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삼월에 결혼 한 막내 동생 내외와 함께 아버지 산소를 다녀온 뒤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고향의 어디에선가 가족들이 모여 앉아 무엇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었는데, 나와 마주 앉은 아버지의 표정이 그렇게 편안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부자가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꿈이야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니지요. 하지만 생전에 단 한 번도 아버지와 편안한 자리를 가져보지 못했던 내게는 그 꿈이 참 낯설고 기이했습니다.


생시에서나 꿈에서나 아버지는 당신의 뜻에 어긋나기만 한 나에게 늘 적대적이었고 나 또한 내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었지요. 당시에나 지금이나 내가 꾸는 꿈이 대개가 그렇기는 했지만 드물게나마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은 하나같이 몹시 불편한 꿈이어서 그런 꿈을 꾼 날이면 망쳐버린 아침 기분 때문에 비몽사몽간에 아버지에 대한 원념을 어금니에 물고 하루를 시작하고는 했습니다. 조금만 물러서서 짚어 본다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속마음을 부러 외면하고 칼날을 들이대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입던 참담한 세월이었지요.

어쨌든 꿈을 깨고 보니 참 처음으로 겪은 행복한 꿈이 내 것이 아닌 양 서먹서먹해서 잠을 깨어서도 얼른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 멍 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서슬에 아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습디다. 내 기색이 다르다 싶었는지 아내가 물었습니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그럼 이제야 아버지랑 화해를 한 거냐고 되물었습니다.


아니지요. 화해는 아니었습니다. 불화의 책임 소재는 덮어 두더라도 막무가내 일방적이고 불공정하던 아버지 때문에 입은 상처는 아직도 다 씻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날 밤의 그 꿈은 무슨 영문일까요. 꿈속에서조차 내 마음은 지극히 평안하여 잠을 깨고 나서도 그 잔잔하고 은근한 푸근함에 끌려 누운 채로 다시 눈을 감고 꿈을 되새겨 볼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혹, 늘 못마땅하고 어긋나기만 하던 큰 아들은 밀쳐놓고 늘그막에 새로 얻어 애지중지하던 작은 아들을 성가시키지 못해 만년에 조바심이시더니 이제 작은 며느리를 보아 그리도 마음이 편안하여 여태 미루던 안식을 찾으신 것일까요.

잠시 궁리 끝에,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그렇다면 막내 동생의 꿈에나 나타나실 일이지 무슨 심사로 엉뚱하게 내 꿈에 나타나서 뒤늦게 사람을 이리 흔들어 놓는 거냐, 참 별일도 다 있다. 혼자 그리 울퉁불퉁 멋대로 짐작하고 말았습니다만, 그렇다면 이승과 저승은 정말로 어딘가에 엄연하고, 원념이 있어 안식하지 못한 영혼은 늘 구천을 떠돈다는 옛 이야기들이 참말로 그런 것일까 뒤숭숭한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눈  앞에 귀신이 보인다는 말이 무슨 귀곡산장 이야기처럼 눈앞에 산발하고 소복 입은 귀신이 혀를 빼물고 오락가락한다는 말씀은 아닐 터이니 아마도 이런 현몽 비슷한 증상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환생해서 그 지긋지긋하게 불친절한 얼굴로 다시 내 집을 들어서신다면 내, 과연 그 꿈에서처럼 아무 견제나 의혹 없이 마음을 열고 맞을 수 있을까 지극히 의심스럽기는 하되, 솔직한 심정으로 그 꿈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실현되지 못할 몽중이나마 그 광경은 일생 처음 맛보는 평온함이었으니 내 똥고집 지키느라 거짓말은 못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도 주먹을 펴지 못하고 미련한 앙심으로 일관하기보담은 그래도 조금은 봐 줄만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싶어 일견 다행스럽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 며칠 지나다보니 낯설고 뒤숭숭하던 마음은 다시 그럭저럭 정돈이 되기는 했는데 가만 궁리해보니 참 걱정이 태산입니다. 과연 이승에서 보지 못하던 저승이 정말로 엄연하다면 이거, 생사를 달리했다고 음으로 양으로 소홀했거나 슬쩍 눙치고 지났던 누더기 같은 내 과거사가 언젠가는 총 천연색으로 백일하에 재생 될 모양이니 거 참, 뒷수습을 어쩌지요? 참말로 저승이 어딘가에 있어 나도 언젠가 죽어 그 곳에 간다면, 그래서 일생 마음 편히 해 드린 적 없는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로 인사를 올릴까요. 생시에 그랬듯이 왜 살아 계실 적에 그리 못하고 뒤늦게 그러시냐고 다시 원망을 늘어놓을까요. 아니면 그냥 뒷머리나 두어 번 석석 긁고 딴전이나 피우고 말까요 어쩔까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혼, 삼혼으로 복잡했던 와중에 유년기를 보냈던 나는 유난히 애정의 결손에 대해 민감했던 것 같습니다. 책 속에 잡다하게 열거 되어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사건들도 따지자면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내가 자라면서 겪었던 결핍과 상처들을 내 아이들에게까지 대물림 할 수는 없다는 외고집 같은 것도 그래서 생겨난 모양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게 강했던 때문인지 어느 부분에서는 아내와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그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도 만만찮았지요. 당시에는 한동안 나 스스로도 힘의 균형을 잡지 못해서 남모르는 속앓이를 많이 했었습니다. 반면에 그로 인해서 아버지라는 존재와 내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겪었던 갈등의 구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거니와, 조그맣고 어린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에 새삼 놀라워했고 세상의 어진 어머니들이 얼마나 힘들여 가족과 가정을 지키고 있는지를 절실하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보통의 가장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기회라면 기회였지요. 다만 세상의 아버지들이 겪는 어려움을 오히려 제대로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지 지금도 내 생각이 절름발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생 배척하고 외면했던 아버지가 뒤늦게 아주 느리게나마 내 마음 속으로 용납이 됩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죄스러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올 무렵 책을 받아들면 제일 먼저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안 계셔서 소망을 이룰 길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는 내가 이런 모양으로 이만큼 속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내 딴에는 이만큼 힘겨웠노라고,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고, 그리 읽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설을 쇠고도 아직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에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가봐야지요. 상석 위에 책 한 권 놓고 세배 드리고 술 한 잔 올려야지요. 공연히 눈물이나 나지 않으면 좋으련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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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온 뒤에 북센이란 곳에서 책에 대한 소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썼던 글입니다.
링크가 깨져서 지울까 했는데 마침 남아있는 파일이 있어서 붙여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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