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을 갔습니다.
‘큰 애 때를 좀 벗겨 줄라면 이제는 나도 힘이 부쳐요. 작은 아이는 당신이 데리고 갔으면.’
‘그러지 뭐.’
나는 오동통한 작은 아이를 데리고 목욕하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아서 선뜻 동의를 하는데 큰 아이가 엄살을 핍니다.
‘앗! 엄마가 때 밀면 나는 아파 죽는데.’
‘음. 그렇겠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랑 목욕 가는 게 정말 무서웠거든. 좀 살살 해주지.’
엄마들은 정말 아이들이 질겁할 만큼 알뜰하게도 벗겨내지요. 아빠들은 상대적으로 좀 느슨한 편이고. 이야기 중에 작은 아이도 나섭니다.
‘나도 여자니까 엄마 따라 갈래.’
어릴 때부터 더러 나를 따라 남탕을 가곤 했던 작은 아이였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좀 그렇다 싶어서 결국은 둘 다 제 엄마를 따라가기로 하고 나는 혼자 가방을 따로 챙겨들었습니다.
‘그럼 그래라. 작은 애부터 씻겨서 한 시간 있다 내보내요.’
덕분에 나는 혼자입니다.
우리 식구가 자주 가는 목욕탕은 남탕이 2층에 있습니다. 밤새 찜질방을 열어놓는 집이지만 아무래도 밤늦은 시각이다 보니 목욕탕 안은 조용합니다. 나 말고는 한사람밖에 없네요. 게다가 늦은 밤인데도 물이 깨끗하여 나는 썩 흡족했습니다.
목욕탕 물이 더러운 것을 무척 싫어하셨던 아버지는 목욕을 꼭 새벽에 가셨습니다.
늦게 가면 물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 거의 반드시 꼭두새벽에 나를 깨워 앞세우고 목욕을 가시곤 했었지요. 거기다가 강 아랫쪽 목욕탕은 강물을 끌어 쓴다던가 어쩐다면서 굳이 강 건너 시내에 있는 목욕탕으로 갔었습니다. 한겨울 동도 트지 않은 꼭두새벽에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목욕 가방을 들고 강을 건너가노라면 귀가 아주 떨어져나가는 듯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도록 싫고 귀찮은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 시절 목욕탕은 아침나절이 지나고 나면 목욕탕 아저씨가 수시로 뜰채로 때를 건져내야 할 만큼 물이 더러워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 때도 뜨거운 물에 잘 들어가지 못하던 나는 정강이까지만 담그고 노닥거리고 있는데 구십 킬로그램의 배를 가진 아버지는 살이 아주 쇠가죽인지 우람한 몸을 펄펄 뜨거운 탕에 담근 채로 얼른 안 들어오고 뭐하냐며 연신 채근입니다. 이리저리 요령을 피며 미지근한 물에서 찰박거리다가 아버지한테 붙잡혀 큰 탕으로 들어가노라면 아주 고문이었지요. 펄펄 끓는 탕 속에서 으으으 버티는데 어쩌다 다행히 조금 견딜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손뼉을 두 번 칩니다.
'남탕에 뜨신 물!'
이내 팔뚝만한 빨간 색 파이프에서는 펄펄 끓는 물이 쏟아져 나오지요. 아아, 그 뜨거운 물이 슬금슬금 몸을 휘감아 오는 그 끔찍함이란.
‘아부지, 나는 고만 나가께요.’
‘가만히 있어! 땀이 바짝 나야제!’
요행히 아버지의 마수를 피해 탕 밖으로 달아나면 다행이지만 아버지의 큰 팔뚝에 붙잡히는 날이면 끝장입니다. 그럴 때면 나도 손뼉을 짝짝 두 번 치면서 '남탕에 찬 물!' 로 반항하고 싶은 생각이 꿀떡이었지만 참말로 그러지는 못하고... 벌겋게 익은 채로 겨우 탈출했다 싶으면 '이리 오니라' 이제는 수건 뚤뚤 뭉쳐서 겨드랑이며 사타구니를 사정없이 박박 밀어댑니다. 발갛게 불고 익은 여린 살이 아프고 따갑고... 그나마 뭉친 수건은 양반이었습니다. 더께 앉은 손등은 조약돌로 때를 벗겨야 했지요. 그 시절 목욕탕에는 동글동글한 때밀이용 돌들이 여럿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초록색 신비의 때수건 이태리타올이 나오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거울 앞에 앉아 몸을 씻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다 언뜻 깨어보니 그 사이에 욕탕 속에 들어앉아있던 중년도 나가고 나 혼자밖에 없네요. 귀 기울이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말고는 괴괴한 정적입니다. 얼렁뚱땅 씻어내고 황토방에 땀을 빼러 갑니다. 그렇잖아도 목욕 시간이 빠른 나는 한 시간이면 목욕을 끝내는데 혼자 가도 두 시간을 넘게 채우는 아내는 아이들까지 씻겨 내보내느라 늘 늦습니다.
땀을 빼면 건강에 좋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히 인물은 한 인물 더 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구중중해지는 얼굴이 이 때 만큼은 잠시나마 회춘을 하는 듯해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그럭저럭 땀범벅으로 졸고 있노라면 작은놈을 위시하여 큰 놈과 아내가 차례로 나옵니다. 아이들 등쌀에 밤늦은 국수도 사 먹고 달걀도 사 먹고 재미있게 노닥거리다가 땀 한 번 더 빼고는 늦었으니 이젠 집에 가자, 다들 가서 땀 씻고 나오너라, 줄줄이 여탕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혼자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남탕은 여전히 고요합니다.
..........!.
일순간 비어있는 목욕탕과 순식간에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 그 때의 그리운 시절이 범벅이 되면서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주 맘먹고 힘차게 손뼉을 두 번 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남탕에 찬 물!'
목 놓아 큰 소리로 외치고 나서는 바보같이 혼자 즐거워져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습니다. 드디어 사십년 묵은 소원을 풀었네요. 웃음 끝에는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가 보고 싶어져서 공연히 콧날이 시려오는 것을 참느라 잠시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만.
2005. 0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