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냥 세상 일을 보듬고 달음박질 치기는 잠시 그만 두고
한가로이 강변에 앉아 억새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바라 봄도 좋을 일이로다

품은 뜻이 작아 고개가 숙여지리로다

하늘의 솜씨는 한 낱 억새 한 잎에도 우주가 숨어 있는 법
하물며 그 억새를 고개 숙이게 하는 그 밝은 바람임에야!


기차도 하나 지나가고
비행기도 셋 날아가고
풀이 마르는 가을에는 바람도 이리 좋은데
집 그늘에 앉아 하늘 바라고 이토록 무심타

아무라도 기다리다가 바라보다가
살아 가는 것이 검거나 희거나
희거나 말거나
그저 그럭 저럭 해는 지고
오늘은 찾아 오는 벗도 없구나

어두워지는 길 따라 자리 털고 일어서면
돌아 온 내 자리엔 묵은 냄새
되돌아 문간에 기대어 서서 산 그림자 보고
오늘은 아무에게라도 섭섭하다는 말 하고싶어 진다만


기찻길 옆 황가네 집은
밤 낮 오가는 기차 소리에 들뜨는데

식당차
침대차
시커먼 화물 열차
황혼에 흔들리는 통근 삼등 열차

육중한 바퀴 으르렁거리고 지나가면
황가네 집은 몸을 떨어 기차를 닮아 가는데.


한 낮에 중이 염불을 하는데
간 밤에 꿩 구워 먹었는지
당최 무슨 소린지




볕 바른 법당 기와 지붕에는
풀만 자라고.


아파트 동 사이로 섭씨 영하 십도의 바람이 불고
몹시 심하게 불고
산바람 골바람 닮은 무시무시 귀신 휘파람 불 때

띵띵 얼어붙은 가로등 노란 불빛 아래
귀신 같은 대가리로 제 몸은 못 가누고
외투 자락 여미기 바쁜 취객 하나.


지난 여름 신났던 놀이터의 아이들
지금은 어디어디에 숨어 있을까
여름과 숨바꼭질 하느라 엿보고 있을까

십팔 평 주공 아파트 단지의 겨울 오후 다섯 시
심부름 나온 자그마한 계집아이
비닐 봉지 달랑거리며 춥지 않을까


운동장은 비어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감꽃이 떨어져 시들어가도
아무도 실에 꿰어 목에 걸지 않는다

새벽 안개 속으로 달려와
시큼한 감꽃을 먹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까치집을 짓던 철봉대 모래밭도 비어 사금파리만 반짝거리고
햇살에 숨찬 아주까리도 졸고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텅 빈 복도는 바람만 달리고
초여름 한 낮
선생님과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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