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아미 코러스. 직역하자면 소련 육군 합창단쯤 될까.

어쩐지 이름이 좀 으스스 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어릴 때부터 받았던 냉전적 세뇌교육의 효과겠지?

이미 해체되어 흔적도 없는 소련이라는 공룡.

미국이라는 괴물과 맞붙어 겨룰만한 거의 유일한 괴물이었던 소련.


썩어빠진 이데올로기나 정치 같은 건 제껴 두자.

지구를 수십 번 결딴 낼 수 있다는 몇 천개가 넘는다는 끔찍한 핵미사일도 지금은 잊자.

문어발을 가진 불가사리같이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을 빨아들여 거대한 예술적 잡탕을 만들어놓은 잡동사니 미국을 비롯해서 그 알토란같은 아티스트들을 수시로 서방에 빼앗기면서도 또 다시 어디선가 귀신같이 홀연히 나타나곤 하던 겨울나라의 우울한 아티스트들. 그 추운 나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악의 심연,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강철같은 타건의 호로비츠, 엄청난 스케일과 절제가 공존하는 길렐스, 검은 타이즈의 긴 생머리 뮬로바,

감성 과다로 허구헌날 손수건을 쥐어 짤 것 같은 우울한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

니콜라에바, 오일장 장바닥 좌판 어디에선가 만날 것 같은 뚱댕이 할머니...

오이스트라흐, 아아... 그 존재만으로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을 그 드럼통 아저씨.

그 뿐인가, 리히테르, 코간, 유리 바쉬메트, 등등, 이름만으로도 능히 그 주변의 별들이 빛을 잃을 거성들.

그들의 바탕 위에서 생겨났을지, 아니면 그들의 바탕이 되었을지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대륙의 뿌리. 소비에트 아미 코러스라는 괴물들의 집단.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구경도 못해 본 그 얼음 덮인 대륙이 느껴진다.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그들의 등 뒤에 언제나 거인처럼 누워 있다는 순백의 우크라이나 산맥이 눈에 보인다. 

끝없는 동토를 거세게 할퀴고 지나가는 눈보라 속에, 노쇠하고 지친 거인처럼 더러 눕고 더러 버티고 선 산맥들. 새까만 바탕에 시뻘건 글씨로 공산당 기분을 한껏 살린 EMI의 재킷을 보면서 그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 추운나라를 그리워한다.


다듬지도 않은 듯, 꾸미지도 않은 듯, 제 하고 싶은 소리, 지르고 싶은 소리는 제 멋대로 꽥 꽥 질러대는 듯한,

저 가슴 속 깊은 아래쪽의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후벼 파고 긁어내는 듯한 그들의 야만적인 목소리.

정수리를 벌겋게 강타하는 불덩어리 같은 원색의 테너,

가슴팍을 부르르 떨리도록 후벼 파는 꺼칠꺼칠한 바리톤,

땅 속까지 긁어내는 듯한 까마득한 베이스.

번쩍이는 금관의 압도적인 울림 속에 언뜻언뜻 날선 비수처럼 가슴을 베어내는 발랄라이카의 트레몰로.


애니로리, 초원의 노래, 반두라, 벌판에 선 자작나무, 슬라비앙카, 카츄사, 제비, 손으로 꼽기에도 벅찬 그들의 절창들. 그들이 부르면 연가도 군가가 되고 군가도 연가가 된다.

그들은 지금 남아 있는지? 나라는 찢어지고, 군대가 재편되고, 그래도 그들의 예술 혼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서 저렇게 우울한 망령 같은 노래들을 쏟아내고 있는지.


아아,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다지 씩씩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명색이 사내로 태어났건만

그 놈의 거칠고 야만적인 슬라브 족속의 사내들이 쏟아내는 군가들은 어쩌면 그리도 이 나이 들 만큼 든 사내의 살을 저미고 가슴을 에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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