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한마디로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단어입니다.
꼰대라는 말 자체가 다분히 뒤틀려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워낙에 부정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참 곤란한 단어지요. 도대체 그 어원을 짐작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어쩐지 빈정거리는 듯한 어감도 그렇고 글자로 써 놔도 참 품위가 없습니다.
뭐, 그 이유가 어쨌든 나는 이 단어를 잘 쓰지는 않습니다. 부러 위악적인 말이나 글, 아니면 따 와서 인용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입에도 잘 안 담는 편입니다. 쓰는 말이 거칠면 심상도 거칠어진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젊은 날은 있었고 또한 누구나 그렇듯이 꼰대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참 불편하고 거북한 존재였습니다. 그 꼰대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걸핏하면 잘 쓰는 말이 있지요. 흔해빠진 싸구려 금언록에나 나올법한 뻔한 이야기.
‘사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이니라...’
'모름지기 나이가 들어봐야 세상을 알고...'
'옛말 하나도 그른 거 없나니...'
'그저 成家를 해야 어른이...'
'머리 꼭지에 쇠똥도 안벗겨진 어린 놈들이란....'
귓바퀴에 딱지 않을까봐 들을 때마다 털어냈지요. 가슴 가득히 적개심을 품은 채로
집에서건 바깥세상이건 구태를 몰아내고 개혁해야 하며 너희들은 바로 그 개혁의 대상이며...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케케묵은 책장이나 넘기며 수염 쓰다듬는 소리들이냐는 것이었지요.
마음을 도사리고 독사 대가리같이 고개를 꼿꼿이 치켜든 채 대들고 따지고 덤볐습니다. 만만찮은 세상에 채이고 꺾이고 넘어지면서도 오로지 그것은 낡은 세상 탓이라는 굳은 일념으로 초지일관이었지요.
그 생각은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겼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느 사이에 내가 한 번 멋지게 살고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새 내 자식들이 물려받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바뀌어 갔고, 그러던 그 어느 날, 나는 입이 한 자나 튀어나온 어린놈을 앞에 앉혀두고 답답한 가슴을 치며 방바닥을 두드리는 꼰대로 변해있었습니다.
‘애비 마음도 모르는 괘씸한 놈!’
‘천지 분간도 못하는 어린놈들!’
‘그저 요즘 젊은 것들이란!’
‘이놈들아, 너희들도 나이가 들어봐라!’
그 신념대로 산답시고 기를 쓰고 살다보니 어느새 나도 꼰대가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외형만 그런 게 아니라 생각조차 이미 그리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그래! 내가 생각해도 참 눈부시게 변신했습니다.
세상이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는 몰라도 나도 잔소리라면 어디 빠지지 않을 중늙은이로 근사하게 현신해버린 것이지요.
이제는 이고지고 가야 될 짐들이 생겼다는 겁니다. 부서지거나 깨지더라도 훌훌 날려버리면 그만일 혼자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만만찮은 것은 세월의 무게였습니다. 수백 수천 년 누적되고 퇴적되어 온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세월의 무게가 사실은 알고 보니 결코 만만하게 생각할 그것이 아니었더라는 겁니다.
그랬었구나, 세월 이기는 장사도 없지만 세월만한 장사도 없구나, 딴에는 대오각성 한 셈이지요.
젊어서 약관의 나이에 대오를 이루고 뜻을 실어 펴는 대단한 이들도 없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착실히 나이 먹어 슬쩍 돌아보는 그 평범한 무게만큼은 결국 그만큼 세상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실을 수 없는 무게였더라는 거지요. 세상에 남겨져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지혜와 철학들이 몇몇의 뛰어난 천재나 위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피고 진 그 모든 이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이루어놓은 삶의 퇴적이었더라는 겁니다.
생활이건 예술이건 또 그 어떤 것이든 거장이나 대가의 그것조차도 꼭 특별한 누군가이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라는 걸 왜 몰랐을까요. 그 특별한 이들의 재능조차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세월의 풍상이 바탕을 깔아주지 않았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만한 경지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왜 알지 못했을까요.
늙수구리 적당히 세파를 헤치고 지나 온 그저 그런 이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들이 주는 그 그윽하고 평범한 경지에는 신동이며 천재들이 제아무리 반짝거리며 발버둥치고 밤낮으로 발사심을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심연이 있었던 겁니다. 결국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가치들은 정작 지나간 ‘꼰대’들이 빚어 놓은 것들이더라는 말씀이지요.
등신같이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심신의 양식을 채우리라고 그 긴 세월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당연하려니 하면서 정작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삶에서는 그걸 대입할 줄을 어찌 그리 까막같이 몰랐다는 말인지.
쉰 고개 언저리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내 생각에 조금 끼어 들 틈을 보았는지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넌지시 묻습니다. 나이 들면서 모가 많이 깎이고 둥글어 진 거 아냐고.
‘... 내사 원래가 원만하고 그랬지 뭘 그래.’
누구한테라고도 아닌 핑계 비슷한 소릴 애매하게 던져놓고는 얼렁뚱땅 외면을 하고 일어나버렸습니다. 뭐, 그래도 아주 모르쇠로 잡아떼지는 않았으니 모쪼록 양해를 바랄 뿐입니다.
꼰대, 웬만큼 나이 들어보니 그거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모르긴 하지요.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면 또 뭐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꼰대라는 단어는 참 그렇네요. 아무리 별로 쓸모없어진 나이 든 수컷이라 해도 그렇지 뭐 그럴싸한 다른 말은 없을까요. 세상에 그래도 그렇지 '꼰대'라니.
2003. 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