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 듣노라면
안개가 멋들어지게 휘감고 지나가는 아일랜드의 삐딱한 초원은 사라지고 시뻘겋게 갈라터진 아프리카의 황무지가 나타난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까만딱지도 몇 개 앉은 동화 속의 아일랜드 목동은 사라지고
기계충 먹은 머리통에 파리 몇 마리 달고 앙상한 가슴팍에 풍선처럼 부른 배.... 먼지투성이에 눈꼽 낀 아프리카의 깜둥이 소년이 생각난다.

웅성웅성 객석에 소란스럽던 희멀건 양키들도 쥐죽은 듯 자지러지고
지그시 눈 감은 벨라폰테는 그 때쯤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 서 있었을까.
하마도 졸고 코끼리도 지겨운 그 뜨거운 아프리카의 말라 비틀어진 초원에 그렇게 서 있었을까.

사자에 뜯긴 얼룩말의 시체 위에 잉잉 쉬파리처럼
강바닥도 타들어가는 가뭄에 제 허물처럼 말라 비틀어진 배암의 시체처럼
지겹게 뜨겁기만 한 아프리카의 사나운 평원 한 귀퉁이에 배고파 징징 우는 그 못난 깜둥이 아이처럼 그렇게 서 있었을까.

ANDREAS TRIO

녹음:   ★★★☆☆
연주:   ★★★★☆
신선도: ★★★★★ ..... @.@..



별표에 나타나있다시피
녹음은 그냥 그렇고
연주는 그냥 괜찮고
신선도는 아주 맛이 갔습니다.

.................
날이 갈수록 가슴패기가 삭아 빠져서 까닭없이 옛것이 그리운 분들
팽팽 돌아 가는 세상 살이가 어지럽고 숨 차기만 하여 몹시 못마땅 하신 분들
저녁나절 가시버시 커피 한 잔 놓고 조명 어둡게 해놓고 편안하게 듣다 보면
가슴패기 저 한구석이 조금 간질간질 해 집니다. 공연히 코 끝이 시큼해서 재채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아는 곡이거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곡들입니다.
개인적으로 2,4,육팔장으로 짝수 트랙이 조금 더 끌리고 홀수 트랙은 좀 덜 끌립니다.

참고로,
찌릿찌릿한 애인하고 들을만 한 곡은 아닌 걸로 사료됩니다.



토셀리 세레나데
라프 카바티나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아 목동아
브라가 천사의 세레나데...

이런 매우 상투적인 곡들을 별로 광택 없는 퍼석한 고물 트리오로 듣고싶은 분들...
눈이 침침해지고 손끝이 무디어져서 각종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시는 분들...

후회하셔도 책임 안집니다.
순전히 엿장수 마음입니다.

 

초저녁부터 자불리더니 오밤중 되니 오히려 잠은 다 달아나버리고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무료하니 TV 영화를 하나 본다. 바디 샷.

 

짧은 영어로 대충 몸으로 비벼대기 또는 육탄 돌격 쯤으로 짐작했는데 보아하니 제목 보다는 내용이 조금은 나은 편이다.
뭐 중간중간 늘씬한 여인네 젖가슴도 더러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노천에 자동차 본넷 위에서 거시기 하는 장면도 보여주고 하는 걸로 봐서 얼추 뭐 그렇고 그럴만 하게 후끈한 영화이긴 했지만 주제는 여차저차한 일로 술에 떡이 되어버린 남녀가 어찌어찌 우여곡절을 만들면서 속살 궁합을 맞추고야 말았는데 여자는 강간이라고 울고불고 남자는 화간이라고 박박 우기는 상황이 주제라면 주제다.

 

둘 다 침대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도대체 기억이 없습니다가 되어서 검사니 변호사가 난감해 하는 거며
술에 떡이 된 채로 과연 거시기가 가능하냐는 생리적인 디테일이야 뭐 그렇다손 치더라도
침대에 포개어 눕기까지의 기억이 서로 상반된 거 까지는 대충 뻔하게 상투적이라 그렇고 그런 영화의 소재로 딱 좋은데, 다만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 중에 서로가 변호사가 있어 죄없는 남녀 변호사끼리 법정에서 쌈박질을 하게 되어버린 게 또 다른 사단이다.

 

결국에는 일찌감치 좋아할 뻔 했던 변호사 둘이서 피차에 양쪽의 변호를 맡아 갑론을박 할 말 못할 말에 밑바닥 성질까지 뒤집고보니 사건 종결 후에 그동안 미뤄 왔던 거시기를 해 볼라고 침대에 나란히 눕어서 서로 만져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해봤지만 아주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하고 아리송한 이유 때문에 쓸쓸하게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라 그건 좀 그럴싸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곁다리로 나온 조연 배우가 술이 떡이 되어서 한 밤을 대로변 배수구를 끌어안고 자고 난 뒤에 다음날 쨍쩅 눈부신 늦은 아침에 깨어 아주 푹 젖은 걸레 꼴이 되어서 볕이 눈부시게 가득한 한적한 주택가 골목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한 방 얻어맞은 듯 띵 해져버렸다.

 

그거 나도 해 봤었지.

뭐 그거 해봤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다. 그거 뭔 자랑이라고.

다만 그거..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처럼 기분 더러운 경우도 참 별로 없다. 초저녁부터 새벽녘이 되도록 인사불성으로 처 부어 마시고는 다음날 깨어 도대체 얼토당토 않은 장소에서 눈을 뜨게 되는 그런 꼴.

 

태생이 모주꾼이라 그런 게 아니라면 그래도 젊은 날 세상 고민 다 끌어안고 나 잘났다고 퍼 마시고 댕기던 자들은 적어도 한 두 번 쯤은 겪어 봤음직한 곤욕스런 그 기분.

처음은 거룩하고 창대히 시작하였으나 그 끄트머리가 가까울수록 서서히 뭉개지고 지워지던, 그리하여 잠 깨어 일어난 아침의 오물 범벅으로 뭉개진 바지가랭이같이 그 더럽기 짝이 없던 그 기분.

지난 밤 고주망태로 어질러졌을 때야 그 시각 그 자리에 지친 몸을 눕혀야 할 절실하고도 절박한 그럴싸한 사연이 열두번도 더 있었겠지만 그거 깡그리 이자뿔고 잠에서 깨어난 그 눈물나게 더럽고 낯설은 이튿날 아침은 그럼 대체 누가 책임지냐는 말이지.

 

술도 덜 깬 어리둥절한 머리로 얼굴은 씨근씨근 여직 울긋불긋 시뻘건데다
머리카락은 마구잡이 쑤세머리로 축축한 아침 이슬에 눈 떠보니 아뿔사 길바닥이었다던지,
아니라도 어디 개 오줌처럼 전봇대에 기대어 어질러져 있다가
그 바쁜 아침 출근 길 서두르는 갑남을녀의 그 야릇한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애꿎은 전봇대만 손가락으로 석석 문지르고 앉았던 아, 그 말도 안되는 참혹함이라니.

 

그제서야 간밤의 낭만인지 방만인지에 대해 이를 갈며 후회를 하고 어금니를 물어봤자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골이 빠개지는 지독한 숙취에 술 깨는 드링크 하나 따 줄 손길 하나 없이 흙투성이로 어칠비칠 늦은 아침부터 약국찾아 두리번 거리는 그 절박함. 그렇다고 잘 난 드링크 하나 마셨다고 술이 금새 깨어 방긋 웃으며 상쾌한 아침을 맞게 되냐면 그것도 아니면서.

최소한 아직도 알콜에 푹 쩔어있는 뱃속이 그 놈의 싸구려 얄팍한 드링크 그거 웩웩 뒤집어 올리지만 않아도 감사한 일이지. 아무래도 한나절은 어딘가에 죽은 듯이 누워서 고스란히 앓고나서야만이 겨우 사람 흉내로 일어 설 일인데 그나마 하필 다음날에 잡힌 스케줄은 또 얼마나 빡빡했었던지.

 

게다가 그 빌어먹을 낯설음이 서서히 가시면서 슬금슬금 생각나는 간밤의 객기라든지, 특히 오랜만에 두둑했던 지갑이 빈털털이로 뒷주머니에 삐죽 꽂혀 있는 사연을 추적하다 보면, 아니, 빌어먹을, 원 별놈의 갑자을축이 다 나오는데, 그거 김장 담궜다가 훗날에 보험금 타 먹을 일은 개 코딱지만큼도 없을 순 껍디기들이더라는 것이 사람 심사를 가일층 더 헛개비로 맹글어버리지 않던가 말이다.

 

그것만이라면 그래도 다행이지.

행여나 들고있던 가방이나 이런 것들이라도 없어졌어 보라지. 욱신욱신 쪼개지는 골머리로 공중전화 박스에 붙어 앉아서 이놈 저놈 여기 저기 전화질을 해대면서 내 가방 못 봤냐 내 보따리 내놔라 이자뿔믄 안되는데 큰일났네 징징거리다 결국은 스케줄이고 뭐고 오만가지 핑계조차 만신이 귀찮아져서 어디 날 샌 심야다방 레지 아가씨들 눈치 봐가면서 겨우겨우 눈 좀 붙이다가 그래도 참 드물게 마음씨 착한 흥부 마누라가 있어서 라면 국물이라도 몇 숟가락 얻어 마시는 날이면 횡재하는 날이었지.

 

아, 그럼요.

그런 날이 잦으면 그거 아주 폐인이지. 사람 못되고 말고지.
그러니 나는 그거 아주 썩 자주 그러지는 않았다오.
그것 참, 어쩌다 이 나이에 쓸데없이 뭔 일없는 영화 장면에 휘둘려서 오래된 영사기 돌아가다 마냐고.

그래서 참 오랜만에 간밤에 혼자 한 잔 했지.
이런 저런 생각 좇다보니 불현듯

쓸쓸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런 시절이 그래도 그 때만큼 헛발질은 안하는 걸 보면 철 꽤나 들었지 뭘.


그런데 그런 날이면 왜 그리 맑은 하늘이니 햇볕이 싫었던지.
구름이나 잔뜩 끼고 빗방울이라도 부슬부슬 드는 날이면 그리 끔찍하기까지는 않아서 그나마 견딜 만은 했었는데 내가 무슨 양서류도 아니고 파충류도 아닌 것이 그만 화창하니 개인 날이면 정말 이가 갈리게 싫었던 것이 지금 생각하니 좀 이상하다.

거 참, 왜 그랬을까.
아는 사람 있으면 좀 갈차 주시든지. 아니, 뭐, 이제는 그리 마실 일도 없으니 애절복통으로 꼭 알아야겠다는 건 아니지만...




2003.6.9.

 

 

하늘이 하도나 고요하시니

난초는 궁금해 꽃피는거라


 


내가 서정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싯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두껍고 낡은 미당 시집의 뒷 표지에 그림으로 그려진 시 이기도 하다.

글의 제목은 까먹었다.
까먹었으나마나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어찌 해 볼 수 없는, 미치도록 좋아 죽겠는 싯귀이기도 하다.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는.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내 재주로는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 감히 어떻게 섣불리 첨한답시고.
사람의 눈으로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글의 매무새도 이렇듯 정방형의 결정체처럼 완벽할 수도 있구나.

글 쓸 때 귀신에 씌었거나 아니면 그가 아주 귀신이거나.


이 글을 볼 때마다 내 어릴 때 자라던 낡은 기와집 마당의 둥근 꽃밭에 오월 하순이면 노란 연두색으로 삐죽하게 솟아오르던 난초의 새 순을 생각한다. 간 밤에 비 내려 검게 젖은 땅을 숨막히게 데우던 늦봄의 뜨신 볕도 생각난다. 그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봄 볕 가운데 하얗게 풀 선 바지저고리 입으시고 몰라도 백 개는 넉넉히 넘어서던 갖가지 크고 작은 화분을 자식들보다 어쩌면 더 애지중지 하시면서 철 맞춰 때 맞춰 심고 물 주고 매만지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나지만,


 

난초 따위가 무슨 생각이 있어 하늘을 궁금해하며
궁금하다한들 제까짓 것들이 무슨 재주로 때 맞추어 꽃을 피운다는 건지?
말장난이지. 허구에다가. 염병이지.
말 몇 마디로 사람의 눈을 현혹하여 마음을 빼앗는 사술이기도 하고.
그러기에 말 장난이며 글의 유희에 마음 빼앗기고 일희일비하는 나같은 종자들은 아마도 태생이 썩 허전하거나 누추하여 그러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는 게 기분이 더럽다는 거다.

‘니 마음이 구리니 그따위 글을 좋아하는 것이니라’ 꾸짖는다면 감수해야지.
다만 당신이 보아 좋지 않았으니 이것 좋아하는 놈은 모두 쥐길놈이다, 도끼 날 세우고 우격다짐만은 없었으면 한다.


미당을 생각할 때 저 난초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미당의 국물을 조금만 더 기울여 따뤄내면 그 아래 시커먼 건데기 ‘오장 마쓰이 송가’도 드러난다.
몇 줄 읽다 보면 더 읽고 싶지 않을만큼 참 고약하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詩才는 그런 구린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풀어 나갈까 궁금한 마음에 에라 그래 똥 한 번 밟았다 생각하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아니나 다를까 기분 더럽다. 확 뜯어 발기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이 들 적이면 으흠, 나같은 잡배에게도 허당한 것이나마 약간의 애국심 찌끄러기는 남아 있나 싶어 다소 안심도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굳이 아세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 미당의 글이라고 모두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의 글 대부분이 그저 그러하고 내가 호감을 가지는 벌거스럼하니 묘한 정서를 갖고 있는 이전의 글들도 그렇다고 하나같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시건방진 말이지만 중간 쯤의 글들 몇몇에서는 서정주라는 자신의 이름에 기대어 대충 함부로 갈겨 쓴 것이 아닐까 의심 해 본 글들도 더러 있었다.


다른 이의 글 하나가 또 생각난다.


 

/화장터


몸 털고 선명하게 현신하는

한 켤레 신발


 

이 것은 미당의 글이 아니라 이전자전 소싯적 겁 없이 나잘났다 설치고 다니던 시절에 나랑 둘이서 콧구녕만한 찻집에서 詩展을 열었던 어느 시인의 싯귀다.

후에 내 글 몇 편과 남의 글 다수를 지 글인양 슬쩍 등쳐서 얼렁뚱땅 제 시집 속에 끼워 출판해버렸던 매우 괘씸한 엉터리 사이비 시인이다.
나 보다 연배는 훨씬 위였지만 그 일로 해서 이 천하에 본 데 없는 글도둑놈아 어쩌구 죽일 놈 살릴 놈 멱살잡이로 한 번 벅구를 떨었던 반갑잖은 사람. 뭐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고 관심 둬 봤자 잘 난 글 몇 개 가져가면 어떻고 던져주면 또 뭐 어때서.
 


아무튼 그 일 이후로 상종못할 망종이라 치부하고는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고
그 따위 도둑질이나 일삼는 인간이 詩는 무슨 詩! 하고 내쳐버렸지만 저 우에 ‘화장터’라는 글만은 참 흉내내기 어려운 시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 글에 나타난 남다른 감수성만큼은 지금도 인정한다. 단, 베껴먹은 글이 아니라면. 
서정주의 난초를 볼 때마다 겹치기로 생각나는 싯귀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안팎으로 비슷한 시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詩仙이라 불리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세에 빌붙어 동포를 팔아 먹은 개자식으로,
이런 제에미 순, 재활용도 못할 더러운 쓰레기 같은 늙은 개 취급을 받는 서정주를 싯줄 깨나 짓는답시고 또한 무조건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 맨 위의 난초는 누가 뭐래도 정말 사랑한다.
글 맛도 맛이려니와 내 기억 속의 무엇인가를 건드려서 촉발시키는 저 끔찍한 감수성은 진저리가 나도록 무섭고 아름답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하자면 안타깝고 아쉽고 부애나고 떨떠름하고 얄궂지.


돈 보고 부잣집에 팔려 갔다가 패가망신 소박데기로 쫓겨 온 옆집 이뿐이.

행실은 더러바도 얼굴 하나는 정말 끝내 줬는데.

나쁜 년, 이왕에 버릴 몸이면 나나 주지.

다소 비약이 될 수는 있겠으나 뭐 그런 마음 비슷한 거 아닐까 생각한다.


그 시절 세상에 매겨졌던 자신의 위치를 일찌감치 자각하고 미리 붓을 꺾었거나
택도 없는 강단이나마 버럭버럭 부려서 약간의 고초를 감내하였더라면.. 에구, 어림도 없는 아쉬움만 간당간당.
아쉬움이 있다는 것 부터가 서정주가 남긴 글에 대한 미련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남긴 글에 비해 정작 그 자신은 제 시대의 시공에 대한 통찰이 치명적으로 어두웠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부족한 통찰력이 그의 말년이 오욕과 영예로 뒤범벅이 되어버린 단초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마쓰이 오장 송가가 쓰여졌던 1944년, 그것도 가미가제가 등장했을 무렵이면 이미 전세는 기울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내 몰리고 있음을 어지간만 한 지성이라면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그 귀기서린 文才 이외에는  아주 귀와 눈이 어두웠던 박약한 인격이었거나.


보듬어 품자면 이 민족의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진 근대사의 한 조각이 될 터이고

배척 하자면 매를 먼저 청하여 맞더라도 제 뒤에 섰는 청년 군상들을 생각해서라도 굳세게 이끌고 나아갔어야 했을... 젠장할.. 선각자로서의 자각은 조옷도 없는 노예 근성에 찌든 한 낱 재주꾼에 불과한 글쟁이일 뿐인 건지.


어느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화두 덕분에 오늘 하루 내내 그 생각이다.

글타. 미당인지 말당인지 하여간 더럽게 질긴 이름이다. 씹어도 씹어도 국물이 나오는...

그래서 김지하가 말했다는 인격과 글의 불일치에 대한 견해에 관한 한 나는 유보다.

맨 위에 쓴 난초처럼 어찌할 수 없이 아름다운 글을 보면 글 쓴 이가 누구이건 간에 그 글은 고스란히 박리되어 두둥실 떠오르는데 그걸 낸들 어쩌냐고.

그 인간의 생애는 용납 못하더라도 글은 글대로 아름다운데 어쩌란 말이냐고...
그렇다고 무슨 대의명분에 짓눌려서 흰 것을 검다하고 눙치고 넘어 갈 일도 아니잖은가 말이다.

제엔장, 밑도 끝도 없이 주절거리고 보니 또 회색분자가 되고야 말았다.
그래도 뭐, 하는 수 없는 잡배의 우거지 근성을 내 힘으로 어쩔 수 있나. 탱자탱자 드러누워서 조상 탓이나 하고 세월 보내는 거지 뭐.  


하여간에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뜬금없이 던진 화두에 대한 답장이 되고야 말았지만 도대체가 생겨먹은 쌍통이 안팎으로 동히 몹시 조악하여 그럴싸한 선문답은 커녕 억설만 개발새발 늘어놓은 꼴이 되고야 말았다. 모쪼록 어떤 꼴이든 민폐는 되지말아야 할 텐데.  




2005.2.4.







나는 풀밭에 있다.
그 어떠한 흔적도 없는 원시의 땅에 혼자 누워있다.

산비탈은 햇살 받아 밝게 푸르고 하늘은 온 세상을 덮어 고요하다.
보이지않는 어디선가에서는 맑은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다만 어린 풀잎들만 엷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릴 뿐이다.

선악도 없고
문명도 없고
생사도 없으며
그 어떤 인과나 현상도 없이  
종교적인 고양감이나 격정의 눈물까지도 말끔히 씻어버린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맑음이며 고요함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을 넘어서버리는 기이함이다.

심신이 부대낄때면 나는 이 곡을 한없이 반복해서 듣는다.
음반을 얹고 스피커 앞에 바짝 다가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혼자 듣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도 씻겨진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나도 때를 벗고 눈을 씻는다.

심상이 얇은 잡배의 싸구려 감상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나는 이 곡을 종교의 그것보다 더 우위에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이 음악을 쓴 사람은 말 할 것도 없이 이것을 연주한 이들조차도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 언젠가 내게 조용히 누워 숨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혹시, 나는 그 순간에 이 곡을 듣고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리해야겠다면 반드시 이 음반으로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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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pf/호로쇼프스키
vn/베흐
vc/카잘스

베토벤하우스 실황







 



그 노래는 그렇게 들어야지.

깊은 밤 사방으로 짙은 커튼 드리우고 아득히 가라앉은 누우런 방.

번쩍거리는 하이엔드 오디오라면 좀 그렇겠지?

손때 삼삼하게 앉은 고물 나발 앞에 이리저리 삭아빠진 판때기들 발 끝으로 밀어놓고

침침하게 가라앉은 흐린 날에 흐린 알전구 뎅겅 노랗게 달아놓고

이불 대충 구겨서 한 쪽에 밀어두고 삐딱하게 누워서 입꼬리에 피다만 꽁초도 하나 물고 들으면 좋지.

핑게 좋은 술 한 잔으로 핏줄 속의 알콜 농도를 적당히 높여두면 감상에 더욱 도움이 되고말고.

짓무른 눈자위 축축하게 적셔서 들어야지. 듣다보면 어느 새 언뜻 이빨 빠진 쳇 베이커랑 마주앉아

엣다 너도 한 잔, 그럼 나도 한 잔.

주고 받고 수작하다보면 늬가 난지, 내가 뉜지, 고만 쑤세미처럼 헝클어지고

세수도 하지말고 발도 씻지말고 턱 밑에 깎지 못한 수염도 한 사흘 길러두면 더 좋지.

내가 반드시 그리 해서 이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 어쨋거나 나는 그 노래때매 적잖이 망가지고 말았다니까.

그 노래는 냄새가 너무 진해서, 진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서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게 뭔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거야.

희거나 검거나 가거나 말거나 울든지 말든지...

그러게 내 어깨 위에 얹힌 건 대체 무엇일까.

내 가슴 속에 쑤셔 박혀서 밤낮으로 툭탁거리는 저 시커먼 덩어리는 대체 또 무엇일까.

낡은 세월에 낡은 것들 사이에 끼어 박혀서

도리 없이 밤 낮으로 낡아가는 녹슨 베어링 같은 것인지 뭔지 말이야.

마이 훠니 발렌타인.

원 세상에 별 지독한 노래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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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는 이 녹음을 마지막으로 보름 뒤에(한 달 뒤라는 말도 있고) 네덜란드의 한 여관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재즈에는 문외한이라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입장이 안되지만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작은 정신적 손상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정말로 삶에 대한 어떤 미련이나 애착도 다 놔버리면 저렇게 지독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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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징거' 이외의 바그너를 나는 이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차이코프스키도 잊어버려도 상관 없습니다.

그는 내가 13세때, 즉 사춘기에는 중요했지요.

그렇긴 해도 그의 교향곡 5번과 6번을 안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연주만 좋다면 말입니다. 즉, 차이코프스키를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

놓았을 뿐이지요. 저 아래쪽에 말입니다.

베토벤의 소나타 한 곡보다도 모짜르트의 音符 서너개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말해 온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것은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베토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베토벤은 갈등이 많은 사람이었죠.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도 느껴집니다.

그것이 그에게 그다지 호감이 안 가는 점입니다.

그는 음악의 위대한 건축가였지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으리만큼.

집을 세우는 식으로 교향곡을 구성했던거지요. 훌륭하게 만들었지요. 단단하기 이를데 없이.

그러나 모짜르트는 단 하나의 작은 테마로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채워

버립니다. 슈베르트도 그렇습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의 순수성으로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하는 것입니다.//

-A.루빈시타인.- /페릭스 슈밋과의 대담 중에서. (스테레오뮤직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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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A.루빈시타인 영감님,

나는 마이스터징어 이외의 바그너도 더러 듣습니다.

물론 차이코프스키를 잊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교향곡 뿐 아니라 그의 많은 작품들을 즐겨 듣습니다. 특히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이나 오이스트라흐와 오먼디가 겨루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하도 들어 이제는 지겨워질 만한데도 불구하고 요즘도 더러더러 손이 자주 가는 음반입니다.

물론 나는 지금 사춘기가 아닙니다. 해만 지면 눈앞이 침침한 중년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길고 긴 베토벤의 소나타 한곡을 정신없이 빠져들어 들을 때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모짜르트의 음부 서너개를 지겨워하며 콧구멍을 후빌 때도 있습니다.

나 역시 베토벤이 갈등이 많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은 있습니다. 삼 사십년 듣다 보니 그래도 청맹과니는 아닌 듯 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브람스는 그보다 더 갈등이 많은 걸로 느낍니다. 브람스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머리 한 대 쥐어 박고 '좀 심풀하게 살아라!'며, 매우 진지한 충고를 남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영감님처럼 호감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오히려 친밀감을 느낍니다. 때때로 나의 곰팽이 낀 가슴팍을 열어 제껴서 나를 대변해 준다는 느낌 때문이지요.

물론 모짜르트는 아름답습니다. 나도 그의 수많은 음악들을 사랑합니다. 어느 때인가는 아직 접해 보지 못한 모짜르트의 음악이 못내 아까워서 그걸 모두 섭렵해 본답시고 딸리는 깜냥에 아둥바둥 발사심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슈베르트도 그렇습니다. 나는 요즘도 그의 녹턴을 들으면서 뼈마디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은 몽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음악의 '순수성'만이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고집하지는 못합니다.

우아한 모습으로 고상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 갑남을녀 장삼이사 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만, 나는 때로 울부짖고 싶기도 하고 때로 천박해지고싶기도 합니다.

바하의 깊음을 늘 흠모하지만 여행길, 시골 싸구려 다방에서 듣는 유행가 자락에도 때로는 눈물 짓습니다. 아마도 그대와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한 범부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피아노도 못치고 악보도 능숙하게 읽지 못하며 당신처럼 나이가 많이 들어보지도 못했고 당신만큼 인생의 경험도 썩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럴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죄송하지만 나는 수삼년 전에 당신이 연주한 여러 음악가의 음반을 다수 팔아먹고야 말았습니다. 어느새 중년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이제 '쇼팽' 이외의 당신이 필요하지않은 때문이지요. 미안합니다.

새옹 드림.

/추신:

그래도 스크로바체프스키가 지휘한 영감님의 쇼팽 협주곡 1번은

내가 죽을때까지 팔아먹지 않을 구원의 판때기이니 너무 섭섭해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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