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비니루: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CD에 빗대서 LP를 말할 때 오디오쟁이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속어입니다.]


인터넷 장터에서 중앙일보사에서 찍어 낸 음악의 유산을 노 오픈으로 한 질 구했습니다.
한 장 빠진 한 질을 갖고 있었는데 한 이십년 넘게 듣다보니 고물딱지가 다 돼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또 구했습니다.
원래는 한 장에 육칠천 원 꼴로 팔리던 비싼 음반이었습니다. 라이센스 한 장에 사천 원 남짓 하던 시절이니 꽤 비싼 판때기였지요. 뭐 갖고 있던 것도 제 값 주고 샀던 건 아니고


팔십년대 중반 어느 쯤에 내가 작은 찻집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진주시내 일대를 주름잡고 다니던 찐드기 세일즈맨한테 반 쯤 꼬여서 거의 지갑을 열 뻔 했었는데 뭐 얄팍한 지갑때매 벌벌 떨다가 그만 다시 접었지요. (어슴하나마 기억에 한 질에 사오십 만원이었으니 80년대 중반에 사오십만원이면 만만한 액수가 아니지요?) 
그런데 그 즈음의 어느 날 밤 내 찻집으로 웬 외팔이 사나이가 하나 들어섭디다.
진짜 외팔이는 아니고 한 팔에 깁스를 한 사내였는데 이 친구가 들고 들어 온 게 음악의 유산 전집이었습니다.


LP 60장에 그 무게만큼 무거운 책 열한 권까지 한 팔로 낑낑 이고지고 올라와서는 한다는 말씀이

자기는 저기 어디쯤에서 다방 하던 사람인데 예의 그 찐드기 세일즈맨한테 녹아 떨어져서 사기는 샀지만
도대체 재미가 없어 못 듣겠으니 제발 이것 좀 헐값으로 사라고 그러데요.
소문에 듣자하니 내 찻집에는 이런 재미없는 음반들을 얼씨고 좋다 밤이고 낮이고 돌려대고 있다더라 그러면서.


아이고 나는 그거 살 돈도 없고

 1권 빼고는 거진 내가 가진 음반들이랑 중복되는 곡들이라 살 마음 없다 그랬더니
그 친구 잠시 난감해 하다가 그럼 1권만이라도 사 달라 그럽디다.
그 때 돈으로 판 여섯 장에 2만원 줬나 그랬을걸요.
아 그래서 그 전집 중에 늘 탐나던 1권 '서양음악의 탄생' 편을 얼결에 헐값으로 손에 넣었지요.


그런데 이 친구 또 부탁이 있다는데 그래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보자 하니

지가 시방 외팔이가 되어서 이 무거운 물건을 이고지고 못 댕기겠으니 내 찻집에 보관을 좀 했으면 한다고요. 그럼 보관 하면서 좀 꺼내 들어봐도 무관 하겠냐 슬쩍 찔러봤더니 아 얼마든지 많이 들으라네요.
그래서 사나흘 후에 다시 찾으러 오겠노라고 그러면서 그 사나이는 커피 한 잔 마시고 나갔는데
그 길로 그 친구 이십년이 넘어 삼십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전화도 없고 찾아오지도 않고
고만 종무소식이라는 이야깁니다.


결국은 60장에서 1장 빠진 59장을 2만원에 산 셈이 되고야 말았는데

수년간 이 판때기를 쉬엄쉬엄 돌려보니
그 때 그 세일즈맨이 입에 거품을 물던 말들이 모조리 꽝은 아니었던 것이,
평소에 탐 내던 1권 서양음악의 탄생 편은 말할 것도 없이
편집이나 녹음이나 순전히 구색 일색이던 흔해빠진 전집류는 아니더라는 겁니다. 


하여간 요즘 장터에 보니 이 음반이 더러 돌아 댕기는데 거의 한 장에 천원 꼴로 돌아 댕기데요.

이거 이만큼 천덕꾸러기 취급받을 판은 아니다 싶은 마음에 조금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그 덕에 싼 값으로 구했으니 그도 참 사람 팔자처럼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내사 뭐 한 삼십년 넘게 갖고 있는 소스의 주종이 비닐 판때기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만
요즘 인터넷 장터에 오백 원 천 원 싸구려 돗대기로 돌아 댕기는 라이센스 비닐 판때기들,
그거 그리 천대받을 물건들 아니라는 거지요.


지그럭 툭탁 잡음 투성이 비니루가 무신 음반 축에나 드냐!

웃기네! 늬들이 비니루 맛을 알아?


뭐 이런 식으로 멱살잡이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니깐 시비 걸지는 마시고.
시디가 좋으냐 엘피가 좋으냐 귀한 밥 먹고 일없이 싸울 일이 아니잖아요?

제 좋은 거 지 알아서 듣도록 그냥 내비 두면 되는 거지요.
상대 당에 대한 가열 찬 비난은 같은 편끼리 모였을 때 술안주 삼아 씹으면 되니깐 그걸로 만족들 하시고.
흑돼지 집에 돼지갈비 맛이 정말 죽이더라, 그러는 사람한테
그거 엉터리다 멱살 잡고 끌어 올려서는 성분 분석 표 쪼가리 들이대면서
길 건너 똥돼지 집 삼겹살이 제대로 된 돼지 맛이라고 핏대 세우고 박박 우기면 대체 그거 뭔일이래요?


아, 하여간에 요즘 라이센스 판때기들이 하도 고물 취급을 받다보니

그거 나중에는 아예 저울에 달아서 근으로 팔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해 보지만,
뭐 오리지날 원판이라고 별로 신통치 않은 연주들이 걸핏하면 장당 만원 이 만원 우습게 홋가하는 걸 보면
머잖아 라이센스도 값 뛸 날이 오지 않을까 난망한 기대도 한 번 품어 봅니다.


어쨌든 어제 그놈의 사연 어린 음악의 유산 판때기를

비닐도 뜯지 않은 새 걸로 받아 들고 턴테이블에 얹고 보니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소리에
격세지감이라든지 상전벽해, 뭐 이런 생각들도 나고 해서 애매한 시간 주절주절 한 번 때워 봅니다.
어찌 됐든 가격대비로 갑자을축 따져보면 꽤 괜찮은 음반이라는 이야기지요.



아하, 혹시라도 그 때 그 사나이가 이 글을 보신다면 얼른 만나서 일단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고 난 뒤에

반품을 하든지 정산을 하든지 해야겠지요. 한 이삼십년 묵은 대여료를 내야 할 지 보관료를 받아야 할 지는 둘이서 가위바위보로 결판을 내야 할까요.
아니, 물론 막걸리 값이야 얼마든지 내가 내고말고지요. 동동주에 파전이라도 좋고.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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