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e guapa

russian gypsy swing


혼자 집을 지킨다.

밤이다. 밑도 끝도 안 보이는 적막이고 적요다.

혼자 있는 이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막막함이다. 바람 소리도 없는.


손에 집히는대로 뽑아 든 음반들이다. 집시. 탱고.. 플라멩고...

방바닥에 널려진 음반들은 거의 엘피. 시디는 별로 없다. 다 오래 된 음반들이란 이야기지. 

베르너 뮐러. 만토바니. 스탠리 블랙. 에드문도 로스. 피아졸라. 퀸테토 부에노스아이레스. 렌드바이...


아니, 내가 탱고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를 춤꾼으로 오해는 마시라.

나는 새파랗게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은 구경조차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순 말라 비틀어진 고목나무 장작개비다. 탱고와 집시는 내게는 그냥 추억일 뿐이다.

어럽쇼, 그것 또한 그렇고 그럴듯한 사연으로 분홍 칠 한 그런 추억이 아니다.
그냥 음악으로서의 추억일 뿐이다. 부디 믿어 주시기를 바란다.


한때 지독하게 집시 음악만을 찾아 듣던 적이 있었다.

무슨 까닭이 있어서도 아니고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마냥 좋아서. 왜 좋은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그냥 무작정 들을 뿐이다.

그 리듬을 듣고 있노라면 내 속의 뭔가가 꿈틀거리며 응답을 하기 때문이고

죽어 있던 무엇인가가 다시 살아나 부스럭거리며 기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탱고와 플라멩고를 바하의 첼로를 듣듯이, 브람스를 듣듯이 그렇게 눈을 지그시 감고 듣는다.
깊이 깊이 뼛골이 시리게 새기면서 듣는다.

까짓 것, 집시 음악 나부랭이를 그리 폼 잡고 듣느냐고 핀잔 주셔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렇다. 나는 집시 음악을 그렇게 들어야만 한다. 처음이 그랬고 그 다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죽은 듯이 누워 눈을 감고 듣다보면 메말라 따가운 눈동자에 까닭없는 눈물이 번지고
마른 나무토막처럼 아무렇게나 던져진 팔다리에 이끼가 덮이고,
그리고 어느샌가 나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바람을 안고 달리며 안개 낀 숲을 지나고
젖은 풀잎의 검은 벌판도 지나고 허름한 시골 마을 우물가의 쭈그렁 노인들도 만나고
낯 선 산골짜기 부엉이 울음 따라 온 도깨비도 만난다. 아아 그리고는 드디어 만난다. 그 사람들이 보인다.


한번도 본적도, 아는 것도, 그 아무것도 아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사람들의 헐떡이는 시뻘건 심장도 보인다.
헐떡이는 심장처럼 펄쩍펄쩍 모닥불 주위를 뛰고 돌며 썩 풍기문란하게 미쳐 날뛰는 그들이 보인다.


나는 짐작한다.

그 족속들은 태생적으로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

기뻐 날뛰고 행복에 겨워하고 갖은 황홀과 아름다움에 기꺼워하더라도 결국에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제 아무리 발악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제 아무리 잘난 놈도,
제 아무리 뻔뻔스런 세상에 둘도 없는 뻔칠이도
절대로, 결단코 벗어날 수 없는 생명의 소실점을, 이 거룩하고 잘나빠진 생명의 일회성을,
그 바닥없는 절망을 그들은 이미 생득적으로 가슴에 묻어 살고 있다고 짐작한다.
그들의 음악을 듣다보면 그것이 들리고 보인다.


그들의 애수는 뜨겁다.

입 냄새가 적당히 섞인 헉헉 뜨거운 날숨이다. 그리고 눈물이다.
하지만 만져 볼 수는 없는, 이미 바삭바삭하게 말라버린 눈물이다.
그들은 그렇게 소금 버석거리는 마른 눈물 자국으로 울면서 춤추고 춤추면서 미쳐간다.
그렇게 미친 듯이 춤추고, 먹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잠을 자고,
그렇게 하루하루 발악하듯이 서럽게 미쳐간다.

불같이 뜨겁고 술보다도 향기로운 짙은 사랑도 그들의 음악 속에서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서러움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러운 가슴으로 뜨겁게 미쳐 서로의 몸을 탐하기도 할 것이며

그렇게 삶과 사랑에 미쳐버린 그들의,
낯선 이들과의 내일 없는 사랑도 그들의 음악 속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럴만한 핑계가 있으리라 섣불리 짐작해 본다.

(그렇다고 지금 내 앞에 붉은 장미를 입에 문 카르멘이 서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혼자다.)


저들의 음악은,

가슴속에 숨어 있는, 나도 모르는 내 속의 무엇을 자꾸 건드린다.
그들의 뜨겁고 서러운 선율이 거듭 육신을 훑어 내리면 나는 비로소 조금씩 미쳐버리고 싶다.
그들처럼 땀으로 번들거리는 목울대로 눈물을 삼키면서 미쳐버리고 싶다.


..............

밤이 깊어가도 나는 저 집시들과 탱고 속에 묻혀있으며

또한 아무도 나를 위로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술이라도 한 잔 권할만한 벗들은 모두 멀리 있어 지금쯤 각각 술이 곤드레가 되었든지
아니면 각종의 삶에 짓눌려서 숨죽여 불쌍한 잠에 빠져 있기가 십상이며
온 세상의 연인들은 오래 전에 죽거나 헤어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디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어찌할까. 이 갑작스런 몽상의 구덩이에 그대로 잠겨 있어야 할까?

그래. 이제는 핑계처럼 저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땡볕같이 달구어진 목소리로 더운 숨을 헐떡이면서 이제는 저들이 나를 붙잡는다.

그래도, 서러워도, 그 소실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없더라도
너희들처럼 그렇게 끈적끈적하고 뜨겁고 서러운 사랑을 한 번 해보라고?

그러게.
눈물나게 고맙지만, 이 사람아, 난 이제 청춘이 아닌데 그래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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