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한 십여 년 전 쯤 이야깁니다.

오래 앓던 천식으로 몸이 약해져서 유치원도 못가고 집에서 책만 보며 애비와 씨름하던 어린놈이 어느 날엔가 어디서 봤는지 보조바퀴 달린 자전거에 혼이 나가버렸습니다.


어지간한 장난감에도 좀처럼 욕심을 내지 않던 놈이 아빠 자전거, 아빠 자전거,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전거를 사 내라고 석 달 열흘을 졸라대는데 자식 병 수발 한다고 귓구멍 틀어막은 채로 밥벌이까지 접어버렸던 애비는 자전거를 사 줄 재주가 없었습니다.

새끼 곁을 지키는 것만 소중한 줄 알았지 새끼 소원도 애비에게 달린 것을 몰랐던 어리석은 애비였지요. 어린놈은 자전거에 목을 매고 애비는 빈 주머니만 뒤적거립니다. 이런 막막한 세상아.


제 의논과는 달리 하던 일 다 접고 애한테만 매달린 후로 아내와도 서로 어긋나서 불편했던 때였으니 내 딴에도 허깨비 같은 자존심은 남아서는 말 빚 질까봐 입은 딱 닫아걸고 혼자 냉가슴만 앓았지요.

그렇게 그놈의 자전거 때문에 어린놈과 밀고 당기던 그 어느 날 철딱서니 없이 만만한 애비만 죽어라고 졸라대는 어린놈을 달래다 못해 그만 소리를 꽥 질러서 울려놓고는 훌쩍거리는 어린놈을 보자 하니 기가 막히네요. 그래, 혼자 우울해서 탈기를 하고 방 한 구석에 멍하니 처박혀 있자하니 눈에 띄는 건 고물 오디오에 판때기 밖에 없습니다.


..........아뿔사!!!

이런 등신 같은 인간을 봤나. 자전거에 목숨 거는 어린 새끼를 두고 삼년 가야 손 한 번 안가는 판때기들은 잔뜩 보듬고 있는 꼴이라니.

그 날로 판꽂이를 뒤집어엎어서 손 안 간다는 팔백 장 뽑아내어 트렁크며 뒷자리에 싣고는 중고 음반 산다는 곳 찾아 어린놈을 옆에 태우고 부산으로 대구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앗따, 이놈아. 애비도 돈 생겼구나. 인제는 자전거 사러 가자.

그 날로 반짝반짝 노란 자전거를 사서 싣고 왔습니다.

바퀴살에 방울까지 달아서 굴러가면 도로롱 소리도 나는 아주 멋진 자전거였습니다.

비닐도 안 벗긴 새 자전거를 손에 쥔 어린놈은 입 꼬리가 귀에 걸려서 연신 싱글벙글, 애 엄마는 무슨 돈이냐고 물었지만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입 다물고 암말도 안했었지요.


그렇지요. 아무리 그 당시에 손 안 가는 음반이었다 해도 그렇지. 그거, 딴에는 꽤나 어지럽게 살아왔던 일생, 내 손때에 내 숨소리까지 묻어있는 그런 음반들이었습니다. 참, 내 자식 소원이 아니었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을 그런 난리였지요.


어찌 됐든 그 놈의 자전거, 어린놈은 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지고 무릎 깨고 하면서 익힌 솜씨로 등교 길이며 동네 나들이며 그리도 신나게 끌고 다니더니 점점 키가 크고 무릎이 핸들에 닿을 때가 되니 더 이상 타지 못하고 언젠가부터 헛간에 서 있었습니다. 그놈의 묘한 이력 때문에 남 줄 생각도 못하고, 버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세워만 놓았었습니다. 반짝이던 핸들도 빨갛게 녹이 슬고 바람 빠진 타이어는 납작하게 삭았습니다.


몇 년을 그냥 그대로 세워 두었습니다.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에 한번씩 건드려보기도 하고 어쩌다 심사가 사나운 날에는 툭 차보기도 했지만 하도 낡아버려서 작은 놈 줄 생각도 못하고 그 놈의 자전거, 헛간에 세워 둔 채로 눈길만 주고받고 몇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그 어느 날 오후에 무슨 일인지 마음이 선듯해서 이웃집 텃밭에 비닐하우스 뜯으러 온 고물장수 할아버지에게 실어 보냈습니다.
집에 있는 쇠붙이 이것저것 실어 올리다가 충동적으로 얼른 실어 보내 놓고서는, 아니다, 이게 그냥 보낼 일이 아니다 싶어서 그 할아버지 얼른 뒤따라 가서 사진 두어장 찍어 왔지요. 아주 청승이 늘어졌습니다. 
 


‘아빠, 내 자전거 버렸어?’


그 날 밤, 이제 다 커버린 어린놈은 낮에 찍어 둔 자전거 사진을 만지작거리는 날 보고 잠시 들여다보는 듯 하더니 심드렁하게 묻고는 그냥 그만이었습니다. 


.......에라 이놈아, 이 자전거가 그냥 자전거인줄 아느냐.


꼭 정 붙이 사람이나 짐승을 보낸 듯 공연히 마음이 헛헛하고 우울해져서 고물 값으로 받은 삼천 원, 그 돈 손에 쥐고 하도 마음이 얄궂어 차마 쓰지를 못하고 아이 통장에 그냥 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을 보다가 혼자서 중얼중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뭐 꼭 인사라기보다는 그냥 차마 그냥 보내기가 애잔해서 마음으로 그렇게 보내 주었다는 말이지요.


........

잘 가라.
그리고 펄펄 끓는 용광로에 몸 한 번 덥혔다가, 다시 태어날 때도 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더 노란 자전거로 태어나 노랑 자전거에 혹해 애비를 졸라대는 작은 계집아이에게로 가거라. 잘 가거라.



200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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