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둑한 골방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출세와는 거리가 좀 먼 책들을.

남보다 재빠른 감각으로 남보다 앞서기 위한 책들을 열병이라도 앓듯이 읽어야 하는데.

책을 백 권쯤 가려내서 커다란 상 위에 쌓아놓고

제대하는 8월 말까지 다 읽어 치우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
연희와 만나면 형에 관한 이야기는 삼갑니다.

그 여자가 순수하게 사랑한 처음이자 마지막일 사람이 형이니까.

그 여자도 자기 양심을 부끄러워합니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형의 건투를 빌며 넋두리 접습니다. 낙원 드림.


♣♣♣♣♣
Dear 여윈 선배님.

방학동안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sons & lovers 를 읽었습니다.

(큰일 했다 큰 일 했어.)

puppet man 인 우리 선배님 따분하시죠.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지도록 기도 할까요.

(중략------)

........

여위고 빼빼하고 불쌍하고 고독하시고 심심하신 선배님 안녕히 계세요.


--커다란 후배 선정.


♣♣♣♣♣

낯 설은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삽니다.

잘 지내시지요?

오랜만에 소식 접하여 마냥 기쁜 맘에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어보아도

모든 글자들이 가물거리기만 합니다.

이게 테크닉의 문제인지 스타일의 문제인지 아니면 거리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신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습니다.
(중략-----)

....

직관도 무지에서 오지는 않을 듯 합니다.

많은 경험을, 거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

감정들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 시켜 가십시오. 소극적인 것은 껍데기뿐일지도 모르지요.


--연희


♣♣♣♣♣

찌는 게 아니라 아주 튀기는 날씨다. 점심 반찬으로 튀김이 나온다면 우스울 것 같다.

안 간다 안 간다 하면서도 세월은 어영부영 가나보다.

코는 시월에 수술하기로 했다. 가슴은 이상 없더라.

나는 왜 이렇게 못나서 너처럼의 갈등과 희열을 맛 볼 수 없는지 생각할수록 병신스러울 뿐이다.

너 같은 놈 때매 나 같은 비극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잊지 마라.

(중략------)
..........

날이 더우니 모일 때마다 개 이야기뿐이다.

나도 소주 한 병 쯤을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이마에 정맥이 선 네 얼굴 보고 싶다.

뜨겁게 살아라. 너도 나도.


--근호


♣♣♣♣♣

부패와 썩은 몰골들이

항시 주변을 메우고 있고

탁한 놈은 팽팽한 오물 주머니를 차고

옆에 서서 터뜨릴 기세고.

(중략------)

.........

많은 시간, 많은 이야기들 진심으로 고마웠고

진주에서의 하루는 기억하겠소.

모쪼록

건강 속에 만나서 과격한 느낌으로 태웠으면

쓴 술 한 잔은 달지 않겠소.


-중수


♣♣♣♣♣
(전략-------)

시외전화라도 한 통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생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생활은 어떠십니까.

안경에 더벅머리 형의 얼굴이 선합니다.

짬나는 대로 찾아 뵐 테니 남강 변에서 개다리소반 마주 할 준비나 하십시오.

얄팍한 호주머니 그거나마 다 축내고 올 작정이니

마음 굳게 먹고 그 날은 지리산 가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시월 팔일 휴가 출발합니다.

-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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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를 정리하다 마구잡이로 쌓아 둔 종이 뭉치에서 나온 오래 된 편지들.

누렇게 바래고 삭아 만지면 귀퉁이가 부서진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낡고 지친 편지 몇 장을 뒤적이다가 오래 지난 상념으로 조금씩 앓는다


편지는 식은 아궁이처럼 쓸쓸할 뿐인데

오히려 일없는 가슴만 비시시 일어나 이내 조금씩 기척을 하고

오래 오래 지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누렇게 묵은 책꽂이에 잊은 듯 남겨두었다가

공연히 아팠다 웃었다 하는 것도 홀로 썩 민망한 일이지만

그래도 참 그때가 조용히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만큼은 낡았나보다.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


낙원/

나이는 나와 동갑이면서 학번이 하나 늦어 나더러 꼬박꼬박 형으로 부르던 후배.

이 친구가 가사를 짓고 내가 곡을 붙인 노래가 모모대학 방송국 공식 방송국가로 남아 있다.

자랑이다. ㅎㅎㅎ.. 


선정/

그 해에 내가 대장 노릇하던 음악 써클의 여자 후배.

몸집이 커다랗지만 썩 고운 얼굴과 활달한 성격으로 재미있었던 친구.

지방대학에서 꽤나 세련된 도회적인 이미지로 눈길 꽤나 끌었던 친구.


연희/

그냥 어떤 여자.

의사한테 시집가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여자.


근호/

지독하게 가난했던 집구석이 이가 갈려서 무슨 수를 쓰던지 돈을 벌어야 한다던 고등학교 동창생.

비슷한 시기에 같은 병을 같이 앓기도 해서 잘 어울렸던 친구.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는 걸려 오는데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세세한 소식은 잘 모른다.

배고팠던 시절 이 친구와 둘이서 라면 다섯 개와 찬 밥 한 밥통(약 5인분?)을 한 끼에 해치운 추억이 있다.


중수/

군 복무 중, 국군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만났던 해군 친구.

미술 전공에 꽤나 독특한 감각을 가진 친구였는데 결혼식 때 못 가본 탓으로 서로 엇갈려 소식이 끊겨 버렸다.


호경/

군대 쫄병.

시커먼 안경을 쓰고 삐딱이 기질이 농후하던 졸병.

군대가 아니라면 어떻게 각별히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를 기질이었는데 편지의 내용대로 뻥구라만 쳐놓고 결국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소식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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