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그림을 보고 색감이 어떠네 구도가 어떠네
씨도 안먹히는 얘기들만 전문가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나는 싫어.
詩는 안읽고 詩 속에 들어있는 단어하고 구절만 붙들고
싸우고 따지고 분석하는 거지 발싸개 같은 삽쟁이들하고 똑같아서 그래.

머리를 삶으면 귀는 저절로 익을걸 다들 왜 귀때기만 잡고 흔들어대는지.
그러니 코딱지 만한 놈들도 어디 시 한 편 써봐라 그러면
귀신이 씨나락 까묵을만 한  단어부터 몇개 골라 들고 조립한다고 흉내들만 내지.

가슴에 꽂히는 비수가 살색 가리고 육질 따지며 꽂힐까
가슴에 날 선 비수가 꽂히거든, 그래서 숨이 턱 막히거든
그만 뜨신 눈물이나 한 주먹 팍 쏟아내고 그 길로 그냥 칵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죽을 때는 그냥 죽으면 돼.  
저승 길 욕심 내지 말고 그냥 죽기만 하면 돼.

이런 화이트에 숨 넘어 가도록 환장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리고 그런 화이트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히 신선도에 문제가 많다던데
이런 그림을 그린 위트릴로라는 인간은
살아 생전 이미 머릿속이나 가슴패기가
적잖이 썩거나 부식되어 있었을거야.
좀벌레가 파 묵어서 구멍이 숭숭 뚫렸든지.

그런데도 나는 화이트는 잘 몰라요. 
다만 저놈의 궂은 하늘 아래 비어 있는 골목길 때문에,
저놈의 오후 세시의 적막강산 때문에 그렇지.




 

공연 문화의 불모지인 변방이라 늘 여의치는 않지만 어렵게 기회가 맞아떨어지면 가족을 대동해서 더러 공연장을 간다. 하지만 인근의 소도시라 해봐야 그리 문화적으로 우수한 여건이 갖추어져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렵사리 찾아오는 공연이라야 수도권 인구들에게는 그리 눈길도 끌지 못할 그렇고 그런 공연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불모지에 살다보면 이거다 저거다 하고 입맛 가릴 처지가 아니다. 포스터 하나 붙으면 와르르 몰려가서 기갈에 물 한 방울 격으로 냄새라도 맡고 싶은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들지. 그러니 내용이 어떠니 색깔이 어떠니 그래봤자 그 뒷 궁리야 어떻든 촌구석까지 와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뭐. 그런데 그 중에서 얼굴 좀 알려지고 그 중에 입심 꽤나 있는 이들의 공연장을 가 보면 심심찮게  따라 다니는 것이 '따라 해보기'다.


-'자, 그러면 이렇게 소리 내어 보세요.'

(그게 아무나 진작에 쉽게 될 것 같았으면 당신들이 시방 그 무대에 서서 용을 쓸 일도 없었을걸?)

-'손을 이렇게 올리고, 좌우로 흔들면서, ...'

(흥이 나 봐라. 이 민족은 흥만 나면 도시락 싸다니면서 말려도 남녀 쌍쌍이 붙들고 못 말리게 흔들고 돌아간다니까. )

 

이보슈들. 
나는 당신들에게 그것들을 배우고 싶어서 그 곳에 간 것은 아니야. 나는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상에 지친 대부분의 나를 멈춰두고 당신들의 그 아름다운 소리나 몸짓을 보고 들으러 간 거야. 따라 하기도 그렇고 안하고 버티고 앉아있기도 어정쩡한 그런 난처한 꼴로 불편한 시간을 보내러 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대부분의 당신들은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대들의 재능을 펼쳐 보이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해 보세요.' '저렇게 해 보세요.' 때로는 어느 특정인을 지목해서 망신(?)을 주기도 한다. 

'거기 얼룩무늬 티셔츠 입고 안경 끼신 분 일어나 보세요.'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그런 시간이 닥치면 그저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황급히 옷차림이나 소지품 같은 것을 살펴 본다. 하는 사람은 진땀나고 보는 사람은 닭살이 돋는 그런 시간. 그걸 꼭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굳이 뭔가를 비싼 돈 내고 앉은 관객들에게 배워주고 싶다면 공연 안내 포스터에 반드시 그것을 명기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누구의 무슨 공연- (즐겁고 유익한 따라하기 시간도 있음).-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런 불평분자는 당신들의 훌륭한 공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늘 하던 대로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편안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당신들은 이런 불순한 관객의 오염 없이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마음껏 그대의 재능을 빛 낼 수 있겠지. 그렇지 않고 무슨 무슨 공연이라는 표기만 되어있다면 알차게 그것에 충실 하라는 이야기다. 물론 공연 중의 분위기에 기름을 치기 위해서 한마디씩 던지는 재치는 나쁘지 않다. 나도 그쯤의 융통성은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객석의 반응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거나 바라고 하는 행위라면 그것 역시 떫다. 열성적인 오빠부대나 팬들의 환호성은 그럴 만한 대상과 그럴만한 장소가 갖추어졌을 때 기대 해 볼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대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뜯어 고쳐져야 할 좋지 못한 습관도 아니며 좌중 앞에 나서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미덕인 것도 아니다. 나 같은 경우는 공연장에서 박수를 치는 것조차도 인색한 편이다. 그야말로 마음이 벅차올라서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예의상 몇 번 맥 빠지게 두드리고 만다.

아, 물론 모범적인 관객의 태도가 아닌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썩 신통하지 못한 내용으로, 게다가 연습부족이 여실한 내용으로 한 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이 겨워 기진맥진 때우고 있다든지, 그런 모자라는 재능을 입심에 기대어 그럴 듯 하게 포장하고 있다는 눈치가 보이기라도 한다면 이 고약한 관객의 박수는 미안하지만 단 한 번도 받지 못하고 말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의 뛰어난 쇼맨십을 발휘하고 싶거든 공연 안내에 그걸 친절히 명기 해 주면 좋겠다는 부탁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공연에 충실해 달라는 이야기고. 그래도 못내 자신의 재능을 떨쳐 보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면 박수소리가 채 멈추기 전에 펼쳐 보일 앵콜이나 한 두 개쯤을 더 준비 해 오는 것은 어떠실지.    







 

작년 삼월에 결혼 한 막내 동생 내외와 함께 아버지 산소를 다녀온 뒤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고향의 어디에선가 가족들이 모여 앉아 무엇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었는데, 나와 마주 앉은 아버지의 표정이 그렇게 편안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부자가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꿈이야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니지요. 하지만 생전에 단 한 번도 아버지와 편안한 자리를 가져보지 못했던 내게는 그 꿈이 참 낯설고 기이했습니다.


생시에서나 꿈에서나 아버지는 당신의 뜻에 어긋나기만 한 나에게 늘 적대적이었고 나 또한 내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등을 돌렸었지요. 당시에나 지금이나 내가 꾸는 꿈이 대개가 그렇기는 했지만 드물게나마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은 하나같이 몹시 불편한 꿈이어서 그런 꿈을 꾼 날이면 망쳐버린 아침 기분 때문에 비몽사몽간에 아버지에 대한 원념을 어금니에 물고 하루를 시작하고는 했습니다. 조금만 물러서서 짚어 본다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속마음을 부러 외면하고 칼날을 들이대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입던 참담한 세월이었지요.

어쨌든 꿈을 깨고 보니 참 처음으로 겪은 행복한 꿈이 내 것이 아닌 양 서먹서먹해서 잠을 깨어서도 얼른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 멍 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서슬에 아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습디다. 내 기색이 다르다 싶었는지 아내가 물었습니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그럼 이제야 아버지랑 화해를 한 거냐고 되물었습니다.


아니지요. 화해는 아니었습니다. 불화의 책임 소재는 덮어 두더라도 막무가내 일방적이고 불공정하던 아버지 때문에 입은 상처는 아직도 다 씻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날 밤의 그 꿈은 무슨 영문일까요. 꿈속에서조차 내 마음은 지극히 평안하여 잠을 깨고 나서도 그 잔잔하고 은근한 푸근함에 끌려 누운 채로 다시 눈을 감고 꿈을 되새겨 볼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혹, 늘 못마땅하고 어긋나기만 하던 큰 아들은 밀쳐놓고 늘그막에 새로 얻어 애지중지하던 작은 아들을 성가시키지 못해 만년에 조바심이시더니 이제 작은 며느리를 보아 그리도 마음이 편안하여 여태 미루던 안식을 찾으신 것일까요.

잠시 궁리 끝에,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그렇다면 막내 동생의 꿈에나 나타나실 일이지 무슨 심사로 엉뚱하게 내 꿈에 나타나서 뒤늦게 사람을 이리 흔들어 놓는 거냐, 참 별일도 다 있다. 혼자 그리 울퉁불퉁 멋대로 짐작하고 말았습니다만, 그렇다면 이승과 저승은 정말로 어딘가에 엄연하고, 원념이 있어 안식하지 못한 영혼은 늘 구천을 떠돈다는 옛 이야기들이 참말로 그런 것일까 뒤숭숭한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눈  앞에 귀신이 보인다는 말이 무슨 귀곡산장 이야기처럼 눈앞에 산발하고 소복 입은 귀신이 혀를 빼물고 오락가락한다는 말씀은 아닐 터이니 아마도 이런 현몽 비슷한 증상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환생해서 그 지긋지긋하게 불친절한 얼굴로 다시 내 집을 들어서신다면 내, 과연 그 꿈에서처럼 아무 견제나 의혹 없이 마음을 열고 맞을 수 있을까 지극히 의심스럽기는 하되, 솔직한 심정으로 그 꿈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실현되지 못할 몽중이나마 그 광경은 일생 처음 맛보는 평온함이었으니 내 똥고집 지키느라 거짓말은 못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도 주먹을 펴지 못하고 미련한 앙심으로 일관하기보담은 그래도 조금은 봐 줄만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싶어 일견 다행스럽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 며칠 지나다보니 낯설고 뒤숭숭하던 마음은 다시 그럭저럭 정돈이 되기는 했는데 가만 궁리해보니 참 걱정이 태산입니다. 과연 이승에서 보지 못하던 저승이 정말로 엄연하다면 이거, 생사를 달리했다고 음으로 양으로 소홀했거나 슬쩍 눙치고 지났던 누더기 같은 내 과거사가 언젠가는 총 천연색으로 백일하에 재생 될 모양이니 거 참, 뒷수습을 어쩌지요? 참말로 저승이 어딘가에 있어 나도 언젠가 죽어 그 곳에 간다면, 그래서 일생 마음 편히 해 드린 적 없는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로 인사를 올릴까요. 생시에 그랬듯이 왜 살아 계실 적에 그리 못하고 뒤늦게 그러시냐고 다시 원망을 늘어놓을까요. 아니면 그냥 뒷머리나 두어 번 석석 긁고 딴전이나 피우고 말까요 어쩔까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혼, 삼혼으로 복잡했던 와중에 유년기를 보냈던 나는 유난히 애정의 결손에 대해 민감했던 것 같습니다. 책 속에 잡다하게 열거 되어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사건들도 따지자면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내가 자라면서 겪었던 결핍과 상처들을 내 아이들에게까지 대물림 할 수는 없다는 외고집 같은 것도 그래서 생겨난 모양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게 강했던 때문인지 어느 부분에서는 아내와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그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도 만만찮았지요. 당시에는 한동안 나 스스로도 힘의 균형을 잡지 못해서 남모르는 속앓이를 많이 했었습니다. 반면에 그로 인해서 아버지라는 존재와 내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겪었던 갈등의 구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거니와, 조그맣고 어린 사람들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에 새삼 놀라워했고 세상의 어진 어머니들이 얼마나 힘들여 가족과 가정을 지키고 있는지를 절실하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보통의 가장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기회라면 기회였지요. 다만 세상의 아버지들이 겪는 어려움을 오히려 제대로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지 지금도 내 생각이 절름발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생 배척하고 외면했던 아버지가 뒤늦게 아주 느리게나마 내 마음 속으로 용납이 됩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죄스러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나올 무렵 책을 받아들면 제일 먼저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안 계셔서 소망을 이룰 길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는 내가 이런 모양으로 이만큼 속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내 딴에는 이만큼 힘겨웠노라고,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고, 그리 읽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설을 쇠고도 아직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에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가봐야지요. 상석 위에 책 한 권 놓고 세배 드리고 술 한 잔 올려야지요. 공연히 눈물이나 나지 않으면 좋으련마는. 




##
책이 나온 뒤에 북센이란 곳에서 책에 대한 소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썼던 글입니다.
링크가 깨져서 지울까 했는데 마침 남아있는 파일이 있어서 붙여 넣었습니다.
 










 Panis Angelicus / Frank

The choir of Paisley Abbey

사람이 성정이 여물지를 못하여서 그런지 이 나이에도 듣다보면 콧머리가 시금털털해지는 곡들은 더러 있었지만
어떻게 수습할 겨를도 없이 왈칵 쏟아져버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수년 전에 부산에 사는 동갑내기 지인에게서 얻은 복사 시디입니다. 스피커 회사에서 나눠주는 샘플러 시디라 뭐 되잖은 곡들도 이것 저것 섞여있기도 한데다가 대부분의 그런 류의 음반이 그렇다시피 이것 또한 한 두 곡을 제외하고는 음악보다는 음향효과를 극대화 한 그런 효과음악(?)들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곡의 배열도 두서가 없어 내내 이어 듣자면 몇몇 곡은 좀 짜증스럽기도 했지요.

그랬었는데...
몇 해 전 어느 날 오후에 여느때와 다름없이 별 생각없이 볼륨 열두시까지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순간, ‘저 먼 우주로부터 날아 온 아지못할 그 무엇’ 에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 찌리릿! 관통 당하여 엉거주춤 무심결에 고만 팍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 왜 눈물이 났는지는 나도 몰라요. 며느리도 모르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건지 비위가 약해 그런건지 소화불량이라 그랬는지. 뭐 어쨌거나 그 이후로도 들을때마다 그 양이 적거나 많거나간에 눈물이 납니다.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로구나, 라든지, 혼신의 힘으로... 라거나,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음악성이로구나...  뭐 이따위 각종 수식어들이 무색해지는, 그야말로 神에게 영혼을 다 바쳐 부르는 듯한 숭고한 목소리입니다.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넘어선 숭고함입니다. 神이건 누구건, 그 어떤 존재가 이 사람이 부른 이 곡을 듣는다면 그 자신도 한번 쯤은 헛기침하며 눈을 끔벅거리지 않을까 그리도 생각해봤습니다.  

아니, 뭔 촌뜨기 주제에 뭐 얼마나 보고 들어 봤답시고 따따부따 설레발이냐 삿대질 한다면 섭섭합니다만, 그래도 할 수 없지요. 나는 고만 이 여인네에게 홀딱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혹시 뭔 일 없는 편집 시디 만들 때는 거의 빼지않고 끼워넣는 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돌려댑니다. 오늘 아침에도 들었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곡을 부른 독창자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잡는 독창자를 알고싶은 마음에 인터넷을 있는대로 뒤지면서 난리 법석을 떨어봤지만 이 소프라노가 도대체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몇 살이나 먹었는지, 기혼인지 미혼인지....(대체 이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마는...) 또한, 이 소프라노가 내놓은 또 다른 음반이 있는지, 특히 이 소프라노가 부른 성가곡 음반들이 있는지, 검색 솜씨가 형편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결국 그 외의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짐작에 페이슬리라는 수도원의 성가대에 소속된 무명의 수녀가 아닐까 짐작하는 바, 이 수녀님(혹은 아줌마, 또는 아지매, 혹은 처자,)는 이 한 곡만으로 거의 천사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라고 내 혼자 멋대로 결정해버렸습니다.
어쨌든 이름도 모르는 이 소프라노는 딱 이 한 곡만으로 동아시아의 동쪽 변방에 쭈그러져 살고있는 촌뜨기의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말이야 하기 나름이지만 이만큼 넋을 놓고 들었던 음악이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추신/
또한 목소리의 음색과 성량과 음악적 감성 등등으로 미루어보아
이 여인은 절대로 도무지 도대체 못생길래야 못생길 수가 없는 것으로 확신되는 바,
혹시 그간 심경의 변화 있어 환속을 하시거나 파문을 당하는 불상사가 있다면
주저치 마시고 얼른 우리집으로 전화 하시기 바랍니다. 버선 발로 마중 나간다니까요. 그럼요...


 

우리는 오디오쟁이라는 핑계로 너무 근사한 소리만 찾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쳇 베이커의 이빨 빠진 보컬과 그의 김새는 트럼펫 소리를 듣다가 하게 된 생각입니다.

물론 음악이란 것이 온갖 예술 일반과 마찬가지로 기초란 것이 무척 중요하긴 하겠지만, 그리고 그 기초가 튼튼히 말뚝처럼 박혀 있어야만 대체로 좋은 소리가 나오게 되어있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쳇 베이커의 김새는 트럼펫 소리가 기초가 없다고는 강변하지 못할 것이 그 기초란 것이 무엇에 기준을 두느냐가 관건이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학교에서 우수한 선생님들한테 도제식으로 강 훈련을 받았다 하더라도 일껏 불어 제낀 나발이, 또는 팔뚝에 알통이 배기도록 긁어댄 비올이 가슴패기 한 구석도 달싹거리지 못할 맹물인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습니까?

태권도 팔 단짜리하고 뒷골목 쌈대장 하고 붙으면 누가 이기냐고 소싯적에 골목 어귀에서 참 숱하게 박박 우기고 옥신각신 한 것처럼, 꿩 잡는 게 매라고 무엇이 어떻게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느냐가 문제이지 실크 브라우스 입고 나비넥타이 맨 근사한 연주자들의 우아하고 고상한 연주라야만이 우리가 감동을 받는 건 아니지 않느냐,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쥐도 죽고 새도 잠든 시꺼먼 오밤중에 새끼들 다 재우고 혼자 소주 한 잔 놓고 퀭하니 풀어져서 듣는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에서 그 옛날 남강 고수부지가 흥건하도록 낭자한 나발 소리에 취해서 아 그 이뿐 채색 옷 입고 허리가 활처럼 휘고 얼굴에는 백새같이 분칠하고 쥐 잡아 먹은 듯 새빨갛게 연지 칠하고, 그래도 절대로 웃지 않던, 웃지 않아서 너무 예쁘고 너무 예뻐서 눈물나게 슬프던 계집아이가 보고 싶어서 컴컴하게 어두운 천막 안에서 그 아이 휙 휙 날아다닐 때 혹시나 다칠까 떨어질까 조마조마 박수치다가 아쉽고 애틋하고 ... 나도 그만 저 계집아이 따라서 서커스나 따라 갈까, 어리둥절 허랑한 채로 천막 나서면 원숭이 두어 마리 말뚝에 매 놓고 거기 늙수구리 사나희 두어 사람 다음 파수 손님 끌라고 울긋불긋 나이롱 채색 옷 입고 찬바람 부는 하늘로 불어제끼던 혼비백산 고만 스산한 가슴패기 발기발기 뜯어 놓던 처량한 나발소리, 쳇 베이커의 김빠진 트럼펫에서 그걸 들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예술의 기본정신일진대 그 소리 사진으로 백혀 놓을 수만 있었다면 지금 어떨까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봤던, 댐 수몰 지역으로 지정 된 학교에서 마지막 운동회. 거기서 맑은 하늘로 솟아오르던 브라스밴드 소리를 사진으로 박아놓지 못함을 한탄하던, 그럼요, 소리에도 적막한 쓸쓸함이 있고말고요!


그러게 예술이란 것이 억만금 비싼 돈 들여서야 거드럭거리며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예술이 아니지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개뿔도 없으면서 으리으리하게 차려놓은 오디오며 장비들을 보면 으라차차 엄청나고 대단 하구나 감탄은 할망정 거기서 팍 삭아빠진 나발소리나 물 빠진 듯한 낡은 소리 안나오면 그래, 오늘 비싼 물건 구경 했구나, 그거 이상 감흥이 없는 거지요. 


기왕에 쳇 베이커 이야기로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오디오란 것도 그 트럼펫 소리처럼 이게 정답이다 하고 기막히게 뽑아 주는 오디오라는 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귀마다 다르고 추억의 근저부터가 다들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값이나 브랜드가 문제가 아니라, 뭐라고 딱 집어 낼 수는 없어도 어쩐지 지한테 안 맞아서 석 달 열흘을 시난고난 바꿔대면서 패대기를 치다가 어느 날, 그때의 제 감성하고 딱 맞아 떨어지면 아이고 이게 최고다, 내가 여태 어딜 헤메고 다녔더냐, 가진 물건 다 갖다 버리고 거품 물고 온 동네 쌍 나발 불어대지만 그거 실눈 뜨고 흘겨보는 옆집 사는 김 서방은 그 사랑 몇 달 가나 두고 보자 시큰둥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기야 뭐 세상 사는 꼴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불현듯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연 가슴을 파고들어 눈물짓는데 그거 같이 들어보자고 일껏 불러 낸 친구는 이게 뭐냐 뭔 소리냐 연신 하품일 수도 있지요. 암사슴 다방에 미쓰 리가 지 눈에 콩팥이라 가슴 밤마다 쥐어뜯으며 죽고 못 살아도 만두집 왕 서방은 콧구멍만 후비고 앉았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1.
내가 아는 진수라는 후배는 낚시광입니다.
언젠가 대낚시 예찬에 장광설이 늘어진 진수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물었습니다.

'릴도 있잖아?'

그 친구의 말에 진수는 상기된 얼굴로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릴을 쓰는 사람은 어부입니다. 釣士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낚시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그 후배의 낚시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좀 듣기 거북한 비린내도 같이 맡았지요.
어부가 뭘 어쨌다고? 나는 공연히 심사가 뒤틀려서 진수에게 대패질을 했습니다.

'어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것이 있다면 어디 한 번 꺼내봐라.'

아, 당연히 그 때나 지금이나 낚시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나 또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곁눈질로라도 한 번 배워 볼까 싶은 생각이 없지 않은 매력있는 취미 생활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사돈의 팔 촌에 처삼촌까지 뒤져봐도 우리 집안이야 맨 산골 촌놈, 눈귀를 씻고 살펴 봐도 어부라고는 없으니 공연히 어부를 두둔한답시고 무단히 팔 걷고 나서서 구정물 뒤집어 쓸 일은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랑하는 후배 녀석이 낚시에 대한 지나친 애정을 핑계삼아서 그것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을 은근히 조롱하고 비하하는 꼬라지가 뵈기 싫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2.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흔히 예술가를 비하하여 부를 때 , 혹은 그대들 스스로 자조하여 칭할 때, '내가 장사꾼이냐?' 하고 비틀어 튕깁니다.
언뜻 보면 그럴듯한 비유처럼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이거 아주 웃기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장사꾼이 아닌 줄 알았냐는 겁니다.
나는 진정한 예술가는 진정한 장사꾼과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다르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술인들은 우리에게 단순히 지갑을 여는 것 만으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중개 해 주는 또 다른 상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논바닥에 발 한 번 담그지 않고도 동네 마트에만 가면 깨끗하게 도정 된 쌀을 사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고 아름다운 모습 아닌가요?

물론 저자에 보자하면 간혹 소비자에게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하는 간뗑이가 부은 장사꾼도 없지는 않지만 그건 아시다시피 곧 망하기를 작정했거나, 아니라면 안면으로 먹고 사는 동네 골목 수퍼나 독과점을 무기삼아 턱주가리로 장사 해 먹는 불한당일 뿐입니다. 이런 저런 까닭으로해서 나는 이 말을 조자룡이 헌 칼 꺼내드끼 써 먹습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더 거룩하고 숭고한 게 어디 있어?'

대낮에 예술적으로 한 잔 꺾고 길바닥에 어질러진 채로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업신 여기거나 뭇 사람들의 이목이 못내 그리워 조금이라도 남달라보이기 위해서 갖은 애를 써야만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일에 미친듯이 매달려 있자면 저절로 남 달라 보이기도 하고 그 모습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이지 남 달라 보이기 위해서 미친듯이 노력하는 모습은 글쎄올시다...
어쨌든 그런 안쓰러운 모습은 순전히 그대들의 개성이고 자유지만, 여기저기서 줏어 모은 유치한 행위 따위나 일삼으며 예술가연하는 그대들. 지 잘난 맛으로 사는 거야 무방하지만 사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실 좀 거시기 하거든요. 꼭 기본 실력은 개차반이면서 오로지 특이함이나 기괴함으로 어필 해보려는 싸구려 상품들을 보는 느낌과 어쩐지 비슷합니다.
단지 품질이 떨어진다는 단순한 사실 이외에도 택도 아닌 것으로 어필하려고 뼁기칠 해 놓은 듯한 불쾌감까지 유발하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생각이 진지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야바위는 못팔아먹지요?
아, 당연히 여기서 싸구려라는 것은 가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껍질만의 이미지로 한 몫 잡으려는 그 의도의 얄팍함에 대한 것이지.

3.
아니 아니, 낫살이나 지긋이 먹어서 희끗한 머리 빵떡모자로 삐딱하게 눌러 쓰고 빨뿌리 담배 뻑뻑 빠는 할배 할매들이야 뭐 어때요. 얼마든지 애교로 봐 줄 용의가 있고 말고지요. 그거야 최백호 말 마따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변두리 낭만을 위한 애절한 탱고 일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그건 쉬염이 발등을 덮고 팔다리가 후들거릴 때 쯤 해서야 '그럴 수도 있을 일'입니다. 북망산이 코 앞인 다 늙은 낭만객이 민폐 끼쳐봤자 얼마나 가겠냐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여기저기서 줏어 모은 기행이나 흉내내면서 술주정도 예술, 민폐도 예술, 시건방도 예술, 찍자도 예술, 행패도 예술, 하다 못해 아랫도리 함부로 내돌리는 것도 예술적이라며 숫캐 암캐같이 아무데서나 발정 난 청춘을 변호하느라 기염을 토하는 자칭 타칭 예술가들. 나는 그런 십원짜리들은 예술가로 인정 못합니다. 그 옛날, 으랏차차 차력 보여주고 만병통치 약 팔던 약장사들은 그래도 관중들에게 겸손하기라도 했지. 하다 못해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었잖아요?

기행이란 것은 말이 좋아 기행이지 사실은 별꼴이나 다름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별꼴은 운 나쁘게 진짜배기와 맞딱뜨렸을 때 인격이나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떨이로 두 손 털고 오링 되는 패지요. 그 싸구려 예술이나 사이비 인격이 통하는 부류라는 것도 어차피 그대들과 비슷하거나 달라봤자 겉모습만 조금 바꾼 마이너체인지 시리즈일뿐이니, 이거나 저거나 쉽게 말해서 주로 예술을 보따리에 싸 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분이나 뭔가 색달라 보이는 별난 짓을 통해 예술적 악취를 풍기고 다니는 분들을 말합니다. 나는 둘 다 예술적 양아치로 생각합니다.

하긴 별꼴이건 기행이건 사실 뭐, 별 개차반같은 날궂이도 오다가다 언뜻 보면 한 번쯤은 구경해 볼 만도 합니다. 하지만 예술이 무슨 면죄부도 아니고 면허증도 아닌 다음에야 그런 날궂이는 젊을 때 한 두번, 어쩌다 생각 난듯이 한 번쯤 해야 맛이지 그거 뭔 듣기 좋은 꽃노래라고 밤낮으로 불어대면 그 날로 반상회 소집하고 덕석말이 들어갑니다. 동네 사람들이라고 너나 없이 다 순덕이는 아니거든.

그러니 끝까지 고상하게 버텨봤자 장사꾼이 소비자로 인하여 밥을 벌어먹는 것 처럼 예술가 역시도 밥은 먹어야 살고, 결국은 그 놈의 예술이란 것도 역시, 그 짓 아니면 밥 빌어먹고 살 길이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남 보기 좋게 포장해 놓은 하나의 상품이며, 그러나 마나 제아무리 시대를 앞서는 뛰어난 예술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 대상은 '사람에게로'지요. 세상에 개나 원숭이를 위해서 우울하게 고뇌하는 예술가는 없을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것을 구매하는 대중이나 그 대중이 세상 먼지 뒤집어쓰면서 시난고난 살아가는 이 먼지투성이 세상이 아니라면 그 놈의 거룩한 예술도 존재 이유가 없는 거 맞지요? 그 수준 낮은 대중이 사실은 다 너그들의 거룩한 예술의 존재 이유에 들어간다는 거 정말 모르겠어요? 송곳 구멍이나 들여다보면서 건방지게 턱주가리나 내 밀줄 알았지 도무지 겸손할 줄 모르는 호마이카 예술가 여러분.
내가 아는 어떤 화상이 그럽디다. 교만은 가장 부서지기 쉬운 값싼 유리그릇이라고. 교만한 인간보다 손쉬운 상대는 없다고. 그거 천만번 옳은 이야기니 귓구멍에 잘 새겨 들어둬요. 
4.
한 가지 더.
그대들이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고 해서 갑남을녀 보통 사람들이 대체로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대들과 같은 별난 재주는 정신적인 결손으로 비롯된 보상 작용의 과부하일 확률이 팔 할이 넘어요. 다친 상처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을 때 아물면서 부풀어 오른 보기 흉한 떡살같은 거 말입니다. 또한 그대들은 그대들 스스로 치열한 싸움 끝에 보통 사람과 같은 평범한 삶을 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보통 사람의 삶과 같은 평범한 삶을 누릴 능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평범하게 사는 거, 그거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땡볕에 어린 놈들 업고 걸리고 양 손에 시장 보따리 들고 콧등에 송글송글 땀방울 달고 골목길 들어서는 동네 아지매로 사는 것, 저녁이면 한 잔 걸치고 콧노래 부르면서 과자 봉다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옆집 아저씨로 사는 것, 그거 사실은 사람 사는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능력이란 말이지요. 세상의 피와 살과 뼈가 되어 주는. 그런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없는 세상, 즉, 온 세상 사람들이 당신들 같은 '자칭 예술가'로 가득 차 있다는 상상을 해 보면 대번에 짐작이 되지요?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 될지.  

예술이랍시고 남다른 뭐 있는듯이 포장해놔봤자 책만 보면 베고 자는 장돌뱅이라도 시장 바닥 돌아가는 데는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훤하며 공부는 젬병이라도 시멘트 바르는 데는 도가 튼 그런 사람들이나 매한가지라는 겁니다. 혹시나 그대들이 세상을 위해 기여한다는 것이 그들의 능력에 비해 뭐가 얼마나 나은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아, 그대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대중보다 최소한 한 세대를 앞서 가는 대 예술가라 자부 한다고요?  그렇다면 참 잘 된 일이군요. 그 참에 밥그릇에는 신경 끊고 예술에만 전념 하시든지. 한 세대 지나고 나면 값 엄청 올라 갈테니 염려 붙들어매시고. 시대를 앞선 대 예술가 체면에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니가 나를 모르느냐 세상이 나를 버리는구나 배고픈 강아지처럼 짖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알아듣도록 줄줄이 풀어서 이야길 해 줘도, 웃기네, 소용 없다, 밥내 나는 대중 따위와 관계없이 당신 혼자 고고히 존재 해야겠다면 남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혼자 골방에서 다 해 먹든지 말입니다.
그대에게 관심 없어 무심히 지나가는 한 세대 뒤쳐진 무식한 삼돌이 삼순이 여러분들 붙들고 니가 내를 아나 모르나 자다 깨서 봉창 두드리듯 울부짖지 말라는 겁니다.

5.
마지막으로 한 가지.
보통 사람이 봐서는 도대체 재미도 없고 돈도 안되는 어려운 예술이 반드시 존재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뭐 어쨌든, 난해한 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재능입니다. 당신이 다행히도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면 참 좋은 일입니다. 진심으로 축하를 드려야겠지요. 하지만 뭔 존재 가치고 나발이고를 다 떠나서 그 난해하다는 것은 결국 전달하는 방법일 뿐이란 건 알고 있지요? 난해한 예술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예술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난해한 것이라는 거. 또한 그런 방법을 구사하는 여러분들 역시도 난해하건 불가해하거나 간에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류가 결국 몇 안된다는 것은 역시 잘 알고 시작했을 것이고.

그러니 사람이 밥을 먹었으면 밥값을 해야하듯이 낫살이나 먹었으면 나이 값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싹수 없고 경박하기로 소문난 요즘 아이들도 사춘기만 지나면 내 코드에 안맞다고 징징거리고 보채지는 안해요. 잘난 척을 하고 싶다면 어떤 게 남사스런 일인지도 알아야지. 내가 내 인생을 사랑하고 예술을 즐기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고 그것이 잘 팔리기까지 한다면 더 좋은 일이지만 그거 빌미로 그 놈의 예술적인 그대의 인생까지 팔아 먹거나 행세 해 먹을 생각은 하지 말자는 겁니다. 

6.
마지막으로 요약해 봅시다.
첫째. 
끝끝내 우중충하게 예술적으로 우울해지고 싶다면 돈벌이에 신경을 끊어라.
둘째.
돈벌이가 목적이라면
그 같잖은 예술가 시늉은 집어치우고 싸구려 장사꾼임을 곱다시 인정하고 제대로 장사를 시작해라.
셋째.
그대가 진짜 훌륭한 예술가라서 둘 다 가져야겠다면
질도 좋고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들어서 어디 뭔가를 한 번 본때있게 보여주시라.
넷째.
부디 여기저기 줏어 모은 기행 따위들 흉내 내지말고 예술 팔아서 술주정 하지말고, 민폐 끼치지 말고, 시건방 떨지 말고, 항상 소비자에게 겸손할 것이며, 특히 그 놈의 예술적으로 발정 난 아랫도리 함부로 내돌리는 짓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이 좋아 예술이지, 사랑한다, 미안하다, 죽여라, 못 산다, 울부짖으며 어질러 놓고는 뒷 수습이 안되니 나중에는 사랑했노라 행복했노라 고뇌에 찬 분홍색 꽃 편지지 같은 소리나 하고 뒤로 나자빠질 것이 십중 팔구지요?
별별 사람이 별별 고상하고 거룩한 소리 해싸도 솔직히 들여다 보면 인생 잡사 대부분이 목구멍이나 아랫도리 감당 못해서 시작한 일인 거잖습니까.
세상을 지탱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대들처럼 고상하게 쉬어 꼬부라진 예술가들이 아니라 새끼들 아파서 밤새 뜬 눈으로 동동거리는 순옥이 어마이, 내 식구 어느 놈이 건드렸냐 앞뒤 없이 괭이 자루 들고 나서는 맹구 아바이, 보리쌀 한 자루 때문에 지게 작대기로 공매를 맞고도 내 새끼 기 죽을라 터진 대가리 싸매고 포커 페이스로 버티는 삼식이 아부지들이에요. 그러니 따신 밥 먹고 식어 빠진 예술같은 소리 해쌓지 말고 일찌감치 정신들 차리기를 바랄 뿐이지요. 


2006 년 8 월경.  




 

 겨울이다.
낯 선 도시다.
차고 매운 소주 몇 잔으로,
그 잔 속에 말아 마셔버린 단념과 낙심으로,
간절한 정욕으로 함께 부대끼던 어두운 골목길이다.   


오래 전 내 속에 죽어 수십번 썩어 문드러지고, 육탈하고,

또 썩고, 또 다시 썩어 문드러지던,

그래도 뼈를 남겨 늙은 나를 지탱하는 지독한 연인아

지금 듣고 있는가. 이 흔해 빠진 추억을.

그 지긋지긋한 통속함에 오늘은 내 그대에게 한 잔 따르지. 깊고 큰 잔으로.


그리하여 잔 들어 그 날을 기념하자. 그리고 오늘 밤은 같이 죽자.

내일 아침,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리는 숙취와 상실감으로 잠시 그대를 잊더라도
오늘 밤은 비로소 같이 죽자.

아무 딴 생각 없이 그냥 칵 죽어버리자니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