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리 샤콘느]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



언젠가 비탈리의 샤콘느 음반 표지에다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놓은 걸 보고는 혼자 픽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비탈리의 샤콘느를 듣다보면 그 비장한 멜로디의 흐름이 사뭇 처절한 바가 없지는 않으나, 사람이 겪어 내야하는 지극한 슬픔이라는 것이 그렇게 시종일관 드라마틱 하거나 비장한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온 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 나가고 나 이외의 모든 세상과 단절 된 느낌으로 한 없이 잦아들어 그만 아득하게 맥을 놓아버릴 그런 것이 슬픔이 아닐까 싶은데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밖으로 슬픔을 내지르는 곡은 사실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진짜 슬픔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지요. 불각시에 옆구리를 찔린 듯이, 길가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일시에 가슴이 무너져 내려서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슬픔이나 감동은 그렇게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탈리의 샤콘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나 슬퍼 죽겠으니 제발 나를 봐다오’ 하고 광고를 하는 듯 한, 지나치게 감성적인 멜로디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가슴이 무너지도록 슬프다면 그 슬픔을 포장하거나 가공해서 드러낼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뭐야, 창문 활짝 열어놓고 나 슬퍼 다 죽어간다아! 하고 동네방네 나발 부는 주제에,’

뭐 그런 비슷한 생각이지요. 개인적으로 그리 생각했다는 뜻이니 이 곡을 사랑하는 분들께서도 그리 고깝게 여기실 것 까지는 없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음악 중 턱없이 억장이 무너졌던 곡은 니콜라에바의 내가 사랑하는 바하 1집에 실려있는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 입니다. 
이 곡을 듣다보면 말할 듯 말할 듯 하다가 차마 다 말하지 못하고 결국 맥없이 주저앉아 눈물 삼키는 듯한 마지막 마디 때문에 정말 억장이 무너져 내리지요.


굳이 비교하자면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가 인간이 내면적으로 겪어 내야 할 슬픔이라면 비탈리의 샤콘느는 조금은 드라마틱하고 또 어느 한편으로는 조금은 자신의 감정을 바깥으로 치장한 느낌이 없지 않은, 그런 슬픔이란 느낌입니다.
하기야 사람마다 귀가 다르고 가슴이 다른데 누가 슬픔이나 절망을 일렬로 줄 서라 저울로 달아 값을 매기겠습니까만. 말하자면 내 개인적인 느낌이 그렇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으로, 그보다 더한 슬픔을 말하자면 나는 모든 소리를 잠그고 눈도 감아 버려야 한다는 쪽입니다.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지는데 사람의 소리로 그것을 포장하겠다는 시도부터가 불순하다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더러 미디어에서 보고 듣는 비극적인 현장 상황에다가 음악을 더빙해서 그럴싸하게 드라마화 시키는 짓을 극도로 혐오하는 편입니다. 도대체 타인의 절망이나 슬픔을 재료로 삼아서 팔아먹을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그런 생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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