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리 샤콘느]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



언젠가 비탈리의 샤콘느 음반 표지에다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놓은 걸 보고는 혼자 픽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비탈리의 샤콘느를 듣다보면 그 비장한 멜로디의 흐름이 사뭇 처절한 바가 없지는 않으나,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지극한 슬픔이라는 것이 그렇게 시종일관 드라마틱 하거나 비장한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온 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 나가고 나 이외의 모든 세상과 단절 된 느낌으로 한 없이 잦아들어 그만 아득하게 맥을 놓아버릴 그런 것이 슬픔이 아닐까 싶은데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밖으로 슬픔을 내지르는 곡은 사실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진짜 슬픔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지요. 불각시에 옆구리를 찔린 듯이, 길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일시에 가슴이 무너져 내려서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슬픔이나 감동은 그렇게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탈리의 샤콘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나 슬퍼 죽겠으니 제발 나를 봐다오’ 하고 광고를 하는 듯 한, 지나치게 감성적인 멜로디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가슴이 무너지도록 슬프다면 그 슬픔을 포장하거나 가공해서 드러낼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뭐야, 창문 활짝 열어놓고 나 슬퍼 다 죽어간다아! 하고 동네방네 나발 부는 주제에,’

뭐 그런 비슷한 생각이지요. 개인적으로 그리 생각했다는 뜻이니 이 곡을 사랑하는 분들께서도 그리 고깝게 여기실 것 까지는 없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음악 중 턱없이 억장이 무너졌던 곡은 니콜라에바의 내가 사랑하는 바하 1집에 실려있는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 입니다. 
이 곡을 듣다보면 말할 듯 말할 듯 하다가 차마 다 말하지 못하고 결국 맥없이 주저앉아 눈물 삼키는 듯한 마지막 마디 때문에 정말 억장이 무너져 내리지요.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가 인간이 내면적으로 겪어 내야 할 슬픔이라면 비탈리의 샤콘느는 조금은 드라마틱하고 또 어느 한편으로는 조금은 자신의 감정을 바깥으로 치장한 느낌이 없지 않은, 그런 슬픔이란 느낌입니다.
하기야 사람마다 귀가 다르고 가슴이 다른데 누가 슬픔이나 절망을 일렬로 줄 서라 저울로 달아 값을 매기겠습니까만. 말하자면 내 개인적인 느낌이 그렇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으로, 그보다 더한 슬픔을 말하자면 나는 모든 소리를 잠그고 눈도 감아 버려야 한다는 쪽입니다.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지는데 사람의 소리로 그것을 포장하겠다는 시도부터가 불순하다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더러 미디어에서 보고 듣는 비극적인 현장 상황에다가 음악을 더빙해서 그럴싸하게 드라마화 시키는 짓을 극도로 혐오하는 편입니다. 도대체 타인의 절망이나 슬픔을 재료로 삼아서 팔아먹을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그런 생각이지요.





[註/ 비니루: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CD에 빗대서 LP를 말할 때 오디오쟁이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속어입니다.]


인터넷 장터에서 중앙일보사에서 찍어 낸 음악의 유산을 노 오픈으로 한 질 구했습니다.
한 장 빠진 한 질을 갖고 있었는데 한 이십년 넘게 듣다보니 고물딱지가 다 돼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또 구했습니다.
원래는 한 장에 육칠천 원 꼴로 팔리던 비싼 음반이었습니다. 라이센스 한 장에 사천 원 남짓 하던 시절이니 꽤 비싼 판때기였지요. 뭐 갖고 있던 것도 제 값 주고 샀던 건 아니고


팔십년대 중반 어느 쯤에 내가 작은 찻집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진주시내 일대를 주름잡고 다니던 찐드기 세일즈맨한테 반 쯤 꼬여서 거의 지갑을 열 뻔 했었는데 뭐 얄팍한 지갑때매 벌벌 떨다가 그만 다시 접었지요. (어슴하나마 기억에 한 질에 사오십 만원이었으니 80년대 중반에 사오십만원이면 만만한 액수가 아니지요?) 
그런데 그 즈음의 어느 날 밤 내 찻집으로 웬 외팔이 사나이가 하나 들어섭디다.
진짜 외팔이는 아니고 한 팔에 깁스를 한 사내였는데 이 친구가 들고 들어 온 게 음악의 유산 전집이었습니다.


LP 60장에 그 무게만큼 무거운 책 열한 권까지 한 팔로 낑낑 이고지고 올라와서는 한다는 말씀이

자기는 저기 어디쯤에서 다방 하던 사람인데 예의 그 찐드기 세일즈맨한테 녹아 떨어져서 사기는 샀지만
도대체 재미가 없어 못 듣겠으니 제발 이것 좀 헐값으로 사라고 그러데요.
소문에 듣자하니 내 찻집에는 이런 재미없는 음반들을 얼씨고 좋다 밤이고 낮이고 돌려대고 있다더라 그러면서.


아이고 나는 그거 살 돈도 없고

 1권 빼고는 거진 내가 가진 음반들이랑 중복되는 곡들이라 살 마음 없다 그랬더니
그 친구 잠시 난감해 하다가 그럼 1권만이라도 사 달라 그럽디다.
그 때 돈으로 판 여섯 장에 2만원 줬나 그랬을걸요.
아 그래서 그 전집 중에 늘 탐나던 1권 '서양음악의 탄생' 편을 얼결에 헐값으로 손에 넣었지요.


그런데 이 친구 또 부탁이 있다는데 그래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보자 하니

지가 시방 외팔이가 되어서 이 무거운 물건을 이고지고 못 댕기겠으니 내 찻집에 보관을 좀 했으면 한다고요. 그럼 보관 하면서 좀 꺼내 들어봐도 무관 하겠냐 슬쩍 찔러봤더니 아 얼마든지 많이 들으라네요.
그래서 사나흘 후에 다시 찾으러 오겠노라고 그러면서 그 사나이는 커피 한 잔 마시고 나갔는데
그 길로 그 친구 이십년이 넘어 삼십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전화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고
고만 종무소식이라는 이야깁니다.


결국은 60장에서 1장 빠진 59장을 2만원에 산 셈이 되고야 말았는데

수년간 이 판때기를 쉬엄쉬엄 돌려보니
그 때 그 세일즈맨이 입에 거품을 물던 말들이 모조리 꽝은 아니었던 것이,
평소에 탐 내던 1권 서양음악의 탄생 편은 말할 것도 없이
편집이나 녹음이나 순전히 구색 일색이던 흔해빠진 전집류는 아니더라는 겁니다. 


하여간 요즘 장터에 보니 이 음반이 더러 돌아 댕기는데 거의 한 장에 천원 꼴로 돌아 댕기데요.

이거 이만큼 천덕꾸러기 취급받을 판은 아니다 싶은 마음에 조금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그 덕에 싼 값으로 구했으니 그도 참 사람 팔자처럼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내사 뭐 한 삼십년 넘게 갖고 있는 소스의 주종이 비닐 판때기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만
요즘 인터넷 장터에 오백 원 천 원 싸구려 돗대기로 돌아 댕기는 라이센스 비닐 판때기들,
그거 그리 천대받을 물건들 아니라는 거지요.


지그럭 툭탁 잡음 투성이 비니루가 무신 음반 축에나 드냐!

웃기네! 늬들이 비니루 맛을 알아?


뭐 이런 식으로 멱살잡이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니깐 시비 걸지는 마시고.
시디가 좋으냐 엘피가 좋으냐 귀한 밥 먹고 일없이 싸울 일이 아니잖아요?

제 좋은 거 지 알아서 듣도록 그냥 내비 두면 되는 거지요.
상대 당에 대한 가열 찬 비난은 같은 편끼리 모였을 때 술안주 삼아 씹으면 되니깐 그걸로 만족들 하시고.
흑돼지 집에 돼지갈비 맛이 정말 죽이더라, 그러는 사람한테
그거 엉터리다 멱살 잡고 끌어 올려서는 성분 분석 표 쪼가리 들이대면서
길 건너 똥돼지 집 삼겹살이 제대로 된 돼지 맛이라고 핏대 세우고 박박 우기면 대체 그거 뭔일이래요?


아, 하여간에 요즘 라이센스 판때기들이 하도 고물 취급을 받다보니

그거 나중에는 아예 저울에 달아서 근으로 팔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해 보지만,
뭐 오리지날 원판이라고 별로 신통치 않은 연주들이 걸핏하면 장당 만원 이 만원 우습게 홋가하는 걸 보면
머잖아 라이센스도 값 뛸 날이 오지 않을까 난망한 기대도 한 번 품어 봅니다.


어쨌든 어제 그놈의 사연 어린 음악의 유산 판때기를

비닐도 뜯지 않은 새 걸로 받아 들고 턴테이블에 얹고 보니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소리에
격세지감이라든지 상전벽해, 뭐 이런 생각들도 나고 해서 애매한 시간 주절주절 한 번 때워 봅니다.
어찌 됐든 가격대비로 갑자을축 따져보면 꽤 괜찮은 음반이라는 이야기지요.



아하, 혹시라도 그 때 그 사나이가 이 글을 보신다면 얼른 만나서 일단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고 난 뒤에

반품을 하든지 정산을 하든지 해야겠지요. 한 이삼십년 묵은 대여료를 내야 할 지 보관료를 받아야 할 지는 둘이서 가위바위보로 결판을 내야 할까요.
아니, 물론 막걸리 값이야 얼마든지 내가 내고말고지요. 동동주에 파전이라도 좋고. 그럼요.



CD. 1
01. 시인의 마을
02. 회상
03. 떠나가는 배
04. 윙 윙 윙
05. 촛불
06. 사망부가
07. 서울의 달
08. 애고, 도솔천아
09. 봉숭아
10. 북한강에서
11. 바람
12. 탁발승의 새벽 노래
13. 우리는
14. 장서방네 노을
15. 하늘 위에 눈으로
16. 들 가운데서
17. 서해에서
18. 사랑하는 이에게 3

CD. 2
01. 실향가
02. 양단 몇 마름
03. 고향집 가세
04. 사랑하는 이에게 2
05. 인사동
06. 한 여름 밤
07. 나 살던 고향
08. 저 들에 불을 놓아
09. L.A. 스케치
10.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11. 92년 장마, 종로에서
12. 정동진 1
13. 건너간다
14. 5.18
15. 수진리의 강

//
정태춘은 이 음반의 1집에 실린 노래들을 사춘기적 값싼 감상의 소산이라 했다 한다.
"우리의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멀리서 보이는 불빛처럼 따스함을 전해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없죠. 그런데 정태춘은 달라요. 위로는 무슨 위로냐, 뭔가를 바꿔야한다는 거죠"
이 음반에 담긴 그의 아내 박은옥의 말이란다.
//

....
당신 말마따나 사춘기 적 유치한 감상에 젖어보지 않은 사람이 나이를 먹어 성숙한들
어찌 속 깊은 아픔을 품어 간직할 줄을 알겠으며
당신의 지난날 그 '값싼 사춘기적 감상'의 물을 정말 눈물 나게 감사하며 마셨고
지금도 즐겨 마시고자 하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렇다면 당신의 잣대로는 갖다 내 버려야 마땅할 값싸고 유치한 감성의 소유자일 뿐인가. 

나도 당신의 노래를 아직 누구의 노래보다도 더 좋아하고 즐겨 부르지만
언젠가 제 스스로 자신의 옛 노래들을 값싼 감상이라 폄하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나 또한 그 때 부터 그대를 처음보다는 값을 덜 치기로 작심했었다.

나도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으며, 목청껏 따라 불러 보며, 시큰해지는 콧날을 비비기도 했지만
그 캄캄하던 칠십 년대 후반 포장마차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아름다운 시인의 마을을 처음 들으면서 받은 충격에 어찌 비할 것이며
思亡父歌가 내게 집어 던진 만장 쪼가리에 묻은 나와 내 아버지의 남루한 삶의 질곡에 비하겠는가.

그런가? 날더러 개인주의자라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모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아니라면 그대는 가슴팍이 텅 빈 허깨비의 군상들이 부르짖는 정치적 사회적 혁명과 자유만 소중한 사람이든지.

나 또한 그 아름다운 시인의 마을이 가위질을 당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뚝 솟은 깃발’이 ‘푸른 하늘 구름’으로 바뀌었었다는 것을 뒷날에서야 알았고
그 깃발을 되찾기 위해 그대가 힘들게 싸워 온 이야기를 보고 들어서 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가치 있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뚝 솟은 깃발이 오르기 전에 먼저 알고 즐겨 불렀던  푸른 하늘의 구름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고 또 우뚝 솟은 깃발이 펄럭일 푸른 하늘 또한 반드시 필요한 배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주인은 당신이지만
그 노래를 듣고 사랑할 자유는 우리들에게 남겨 놓았어야 했다는 이야기지.

굳센 팔다리의 투사들도 때로는 뜨거운 가슴을 쥐어뜯으며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살아 온 세월이 겨워 서산에 지는 노을을 아파할 줄도 알았어야 했거든.
그렇지 못했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그 투사들은 살 냄새에 땀 냄새며 입 냄새 고약한 지치고 가여운 이웃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정치 사회적 구도의 완성만을 위해 달리는 정치적 도구들일 뿐이라는 말이 되겠지.

세상은 투사들로만 채워질 수는 없다. 그리 되어서도 안 되고.
때로는 힘차게 달리는 다리도 있고 부르쥐는 주먹도 있어야 하지만
그 시각에도 심장은 쉴 새 없이 뛰어야 하고
뱃속에는 냄새나는 음식물 찌꺼기도 더러더러 채워 놓아야 힘이 생기는 법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그대가 사춘기적 값싼 감상이라고 내 던진 그 노래로 젊은 날을 적잖이 적셔 온 그런 사람들이라야 만이
그대가 지향해 마지않는 멋진 투사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지.
또,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과 이웃과 세상은
그것을 가슴이 터져라 품어 본 사람만이 그것을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될 듯한데
그 또한 그대의 생각은 어떤지.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던져 놓았으면 그것으로 그대의 소임은 끝이다.
그 뒤의 그대의 행보가 투사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그것은 그대의 판단이지만
그대가 이미 세상 사람들의 손에 던져 준 그것들을 차갑게 부정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보듬어 마지않는 많은 이들의 작은 가슴을 보듬어 품을 아량이라고는 없이
그렇듯 값없이 걷어 차버린다면 그대가 진정 바꾸고자 하는 세상의 의미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대의 지난날을 부정하고 폄하한다고 해서 그대의 앞날이 더욱 공고해지는 것은 아니다.
꼭 자신의 과거를 못내 잘라 내 버리고 싶다면 그대는 앞만 보고 그대의 갈 길을 가라.
그러나 지난날의 정태춘은 우리에게 남겨 두고 가라.
지난날의 그대에게 보냈던 우리들의 사랑을 그런 야멸차고 싸가지 없는 말로 배신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불가피한 전쟁은 있을지 몰라도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이 어떠한 전쟁이건
피아가 모두 젊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승리라는 환상을 목표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에서의 모든 전리품은 정치가와 장교들의 몫이며
그리고 전쟁의 모든 부담은 가난한 자들과 젊은 병사들에게 지워진다.
 

전쟁의 모든 손익 계산이 끝난 후에 남은 값 없는 영광은 죽은 자에게 주어지고
그것은 얼핏 보기에 거룩한 색깔로 채색 된 채 주어지며 사람들은 그것을 훈장이라고 말한다.





/
고요한 돈강
원작: 미하일 숄로호프
감독: 세르게이 게라시모프 




독감에 걸려서 음악을 들어보자.
이 때, 홍콩 A형이니 북경 B형이니 하는,
비교적 회복이 더디고 후유증이 심한 독감으로 골라잡으면 더 좋다.
사나흘 제대로 앓아보면 온몸의 진기는 다 빠져나가고 뱀 허물 같은 껍데기만 남는다.
물론 눈치 채셨겠지만 다이어트에도 썩 유효하다.
할 수만 있다면 쓸데없는 생각들로 밤잠을 설친다든지 끼니를 걸러서.
몸을 일시적으로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힘에 부치는 무리한 육체노동을 씩씩하게 감행한 후에
난닝구만 입고 찬바람에 땀을 말리는 일도 썩 좋은 효과가 있다.
그리하여 뜬금없이 으실으실 추워지거나 까닭 없이 머리가 띵~ 해지면
일단 몸살감기의 초급 과정으로 진입했다는 신호이니 기뻐해도 된다.

증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두통과 조갈과 현기증,
거기에 고열까지 일습으로 갖추게 되어 일만 가지 인생이 다 귀찮아 질 때쯤 되면
열을 내린답시는 미명하에 냉방이 아주 잘 된 골방에 격리 되어 이불감고 누워서
음악만 냅다 들어보자.


고열에 들떴을 때 들리는 음악은 좀 다르다.
유념해야 할 것은, 평소에 자주 듣던 바로크 음악들,
그 중에서도 단선율이 고만고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음악들은
정신을 더욱 몽롱하게 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기타(guitar) 곡들도 마찬가지다.
고저 기복이 크고 음량의 기복도 큰 관현악곡들이 그래도 다소 정신을 쇄락하게 해 주지만
땡중 이 앓는 소리 같은 오르간 독주곡이라든지
고전 낭만 시대의 실내악들을 듣자하면
때로 증세가 악화되어 혼수상태를 방불케 하는 경우도 있다.

책이나 여타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 혹은 제 3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 등을 백안시 하며 

그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며 의심귀 들린,
가급적 본인의 직접 체험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진지한 분들은
반드시 경험해 보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슈타커의 무반주 첼로.
.............
열이 내리면 다시 들어야지.
내가 아무리 이 곡을 사랑해 마지않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40도에 육박하는 체열에서는 거의 몽환이다.


내친김에 대포 소리도 한 번 들어보자. 1812.
뻥! 뻥! 역시 뻥이 좀 과하다.
차이코프스키는 지가 쓰는 곡에 지가 휩쓸리는 듯한 혐의가 짙다.
그래도 오랜만에 들어보니 간만에 재미는 있다.

니꼴라에바의 사랑하는 바하 시리즈는 기피 음악이다. 기껏 돌아 온 정신을 다시 원위치 시킨다.

가사 있는 음악들은 모조리 금물이다.
멜로디는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가사만 귓구멍으로 파고든다.
사라 맥라클란의 앤젤은 구멍 뚫린 스폰지같이 들리는구나. 모래밭에서 달리기 하는 기분이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꼭꼭 숨은 마리아를 찾아서 운동장 백 바퀴 돌기.


소란스런 관현악곡들은 전쟁터다. 천지사방에 병장기 부딪는 소리로 요란하다.
이때쯤 노파심에서 잔소리 한마디 하는데 절대로 비니루 음반(LP)을 만져서는 안 된다.
오한으로 비롯된 진동계수가 한도를 넘어 바늘을 부질러먹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니 엘피보다 무조건 시디만 듣자.
그것조차도 귀찮으면. 에라, 삼천만의 음악방송 KBS FM이나 켜 놓고 자빠져버리든지.


................
다시 읽어보니 역시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보장할 수 없는 촌평들이다.
다만 체열이 38.5도 이상일 때는 때에 따라 보장할 수도 있다.
책이건 음악이건 역시 머리가 멍청해지면 단순스토리가 더 잘 들린다.
독감으로 고열에 시달릴 때는 별로 철학적이고 싶지 않다. 사색적이고 싶지도 않다. 절대로.
그저 종합감기약 광고처럼 단순 명쾌해지고 싶다. 오로지.언제는 철학적이고 사색적 이기라도 했냐고?
뭐, 열에 들뜨면 헛소리도 나오기 마련이다. 지나가는 말 붙들고 쪼잔하게 시시콜콜 따지지 말자.


어떻든 이런 저런 음악들을 바꾸어 듣다보면 늘 느끼는 것이,
대부분의 음악은 일견 밝고 즐거워 보이는 것들도 
듣다보면 어쩐지 아련한 슬픔을 바탕에 깔아 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의 삶이 그러해서 그러한 것일까?
회자정리. 제 아무리 기뻐 날뛰고 일생 행복에 겨워 넌더리가 나는 삶이라도
종래에는 기어코 슬프고야 마는 이승의 삶이 그리 만드는 것일까?
그런데 내가 시방 무슨 책임지지 못할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걸까?
아, 물론 열에 들뜨면 무슨 소린들 못하겠냐만, 감당 못할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자.
와병 중에 떠는 주접이라도 주접은 용서가 잘 안 된다.


결론은 단순하다. 독감은 하늘로 부터 받은 훌륭한 자아성찰의 도구다.
지극히 단순 명료한 육체적인 고통 하나로 인하여
고귀하고 우아한 척하던 인간의 밑바닥 성질이 다 드러난다.
일생 목숨 걸고 대외비로 지켜 오던 냄새 나는 괴춤 다 풀어 던지고,
품위 유지와 체면과 염치의 굴레에 갇혀 있던 너덜너덜한 본성들이 아주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사나흘 앓다보면 호모 사피엔스는 일찌감치 물 말아 먹어버리고
피테칸트로푸스나 크로마뇽인으로 변신을 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아니 아주 감동적으로 영장류로 변신 할 수도 있겠다. 으르릉...... 아주 사람을 잡는다니까. 일주일 쯤 앓고 육신의 진액을 다 뽑아내고 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공히 폐인이 따로 없다. 

그러니 나이 먹어서 거지발싸개 꼴로 구겨져 방구석에 처박힌 채 구박 받지 않을려면 아프지 말자.


부록/// 독감에 관한 열두 가지 리포트.

1.
그냥 기분이 언짢다.
몇 시간 지속하는 경우도 있고 급성으로 총 맞은 듯이 일순간에 픽 꼬꾸라지는 경우도 있기는 있다.

2.
오한이 들기 시작한다.
처음엔 열은 안 나고 오한만 든다. 죄 지은 것도 없이 괜히 덜덜 떨린다. 그러니 모쪼록 착하게 살자.

3.
편도선이 붓는다. 목 안쪽으로 불쾌한 느낌이 깊어진다.
그리하여 먹는 것이 즐거워지지 않으므로 신경질이 곱절 늘어난다.

4.
드디어 열이 난다. 올 것이 왔으니 어금니 물고 극력 환영하자. 좋은 말 할 때 각오하는 편이 좋다.

5.
두통, 현기증, 조갈, 등이 동반된다. 속도 메스꺼워진다.

6.
추워서 못 견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덜덜 떤다.

7.
기침은 심오하게 깊어져 컹컹 늑대 소리를 낼 때쯤이면 인제는 잠도 안 온다.
시간은 더럽게 안 간다.

8.
온 몸의 뼈마디가 몇 개인지 셀 수 있다. 마디마다 쑤시고 아프니까.

9.
입 안이 소태가 된다.
맛을 느낄 수 없으므로 소금이나 간장을 무진장 퍼 넣게 된다. 당연히 갈증은 더 심해진다.

10.
점점 살기가 싫어진다.

11.
일찌기 세상을 뜨신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어진다.

12.
결국에는 나중에 발등을 찍고 후회 하더라도 일단 장가는 들고 볼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혹시라도 미모의 개인 간병인을 둘 형편이 된다면 또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다.
아니라면 혼자 뒤집어쓰고 한 번 앓아보시든지.


주의 사항/
1.
약 먹으면 일주일, 약 안 먹으면 칠일이면 낫는다는 낭설을 믿지 말자. 그대는 청춘이 아니다.
위의 증상 중 두 가지 이상이 일치한다면 만사 제쳐놓고 병원으로 달려가자.
밥 먹던 숟가락도 내 던지고 빨리 달려가자.
무조건 엄살떨어서 궁뎅이 까서 주사 맞고 끼니마다 약 한주먹씩 삼키자.
그래야 그나마 약기운으로나마 겨우 운신이라도 할 수가 있다.
별 일 있으랴 방심하거나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다가는
갱신도 못하고 걸레처럼 길바닥에 어질러지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음을 상기하자.
치사하게 감기 몸살 따위로 병원을 가냐고?
오기.... 오기나 쎈 척, 그런 거 그대의 일생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2.
운전은 되도록 삼가 하자. 맞은편의 차가 오는지 가는지도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래도 기어이 운전을 해야 할 형편이라면 무조건 열은 내려놓고 핸들을 잡으라.
얼음주머니를 뒤집어쓰든지 해열제를 바가지로 들이마시든지 체온계를 아주 박살 내 버리든지,
어찌 됐든 열은 내리고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 안 그러면 죽는다.
체열 38.5도는 혈중 알콜 농도 2.0 이랑 맞먹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큰 코 다친다. 매사에 눈을 의심해야 한다.
보고도 의심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3.
찬 음식, 술, 날 것 들을 먹지 말자. 꼭 먹고 싶다면 무조건 익혀서 먹자.
생선회도 익혀 먹고 과일은 구워 먹고 술은 연탄불에 두어 시간 졸여서 먹자.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착실히 먹어 놓자.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저울에 달아서 쑤셔 넣자.
뱃속까지 비워두면 영양실조를 동반한 혼수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아, 물론 거룩한 호모 사피엔스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토하지 않을만큼만 먹어야 한다.

4.
열이 내리고 땀이 나기 시작하면 무조건 이불 뒤집어쓰고 땀을 빼자.
자의건 타의건 땀 빼고 나면 인물도 한 인물 더 난다.
땀 빼기에 유용한 도구로는 고전적으로는 구들막에 핫이불 뒤집어쓰기를 비롯해서
소주와 함께 대구 볼태기 찜을 섭취하는 것 까지 매우 다양한 방법이 있다.
다만 땀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부실한 몸을 끌고 황토찜질방이나 한증막에 기어들어가서 생기는 불상사에 대해서는 본인은 법적 도의적 책임을 면하고자 한다.

5.
아이들을 무조건 격리 시켜야 한다.
아이들을 격리시킬 수 없으면 스스로 격리되자. (예: 불 안 땐 골방이나 문간방 등등,)
거룩한 결단이라고 감동하실 필요는 없다.
어린놈들이 앓기 시작하면 칭병하고 누워서 쉴 수 있는 권리마저 깨끗이 반납해야 하기 때문이니까.

6.
아내나 남편도 격리 시키자. 둘 다 엎어지면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
또한 긴 병에 곱게 보이는 놈 없다.
며칠 앓다보면 눈구멍 퀭하게 드러누워서 유언무언의 괄시를 받을 각오는 당연지사다.
그래도 같이 앓아누워서 물 한 잔 먹고 싶어도 상호간에 벌벌 기어 다녀야 할 지경보다는
다소의 핍박을 감내하고서라도 한 사람은 성한 편이 낫다.

7.
하여간에 건강한 가족들과는 무조건 격리된 공간에서 구분된 도구를 사용하며
매우 불쌍하게 며칠을 보낼 각오를 하자.

8.
그리고 실컷 아프고 난 뒤에 무슨 큰 벼슬 한 것처럼 이렇게 떠들지 말자.




언젠가 이 곡을 들으며 운전을 하다가 3악장에서 교통사고를 낼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2악장 까지는 아주 안전하게 별 탈 없이 잘 듣고 있었는데
3악장 도입부에서부터 잔잔한 오케스트라 사이로 오르내리던 바이올린이 아득하게 치솟았다가  오케스트라의 총주와 함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부분이었지요. 
현 합주가 휘감아 돌면서 좁은 자동차 속이 어마어마한 음향으로 출렁이는 순간 까닭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면서 눈 앞이 아득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오른 발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지요. 
갑자기 시프트 다운이 되면서 급가속.
하마트면 앞차를 들이받을 뻔했지요. 진땀이 바짝 났습니다. 얼마나 시껍을 했던지.

이전에도 이후에도 집에서는 물론 녹음을 해서 갖고 다니면서 운전 할 때도 자주 들었지만
오디오를 바꾸거나 고장 났던 오디오를 수리하고 나면 세팅 후에 거의 반드시 얹어보던 곡입니다.
그 커다란 파도와 같은 3악장의 선율 때문에.

물론 네 악장이 다 좋지만 그 중에도 이 3악장은 이전에도 좋아했고
또 그 사건 이후로는 더더욱 각별하게 좋아져서 늘 그 넘실대는 음향의 해일 속에 몸을 얹습니다.
정말 눈 감고 몰입하노라면 무슨 커다란 물결을 타고 앉은 느낌이지요.
그 중에서도 오이스트라흐 연주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워낙에 좋아하는 연주자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냥 여러 연주를 나란히 놓고 들어봐도 독주가 가장 아름답고 다이나믹한 오케스트레이션도 일품이어서 가장 좋아하는 연주입니다. 아, 물론 안전 운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곡이라 때로는 좀 흘겨 보기도 합니다만. 
엘피가 속절없이 낡아가는 것이 걱정스러워서 연전에 레전드 시리즈로 나온 시디를 또 사두었습니다. 걱정도 미리 땡겨서 하고 있는 걸 보면 참, 걱정도 팔자에 있기는 있나봅니다. 하긴, 페렌치크의 베토벤을 깨 먹고 난 뒤 방심하다가 절판 되어버려서 크게 낙심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니까 그래도 이런 조바심은 조금 면피가 될라는지. 
 



Max Bruch / Scottish Fantasia (3악장)
Violin / D. Oistrakh
J. Horenstein / London Symphony Orchestra



창수령 고갯길을 넘어가던 중에 작은 아이가 멀미를 해서 차를 세웠다.
마침 길 옆에 잔설이 깔린 오솔길이 참 예쁘길래 큰 아이더러 한 장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
다 흔들어 놨네.
큰 아이는 카메라가 고물이라 그렇다고 우긴다만.

버리려다가 가만 보니 흔들린김에 못생긴 얼굴이 조금 보완이 된듯도 하고
배경이며 구도가 그냥 괜찮아 보여서 적당히 왜곡 시킨 채로 올려 본다.  

사진이 흐린 것이 나는 다행이지만 덩달아 얼굴이 흐릿해진 개구쟁이 작은 아이는 손해다.
파란 색연필로 블로그에 띄워진 내 얼굴을 그린 놈이다. 네 살때 그렸다.
아니 뭐, 보나마나 메추라기 애비에다가 콩껍질 뒤집어 쓴 팔불출이란 핀잔이나 듣겠지요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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