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디오쟁이라는 핑계로 너무 근사한 소리만 찾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쳇 베이커의 이빨 빠진 보컬과 그의 김새는 트럼펫 소리를 듣다가 하게 된 생각입니다.

물론 음악이란 것이 온갖 예술 일반과 마찬가지로 기초란 것이 무척 중요하긴 하겠지만, 그리고 그 기초가 튼튼히 말뚝처럼 박혀 있어야만 대체로 좋은 소리가 나오게 되어있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쳇 베이커의 김새는 트럼펫 소리가 기초가 없다고는 강변하지 못할 것이 그 기초란 것이 무엇에 기준을 두느냐가 관건이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학교에서 우수한 선생님들한테 도제식으로 강 훈련을 받았다 하더라도 일껏 불어 제낀 나발이, 또는 팔뚝에 알통이 배기도록 긁어댄 비올이 가슴패기 한 구석도 달싹거리지 못할 맹물인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습니까?

태권도 팔 단짜리하고 뒷골목 쌈대장 하고 붙으면 누가 이기냐고 소싯적에 골목 어귀에서 참 숱하게 박박 우기고 옥신각신 한 것처럼, 꿩 잡는 게 매라고 무엇이 어떻게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느냐가 문제이지 실크 브라우스 입고 나비넥타이 맨 근사한 연주자들의 우아하고 고상한 연주라야만이 우리가 감동을 받는 건 아니지 않느냐,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쥐도 죽고 새도 잠든 시꺼먼 오밤중에 새끼들 다 재우고 혼자 소주 한 잔 놓고 퀭하니 풀어져서 듣는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에서 그 옛날 남강 고수부지가 흥건하도록 낭자한 나발 소리에 취해서 아 그 이뿐 채색 옷 입고 허리가 활처럼 휘고 얼굴에는 백새같이 분칠하고 쥐 잡아 먹은 듯 새빨갛게 연지 칠하고, 그래도 절대로 웃지 않던, 웃지 않아서 너무 예쁘고 너무 예뻐서 눈물나게 슬프던 계집아이가 보고 싶어서 컴컴하게 어두운 천막 안에서 그 아이 휙 휙 날아다닐 때 혹시나 다칠까 떨어질까 조마조마 박수치다가 아쉽고 애틋하고 ... 나도 그만 저 계집아이 따라서 서커스나 따라 갈까, 어리둥절 허랑한 채로 천막 나서면 원숭이 두어 마리 말뚝에 매 놓고 거기 늙수구리 사나희 두어 사람 다음 파수 손님 끌라고 울긋불긋 나이롱 채색 옷 입고 찬바람 부는 하늘로 불어제끼던 혼비백산 고만 스산한 가슴패기 발기발기 뜯어 놓던 처량한 나발소리, 쳇 베이커의 김빠진 트럼펫에서 그걸 들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예술의 기본정신일진대 그 소리 사진으로 백혀 놓을 수만 있었다면 지금 어떨까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봤던, 댐 수몰 지역으로 지정 된 학교에서 마지막 운동회. 거기서 맑은 하늘로 솟아오르던 브라스밴드 소리를 사진으로 박아놓지 못함을 한탄하던, 그럼요, 소리에도 적막한 쓸쓸함이 있고말고요!


그러게 예술이란 것이 억만금 비싼 돈 들여서야 거드럭거리며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예술이 아니지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개뿔도 없으면서 으리으리하게 차려놓은 오디오며 장비들을 보면 으라차차 엄청나고 대단 하구나 감탄은 할망정 거기서 팍 삭아빠진 나발소리나 물 빠진 듯한 낡은 소리 안나오면 그래, 오늘 비싼 물건 구경 했구나, 그거 이상 감흥이 없는 거지요. 


기왕에 쳇 베이커 이야기로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오디오란 것도 그 트럼펫 소리처럼 이게 정답이다 하고 기막히게 뽑아 주는 오디오라는 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귀마다 다르고 추억의 근저부터가 다들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값이나 브랜드가 문제가 아니라, 뭐라고 딱 집어 낼 수는 없어도 어쩐지 지한테 안 맞아서 석 달 열흘을 시난고난 바꿔대면서 패대기를 치다가 어느 날, 그때의 제 감성하고 딱 맞아 떨어지면 아이고 이게 최고다, 내가 여태 어딜 헤메고 다녔더냐, 가진 물건 다 갖다 버리고 거품 물고 온 동네 쌍 나발 불어대지만 그거 실눈 뜨고 흘겨보는 옆집 사는 김 서방은 그 사랑 몇 달 가나 두고 보자 시큰둥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기야 뭐 세상 사는 꼴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불현듯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연 가슴을 파고들어 눈물짓는데 그거 같이 들어보자고 일껏 불러 낸 친구는 이게 뭐냐 뭔 소리냐 연신 하품일 수도 있지요. 암사슴 다방에 미쓰 리가 지 눈에 콩팥이라 가슴 밤마다 쥐어뜯으며 죽고 못 살아도 만두집 왕 서방은 콧구멍만 후비고 앉았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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