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에 걸려서 음악을 들어보자.
이 때, 홍콩 A형이니 북경 B형이니 하는,
비교적 회복이 더디고 후유증이 심한 독감으로 골라잡으면 더 좋다.
사나흘 제대로 앓아보면 온몸의 진기는 다 빠져나가고 뱀 허물 같은 껍데기만 남는다.
물론 눈치 채셨겠지만 다이어트에도 썩 유효하다.
할 수만 있다면 쓸데없는 생각들로 밤잠을 설친다든지 끼니를 걸러서.
몸을 일시적으로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힘에 부치는 무리한 육체노동을 씩씩하게 감행한 후에
난닝구만 입고 찬바람에 땀을 말리는 일도 썩 좋은 효과가 있다.
그리하여 뜬금없이 으실으실 추워지거나 까닭 없이 머리가 띵~ 해지면
일단 몸살감기의 초급 과정으로 진입했다는 신호이니 기뻐해도 된다.
증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두통과 조갈과 현기증,
거기에 고열까지 일습으로 갖추게 되어 일만 가지 인생이 다 귀찮아 질 때쯤 되면
열을 내린답시는 미명하에 냉방이 아주 잘 된 골방에 격리 되어 이불감고 누워서
음악만 냅다 들어보자.
고열에 들떴을 때 들리는 음악은 좀 다르다.
유념해야 할 것은, 평소에 자주 듣던 바로크 음악들,
그 중에서도 단선율이 고만고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음악들은
정신을 더욱 몽롱하게 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기타(guitar) 곡들도 마찬가지다.
고저 기복이 크고 음량의 기복도 큰 관현악곡들이 그래도 다소 정신을 쇄락하게 해 주지만
땡중 이 앓는 소리 같은 오르간 독주곡이라든지
고전 낭만 시대의 실내악들을 듣자하면
때로 증세가 악화되어 혼수상태를 방불케 하는 경우도 있다.
책이나 여타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 혹은 제 3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 등을 백안시 하며
그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며 의심귀 들린,
가급적 본인의 직접 체험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진지한 분들은
반드시 경험해 보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슈타커의 무반주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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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내리면 다시 들어야지.
내가 아무리 이 곡을 사랑해 마지않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40도에 육박하는 체열에서는 거의 몽환이다.
내친김에 대포 소리도 한 번 들어보자. 1812.
뻥! 뻥! 역시 뻥이 좀 과하다.
차이코프스키는 지가 쓰는 곡에 지가 휩쓸리는 듯한 혐의가 짙다.
그래도 오랜만에 들어보니 간만에 재미는 있다.
니꼴라에바의 사랑하는 바하 시리즈는 기피 음악이다. 기껏 돌아 온 정신을 다시 원위치 시킨다.
가사 있는 음악들은 모조리 금물이다.
멜로디는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가사만 귓구멍으로 파고든다.
사라 맥라클란의 앤젤은 구멍 뚫린 스폰지같이 들리는구나. 모래밭에서 달리기 하는 기분이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꼭꼭 숨은 마리아를 찾아서 운동장 백 바퀴 돌기.
소란스런 관현악곡들은 전쟁터다. 천지사방에 병장기 부딪는 소리로 요란하다.
이때쯤 노파심에서 잔소리 한마디 하는데 절대로 비니루 음반(LP)을 만져서는 안 된다.
오한으로 비롯된 진동계수가 한도를 넘어 바늘을 부질러먹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니 엘피보다 무조건 시디만 듣자.
그것조차도 귀찮으면. 에라, 삼천만의 음악방송 KBS FM이나 켜 놓고 자빠져버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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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니 역시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보장할 수 없는 촌평들이다.
다만 체열이 38.5도 이상일 때는 때에 따라 보장할 수도 있다.
책이건 음악이건 역시 머리가 멍청해지면 단순스토리가 더 잘 들린다.
독감으로 고열에 시달릴 때는 별로 철학적이고 싶지 않다. 사색적이고 싶지도 않다. 절대로.
그저 종합감기약 광고처럼 단순 명쾌해지고 싶다. 오로지.언제는 철학적이고 사색적 이기라도 했냐고?
뭐, 열에 들뜨면 헛소리도 나오기 마련이다. 지나가는 말 붙들고 쪼잔하게 시시콜콜 따지지 말자.
어떻든 이런 저런 음악들을 바꾸어 듣다보면 늘 느끼는 것이,
대부분의 음악은 일견 밝고 즐거워 보이는 것들도
듣다보면 어쩐지 아련한 슬픔을 바탕에 깔아 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의 삶이 그러해서 그러한 것일까?
회자정리. 제 아무리 기뻐 날뛰고 일생 행복에 겨워 넌더리가 나는 삶이라도
종래에는 기어코 슬프고야 마는 이승의 삶이 그리 만드는 것일까?
그런데 내가 시방 무슨 책임지지 못할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걸까?
아, 물론 열에 들뜨면 무슨 소린들 못하겠냐만, 감당 못할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자.
와병 중에 떠는 주접이라도 주접은 용서가 잘 안 된다.
결론은 단순하다. 독감은 하늘로 부터 받은 훌륭한 자아성찰의 도구다.
지극히 단순 명료한 육체적인 고통 하나로 인하여
고귀하고 우아한 척하던 인간의 밑바닥 성질이 다 드러난다.
일생 목숨 걸고 대외비로 지켜 오던 냄새 나는 괴춤 다 풀어 던지고,
품위 유지와 체면과 염치의 굴레에 갇혀 있던 너덜너덜한 본성들이 아주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사나흘 앓다보면 호모 사피엔스는 일찌감치 물 말아 먹어버리고
피테칸트로푸스나 크로마뇽인으로 변신을 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아니 아주 감동적으로 영장류로 변신 할 수도 있겠다. 으르릉...... 아주 사람을 잡는다니까. 일주일 쯤 앓고 육신의 진액을 다 뽑아내고 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공히 폐인이 따로 없다.
그러니 나이 먹어서 거지발싸개 꼴로 구겨져 방구석에 처박힌 채 구박 받지 않을려면 아프지 말자.
부록/// 독감에 관한 열두 가지 리포트.
1.
그냥 기분이 언짢다.
몇 시간 지속하는 경우도 있고 급성으로 총 맞은 듯이 일순간에 픽 꼬꾸라지는 경우도 있기는 있다.
2.
오한이 들기 시작한다.
처음엔 열은 안 나고 오한만 든다. 죄 지은 것도 없이 괜히 덜덜 떨린다. 그러니 모쪼록 착하게 살자.
3.
편도선이 붓는다. 목 안쪽으로 불쾌한 느낌이 깊어진다.
그리하여 먹는 것이 즐거워지지 않으므로 신경질이 곱절 늘어난다.
4.
드디어 열이 난다. 올 것이 왔으니 어금니 물고 극력 환영하자. 좋은 말 할 때 각오하는 편이 좋다.
5.
두통, 현기증, 조갈, 등이 동반된다. 속도 메스꺼워진다.
6.
추워서 못 견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덜덜 떤다.
7.
기침은 심오하게 깊어져 컹컹 늑대 소리를 낼 때쯤이면 인제는 잠도 안 온다.
시간은 더럽게 안 간다.
8.
온 몸의 뼈마디가 몇 개인지 셀 수 있다. 마디마다 쑤시고 아프니까.
9.
입 안이 소태가 된다.
맛을 느낄 수 없으므로 소금이나 간장을 무진장 퍼 넣게 된다. 당연히 갈증은 더 심해진다.
10.
점점 살기가 싫어진다.
11.
일찌기 세상을 뜨신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어진다.
12.
결국에는 나중에 발등을 찍고 후회 하더라도 일단 장가는 들고 볼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혹시라도 미모의 개인 간병인을 둘 형편이 된다면 또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다.
아니라면 혼자 뒤집어쓰고 한 번 앓아보시든지.
주의 사항/
1.
약 먹으면 일주일, 약 안 먹으면 칠일이면 낫는다는 낭설을 믿지 말자. 그대는 청춘이 아니다.
위의 증상 중 두 가지 이상이 일치한다면 만사 제쳐놓고 병원으로 달려가자.
밥 먹던 숟가락도 내 던지고 빨리 달려가자.
무조건 엄살떨어서 궁뎅이 까서 주사 맞고 끼니마다 약 한주먹씩 삼키자.
그래야 그나마 약기운으로나마 겨우 운신이라도 할 수가 있다.
별 일 있으랴 방심하거나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다가는
갱신도 못하고 걸레처럼 길바닥에 어질러지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음을 상기하자.
치사하게 감기 몸살 따위로 병원을 가냐고?
오기.... 오기나 쎈 척, 그런 거 그대의 일생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2.
운전은 되도록 삼가 하자. 맞은편의 차가 오는지 가는지도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래도 기어이 운전을 해야 할 형편이라면 무조건 열은 내려놓고 핸들을 잡으라.
얼음주머니를 뒤집어쓰든지 해열제를 바가지로 들이마시든지 체온계를 아주 박살 내 버리든지,
어찌 됐든 열은 내리고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 안 그러면 죽는다.
체열 38.5도는 혈중 알콜 농도 2.0 이랑 맞먹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큰 코 다친다. 매사에 눈을 의심해야 한다.
보고도 의심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3.
찬 음식, 술, 날 것 들을 먹지 말자. 꼭 먹고 싶다면 무조건 익혀서 먹자.
생선회도 익혀 먹고 과일은 구워 먹고 술은 연탄불에 두어 시간 졸여서 먹자.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착실히 먹어 놓자. 배가 고프지 않아도 저울에 달아서 쑤셔 넣자.
뱃속까지 비워두면 영양실조를 동반한 혼수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아, 물론 거룩한 호모 사피엔스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토하지 않을만큼만 먹어야 한다.
4.
열이 내리고 땀이 나기 시작하면 무조건 이불 뒤집어쓰고 땀을 빼자.
자의건 타의건 땀 빼고 나면 인물도 한 인물 더 난다.
땀 빼기에 유용한 도구로는 고전적으로는 구들막에 핫이불 뒤집어쓰기를 비롯해서
소주와 함께 대구 볼태기 찜을 섭취하는 것 까지 매우 다양한 방법이 있다.
다만 땀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부실한 몸을 끌고 황토찜질방이나 한증막에 기어들어가서 생기는 불상사에 대해서는 본인은 법적 도의적 책임을 면하고자 한다.
5.
아이들을 무조건 격리 시켜야 한다.
아이들을 격리시킬 수 없으면 스스로 격리되자. (예: 불 안 땐 골방이나 문간방 등등,)
거룩한 결단이라고 감동하실 필요는 없다.
어린놈들이 앓기 시작하면 칭병하고 누워서 쉴 수 있는 권리마저 깨끗이 반납해야 하기 때문이니까.
6.
아내나 남편도 격리 시키자. 둘 다 엎어지면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
또한 긴 병에 곱게 보이는 놈 없다.
며칠 앓다보면 눈구멍 퀭하게 드러누워서 유언무언의 괄시를 받을 각오는 당연지사다.
그래도 같이 앓아누워서 물 한 잔 먹고 싶어도 상호간에 벌벌 기어 다녀야 할 지경보다는
다소의 핍박을 감내하고서라도 한 사람은 성한 편이 낫다.
7.
하여간에 건강한 가족들과는 무조건 격리된 공간에서 구분된 도구를 사용하며
매우 불쌍하게 며칠을 보낼 각오를 하자.
8.
그리고 실컷 아프고 난 뒤에 무슨 큰 벼슬 한 것처럼 이렇게 떠들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