한 거죽입니까 아니면 똥오줌 담고 다니는 시뻘건 오장육부입니까?

나의 어디에다 잣대를 들이대야 할까요?

나 또한 짐작하셨듯이 역시 장삼이사, 심성이 삐딱한 잡배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쉬케나지의 라흐마니노프 3번은 여전히 즐겨 뽑아드는 음반입니다. 뒤를 받쳐주는 오먼디의 서포트에 매료된 탓이긴 하지만. 어떻든 음악은 음악일 뿐이니까.

하여간에 음악이란 물건은 사랑하고 좋아할 만한 필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이나 오디오를 두고 갑자을축 입씨름 하는 것 보다는 그냥 음악을 듣는 시간이 내게는 훨씬 소중합니다. 해서, 그렇고 그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음악을 듣습니다.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시간과 열정을 쏟아 가면서.

들어도 뭐가 뭔지를 정돈되이 듣지 못하고 무작정 삼키기만 하는 천박한 감수성에 이론이라고는 판 껍데기에 주저리 갈겨 둔 북렛 수준도 채 못 따라가서 허덕이는 아둔한 머리가 문제이긴 하지만 시시껄렁한 생각들로 가득 찬 지저분한 영혼을 조금씩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을까 일견 매우 지난한 기대를 품고서 말입니다.




 

현장은 현장이지 드라마가 아니다.

국화 꽃 몇 송이 배경에 깔아놓고

넋 나간 사람들 슬로비디오로 드라마 찍지 말라는 말이다.

음악은 그런 곳에 쓰라는 물건이 아니야

이 얄팍한 싸구려 개자식들아.


윗 글과 같이 아주 불량한 글을 게시판에 쓰게 된 개인적인 심사를 풀어내고 싶어졌습니다.


몇 년 전에 씨랜드라는 곳에서 어린 애기들이 참혹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매스컴이란 매스컴은 거의 씨랜드라는 이름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는데 이 사람들이 그 와중에 무슨 시청률 경쟁을 하자는 것인지 별별 쑈를 다하다가 급기야는 그 잿더미로 변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느린 화면으로 천천히 훑어가면서 배경에 제 딴에는 아주 슬프디 슬픈 음악을 깔아 두었더랬습니다.


나도 음악을 끔찍하게 좋아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날 그 화면에 배경으로 깔린 음악은 나도 자주 듣고 좋아하던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아주 역겹게 느꼈었습니다. 그러다가 잿더미 속에 뒹굴고 있는 색깔 고운 김밥을 보는 순간 오만 갖가지 상상과 영상과 그 음악이 순간적으로 한꺼번에 겹쳐지면서 정말 토할 뻔 했습니다. 평소에도 꼴같잖은 영상에 그럴 듯하게 포장용으로 깔아두는 음악은 혐오했었습니다만 그날 그게 마침 그렇게 된 거겠지요.

그래봤자 뭐 거룩하고 숭고한 뭔가를 가진 사상가도 아니고 깡촌에 처박혀 사는 어릿한 촌놈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눈과 귀를 의심하고 싶은 참사 현장에 얼렁뚱땅 음악 깔아서 드라마 짓고 앉았을 생각 밖에 못하는 싸구려 미디어들을 보면 거의 살의가 느껴질 만큼 기분이 더러워집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의 그런 감각은 싸구려일 뿐만 아니라 머리도 아주 나쁜 것으로 짐작 되는 것이,
대체 지극한 슬픔을 그따위 인위적인 배경 음악으로 연출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주제에도 벗어나고 뭐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정말 지극한 슬픔은 적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악으로 대체 될 수 있는 슬픔은 제아무리 슬픈 음악이라도 최소한 그 슬픔의 심연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고집을 갖고도 있습니다.


굳이 화면에 잡힌 슬픔을 최대한으로 효과 있게 나타내야겠다면 참혹한 현장과 남은 유족들의 피 말리는 오열을 담담하게, 마이크에 잡힌 소리들만 내보내든지, 오히려 차라리 모든 소리를 지워버린 채로 천천히 보여준다면 그 막막한 절망의 느낌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보여 줄 수 있을 것이고 말도 안 되는 배경음악이나 선곡하느라 쓸데없는 머리 굴리고 있는 경쟁 방송사들과는 한결 차별화 된 격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봤지요. 그러게 어째서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똑 같은 사건에 똑 같은 사후 약방문에 똑 같은 수준의 배경음악이 반복 되는 거냐는 말입니다.


안팎으로 궂은 일이 겹쳐서 김에 좀 휩쓸렸나 봅니다.

난데없이 화를 버럭버럭 내서 송구스럽기도 하고 뭐 잘났다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냐고 핀잔을 들을까 눈치도 보입니다만 아무튼 그놈의 배경음악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봤습니다.  





눈보라 속에 기차는 떠나고
얼을 빼며 작열하는 저 금관 소리 북 소리에

조옷도,
이 순간만큼은 죽어도 좋아

적군의 총검에 심장이 뚫리고
날아 드는 포탄에 뜨거운 육신이 갈갈이 흩어져도 좋아.
띵띵 얼어 붙은 시베리아 벌판에 내 몸뚱아리를 묻어도 좋다니까.

나는 촌놈이야.
길다란 장총에 기대어
나뭇짐이나 짊어지던 어깨에 구리빛 겁나는 탄띠 두르고
내가 시방 아니면 언제 이런 비장하고 근사한 이별을 해 보겠냐고
사나희 가는 길에 그 무슨.

이름도 예쁘지 슬라비앙카
플랫폼에 얼어붙은 그 고운 얼굴에 눈물이 고여 흔들리고
굽이쳐 눈보라에 나부끼는 긴 머리는 얼굴을 때리는구나
잘 있어 슬라비앙카
혹 살아 돌아온다면 뜨겁게 안아보자

조국이니 이념이니 그런 건 개나 물어가라 그래
나는 단지 저 소리에 들떠 死線으로 떠나는거야
미친 듯이 불어 제끼는 눈보라 속에 사생 결단으로 울부짖는 저 나발소리 북소리에

아니 시부럴,
죽어도 좋다니까
유치해도 좋고 싸구려 감상에 나부끼는 선동 깃발이라도 좋아
저 소리 듣고도 피가 끓지 않으면 그게 죽은 목숨이지

슬라비앙카. 부디 잘 있어
혹시라도 살아 돌아온다면 뜨거운 맨살로 으스러지게 껴안아 보자
저 노래처럼 시뻘겋게 껴안아 보자니까


#
슬라비앙카는 슬라브 여인이라는 뜻이며 이 곡은 발칸 전쟁 당시에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내는 불가리아 여인들을 기리기 위한 노래랍니다. 하지만 러시아 말이라고는 굿모닝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노래 가사를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이 곡을 듣다보면 아무 이유도 없이 무슨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상되어 그냥 그걸 그대로 풀어 써 본 것입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주는 살냄새는 매혹적이지만 가사가 있는 음악은 간혹 이런 폐단이 없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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