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읍내 오일장에 갔었습니다.
개천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보니 앞차가 닭장차네요. 여러 칸으로 높다라니 쌓아올린 네모난 철망 속에 털이 숭숭 빠진, 비루먹은 닭인지 중병아린지 수십 수백 마리가 쓰레기 뭉치처럼 엉켜 쑤셔 넣어져 있어서 그냥 지나쳐 보기에도 마음이 불편한데 맨 뒤쪽을 보니 낯 선 형상의 큼직한 기계가 놓여있었습니다. 까닭 없이 섬찟한 느낌에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 의심스러운 기계의 출구 쪽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중충하게 젖어있는 기계 구멍 주변에 여기저기 닭털이며 썩 유쾌하지 못한 부산물들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닭을 모가지만 뎅겅 잘라서 퍼덕퍼덕 하는 놈을 기계 아가리에 던져 넣으면 자동으로 웅웅 돌면서 후다닥 털 뽑고 내장 털고 해서 순식간에 식용 생닭으로 둔갑시키는 물건으로 보였습니다.


일순간에 자동화라는 미명하에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인간의 매우 비도덕적인 행위의 일면을 본 듯하여 에잇, 살다가 못 볼꼴을 보고야 말았구나, 참담한 심사를 어쩌지 못하고 장을 보는 둥 마는 둥 어마지두 간에 돌아오기는 했는데 몇 날이 지나도 참 얄궂은 마음이 쉽사리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계에 던져 넣건 목을 비틀어 잡건 모든 도축 방법이 짐승의 목숨을 끊기는 매한가지인데 그렇다고 해서 진작부터 먹어오던 닭고기나 육류들을 당장에 끊거나 삼가 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유독 닭 잡는 기계를 보고 참혹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일인지요.

혹시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인간이란 종족의 값싼 지적 유희는 아닌지, 기왕에 먹을 음식이야 쌔고 쌨으니 그 경로나마 트집을 잡아서 조금 우아해보고 싶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아닌지 이런 저런 궂은 생각으로 우울해졌습니다.


생명/

어떤 절대자가 생명의 저울을 걸어놓고 한 수도승을 시험하는데 저울의 한 쪽에 죽은 비둘기를 얹어두고 이윽고 말씀하시기를


‘이 비둘기의 생명에 걸맞은 값을 얹어보라.’


그 말씀에 공력이 대단하던 그 수도승, 선뜻 자신의 허벅지 살을 그 비둘기 만큼만하게 베어 저울 맞은편에 얹어 보았으나 저울추는 까딱도 않았습니다. 당황한 그 수도승, 이번에는 자신의 한 쪽 팔을 잘라 저울에 던졌으나 그래도 무정한 절대자의 추는 묵묵부답이었다지요. 그제야 아차, 깨달음을 얻은 그 수도승은 자신 스스로 그 저울에 올라섰고 비로소 저울은 수평으로 서더라는 이야깁니다.
무릇 온 세상의 온갖 미물들이라 하더라도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깨우쳐 주고자하는 거룩한 이야기겠지요. 어린놈이 즐겨듣는 어린이 동화 테이프에 있던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값/

사람의 몸을 용도에 따라 값으로 환산해 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성인의 몸에 있는 지방으로 비누 일곱 개, 인으로 성냥 대가리를 만들고 철분과 탄소로 못과 연필심 등을 만들 수 있답니다. 돈으로는 오 만 원 쯤 받을 수 있다던가. 이건 공업적 해체 방법이랍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화학 약품으로 추출하면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말도 있었습니다. 인슐린, 알부민, 콜라겐, DNA와 호르몬 등은 매우 고가의 물질이라 그러네요. 촌부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이야기라, 거 참, 세상에는 별 괴이한 짓을 하는 사람도 다 있구나, 그러고 넘기기는 했습니다만 가만 생각해보자니 그럼 나는 도대체 얼마짜리인지. 공업적 해체 방법이나 화학적인 방법은 매우 어려운 방법이라 제쳐 두고서라도 다소 엽기적이기는 하나 알기 쉽게 마트나 식육점에 널린 삼겹살 따위의 고깃덩어리로 환산을 하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고기로 치자면 개나 소나 나이 든 수컷의 고기는 그 중 질이 떨어지는 정육이니 파는 사람이 몰래 속여 팔지만 않는다면 그 중 헐값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도대체 동네 뒷산에 목 매인채로 복날만 기다리며 살찌고 있는 개 값보다 나을지 어떨지.


사람의 값을 매긴다는 것부터가 다분히 특이한 궁금증을 가진 이들의 호기심을 만족 시키는 것 외에는 딱히 실효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데, 그럼 공업적, 화학적, 식육적 방법 이외에 좀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값을 매기자면 무엇이 있을까요. 수천 년 이래로 그 잘난 인간들이 짐승과 다르다고 우기는 정신적인 가치. 말하자면 개개인에 얽힌 인간관계의 경중에 따른 추상적인 값이나 어떤 사람의 숭고한 정신세계에 대한 무형의 가치. 아름다움, 소박함, 선함, 타인에 대한 긍휼이나 감사함 같은 것도 가능할까요?


말 해보나마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의 눈물 몇 방울, 남은 세월동안 쏟아 놓을 밑바닥 허전한 한숨들, 조금 더 현실적으로는 누군가가 소멸됨으로 해서 받게 될 경제적 이득이나 손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 인간 살아생전에 보험을 얼마나 들어놨던가, 혹은 자식에게 남겨 줄 재산이나 여타 자산이 얼마 만큼이냐는 따위, 이런 것들로 사람의 가격이 정해지는 세상이라 생각하다보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 치이고 채이고 찢어지고 부서진 나머지 몸과 마음에 남겨진 기기묘묘한 형상의 온갖 흉터자국들, 그거 말끔히 지우고 새로 깨끗한 인생 하나 만들려면 견적이 얼마나 나올까요? 정말 온 세상에 무슨 전염병처럼 창궐하는 보험 광고처럼 죽어서 타게 될 보험금으로 모든 것이 정산되고 탕감이 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린 건가요. 그것 참, 아무리 궁리 해봐도 나는 그다지 값이 안 나갈 것 같은 생각에 불현듯 인생이 쓸쓸해져서 말이지요.

                           




빵1

아내는 중3 담임이다.
그런데 어제 뇌물을 받아왔더라. 모 고등학교에서 저그학교에 좋은 애들 좀 많이 보내달라고 주는 뇌물이다. 그 뇌물이 그 고등학교 학생들이 실습때 구운 빵이라더라.

작년에도 먹어봤지. 이거.... 중독된다.... 옆에 놔두면 종일 짤라먹게 된다.

엔간한 빵집들은 명함도 못내민다. 가히 파운드 케익의 종결자다. 
빵 옆에 거뭇거뭇한 가루 같은 것은 빵 누룽지다. 빵 중에 저 부분이 제일 맛있다.


빵2

국민학교 다닐무렵 나는 해질녘이면 남강다리 끝에 서서 퇴근하는 누나를 기다렸다.
집구석에 일찍 들어가봤자 좋은 일도 없고해서 그랬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고 땅거미가 어둑할때쯤 칼바람에 꽁꽁 얼어서 시퍼렇게 동태가 되어 있노라면 누나는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종종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그 곁의 밀림제과점으로 나를 데려가서는 빵을 사주곤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난로 옆자리에 앉아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쏟아지는 졸음과
연탄 난로 위에서 펄펄 끓던 보리차와
그리고 접시에 담긴 고급빵 (제과점 빵을 그리 불렀었다.) 몇개는 천국보다 달콤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단팥빵과 노란 크림이 들어있는 반달빵을 제일 좋아한다.  제아무리 무슨빵 무슨빵 해싸도 그 빵이 아직도 제일 맛있다. 정말이다. 언젠가는 사과파이도 먹어볼 참이다. 그 시절 누나가 사주던 사과파이를 딱 한번 먹어봤는데 그 맛이 남아 있으려는지.



빵3

그 시절 이십원짜리 카스테라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쯤 돼야 하나씩 맛보는 카스테라였다. 눈곱도 떼지않은채로 비닐 봉지를 벗기고 ..... 처음에는 바닥에 붙은 종이도 같이 씹어 먹었다... 이런 제기랄, 빵에 종이는 왜 붙어있다는 말이냐.
...... 맹세코 처음 두세번만 그랬고 그 다음부터는 잘 벗겨 먹었다. 그리고 그 벗긴 종이는 구멍이 날때까지 이빨로 긁어 먹었다. 빵 누룽지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그런지 내 아이들도 날 닮아서 빵 누룽지를 좋아하더라.
하지만 나는, 카스테라며 파운드케익에 붙은 누룽지를 독점하는 어린놈들을 보면 간혹 슬프다. 빵 누룽지는 왜 어린 놈들만 먹어야 하냐고. 빵 누룽지 그거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서 내 허리둘레는 줄지를 않는 것이냐.

 

빵4

그래서 나는 빵을 보면 누군가가 생각난다.
카스테라에 붙은 누룽지 종이를 보면 지금은 안계신 아버지가 생각이 나고 신나게 빵 누룽지를 긁어먹는 아이들을 보면서 또 아버지를 생각한다.

둥근 단팥빵이나 노란 크림의 반달빵을 보면 지금은 혼자 된 작은 누님이 생각 나고
칼바람 불던 남강다리 끄트머리가 생각나고
그 달콤한 빵을 녹이던 그 뜨겁던 보리차가 생각이 나고
그 보리차를 마시면서 가물가물 쏟아지던 졸음이 생각난다.

....
...내 허리 둘레는 정말 빵때매 줄지않는 것일까.  


                             // 육칠십년대 거리를 주름잡던 국적 불명의 마이크로 버스


중학교 때는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이놈의 시내버스란 게 요새처럼 큰 버스가 아니고 요즘의 미니 버스보다 더 작은 마이크로 버스였습니다. 이 마이크로 버스란 물건은 중학생쯤만 되어도 똑바로 설 수도 없이 작고 낮은 버스라 아침 등교시간이면 마구잡이로 구겨서 밀어넣은 남녀 학생들로 북새기통이었지요.

그날따라 그 속에서 설 자리 잡느라고 비비적거리다보니 묘하게 이웃학교 여고생과 마주보고 딱 붙어 서게 되었는데 민망해서 어떻게 자세를 바꿔볼라해도 워낙에 콩나물 시루라 도대체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학생도 어쩔수가 없는지 서로 다른 쪽을 쳐다보며 외면한 채로 그 자세로 실려 가는데 우리 학교 앞에서 정차를 하면서 급정거를 했는지 차가 울컥합니다. 모두들 자빠지고 넘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지요. 각중에 몸이 확 쏠리는데, 엔진룸 위로 여학생이 자빠지고 내가 그 위로 엎어져버린 겁니다.

그당시 버스들은 운전석 옆 가운데 앞쪽으로 엔진룸이 툭 튀어나와 있었지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세가 참 거시기하게, 하여튼 그런 자세가 되어버린 겁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랬는지 혼비백산해서 일어나는데, 차가 또 한번 울컥 하면서 이번에는 왼손으로 그 여학생 가슴을 정통으로 짚어버린겁니다.
큰일 났다, 어디, 어리버리하게 얼쩡대고 있다가는 뺨따구라도 한 대 맞을 일이로구나 싶어서 단추가 튿어지는 줄도 모르게 아주 총알같이 튀어 내리는데, 아이고, 그 복잡한 난리통에 고만 아뭇소리도 안들리고 눈앞이 캄캄한데도 거 참 희안한 것이 왼손의 그 포근한 감촉은 또렷하게 기억이 되더란 말이지요.

그래봤자 얼띠기같이 순진하던 시절이라 머리통에 땀이 바짝 나서는 얼렁뚱땅 애들과 섞여서 황망하게 교문으로 향하는데, 발바닥이 땅에 닫는지 마는지 머리끝이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어린 마음에 이거 참 사껀이다 싶은 생각도 들고 해서 친한 친구를 복도로 불러 내다가 숨을 몰아쉬면서 자랑을 했지요.

'자슥. 복도 만타!'

그 친구는 밑도 끝도 없이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탄식을 했습니다. 거 참. 그것도 뭔 복인지. 뭐 어쨌든 나는 그날 둥실둥실 구름 위에 떠서 하루를 보냈지요.

그 다음날 아침.
시내버스를 내려서 로타리를 돌아 교문쪽으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내 앞을 누가 가로막습니다. 보니, 어제의 그 여고생이었습니다. 어제 엉겁결에 지나쳐서 잘 몰랐더니 약간 상기된 얼굴이 꽤 이쁜 얼굴입디다.

아이고, 인자 나는 꽃피는 봄날인가보다. 그런데 연상의 여인도 괜찮을라나. 뭐, 사실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아침 그 바쁜 시간에 대로상에서 이놈 저놈 지나가며 다 기웃거리는데 그 여학생 대담하게 내 앞을 딱 가로막고는,

'너 어제 글마 맞지'
'.....응'
'자. 이거'

딱지 접기를 한 쪽지를 하나 줍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목덜미가 화끈한 것이 그 순간의 기분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몇반에 뉘뉘한테 좀 전해주라.'
'.................'

내가 댕기던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운동장을 건너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젠장.

'알았지!!'
'^&#$^$%@!$!@$!..........고등학교 들어갈라믄 무섭은데.'
'니 만날라고 여기서 한참 기다렸는데!'
'...........(아이 쉬..)......................'

아니 이런.
조금 이상한 협박 비슷하게 눈을 흘기며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얼토당토않은 그 백주대로의 희안한 공간에서 밀어붙이는 그 여학생의 부탁을 내가 들어줬는지 어떤지는 진짜로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그 쪽지를 받아 든 것은 확실합니다. 특별한 사연이 없는 한 아마도 전해줬것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네 시작은 심히 창대하였으나 네 끝은 매우 미미하리라. 이런 젠장.

자의건 타의건(자의 반 타의 반이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내가 처음으로 여자의 몸을 만져 본 경험이었습니다.
첫 경험이지요 뭐.




///이전자전에 글자 그대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자료를 찾아 뒤적거리다가 저 위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 당시의 마이크로 버스와 그 여학생이 순식간에 연상되어 살아난 기억입니다. 이제는 그런 기억까지 공연히 가슴이 아릿하고 그러네요.
쓰면서 혼자서 조금 웃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서운한 웃음이었습니다. 세월이 참 많이 지났습니다. 


때로는 그런 날이 있지요.
새끼들 다 건강하고 마누래도 별 탈 없고 나도 뭐 잘 먹고 잘 자고 괜찮아요.

세끼 밥 굶을 일 없고 냉장고에는 과일도 몇 개 뒹굴고.
으랏차차 날씨가 좋은날이면 투덜투덜 고물 차에다가 네 식구 담아싣고 산천경개 구경하러 더러 구불러 댕기니... 뭐 별일 없지요. 잘 있어요.

그러게 말이지요. 콧구녕만한 집구석에 별 걱정거리 없는데도 말이지요.
어쩐지 잠도 안오고 일도 손에 안잡히는 그런 날이 있잖소?
그래, 혼자 오밤중에 이런저런 토달고 앉았노라면 공연한 개똥철학이 오락가락 하는 그런 날 말이야..

어쩌다 생각해보면 기십년 살아온 그 인생 누구 건지 아리송 할 때도 있고
이날 입때껏 살아오면서 대체 어딜 갈려고 쎄가빠지게 열심하여 달려온건지 어리둥절 할 때도 있지요.

그래봤자 구구절절 콩팔칠팔 풀어노면 그거 뉘가 쳐다나 봐준다나.
지 입에 풀칠하기도 바뿐 세상에 남으 숟가락 세고 앉았다더냐.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고 그런 때도 있는갑더라 그러니 시거나 떫거나 대충 그리 여기소서 하는 심사겠지요 뭐.
이만큼들 살아봤으면 너나없이 대충은 알잖아요?

.......
작은 놈 곁에 누워서 졸리는 마누래는
아니, 밤중에 뭘 먹는다고 그러요. 밤중에 먹어 좋을거 읍는데 뭐 어짜고 잔소리를 해싸도

아이고 원수야.
잔소리좀 고만하고 오늘 같은 날은 그냥 혼자 청승 좀 떨다 자게 내버려 둬.
그저 이런 날은 냉장고 뒤져서 한 잔 마시고 곧장 뻗어버려야지.
스티븐 시걸이 부다다다 총질하는 그렇고 그런 뻔한 헐리우드 영화나 켜놓고 말이야.
인생이란게 말이야, 매사에 매순간마다 보람차야 하는 건 아니거든.
때로는 이런 무망한 시간이 지극한 평강일 때도 있는법이야. 어째서 그걸 몰라. 이 웬수야.


창문 열어봤자 창밖으로 들고양이 흘레붙는 소리에 머리카락만 삐죽 곤두서고
이런때는 어두운 마당에 나서서 담배한대 뿜어대면 좋으련마는 그나마 끊어버렸으니 재미없네요.
일없이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봤자 오는지 가는지 대숲 너머 귀신새 소리 휘이 휘이 마음만 얄궂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공연한 심사만 붙들고 앉았으니 혼자서 한 잔 마시고 투덜댄다고 해서 해결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밤새 다들 안녕하신지 안부나 물어보지 뭘.
대체 촌구석에서 어데다 다 쓰는지 한달에 육칠만원 전기세가 적잖이 거시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밤은 내사 모르것다 오디오 벌겋게 달궈서 한 곡 듣다 자야겠수.
뭘 들을지는 나도 몰라요. 메누리도 모르지 뭘. 곰팡내 나는 판때기들 이리저리 뒤져보면 뭐 하나 나오겠지.

눈물이 핑 돌도록 한 곡 찐하게 듣고서 인자는 자야지. 다들 밤새 안녕히들 주무시오들. 나는 좀 취했거든.
아, 그럼요. 별일 없어요.
멀쩡한 사지육신도 쓰다보면 몸살도 하고 그러는데
수십년 시들어 온 너덜너덜 사나운 심사도 때로는 지 혼자 몸살도 하고싶것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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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삼일 전부터 감기가 왔는데...
칭병하고 드러누울만큼에는 좀 모자라고 그렇다고 멀쩡한 척 팔다리 걷어부치고 나서기도 좀 거시기하고.. 딱 사람 고단하기 좋을만치 그래요.

좀 많이 아프면 마누래며 새끼들한테도 애비 아프노라고 생색도 좀 내고 물 가져와라 약 가져와라 드러누워서 심부름 시키는 재미도 있고 살다보면 그것도 또 한재미 하기는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그래노니 지난 주에 마지못해 약속해놨던 교회 가족창도 못빼먹고 그래도 마침 오늘은 추수 감사절이라 교회에서 밥준다던데. 그래도 약속했던 노래라도 불러야 밥 한사발 얻어먹을 염치가 있지않겠냐는 애 멈마의 채근에 못이겨 네식구 꾸역꾸역 나가서 찬송가 한자락 부르고 투닥투닥 박수 한번 받고 가자미 조림에 매운탕에 한 상 잘 받아 먹기는 먹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아무래도 몸이 으시시한 게 기분이 별로 좋지를 안해요.

그래 좋다.
그럼 어디 오늘 한번 제대로 드러누워 볼까 염을 뒀더니 마누래는 또 붙잡아 놓은 약속이라고 휭하니 출타해버리고... 큰놈은 내일부터 기말고사라고 코가 석자나 빠져서 공부한다고 복대기를 치고 작은 놈은 디비디 켜놓고 쏙 빠져서는 정신 못차리고. 명색이 가장이 와병중인데 뭐 누구하나 들여다보는 코끄트머리도 없구나. ..아니, 도대체가 집구석이 계통이 안서요 계통이... 이 무슨...

에라 모르것다 그럼 아주 축수를 해서라도 골병이 들어볼까,
차는 마누래가 갖고 가버렸고 마음은 섭섭한김에 터덜터덜 들판길 걸어 건너 가 보니 날은 흐리고 바람은 불고... 스산한 빈 들판에 온갖 새들만 이리 날고 저리 날고... 에잇! 재미도 한개도 없구나. 고만 집구석에 들어가서 이불이나 뒤집어써야겠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집 지붕 위로 웬 놈이 빙빙 돌다가 공중에 못박힌드끼 딱! 멈추는데,
아뿔사, 저놈 저거 솔개 아니냐. 들판에 새가 많다 싶더니 한 마리 잡아 먹자 하고 망 보는구나 아니면 빈 들에 들쥐 새끼라도 노리는 건지.

내 어릴 때야 솔개가 하도 많아서 우리집 마당에 병아리 채 가는 것도 보고 그랬었는데 말 안듣는 놈 있으면 솔개가 확 채간다고 겁나는 소리도 더러 들었었는데 어디 보자 솔개야 너 거기 가만 그대로 있거라. 얼른 집에 뛰어 들어가서 사진기 들고 나오니 이런, 그 새에 제법 멀리 가버렸구나. 기념으로 한 방 박아 줄랬더니 그 새를 못참고. 멀리 내뺐으나따나 한 방 찍어서 기념으로 올려놓고지고..

그래서 컴퓨터로 솔개 사진 뺀다고 뒤적거리자니 전화가 한 통 왔는데 말이지요, 웬 영감님이 어디어디서 비니루 음반 좋은 거 많이 샀다고 뜬금없이 자랑을 하시는데 폴리니며 조지 쉘이며 클리블랜드에 제르킨에 칼리히터... 레미제라블.
시방은 멀고도 가까운 당신들이구나. 도대체 그 할배들의 그 소리들을 들어 본 적이 그 언제였더냐 그 영감님 염장은 제대로 질렀다. 타이밍이 절묘하구나.
형님. 좋은 판 많이 사셔서 좋으시것습니다아. 대충 들어보니 팔할은 건진듯 하옵니다아....
배는 아프나마나 멀쩡하게 덕담이야 했다마는 장유유서에서 밀리니 욕도 못하지 양반 체면에 얼굴 붉힐 수 있나. 

머리는 띵하고 뼈마디는 쑤시고... 치사하게 비니루 음반 몇 장으로 염장 질렀다고 온순하케 칼쌈을 할 수도 없고...

그러게 아프다는 화상이 책상 앞에서 온갖 해작질에 온갖 간섭 다하고 앉았으니 이러니 아파도 대접을 못 받고 글치요 뭐. 그래도 명색이 와병 중인데 참 문병도 없고 안부 전화도 한 통 없고 말이지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그럴 수 있는거요? @@..  늙어가면 그저 드문드문 얼굴 들여다보는 재미로 사는법인데 거참.
아니다. 앉아서 떠들고 앉았으니 와병이 아니고 좌병인가.
이렇거나 저렇거나 하여튼 나 아파요. 아프다고 자랑하는 거라니까. 

큰 병이라오. 약 먹어도 잘 안낫는 병. 난치병이지. 감기래니까 감기.




어제 목욕을 다녀왔습니다.
볼 일이 있어 먼데 다녀 오는 바람에 목욕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씻고 불가마 들어가서 땀좀 빼고 나오니 한 시가 넘었습니다.
푹 삶겨져서 늘어져 있다가 인자는 샤워하고 집에 가야겠다.. 그래서 비누칠 한 번하고 개운하게 씻었습니다.

선풍기 앞에 서서 거울 보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지요.
내 뒤쪽에서 근육질의 한 사나이가 종이 컵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커피는 부어 넣었는데 저을 티스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나이 박력있게 바로 내 앞에 있는 귀지용 면봉 하나를 집어 들고 아주 능숙하게 커피를 저었습니다.
그러면서 선풍기 옆에 서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 사나이와 잠깐 마주 보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순간 나와 그 사나이는 동시에 멈칫 했습니다.
그 사나이가 집어들었던 면봉 상자는 '사용 후' 상자였습니다.

숨이 멎을듯한 그 찰라의 순간동안 그 사나이는
면봉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매우 미묘한 표정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나를 힐끗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시바, 그냥 먹지 뭐.'
그리고 체중계 쪽으로 걸어가며 그 귀짓물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나서 종이 컵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는 옷장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착하게 살자' '一心' 따위의 상투적인 문신조차도 하나 없었으나
내 생전 그만큼 박력있는 사나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당분간 커피를 못마실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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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항 뒷길에 나타난 오징어 외계인

오징어 외계인은 바짝 마르고 나면 물리치기 어렵다. 그저 적당히 피득피득할 때 서둘러 섬멸 해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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