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을 달리는 완행 버스에서 흘린 한 자락 구성진 유행가도
이 세상 어디엔가 꽃 피울 마음으로 채워진 꽃씨도
땅 속에 묻힌 벌레 한 마리도

죽어 있다 살아나고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진부한 이야기들도
아차, 놓쳐버린 약속의 순간도

부릅 뜬 생명도
썩어가는 육신의 사실도

우주의 섭리
신의 이야기
있어도 좋고 거짓이라도 좋은
순간순간 새벽의 등불처럼 꺼져 가는 말 할 수 없는 망각도
역사 앞에 홀연히 줄 지어 서는 아름다운 사실


1.
내 발은 비상의 발목을 붙드는 치욕이었다.

2.
그것이 이름이라면 나를 새라고 부르지 마라
나는 나르면서 잠 들수 없다.

3.
인적 없는 기슭에 몸은 썩어 흙이 되고
마른 잎 검불 사이에 깃털만 남았다
일생 바람 타고 날았어도 흔적은 땅 위에 남았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동의 합니까
당신은 오늘 밤 술 한 잔 하자는데 찬성입니까
아릿다운 찻집 아가씨
그대는 내가 커피를 주문하는데 이의 없습니까

오늘부터 내가 민주주의를 하겠다는데
만장하신 장내에 혹시 반대 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바람도 없이
고물 장수 가위 소리에 위태로운 흰 목련

봄 날은 길기도 해라
인적 없는 골목 담장 위에는
불에 덴 듯
제 풀에 희뜩 놀라는 새 들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없는 정오 쯤
빈 골목 따라 자고 있던 바람이 한 차례 먼지를 쓸고
목련은
늘어진 꽃잎 하나를 놓치고



식은 밥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자는 듯 죽어 가는 듯
대롱대롱 시렁 아래 목 매달고 숨 찬 거미

창호지 문 밖으로는 먼지 바람이 후다닥 마당을 까 뒤집고
군불 식어 웅크린 삿자리 웃 목엔 늙은 호박과
갈라진 메주와 귀퉁이 튿어진 고구마 자루

딴에는 저마다 사연이 깊어 뭔가할 말이 있을 법도 한데
저 혼자 낙숫물 소리만 그럴 듯 한 콩나물 시루

봉창 아래 너덜너덜 국회의원 나리도 공화당 소싯적 이야기지
인자는 뉘가 뉜지
이 놈인지 그 놈인지

임자는 정지에 가서 고구마나 몇 개 쪄 오든지
어흠.

아, 테레비 쫌 꺼삐리고 고만 자빠져 자
어둑 구석에 무슨 배애지는 쳐 고프댜.
썩을 놈의 영감태기
뵈기 싫은 것들은 범도 안 물어 가.



북동 하늘에서 샛바람이 불면
전기 줄 위의 까치들은 그 곳을 본다
무엇을 그리워하고나 있는 듯이
풍향계처럼 일제히 바다 건너 그 곳을 본다

보이기나 하는지
보기나 하는지
그래도 떼 지어 줄 지어 나란히 앉아서
해가 지도록 하염없이 바람이 불어 오는 곳을 보고 있다

날이 흐리고
빗방울이 후두둑 듣는데 전기 줄 위의 까치들은
풍향계가 되어 바람이 불어 오는 곳만 바라보고 있다




/봄. 마당

남새밭에 핀 장다리 꽃 위에 노랑 나비가 앉았다
집을 보던 아이는
거울 조각으로 햇빛을 꺾으며 나비를 좇는다


/봄. 빈 방

어스럼 비어 있는 방
종일 비 오더니
혼자 앓는 잠 깨어 듣는 낙숫물 소리는 푸른 연두색


/초여름. 마루 끝

건너 건너 집 아기 울음 소리
먼 곳에 다듬 방망이 소리
하늘에 박힌 해는 왼 종일 그 자리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긴 긴 여름 낮


/여름. 개울

송사리 모래무지 기슭에 졸고
포플러에 걸린 해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물살은 부서져서 온 종일 꿈 같은


/늦여름. 동구

멀리 기울어진 신작로
버스는 우당탕 누렇게 달리고
삼베 홑이불에 누운 아기
정자 나무 그늘에서 여름 한 나절 졸다


/초가을. 길

낮 잠 깨어 울며 달려 나간 대문 밖 큰 길
시장 갔다 오자던 엄마는 언제 가셨을까
뙤약볕만 가득 찬 눈 부신 초가을
저 놈의 소리개는 또 왜 떠서 가슴만 두근거리고


/가을. 역

허수아비 곁에는 허수 아기도 있다
철 늦은 채송화 맨드라미
사루비아 꽃밭도 예쁘다
꼬부랑 할머니 허둥지둥 철길 건너가고
덜커덩 달리다 삐꺽 멎은 시골 역에 익은 가을  한 낮


/늦가을. 들판

오후의 가을 들판은
종종
정물이 된다


/겨울. 마루

종일 흙바람 마당을 쓸어쌓더니
바람 먼지 곱게 앉은 대청 마루엔  아직 발자국도 없이
비껴 앉은 저녁 햇살에
인숙이네 굴뚝 그림자만 슬그머니 올라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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