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준이는 국민학교 동창생입니다.
키는 크고 주근깨투성이로 얼굴은 못생겼고 공부도 지지리 못했지만 싸움은 고아원 출신 떡대랑 자웅을 다투는 일 이등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귀준이가 싸우는 것은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거였지만.

어느 날 누군가가 귀준이의 구두 통을 훔쳐다가 교실에다 갖다 놓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싸움을 잘한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평소에는 늘 맨 뒷자리에 앉아 별 말이 없던 귀준이는 그 날 얼굴이 하얗게 질리도록 화가 났고 웅성거리며 쑥덕대는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놀랍도록 빠르고 조용하고 위협적으로 범인을 찾아냈습니다. 당연히 귀준이에게 붙잡힌 그 녀석은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 붓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러나 귀준이는 잠시 후에 눈물 범벅으로 쌍코피 터진 녀석의 손을 잡고 들어선 선생님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지요. 


나는 똑똑하고 착한 어린이였기 때문에 까닭 없이 모욕을 당하고도 오히려 공부 못하는 싸움꾼이라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귀준이가 불쌍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했고 코피 터진 채로 징징 울면서 교무실로 달려간 그 밉살스런 녀석을 나라도 좀 더 두들겨 패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싸움을 하지 않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참말로 그 녀석을 때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만족했습니다. 나는 적어도 때린 놈이 무조건 잘못했다거나 공부를 못하고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아니었으니까요.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이었으니까.


귀준이와 그리 많이 친하지는 않았던 까닭에 나는 귀준이네 집을 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귀준이는 겨울에는 딱쇠를 했고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했기 때문에 귀준이네 집이 무척 가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대문 앞 신작로 길에 평상을 걸쳐놓고 식구들과 부채질을 하며 모기를 쫓던 나는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길모퉁이를 돌아 나가는 귀준이를 언뜻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얼른 달려가서 도망치려는 귀준이를 억지로 끌고 왔고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를 졸라서 귀준이의 아이스케키 통을 홀랑 비워냈습니다. 그날 우리 식구들은 커다란 양은 쟁반에 그득하게 아이스케키를 쏟아 놓고 줄줄 녹아내리는 아이스케키를 참 많이도 먹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친구를 돕는 착한 일을 실천했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 일로 인해서 귀준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싸움 일등인 귀준이에게 한 대 얻어터지는 일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그 이후로 귀준이가 나랑 같이 졸업을 했는지 어땠는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도상이의 어머니는 밀수품 보따리 장사였고 상훈이네 집은 넝마 재생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인숙이네 집은 구멍가게, 진식이네 집은 쌀집, 민재 아버지는 날품팔이였습니다. 그리고 귀준이는 철따라 구두통과 아이스케키 통을 번갈아 메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던 나는 천만 다행히도 딱쇠나 아이스케키 장사는 안 해도 괜찮았고, 그래서 조금은 깨끗한 옷을 입었으며, 학교에서도 착하고 똑똑한 척 할 수 있었습니다.

귀준이와의 추억은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많은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라고 달라지면서 제 자리를 찾아 앉았을 것이고 그리고 나 또한 나대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세월을 먹고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마도 단 한 번도 귀준이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던 이즈음의 어느 날, 불현듯 사소한 계기로 귀준이를 기억해 냈고, 귀준이를 기억해 낸 후 오래지않아서 그 날의 귀준이에게는 구두 통으로 장난치다가 코피 터진 놈보다는 같잖은 영웅심으로 아이스케키 통을 붙들고 식구들 앞으로 끌고 간 내가 훨씬 더 꼴 보기 싫은 놈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으로 허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은 모닥불을 쏟아 부은 듯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그 느닷없는 수치심으로 혼자 쩔쩔매면서도 그 옛날 그날을 다시 가 본다면 참말로 그랬을지, 아니면 나 혼자 생각만으로 또 다른 잘난 체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면할 궁리도 해보았습니다만 궁리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올 리도 없거니와, 어찌어찌 잔머리를 굴려 본들 이미 망가져버린 추억을 수습할 도리는 없었습니다.
차라리 그날 자존심 상해서 화난 귀준이에게 몇 대 얻어맞고 코피라도 터졌었더라면 착하고 똑똑한 줄 알았던 내 인생이 좀 더 솔직하고 개운해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만큼은 꿀떡같았지요. 귀준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과연 나와 그 때의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먼저 떠나지도 말것이며, 먼저 보내지도 말것이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같이 가는
한 해가 되기를.

 



일출.
몇 해만에 보는 첫 일출.

해마다 거의 그렇듯이 올 해도 낮게 깔린 구름 위로 솟는 해라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새해 첫 일출이라 생각하니 그런대로 볼만 했다.
식구들이 모두 게으름을 피는 바람에 혼자 차를 끌고 나가서 보고 왔다.
나도 혼자 나간 김에 차 안에서 게으름을 피면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왔다.




아들의 약혼녀와 격렬한 사랑에 빠진 한 정치가의 몰락을 그린 '데미지'라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우리는 때때로 알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 라는 대사가 나온다.
충분히 공감하지만.
원래 열정이라는 것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열정인 것이고.


열정은 한 인간을 견디기 힘든 고통 속으로 밀어 넣지만 인간은 삶이 꺾이고 부서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열정에 항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극한의 희열과 스스로의 열망을 수반한 고통이기 때문에.
그래서 열정이란 것은 때때로 한 인간을 그 속에 매몰시켜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형태로든 크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열정은 항거 할 수 없는 유혹을 동반하는 고통이다.
 
 

 




고호의 삼나무 그림같은 길을 걷는다
누군가 사라졌고
거기서 새벽길까지 걸어야 한다

소가 죽었다
달구지 곁에는 죽은 소보다 더 살기등등한 사내들이
손에 손에 새벽같이 푸른 칼을 들고
지극히 안타까운 일들은 신작로의 자갈처럼 불거진다

버스를 탄다
대책 없는 문제를 골몰하듯이 나는 멀리 떠나는 버스를 탄다
사라진 누군가는 보이지 않고 거리는 아둑시니같이 고요한데
무반주 첼로 조곡이 빠른 템포로 새벽의 시퍼런 거리를 황급히 지나가면
누렇게 뜬 골목길 봉창
약에 찌든 쳇 베이커는 시름시름 죽어 가고 
넋 나간 싸구려 여가수는 숨이 넘어 갈 듯 자지러진다

my funny valentine...
you make me smile..... with my hmmmmmmm.......................

산발을 하고 거리를 헤메는  my funny valentine

맨발로 아스팔트를 걷는다
허황한 내 공간은 지붕이 없고 지붕이 없는 방에서의 황망함이란
만족과 위안을 가장한 사람들만 내 자리에 가득하다

죽은 연인을 그리는 노래
오래 전에 이미 죽어버린 오래 된 연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먼 곳에서 아이 우는 소리
죽은 어미의 시신 곁에서 우는 아이의 주린 배를 위한 달콤한 웨딩 케익

야산 마루에 걸린 살 찐 그믐달
다시 새벽길까지 캄캄하게 눈 감은 산
더러 푸르게 고요히 누운 사람들의 눈은 빛나고
다시 죽은 소 곁으로 그 달구지 바퀴에 기대어서.



어제 큰 바람에 새도 날개짓이 겨워 나뭇가지를 붙들고 버티고 있었다

서너 집 건너 휘청이는 감나무 가지만 한사코 붙들고 대숲 앞의 제 둥지로 거슬러가지 못하고
대롱대롱 매달린채 세찬 바람에 깃털만 부대끼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태어났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도 저만큼 힘들까
바람에 마음만 다 날려 보내고 바람 설거지 핑계 삼아 우두커니 마당에 서서 쑥대머리로 그 바람 다 맞던 날



머지않아 모두들 죽어 갈 것이다
그릇들은 새 것들로 차 오르고, 그러나 낡은 것들의 자리는 헐어 없어질 것이다
묵은 것이 자취도 없이 소멸되어 공황된 중에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때로는 비를 뿌릴 것이며 그 이후의 모든 삶에도 따뜻한 바람을 휘감을 것이다

입춘도 지나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날쌔게 나르는 물새들

내 떠난 뒤에도 물새들은 날아 오를 것이고 백로는 강 가운데서 무심히 고기를 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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