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한 십여 년 전 쯤 이야깁니다.

오래 앓던 천식으로 몸이 약해져서 유치원도 못가고 집에서 책만 보며 애비와 씨름하던 어린놈이 어느 날엔가 어디서 봤는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에 혼이 나가버렸습니다.


어지간한 장난감에도 좀처럼 욕심을 내지 않던 놈이 아빠 자전거, 아빠 자전거,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전거를 사 내라고 석 달 열흘을 졸라대는데 자식 병 수발 한다고 귓구멍 틀어막은 채로 밥벌이까지 접어버렸던 애비는 자전거를 사 줄 재주가 없었습니다.

새끼 곁을 지키는 것만 소중한 줄 알았지 새끼 소원도 애비에게 달린 것을 몰랐던 어리석은 애비였지요. 어린놈은 자전거에 목을 매고 애비는 빈 주머니만 뒤적거립니다. 이런 막막한 세상아.


제 의논과는 달리 하던 일 다 접고 애한테만 매달린 후로 아내와도 서로 어긋나서 불편했던 때였으니 내 딴에도 허깨비 같은 자존심은 남아서는 말 빚 질까봐 입은 딱 닫아걸고 혼자 냉가슴만 앓았지요.

그렇게 그놈의 자전거 때문에 어린놈과 밀고 당기던 그 어느 날 철딱서니 없이 만만한 애비만 죽어라고 졸라대는 어린놈을 달래다 못해 그만 소리를 꽥 질러서 울려놓고는 훌쩍거리는 어린놈을 보자 하니 기가 막히네요. 그래, 혼자 우울해서 탈기를 하고 방 한 구석에 멍하니 처박혀 있자하니 눈에 띄는 건 고물 오디오에 판때기 밖에 없습니다.


..........아뿔사!!!

이런 등신 같은 인간을 봤나. 자전거에 목숨 거는 어린 새끼를 두고 삼년 가야 손 한 번 안가는 판때기들은 잔뜩 보듬고 있는 꼴이라니.

그 날로 판꽂이를 뒤집어엎어서 손 안 간다는 팔백 장 뽑아내어 트렁크며 뒷자리에 싣고는 중고 음반 산다는 곳 찾아 어린놈을 옆에 태우고 부산으로 대구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앗따, 이놈아. 애비도 돈 생겼구나. 인제는 자전거 사러 가자.

그 날로 반짝반짝 노란 자전거를 사서 싣고 왔습니다.

바퀴살에 방울까지 달아서 굴러가면 도로롱 소리도 나는 아주 멋진 자전거였습니다.

비닐도 안 벗긴 새 자전거를 손에 쥔 어린놈은 입 꼬리가 귀에 걸려서 연신 싱글벙글, 애 엄마는 무슨 돈이냐고 물었지만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입 다물고 암말도 안했었지요.


그렇지요. 아무리 그 당시에 손 안 가는 음반이었다 해도 그렇지. 그거, 딴에는 꽤나 어지럽게 살아왔던 일생, 내 손때에 내 숨소리까지 묻어있는 그런 음반들이었습니다. 참, 내 자식 소원이 아니었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그런 난리였지요.


어찌 됐든 그 놈의 자전거, 어린놈은 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지고 무릎 깨고 하면서 익힌 솜씨로 등교 길이며 동네 나들이며 그리도 신나게 끌고 다니더니 점점 키가 크고 무릎이 핸들에 닿을 때가 되니 더 이상 타지 못하고 언젠가부터 헛간에 서 있었습니다. 그놈의 묘한 이력 때문에 남 줄 생각도 못하고, 버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세워만 놓았었습니다. 반짝이던 핸들도 빨갛게 녹이 슬고 바람 빠진 타이어는 납작하게 삭았습니다.


몇 년을 그냥 그대로 세워 두었습니다.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에 한번씩 건드려보기도 하고 어쩌다 심사가 사나운 날에는 툭 차보기도 했지만 하도 낡아버려서 작은 놈 줄 생각도 못하고 그 놈의 자전거, 헛간에 세워 둔 채로 눈길만 주고받고 몇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그 어느 날 오후에 무슨 일인지 마음이 선듯해서 이웃집 텃밭에 비닐하우스 뜯으러 온 고물장수 할아버지에게 실어 보냈습니다.
집에 있는 쇠붙이 이것저것 실어 올리다가 충동적으로 얼른 실어 보내 놓고서는, 아니다, 이게 그냥 보낼 일이 아니다 싶어서 그 할아버지 얼른 뒤따라 가서 사진 두어장 찍어 왔지요. 아주 청승이 늘어졌습니다. 
 


‘아빠, 내 자전거 버렸어?’


그 날 밤, 이제 다 커버린 어린놈은 낮에 찍어 둔 자전거 사진을 만지작거리는 날 보고 잠시 들여다보는 듯 하더니 심드렁하게 묻고는 그냥 그만이었습니다. 


.......에라 이놈아, 이 자전거가 그냥 자전거인줄 아느냐.


꼭 정 붙이 사람이나 짐승을 보낸 듯 공연히 마음이 헛헛하고 우울해져서 고물 값으로 받은 삼천 원, 그 돈 손에 쥐고 하도 마음이 얄궂어 차마 쓰지를 못하고 아이 통장에 그냥 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을 보다가 혼자서 중얼중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뭐 꼭 인사라기보다는 그냥 차마 그냥 보내기가 애잔해서 마음으로 그렇게 보내 주었다는 말이지요.


........

잘 가라.
그리고 펄펄 끓는 용광로에 몸 한 번 덥혔다가, 다시 태어날 때도 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더 노란 자전거로 태어나 노랑 자전거에 혹해 애비를 졸라대는 작은 계집아이에게로 가거라. 잘 가거라.



2006. 01.21





♣♣♣♣♣
어둑한 골방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출세와는 거리가 좀 먼 책들을.

남보다 재빠른 감각으로 남보다 앞서기 위한 책들을 열병이라도 앓듯이 읽어야 하는데.

책을 백 권쯤 가려내서 커다란 상 위에 쌓아놓고

제대하는 8월 말까지 다 읽어 치우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
연희와 만나면 형에 관한 이야기는 삼갑니다.

그 여자가 순수하게 사랑한 처음이자 마지막일 사람이 형이니까.

그 여자도 자기 양심을 부끄러워합니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형의 건투를 빌며 넋두리 접습니다. 낙원 드림.


♣♣♣♣♣
Dear 여윈 선배님.

방학동안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sons & lovers 를 읽었습니다.

(큰일 했다 큰 일 했어.)

puppet man 인 우리 선배님 따분하시죠.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지도록 기도 할까요.

(중략------)

........

여위고 빼빼하고 불쌍하고 고독하시고 심심하신 선배님 안녕히 계세요.


--커다란 후배 선정.


♣♣♣♣♣

낯 설은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삽니다.

잘 지내시지요?

오랜만에 소식 접하여 마냥 기쁜 맘에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어보아도

모든 글자들이 가물거리기만 합니다.

이게 테크닉의 문제인지 스타일의 문제인지 아니면 거리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신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습니다.
(중략-----)

....

직관도 무지에서 오지는 않을 듯 합니다.

많은 경험을, 거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

감정들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 시켜 가십시오. 소극적인 것은 껍데기뿐일지도 모르지요.


--연희


♣♣♣♣♣

찌는 게 아니라 아주 튀기는 날씨다. 점심 반찬으로 튀김이 나온다면 우스울 것 같다.

안 간다 안 간다 하면서도 세월은 어영부영 가나보다.

코는 시월에 수술하기로 했다. 가슴은 이상 없더라.

나는 왜 이렇게 못나서 너처럼의 갈등과 희열을 맛 볼 수 없는지 생각할수록 병신스러울 뿐이다.

너 같은 놈 때매 나 같은 비극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잊지 마라.

(중략------)
..........

날이 더우니 모일 때마다 개 이야기뿐이다.

나도 소주 한 병 쯤을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이마에 정맥이 선 네 얼굴 보고 싶다.

뜨겁게 살아라. 너도 나도.


--근호


♣♣♣♣♣

부패와 썩은 몰골들이

항시 주변을 메우고 있고

탁한 놈은 팽팽한 오물 주머니를 차고

옆에 서서 터뜨릴 기세고.

(중략------)

.........

많은 시간, 많은 이야기들 진심으로 고마웠고

진주에서의 하루는 기억하겠소.

모쪼록

건강 속에 만나서 과격한 느낌으로 태웠으면

쓴 술 한 잔은 달지 않겠소.


-중수


♣♣♣♣♣
(전략-------)

시외전화라도 한 통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생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생활은 어떠십니까.

안경에 더벅머리 형의 얼굴이 선합니다.

짬나는 대로 찾아 뵐 테니 남강 변에서 개다리소반 마주 할 준비나 하십시오.

얄팍한 호주머니 그거나마 다 축내고 올 작정이니

마음 굳게 먹고 그 날은 지리산 가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시월 팔일 휴가 출발합니다.

-호경.



=====================================


책꽂이를 정리하다 마구잡이로 쌓아 둔 종이 뭉치에서 나온 오래 된 편지들.

누렇게 바래고 삭아 만지면 귀퉁이가 부서진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낡고 지친 편지 몇 장을 뒤적이다가 오래 지난 상념으로 조금씩 앓는다


편지는 식은 아궁이처럼 쓸쓸할 뿐인데

오히려 일없는 가슴만 비시시 일어나 이내 조금씩 기척을 하고

오래 오래 지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누렇게 묵은 책꽂이에 잊은 듯 남겨두었다가

공연히 아팠다 웃었다 하는 것도 홀로 썩 민망한 일이지만

그래도 참 그때가 조용히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만큼은 낡았나보다.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


낙원/

나이는 나와 동갑이면서 학번이 하나 늦어 나더러 꼬박꼬박 형으로 부르던 후배.

이 친구가 가사를 짓고 내가 곡을 붙인 노래가 모모대학 방송국 공식 방송국가로 남아 있다.

자랑이다. ㅎㅎㅎ.. 


선정/

그 해에 내가 대장 노릇하던 음악 써클의 여자 후배.

몸집이 커다랗지만 썩 고운 얼굴과 활달한 성격으로 재미있었던 친구.

지방대학에서 꽤나 세련된 도회적인 이미지로 눈길 꽤나 끌었던 친구.


연희/

그냥 어떤 여자.

의사한테 시집가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여자.


근호/

지독하게 가난했던 집구석이 이가 갈려서 무슨 수를 쓰던지 돈을 벌어야 한다던 고등학교 동창생.

비슷한 시기에 같은 병을 같이 앓기도 해서 잘 어울렸던 친구.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는 걸려 오는데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세세한 소식은 잘 모른다.

배고팠던 시절 이 친구와 둘이서 라면 다섯 개와 찬 밥 한 밥통(약 5인분?)을 한 끼에 해치운 추억이 있다.


중수/

군 복무 중, 국군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만났던 해군 친구.

미술 전공에 꽤나 독특한 감각을 가진 친구였는데 결혼식 때 못 가본 탓으로 서로 엇갈려 소식이 끊겨 버렸다.


호경/

군대 쫄병.

시커먼 안경을 쓰고 삐딱이 기질이 농후하던 졸병.

군대가 아니라면 어떻게 각별히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를 기질이었는데 편지의 내용대로 뻥구라만 쳐놓고 결국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소식을 모른다.  





칼을 잡았다고 해서 모두 다 검객은 아니다.

검객은 남의 눈으로 상대를 보지 않는다.
검객은 자신의 눈으로 상대를 보고 베어야 할지 지나쳐야 할 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쓰러질 때도 자신의 이름으로 쓰러진다.

남의 눈으로 상대를 보고 칼을 뽑는 자는 검객이 아니다.
그는, 마루 그늘에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주군의 명령만 기다리는 자객일 뿐이다.
또한, 죽은 자객은 이름이 없다.

손에 칼을 쥐었다고해서 누구나 다 검객이 되는 것은 아니다.




I don't even call it violence when it's self-defence.
I call it intelligence.    - Malcolm X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일 경우, 나는 그것을 폭력이라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고 말한다. -말콤 X)  





 


소비에트 아미 코러스. 직역하자면 소련 육군 합창단쯤 될까.

어쩐지 이름이 좀 으스스 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어릴 때부터 받았던 냉전적 세뇌교육의 효과겠지?

이미 해체되어 흔적도 없는 소련이라는 공룡.

미국이라는 괴물과 맞붙어 겨룰만한 거의 유일한 괴물이었던 소련.


썩어빠진 이데올로기나 정치 같은 건 제껴 두자.

지구를 수십 번 결딴 낼 수 있다는 몇 천개가 넘는다는 끔찍한 핵미사일도 지금은 잊자.

문어발을 가진 불가사리같이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을 빨아들여 거대한 예술적 잡탕을 만들어놓은 잡동사니 미국을 비롯해서 그 알토란같은 아티스트들을 수시로 서방에 빼앗기면서도 또 다시 어디선가 귀신같이 홀연히 나타나곤 하던 겨울나라의 우울한 아티스트들. 그 추운 나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악의 심연,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강철같은 타건의 호로비츠, 엄청난 스케일과 절제가 공존하는 길렐스, 검은 타이즈의 긴 생머리 뮬로바,

감성 과다로 허구헌날 손수건을 쥐어 짤 것 같은 우울한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

니콜라에바, 오일장 장바닥 좌판 어디에선가 만날 것 같은 뚱댕이 할머니...

오이스트라흐, 아아... 그 존재만으로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을 그 드럼통 아저씨.

그 뿐인가, 리히테르, 코간, 유리 바쉬메트, 등등, 이름만으로도 능히 그 주변의 별들이 빛을 잃을 거성들.

그들의 바탕 위에서 생겨났을지, 아니면 그들의 바탕이 되었을지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대륙의 뿌리. 소비에트 아미 코러스라는 괴물들의 집단.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구경도 못해 본 그 얼음 덮인 대륙이 느껴진다.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그들의 등 뒤에 언제나 거인처럼 누워 있다는 순백의 우크라이나 산맥이 눈에 보인다. 

끝없는 동토를 거세게 할퀴고 지나가는 눈보라 속에, 노쇠하고 지친 거인처럼 더러 눕고 더러 버티고 선 산맥들. 새까만 바탕에 시뻘건 글씨로 공산당 기분을 한껏 살린 EMI의 재킷을 보면서 그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 추운나라를 그리워한다.


다듬지도 않은 듯, 꾸미지도 않은 듯, 제 하고 싶은 소리, 지르고 싶은 소리는 제 멋대로 꽥 꽥 질러대는 듯한,

저 가슴 속 깊은 아래쪽의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후벼 파고 긁어내는 듯한 그들의 야만적인 목소리.

정수리를 벌겋게 강타하는 불덩어리 같은 원색의 테너,

가슴팍을 부르르 떨리도록 후벼 파는 꺼칠꺼칠한 바리톤,

땅 속까지 긁어내는 듯한 까마득한 베이스.

번쩍이는 금관의 압도적인 울림 속에 언뜻언뜻 날선 비수처럼 가슴을 베어내는 발랄라이카의 트레몰로.


애니로리, 초원의 노래, 반두라, 벌판에 선 자작나무, 슬라비앙카, 카츄사, 제비, 손으로 꼽기에도 벅찬 그들의 절창들. 그들이 부르면 연가도 군가가 되고 군가도 연가가 된다.

그들은 지금 남아 있는지? 나라는 찢어지고, 군대가 재편되고, 그래도 그들의 예술 혼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서 저렇게 우울한 망령 같은 노래들을 쏟아내고 있는지.


아아,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다지 씩씩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명색이 사내로 태어났건만

그 놈의 거칠고 야만적인 슬라브 족속의 사내들이 쏟아내는 군가들은 어쩌면 그리도 이 나이 들 만큼 든 사내의 살을 저미고 가슴을 에는지 말이다.



...'아이고 아저씨 벨 걱정을 다 합니더. 사다 노모 다 사람 뱃속에 드갑니더. 살 때 좀 마이 사가이소.'
인구 5만 남짓이라는 삼천포에 웬 생선은 이렇게 많은지.  .......삼천포 사람들은 혹시 생선만 먹고 사는 걸까. 



'야이 XX년아, 고기 한 다라이가 머시 우째?... 웃지 마라, 웃기는 새 X이 좋타꼬 웃나!!'
회칼 든 아지매는 당장에 요절을 낼듯이 옆집 아지매를 닥달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웃집 아지매들은 싸우는 게 우습다고 깔깔깔깔 넙덕 웃음으로 뒤집어진다.
적나라하고 무시무시한 욕바가지에 지나가던 나그네도 흠칫 놀라다가 이웃집 아지매들 웃음 소리 덕에 소심하게 안도하면서 그 앞을 지나간다.

고향 간 길에 삼천포 어시장을 다녀왔다.
날씨 풀어졌다더니 아나 맛좀 봐라 갯바람에 얼고 
철벅철벅 낡은 구두는 물까지 먹어서 발끝이 시렸지만
갯냄새 물비린내 생선 비린내 사람 냄새까지 아주 자욱해서 오랜만의 나들이가 썩 행복했다.

 





이런 그림을 보고 색감이 어떠네 구도가 어떠네
씨도 안먹히는 얘기들만 전문가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나는 싫어.
詩는 안읽고 詩 속에 들어있는 단어하고 구절만 붙들고
싸우고 따지고 분석하는 거지 발싸개 같은 삽쟁이들하고 똑같아서 그래.

머리를 삶으면 귀는 저절로 익을걸 다들 왜 귀때기만 잡고 흔들어대는지.
그러니 코딱지 만한 놈들도 어디 시 한 편 써봐라 그러면
귀신이 씨나락 까묵을만 한  단어부터 몇개 골라 들고 조립한다고 흉내들만 내지.

가슴에 꽂히는 비수가 살색 가리고 육질 따지며 꽂힐까
가슴에 날 선 비수가 꽂히거든, 그래서 숨이 턱 막히거든
그만 뜨신 눈물이나 한 주먹 팍 쏟아내고 그 길로 그냥 칵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죽을 때는 그냥 죽으면 돼.  
저승 길 욕심 내지 말고 그냥 죽기만 하면 돼.

이런 화이트에 숨 넘어 가도록 환장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리고 그런 화이트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히 신선도에 문제가 많다던데
이런 그림을 그린 위트릴로라는 인간은
살아 생전 이미 머릿속이나 가슴패기가
적잖이 썩거나 부식되어 있었을거야.
좀벌레가 파 묵어서 구멍이 숭숭 뚫렸든지.

그런데도 나는 화이트는 잘 몰라요. 
다만 저놈의 궂은 하늘 아래 비어 있는 골목길 때문에,
저놈의 오후 세시의 적막강산 때문에 그렇지.




 

공연 문화의 불모지인 변방이라 늘 여의치는 않지만 어렵게 기회가 맞아떨어지면 가족을 대동해서 더러 공연장을 간다. 하지만 인근의 소도시라 해봐야 그리 문화적으로 우수한 여건이 갖추어져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렵사리 찾아오는 공연이라야 수도권 인구들에게는 그리 눈길도 끌지 못할 그렇고 그런 공연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불모지에 살다보면 이거다 저거다 하고 입맛 가릴 처지가 아니다. 포스터 하나 붙으면 와르르 몰려가서 기갈에 물 한 방울 격으로 냄새라도 맡고 싶은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들지. 그러니 내용이 어떠니 색깔이 어떠니 그래봤자 그 뒷 궁리야 어떻든 촌구석까지 와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뭐. 그런데 그 중에서 얼굴 좀 알려지고 그 중에 입심 꽤나 있는 이들의 공연장을 가 보면 심심찮게  따라 다니는 것이 '따라 해보기'다.


-'자, 그러면 이렇게 소리 내어 보세요.'

(그게 아무나 진작에 쉽게 될 것 같았으면 당신들이 시방 그 무대에 서서 용을 쓸 일도 없었을걸?)

-'손을 이렇게 올리고, 좌우로 흔들면서, ...'

(흥이 나 봐라. 이 민족은 흥만 나면 도시락 싸다니면서 말려도 남녀 쌍쌍이 붙들고 못 말리게 흔들고 돌아간다니까. )

 

이보슈들. 
나는 당신들에게 그것들을 배우고 싶어서 그 곳에 간 것은 아니야. 나는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상에 지친 대부분의 나를 멈춰두고 당신들의 그 아름다운 소리나 몸짓을 보고 들으러 간 거야. 따라 하기도 그렇고 안하고 버티고 앉아있기도 어정쩡한 그런 난처한 꼴로 불편한 시간을 보내러 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대부분의 당신들은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대들의 재능을 펼쳐 보이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해 보세요.' '저렇게 해 보세요.' 때로는 어느 특정인을 지목해서 망신(?)을 주기도 한다. 

'거기 얼룩무늬 티셔츠 입고 안경 끼신 분 일어나 보세요.'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그런 시간이 닥치면 그저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황급히 옷차림이나 소지품 같은 것을 살펴 본다. 하는 사람은 진땀나고 보는 사람은 닭살이 돋는 그런 시간. 그걸 꼭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굳이 뭔가를 비싼 돈 내고 앉은 관객들에게 배워주고 싶다면 공연 안내 포스터에 반드시 그것을 명기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누구의 무슨 공연- (즐겁고 유익한 따라하기 시간도 있음).-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런 불평분자는 당신들의 훌륭한 공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늘 하던 대로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편안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당신들은 이런 불순한 관객의 오염 없이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마음껏 그대의 재능을 빛 낼 수 있겠지. 그렇지 않고 무슨 무슨 공연이라는 표기만 되어있다면 알차게 그것에 충실 하라는 이야기다. 물론 공연 중의 분위기에 기름을 치기 위해서 한마디씩 던지는 재치는 나쁘지 않다. 나도 그쯤의 융통성은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객석의 반응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거나 바라고 하는 행위라면 그것 역시 떫다. 열성적인 오빠부대나 팬들의 환호성은 그럴 만한 대상과 그럴만한 장소가 갖추어졌을 때 기대 해 볼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대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뜯어 고쳐져야 할 좋지 못한 습관도 아니며 좌중 앞에 나서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미덕인 것도 아니다. 나 같은 경우는 공연장에서 박수를 치는 것조차도 인색한 편이다. 그야말로 마음이 벅차올라서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예의상 몇 번 맥 빠지게 두드리고 만다.

아, 물론 모범적인 관객의 태도가 아닌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썩 신통하지 못한 내용으로, 게다가 연습부족이 여실한 내용으로 한 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이 겨워 기진맥진 때우고 있다든지, 그런 모자라는 재능을 입심에 기대어 그럴 듯 하게 포장하고 있다는 눈치가 보이기라도 한다면 이 고약한 관객의 박수는 미안하지만 단 한 번도 받지 못하고 말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의 뛰어난 쇼맨십을 발휘하고 싶거든 공연 안내에 그걸 친절히 명기 해 주면 좋겠다는 부탁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공연에 충실해 달라는 이야기고. 그래도 못내 자신의 재능을 떨쳐 보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면 박수소리가 채 멈추기 전에 펼쳐 보일 앵콜이나 한 두 개쯤을 더 준비 해 오는 것은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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