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e guapa

russian gypsy swing


혼자 집을 지킨다.

밤이다. 밑도 끝도 안 보이는 적막이고 적요다.

혼자 있는 이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막막함이다. 바람 소리도 없는.


손에 집히는대로 뽑아 든 음반들이다. 집시. 탱고.. 플라멩고...

방바닥에 널려진 음반들은 거의 엘피. 시디는 별로 없다. 다 오래 된 음반들이란 이야기지. 

베르너 뮐러. 만토바니. 스탠리 블랙. 에드문도 로스. 피아졸라. 퀸테토 부에노스아이레스. 렌드바이...


아니, 내가 탱고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를 춤꾼으로 오해는 마시라.

나는 새파랗게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은 구경조차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순 말라 비틀어진 고목나무 장작개비다. 탱고와 집시는 내게는 그냥 추억일 뿐이다.

어럽쇼, 그것 또한 그렇고 그럴듯한 사연으로 분홍 칠 한 그런 추억이 아니다.
그냥 음악으로서의 추억일 뿐이다. 부디 믿어 주시기를 바란다.


한때 지독하게 집시 음악만을 찾아 듣던 적이 있었다.

무슨 까닭이 있어서도 아니고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마냥 좋아서. 왜 좋은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그냥 무작정 들을 뿐이다.

그 리듬을 듣고 있노라면 내 속의 뭔가가 꿈틀거리며 응답을 하기 때문이고

죽어 있던 무엇인가가 다시 살아나 부스럭거리며 기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탱고와 플라멩고를 바하의 첼로를 듣듯이, 브람스를 듣듯이 그렇게 눈을 지그시 감고 듣는다.
깊이 깊이 뼛골이 시리게 새기면서 듣는다.

까짓 것, 집시 음악 나부랭이를 그리 폼 잡고 듣느냐고 핀잔 주셔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렇다. 나는 집시 음악을 그렇게 들어야만 한다. 처음이 그랬고 그 다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죽은 듯이 누워 눈을 감고 듣다보면 메말라 따가운 눈동자에 까닭없는 눈물이 번지고
마른 나무토막처럼 아무렇게나 던져진 팔다리에 이끼가 덮이고,
그리고 어느샌가 나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바람을 안고 달리며 안개 낀 숲을 지나고
젖은 풀잎의 검은 벌판도 지나고 허름한 시골 마을 우물가의 쭈그렁 노인들도 만나고
낯 선 산골짜기 부엉이 울음 따라 온 도깨비도 만난다. 아아 그리고는 드디어 만난다. 그 사람들이 보인다.


한번도 본적도, 아는 것도, 그 아무것도 아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사람들의 헐떡이는 시뻘건 심장도 보인다.
헐떡이는 심장처럼 펄쩍펄쩍 모닥불 주위를 뛰고 돌며 썩 풍기문란하게 미쳐 날뛰는 그들이 보인다.


나는 짐작한다.

그 족속들은 태생적으로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

기뻐 날뛰고 행복에 겨워하고 갖은 황홀과 아름다움에 기꺼워하더라도 결국에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제 아무리 발악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제 아무리 잘난 놈도,
제 아무리 뻔뻔스런 세상에 둘도 없는 뻔칠이도
절대로, 결단코 벗어날 수 없는 생명의 소실점을, 이 거룩하고 잘나빠진 생명의 일회성을,
그 바닥없는 절망을 그들은 이미 생득적으로 가슴에 묻어 살고 있다고 짐작한다.
그들의 음악을 듣다보면 그것이 들리고 보인다.


그들의 애수는 뜨겁다.

입 냄새가 적당히 섞인 헉헉 뜨거운 날숨이다. 그리고 눈물이다.
하지만 만져 볼 수는 없는, 이미 바삭바삭하게 말라버린 눈물이다.
그들은 그렇게 소금 버석거리는 마른 눈물 자국으로 울면서 춤추고 춤추면서 미쳐간다.
그렇게 미친 듯이 춤추고, 먹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잠을 자고,
그렇게 하루하루 발악하듯이 서럽게 미쳐간다.

불같이 뜨겁고 술보다도 향기로운 짙은 사랑도 그들의 음악 속에서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서러움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러운 가슴으로 뜨겁게 미쳐 서로의 몸을 탐하기도 할 것이며

그렇게 삶과 사랑에 미쳐버린 그들의,
낯선 이들과의 내일 없는 사랑도 그들의 음악 속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럴만한 핑계가 있으리라 섣불리 짐작해 본다.

(그렇다고 지금 내 앞에 붉은 장미를 입에 문 카르멘이 서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혼자다.)


저들의 음악은,

가슴속에 숨어 있는, 나도 모르는 내 속의 무엇을 자꾸 건드린다.
그들의 뜨겁고 서러운 선율이 거듭 육신을 훑어 내리면 나는 비로소 조금씩 미쳐버리고 싶다.
그들처럼 땀으로 번들거리는 목울대로 눈물을 삼키면서 미쳐버리고 싶다.


..............

밤이 깊어가도 나는 저 집시들과 탱고 속에 묻혀있으며

또한 아무도 나를 위로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술이라도 한 잔 권할만한 벗들은 모두 멀리 있어 지금쯤 각각 술이 곤드레가 되었든지
아니면 각종의 삶에 짓눌려서 숨죽여 불쌍한 잠에 빠져 있기가 십상이며
온 세상의 연인들은 오래 전에 죽거나 헤어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디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어찌할까. 이 갑작스런 몽상의 구덩이에 그대로 잠겨 있어야 할까?

그래. 이제는 핑계처럼 저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땡볕같이 달구어진 목소리로 더운 숨을 헐떡이면서 이제는 저들이 나를 붙잡는다.

그래도, 서러워도, 그 소실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없더라도
너희들처럼 그렇게 끈적끈적하고 뜨겁고 서러운 사랑을 한 번 해보라고?

그러게.
눈물나게 고맙지만, 이 사람아, 난 이제 청춘이 아닌데 그래도 괜찮을까?



플라토체크

dark eyes




우리 집 뒷집 실성한 할매는 허구헌날 혼자서 중얼거린다.

어느 집 후처로 들어와 살다가 서방 전처 다 죽고 전처 자식 하나 데불고 살더니 그 전처 자식도 연전에 죽고 달구새끼 몇 마리랑 같이 사는데 그 할매, 간혹 담 너머로 들릴 만큼 괙괙 소리를 질러댄다.


'이년아! 그래서 뭐시 우쨌냐고!!'

'더런 년아! 니가 뭐시 우째서 뭐 어쩌구 그랬단 말이가!!'


원 참, 달구새끼가 뭘 알아들어. 지나가는 들 고양이가 말귀를 알아 듣냐고.

당연히 ‘이년아!’ 라든지 ‘더런 년아!’ 다음의 이야기는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이다. 

뭐 무슨 사연인지는 내 알 바 없고 알아봤자 별 것도 없겠지만 대개 '놈'짜는 없고 주로 '년'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남정네한테 원한을 가졌거나 앙심을 품을 일은 없을 것으로 보여서 저으기 안심이기는 하다.


대개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사람인데다가 천성은 착해 보이는 것이 여차한 경우에도 이웃에게 해꼬지를 할만한 사람은 아닌 듯한데, 어떤 날은 밤이 깊도록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고 간혹 소리를 지르고 그러기도 하지.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또 멀쩡하게 제 정신으로 잠시 돌아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뚤레뚤레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서 뭔가를 부탁하기도 한다.


'아재요. 선풍기가 왜 안 돌아가는지.'

'아재요. 데레비가 안나오네요.'

'춥어 죽것는디 보일라 좀 돌리주소.'


그러다가 살짝 돌아갈 때는 웃기는 소릴 하고.


'아재네 집 전깃줄이 흔들흔들 하니까 우리 집 지붕 따까리가 다 날아갔잖아요!'

'감나무 앞에 서 있을 적에는 마당을 쓸면 안 되지요.'(??)


아무튼 그 할매는 실성을 했다. 뭘로 보고 아냐면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쭝얼거리고 히히덕거리는 걸로 알지. 

그런데 오늘 청소기를 고치러 나섰다가 실성한 이를 둘이나 더 보았다. 

하나는 마티즈 운전석에 앉았던 분칠한 아줌마.

나랑 나란히 서서 신호대기를 하는데 옆자리며 뒷자리에 사람은 아무도 없드만 저 혼자서 '야이 가시나야!'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더니 깔깔 웃기도 하고 연신 뭔가를 주절거리데. 내 신호가 바뀌었으니 그냥 오기는 했는데 영락없이 정신 나간 사람 형상이드만.


읍내 다 와서 엘지 서비스 앞에 차를 세우는데 이번에는 순경 하나가 순찰차 옆에 서서 머리를 땅으로 처박고 뭔가를 중얼거리데. 혼자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하다가 실실 웃기도 하고 혼자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면서 주절주절 뭘 한참 중얼거리드만.

아니,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다 하더라도 순경마저 실성을 하면 어쩌냔 말이다. 여차하다가 눈이 휙 돌아가서 허리춤에 권총을 빼어들어 빵! 하고 쏘면 거 참 야단이란 말이지.


뭐, 보나마나 핸즈프리니 전화기 이어폰을 귀에 꽂고들 하는 수작이라 요즘에야 그리 낯선 풍경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뒷집 실성한 할매랑 하는 양이 그리 달라보이지를 않아서 그래 한마디 해 보는거지.

그래서 나도 이어폰 달린 전화기 목걸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거 잘 안 써. 주렁주렁 귀찮기도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어쩐지 남 보기에 정신 나간 얼빠진 이처럼 보일까 찜찜해서. 사람이 구식이라 그런지 전화기는 모름지기 손에 들고 귀에 갖다 붙여야 제 격이라는 생각이야.  


2003. 08.21




 

큰 아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한 십여 년 전 쯤 이야깁니다.

오래 앓던 천식으로 몸이 약해져서 유치원도 못가고 집에서 책만 보며 애비와 씨름하던 어린놈이 어느 날엔가 어디서 봤는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에 혼이 나가버렸습니다.


어지간한 장난감에도 좀처럼 욕심을 내지 않던 놈이 아빠 자전거, 아빠 자전거,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전거를 사 내라고 석 달 열흘을 졸라대는데 자식 병 수발 한다고 귓구멍 틀어막은 채로 밥벌이까지 접어버렸던 애비는 자전거를 사 줄 재주가 없었습니다.

새끼 곁을 지키는 것만 소중한 줄 알았지 새끼 소원도 애비에게 달린 것을 몰랐던 어리석은 애비였지요. 어린놈은 자전거에 목을 매고 애비는 빈 주머니만 뒤적거립니다. 이런 막막한 세상아.


제 의논과는 달리 하던 일 다 접고 애한테만 매달린 후로 아내와도 서로 어긋나서 불편했던 때였으니 내 딴에도 허깨비 같은 자존심은 남아서는 말 빚 질까봐 입은 딱 닫아걸고 혼자 냉가슴만 앓았지요.

그렇게 그놈의 자전거 때문에 어린놈과 밀고 당기던 그 어느 날 철딱서니 없이 만만한 애비만 죽어라고 졸라대는 어린놈을 달래다 못해 그만 소리를 꽥 질러서 울려놓고는 훌쩍거리는 어린놈을 보자 하니 기가 막히네요. 그래, 혼자 우울해서 탈기를 하고 방 한 구석에 멍하니 처박혀 있자하니 눈에 띄는 건 고물 오디오에 판때기 밖에 없습니다.


..........아뿔사!!!

이런 등신 같은 인간을 봤나. 자전거에 목숨 거는 어린 새끼를 두고 삼년 가야 손 한 번 안가는 판때기들은 잔뜩 보듬고 있는 꼴이라니.

그 날로 판꽂이를 뒤집어엎어서 손 안 간다는 팔백 장 뽑아내어 트렁크며 뒷자리에 싣고는 중고 음반 산다는 곳 찾아 어린놈을 옆에 태우고 부산으로 대구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앗따, 이놈아. 애비도 돈 생겼구나. 인제는 자전거 사러 가자.

그 날로 반짝반짝 노란 자전거를 사서 싣고 왔습니다.

바퀴살에 방울까지 달아서 굴러가면 도로롱 소리도 나는 아주 멋진 자전거였습니다.

비닐도 안 벗긴 새 자전거를 손에 쥔 어린놈은 입 꼬리가 귀에 걸려서 연신 싱글벙글, 애 엄마는 무슨 돈이냐고 물었지만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입 다물고 암말도 안했었지요.


그렇지요. 아무리 그 당시에 손 안 가는 음반이었다 해도 그렇지. 그거, 딴에는 꽤나 어지럽게 살아왔던 일생, 내 손때에 내 숨소리까지 묻어있는 그런 음반들이었습니다. 참, 내 자식 소원이 아니었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그런 난리였지요.


어찌 됐든 그 놈의 자전거, 어린놈은 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지고 무릎 깨고 하면서 익힌 솜씨로 등교 길이며 동네 나들이며 그리도 신나게 끌고 다니더니 점점 키가 크고 무릎이 핸들에 닿을 때가 되니 더 이상 타지 못하고 언젠가부터 헛간에 서 있었습니다. 그놈의 묘한 이력 때문에 남 줄 생각도 못하고, 버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세워만 놓았었습니다. 반짝이던 핸들도 빨갛게 녹이 슬고 바람 빠진 타이어는 납작하게 삭았습니다.


몇 년을 그냥 그대로 세워 두었습니다.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에 한번씩 건드려보기도 하고 어쩌다 심사가 사나운 날에는 툭 차보기도 했지만 하도 낡아버려서 작은 놈 줄 생각도 못하고 그 놈의 자전거, 헛간에 세워 둔 채로 눈길만 주고받고 몇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그 어느 날 오후에 무슨 일인지 마음이 선듯해서 이웃집 텃밭에 비닐하우스 뜯으러 온 고물장수 할아버지에게 실어 보냈습니다.
집에 있는 쇠붙이 이것저것 실어 올리다가 충동적으로 얼른 실어 보내 놓고서는, 아니다, 이게 그냥 보낼 일이 아니다 싶어서 그 할아버지 얼른 뒤따라 가서 사진 두어장 찍어 왔지요. 아주 청승이 늘어졌습니다. 
 


‘아빠, 내 자전거 버렸어?’


그 날 밤, 이제 다 커버린 어린놈은 낮에 찍어 둔 자전거 사진을 만지작거리는 날 보고 잠시 들여다보는 듯 하더니 심드렁하게 묻고는 그냥 그만이었습니다. 


.......에라 이놈아, 이 자전거가 그냥 자전거인줄 아느냐.


꼭 정 붙이 사람이나 짐승을 보낸 듯 공연히 마음이 헛헛하고 우울해져서 고물 값으로 받은 삼천 원, 그 돈 손에 쥐고 하도 마음이 얄궂어 차마 쓰지를 못하고 아이 통장에 그냥 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을 보다가 혼자서 중얼중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뭐 꼭 인사라기보다는 그냥 차마 그냥 보내기가 애잔해서 마음으로 그렇게 보내 주었다는 말이지요.


........

잘 가라.
그리고 펄펄 끓는 용광로에 몸 한 번 덥혔다가, 다시 태어날 때도 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더 노란 자전거로 태어나 노랑 자전거에 혹해 애비를 졸라대는 작은 계집아이에게로 가거라. 잘 가거라.



2006. 01.21





♣♣♣♣♣
어둑한 골방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출세와는 거리가 좀 먼 책들을.

남보다 재빠른 감각으로 남보다 앞서기 위한 책들을 열병이라도 앓듯이 읽어야 하는데.

책을 백 권쯤 가려내서 커다란 상 위에 쌓아놓고

제대하는 8월 말까지 다 읽어 치우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
연희와 만나면 형에 관한 이야기는 삼갑니다.

그 여자가 순수하게 사랑한 처음이자 마지막일 사람이 형이니까.

그 여자도 자기 양심을 부끄러워합니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형의 건투를 빌며 넋두리 접습니다. 낙원 드림.


♣♣♣♣♣
Dear 여윈 선배님.

방학동안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sons & lovers 를 읽었습니다.

(큰일 했다 큰 일 했어.)

puppet man 인 우리 선배님 따분하시죠.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지도록 기도 할까요.

(중략------)

........

여위고 빼빼하고 불쌍하고 고독하시고 심심하신 선배님 안녕히 계세요.


--커다란 후배 선정.


♣♣♣♣♣

낯 설은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삽니다.

잘 지내시지요?

오랜만에 소식 접하여 마냥 기쁜 맘에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어보아도

모든 글자들이 가물거리기만 합니다.

이게 테크닉의 문제인지 스타일의 문제인지 아니면 거리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신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습니다.
(중략-----)

....

직관도 무지에서 오지는 않을 듯 합니다.

많은 경험을, 거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

감정들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 시켜 가십시오. 소극적인 것은 껍데기뿐일지도 모르지요.


--연희


♣♣♣♣♣

찌는 게 아니라 아주 튀기는 날씨다. 점심 반찬으로 튀김이 나온다면 우스울 것 같다.

안 간다 안 간다 하면서도 세월은 어영부영 가나보다.

코는 시월에 수술하기로 했다. 가슴은 이상 없더라.

나는 왜 이렇게 못나서 너처럼의 갈등과 희열을 맛 볼 수 없는지 생각할수록 병신스러울 뿐이다.

너 같은 놈 때매 나 같은 비극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잊지 마라.

(중략------)
..........

날이 더우니 모일 때마다 개 이야기뿐이다.

나도 소주 한 병 쯤을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이마에 정맥이 선 네 얼굴 보고 싶다.

뜨겁게 살아라. 너도 나도.


--근호


♣♣♣♣♣

부패와 썩은 몰골들이

항시 주변을 메우고 있고

탁한 놈은 팽팽한 오물 주머니를 차고

옆에 서서 터뜨릴 기세고.

(중략------)

.........

많은 시간, 많은 이야기들 진심으로 고마웠고

진주에서의 하루는 기억하겠소.

모쪼록

건강 속에 만나서 과격한 느낌으로 태웠으면

쓴 술 한 잔은 달지 않겠소.


-중수


♣♣♣♣♣
(전략-------)

시외전화라도 한 통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생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생활은 어떠십니까.

안경에 더벅머리 형의 얼굴이 선합니다.

짬나는 대로 찾아 뵐 테니 남강 변에서 개다리소반 마주 할 준비나 하십시오.

얄팍한 호주머니 그거나마 다 축내고 올 작정이니

마음 굳게 먹고 그 날은 지리산 가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시월 팔일 휴가 출발합니다.

-호경.



=====================================


책꽂이를 정리하다 마구잡이로 쌓아 둔 종이 뭉치에서 나온 오래 된 편지들.

누렇게 바래고 삭아 만지면 귀퉁이가 부서진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낡고 지친 편지 몇 장을 뒤적이다가 오래 지난 상념으로 조금씩 앓는다


편지는 식은 아궁이처럼 쓸쓸할 뿐인데

오히려 일없는 가슴만 비시시 일어나 이내 조금씩 기척을 하고

오래 오래 지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누렇게 묵은 책꽂이에 잊은 듯 남겨두었다가

공연히 아팠다 웃었다 하는 것도 홀로 썩 민망한 일이지만

그래도 참 그때가 조용히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만큼은 낡았나보다.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


낙원/

나이는 나와 동갑이면서 학번이 하나 늦어 나더러 꼬박꼬박 형으로 부르던 후배.

이 친구가 가사를 짓고 내가 곡을 붙인 노래가 모모대학 방송국 공식 방송국가로 남아 있다.

자랑이다. ㅎㅎㅎ.. 


선정/

그 해에 내가 대장 노릇하던 음악 써클의 여자 후배.

몸집이 커다랗지만 썩 고운 얼굴과 활달한 성격으로 재미있었던 친구.

지방대학에서 꽤나 세련된 도회적인 이미지로 눈길 꽤나 끌었던 친구.


연희/

그냥 어떤 여자.

의사한테 시집가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여자.


근호/

지독하게 가난했던 집구석이 이가 갈려서 무슨 수를 쓰던지 돈을 벌어야 한다던 고등학교 동창생.

비슷한 시기에 같은 병을 같이 앓기도 해서 잘 어울렸던 친구.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는 걸려 오는데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세세한 소식은 잘 모른다.

배고팠던 시절 이 친구와 둘이서 라면 다섯 개와 찬 밥 한 밥통(약 5인분?)을 한 끼에 해치운 추억이 있다.


중수/

군 복무 중, 국군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만났던 해군 친구.

미술 전공에 꽤나 독특한 감각을 가진 친구였는데 결혼식 때 못 가본 탓으로 서로 엇갈려 소식이 끊겨 버렸다.


호경/

군대 쫄병.

시커먼 안경을 쓰고 삐딱이 기질이 농후하던 졸병.

군대가 아니라면 어떻게 각별히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를 기질이었는데 편지의 내용대로 뻥구라만 쳐놓고 결국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소식을 모른다.  





칼을 잡았다고 해서 모두 다 검객은 아니다.

검객은 남의 눈으로 상대를 보지 않는다.
검객은 자신의 눈으로 상대를 보고 베어야 할지 지나쳐야 할 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쓰러질 때도 자신의 이름으로 쓰러진다.

남의 눈으로 상대를 보고 칼을 뽑는 자는 검객이 아니다.
그는, 마루 그늘에 강아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주군의 명령만 기다리는 자객일 뿐이다.
또한, 죽은 자객은 이름이 없다.

손에 칼을 쥐었다고해서 누구나 다 검객이 되는 것은 아니다.




I don't even call it violence when it's self-defence.
I call it intelligence.    - Malcolm X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일 경우, 나는 그것을 폭력이라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고 말한다. -말콤 X)  





 


소비에트 아미 코러스. 직역하자면 소련 육군 합창단쯤 될까.

어쩐지 이름이 좀 으스스 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어릴 때부터 받았던 냉전적 세뇌교육의 효과겠지?

이미 해체되어 흔적도 없는 소련이라는 공룡.

미국이라는 괴물과 맞붙어 겨룰만한 거의 유일한 괴물이었던 소련.


썩어빠진 이데올로기나 정치 같은 건 제껴 두자.

지구를 수십 번 결딴 낼 수 있다는 몇 천개가 넘는다는 끔찍한 핵미사일도 지금은 잊자.

문어발을 가진 불가사리같이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을 빨아들여 거대한 예술적 잡탕을 만들어놓은 잡동사니 미국을 비롯해서 그 알토란같은 아티스트들을 수시로 서방에 빼앗기면서도 또 다시 어디선가 귀신같이 홀연히 나타나곤 하던 겨울나라의 우울한 아티스트들. 그 추운 나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악의 심연,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강철같은 타건의 호로비츠, 엄청난 스케일과 절제가 공존하는 길렐스, 검은 타이즈의 긴 생머리 뮬로바,

감성 과다로 허구헌날 손수건을 쥐어 짤 것 같은 우울한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

니콜라에바, 오일장 장바닥 좌판 어디에선가 만날 것 같은 뚱댕이 할머니...

오이스트라흐, 아아... 그 존재만으로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을 그 드럼통 아저씨.

그 뿐인가, 리히테르, 코간, 유리 바쉬메트, 등등, 이름만으로도 능히 그 주변의 별들이 빛을 잃을 거성들.

그들의 바탕 위에서 생겨났을지, 아니면 그들의 바탕이 되었을지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대륙의 뿌리. 소비에트 아미 코러스라는 괴물들의 집단.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구경도 못해 본 그 얼음 덮인 대륙이 느껴진다.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그들의 등 뒤에 언제나 거인처럼 누워 있다는 순백의 우크라이나 산맥이 눈에 보인다. 

끝없는 동토를 거세게 할퀴고 지나가는 눈보라 속에, 노쇠하고 지친 거인처럼 더러 눕고 더러 버티고 선 산맥들. 새까만 바탕에 시뻘건 글씨로 공산당 기분을 한껏 살린 EMI의 재킷을 보면서 그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 추운나라를 그리워한다.


다듬지도 않은 듯, 꾸미지도 않은 듯, 제 하고 싶은 소리, 지르고 싶은 소리는 제 멋대로 꽥 꽥 질러대는 듯한,

저 가슴 속 깊은 아래쪽의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후벼 파고 긁어내는 듯한 그들의 야만적인 목소리.

정수리를 벌겋게 강타하는 불덩어리 같은 원색의 테너,

가슴팍을 부르르 떨리도록 후벼 파는 꺼칠꺼칠한 바리톤,

땅 속까지 긁어내는 듯한 까마득한 베이스.

번쩍이는 금관의 압도적인 울림 속에 언뜻언뜻 날선 비수처럼 가슴을 베어내는 발랄라이카의 트레몰로.


애니로리, 초원의 노래, 반두라, 벌판에 선 자작나무, 슬라비앙카, 카츄사, 제비, 손으로 꼽기에도 벅찬 그들의 절창들. 그들이 부르면 연가도 군가가 되고 군가도 연가가 된다.

그들은 지금 남아 있는지? 나라는 찢어지고, 군대가 재편되고, 그래도 그들의 예술 혼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서 저렇게 우울한 망령 같은 노래들을 쏟아내고 있는지.


아아,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다지 씩씩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명색이 사내로 태어났건만

그 놈의 거칠고 야만적인 슬라브 족속의 사내들이 쏟아내는 군가들은 어쩌면 그리도 이 나이 들 만큼 든 사내의 살을 저미고 가슴을 에는지 말이다.



...'아이고 아저씨 벨 걱정을 다 합니더. 사다 노모 다 사람 뱃속에 드갑니더. 살 때 좀 마이 사가이소.'
인구 5만 남짓이라는 삼천포에 웬 생선은 이렇게 많은지.  .......삼천포 사람들은 혹시 생선만 먹고 사는 걸까. 



'야이 XX년아, 고기 한 다라이가 머시 우째?... 웃지 마라, 웃기는 새 X이 좋타꼬 웃나!!'
회칼 든 아지매는 당장에 요절을 낼듯이 옆집 아지매를 닥달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웃집 아지매들은 싸우는 게 우습다고 깔깔깔깔 넙덕 웃음으로 뒤집어진다.
적나라하고 무시무시한 욕바가지에 지나가던 나그네도 흠칫 놀라다가 이웃집 아지매들 웃음 소리 덕에 소심하게 안도하면서 그 앞을 지나간다.

고향 간 길에 삼천포 어시장을 다녀왔다.
날씨 풀어졌다더니 아나 맛좀 봐라 갯바람에 얼고 
철벅철벅 낡은 구두는 물까지 먹어서 발끝이 시렸지만
갯냄새 물비린내 생선 비린내 사람 냄새까지 아주 자욱해서 오랜만의 나들이가 썩 행복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