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아침저녁으로 지겹게 보는 바다. 그래서 그 존재감마저 희미한 바다를 오늘도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짙은 남색으로 투명해 보이는 모범적인 바다였습니다.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가고서는 바다 밑이 휘딱 뒤집어졌는지 눈 닿는 데까지 온통 누런 황토 물이었는데 어느새 다 가라앉았나 봅니다.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겠네.
어부들은 고기가 잘 안 잡힐 때 곧잘 이렇게 투덜거리지요.

'괴기가 씨가 말랐는갑다. 물밑이 한 번 뒤비씨져야지....'

진짜로 물밑이 뒤집어지면 고기가 많이 잡히는지 어떤지 나는 모릅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간에 요 며칠 사이에 밤바다엔 한 동안 뜸하던 오징어 낚시 배들이 훤하게 불을 켜놓고 있기는 합니다.


/갈매기

읍내 도서관 가는 길에 지나친 바닷가에서는 근사해 보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갈매기 떼들이 그럴듯하게 무리 지어 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놈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사실 아주 지저분하고 사나운 놈들입니다. 이놈들은 선창가에서 썩어빠진 생선 내장이니 찌꺼기들을 탐욕스럽게 쪼아 물고 다니며 먹을 게 모자란다 싶으면 저그들끼리 아우성치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갈매기의 부리는 어물전 생선 아지매들의 갈고리마냥 아주 매끄럽게 휘어져 있지요. 저렇게 사납게 구는 걸 보면 혹시 맹금류는 아닐까요?
이 부근에서 갈매기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바닷가에서 제법 떨어진 수산물 가공 공장의 덕장이나 쓰레기 더미입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꽤 낭만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갈매기들은 알고 보면 어디 주워 먹을 게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웅크리고 앉은 배고픈 놈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긴 좀 건방진 갈매기가 있다면
‘지구상에서 너희 인간이란 족속보다 포악하고 더러운 종족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보라’며 혀를 찰 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 할 말 없지요 뭐.


/시장

도서관 다녀오는 김에 대파를 사 오라길래 오일장에 들어섰습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대파를 사지 못하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무슨 일인지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아지매들을 보았습니다. 요즘에 시골 장이라고 뜨뜻하고 푸근하고 자질구레한 재미만을 찾다간 뒤통수 얻어맞는 수도 있습니다. 살아 가야할 절박함에서는 촌 아지매들이 더 그악스럽지요. 도덕책 펴 놓고 나무랄 형편도 아닙니다. 장날 나가보면 장바닥 한 바닥은 대부분 차떼기로 끌고 온 전문 장똘뱅이들이 거의 장악했습니다. 올망졸망 남새 푸성귀 뜯어 온 동네 할매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무공해 논두렁 표라고 애호박 한 개 삼천 원!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값을 태연히 부르는 할매들도 적지 않습니다. 애호박 아니라도 이제는 국산품은 죄 비쌉니다. 동네 할매들도 중국산 수입 참깨니 곡식들을 어디선가 받아서 전을 벌이지요. 재미없는 세상입니다.



/보건소

작은아이가 열이 올라서 동네 보건소를 찾았습니다. 애매한 시각이면 어지간한 병원들은 문닫아 걸 시간이니 믿을 건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 의료기관 뿐입니다.


보건지소.

'의사 선생님이 개인적인 볼일로 출타 하셨습니다.'

여긴 걸핏하면 출장에 툭하면 출타입니다. 간헐성 무의촌에 살고 있습니다.


면 소재지 보건소.

'무의촌에 왕진 가셨는데요....'

뭐, 답답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군 보건소.

'어린이는 소아과로 가세요....약이니 주사니 용량이 달라서 어쩌고.... 의사 선생님들이 어린애들은 안 보실라고 저쩌고.'


결국 못된 성질머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규정에 보건소에선 애들을 안 보게 그리 되었냐니 그건 아니랍니다. 그럼 의학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 여기 와 있는 거냐니 그것도 아니랍니다. 꾸부정한 목소리로 아주 조용히, 뒤집어 엎어버리기 전에 빨리 진료하고 약 처방하라고 을러댔습니다.


고래로 나는 이런 일에는 아주 싸움패입니다. 주먹이 오고 가고 날고 뛰는 싸움이면 또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이건 틀렸다 하고 결심만 섰다하면 옳든 그르든 상대방은 일단 나랑 사이좋게 뻘 구덩이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아주 못된 성질머리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

근래 들어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원래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요즘의 이 생각들은 나를 몹시 상하게 합니다.
선 곳은 선 곳대로 앉은자리는 앉은자리대로 성글다가 배다가 스름스름 제자리 찾아 가라앉습니다.
무슨 선문답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나는 다혈질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과하게 차가운 편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서투른 탓에 더러더러 허방다리를 짚습니다. 살다보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허방다리도 때로는 짚어볼 만도 하지만 이 나이쯤 되어서 한 번 휘청거리고 보면 참 입맛이 쓴 것이 기분이 더럽습니다. 이러구 변설은 풀어 쌓지만 기실은 다 내 탓이지요. 누가 날 개 목줄 걸어 끌어가기라도 했단 말인지 원.

지붕이 바람 타는 소리를 냅니다. 밤마다 내내 흐리고 바람 불었는데 지금은 별이라도 몇 떴는지.


/산

갑자기 산에 들고 싶어 허둥거렸었습니다.

하긴 우리 집 뒤에도 병풍 같은 산들이 버티고 서 있으니 딱이 꼬집어 말하자면 지리산입니다. 지리산에 들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지리산이 멉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당연히 멀지만, 사적으로도 지금은 너무 멉니다.
재삼 새삼 떠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십 여 년 전 칠선 계곡 어느 폭포 벼랑 끝에 혼자 천막 치고 벼락 치듯 요란한 물소리에 둥실 떠 오른 듯 누워서 그 미치도록 맑은 별빛보고 산 짐승처럼 목 놓아 소리소리 지르며 보았던 별빛. 그거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불현듯 어찌 세상을 잘못 살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엿 같은 날에.



2003.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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