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을 실어 드릴 수가 없어요.
더 못갑니다.
녹 슬고 깨지고 부러지고 바퀴도 주저 앉았어요. 이제 더는 당신을 실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왜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요?
........
아, 혹시 당신도 죽었나요?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이나 물상 중의 한 순간을 포착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장면을 포착해 내는 것은 손에 카메라를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길게는 몇 초에서 짧게는 수천분의 일초라는 참 짧은 순간에 담아내는 그림이지만 사람의 삶에 대한 애정과 진지한 생각이 없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진을 만들어 내기는 참 어렵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누적된 삶이 없다면 절대로 잡아 낼 수 없는 그림이다.
좋은 사진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사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진은 그림보다는 글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동영상이 산문이나 소설처럼 서술적이라면 사진은 시처럼 직관적이다. 그래서 그런 그림을 잡아내는 사람들을 눈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주마간산으로 얼핏 지나치다가도 나도 모르게 붙잡혀서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는 사진들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구도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어떤 상황. 그리고 사람의 눈으로 느낄 수 없는 어떤 순간적인 광학적인 현상같은 것들. 같은 사물을 보는 눈이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볼수록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연출된 느낌이 드는 사진들에는 그다지 호감이 가지를 않는다.
꼭 연출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사진들이 있다. 그런 사진들은 어찌 보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써 나간 실용문의 느낌이다. 사진 자체가 주는 예술적인 감흥보다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써 나가기 시작하는 글은 자연스럽지 않다.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목도 뻣뻣해지고. 아무래도 자신의 의도나 목적에 국한해서 사물을 보게 되기 때문에 시야도 좁아질 수 밖에 없고. 사진이라고 다를까. 어느 경우에나 작가가 작품보다 앞에 나서고 싶을 때 생기는 현상이지. 굳이 자신의 얼굴이나 이름을 널리 떨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별로 흠잡을 곳도 없지만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아무 느낌도 없는 사진도 매력 없기는 매한가지. 나는 그런 사진들을 통칭 달력 사진이라고 칭한다. 글로 비교하자면 아무런 생각이 들어있지 않은, 아름다운 단어들만 나열해 놓은 문장인 셈이지. 자신의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 글쓴이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은 평면적인 풍경 묘사와 똑 같은.
입맛이 너무 까다롭다고?
그러게 그럴지도. 너는 그런 달력 사진이라도 한 장 만들어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번에 코가 납작해져서 할 말이 없지. 하지만 나는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아무 느낌이 없는 달력 사진보다는 서투르고 빈 곳이 있더라도 내게 뭔가를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고, 이야기를 걸어오는 그런 그림이 더 좋아. 사진은 사람이 찍는 것이고 똑 같은 피사체를 보고도 어떤 사람의 사진이냐에 따라 사진에 담겨지는 이야기가 달라져야하니까.
까다롭게 굴어서 매우 송구스럽지만 입맛은 순전히 주관적인 것이니 조금 마땅찮더라도 그냥 비 맞은 중이 고개 넘어 가는가보다 그리 여기시기를 바랄 밖에.
좋은 사진을 보고 느낄 때의 감흥은 좋은 시를 읽었을 때와 같다. 좋은 시가 오래 읽히는 것 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도 그렇게 보고 또 보게 된다. 때로는 나도 어떻게 저런 멋진 사진을 남길 수는 없을까 하고 애꿎은 내 카메라를 흘겨 볼 때도 있지만 그 때 그 시절 그 열악한 성능의 필름 카메라로 가슴을 치는 걸작들을 남긴 그 시대의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딱 고만 꿀먹은 벙어리 시늉만 할 밖에. 그러게 사진은 카메라가 아닌 사람이 찍는 거라니까!
나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속 깊은 그림으로 담아내는 이들에게 경탄과 존경을 보낸다. 나에게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가르쳐 주는 말 없는 스승들이므로. 그리고 그대들은 눈으로 시를 쓰고 그것을 아무 대가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아름다운 시인들이므로.
일단 나치에 관련된 역사적인 논란거리에 대해서는 밀어 두기로 하자. 나는 카라얀이라는 자연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노란 간판 모양의 성음 라이센스 음반으로 만났던, 지금은 죽고 없는 어떤 음악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니까.
이런 저런 사료나 기록들을 보면 그의 전력이나 처세술 같은 쪽으로는 일면 수긍이 가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음악까지도 싸구려에 쇼맨십만으로 발라 놓은 깡통이라는 견해에는 선뜻 공감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내 입맛에 비해 조미료끼가 다소 있다는 것은 동의를 하는 편이다. 다만 그것도 느끼해서 못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 사람의 예술과 인격을 동일선상에 놓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나는 일단 한 인간의 도덕률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을 강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도 도마에 올리려면 또 논란거리가 될 충분한 소지가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밀어 두자.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은 각자의 신념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자칫하면 험악한 분위기를 자청할 우려도 없지 않은데다가 안그래도 심란한 봄날에 이런 무거운 주제로 갑론을박하자면 뒷심도 딸릴 것 같고.
즐겨 뽑아드는 애장반에서는 꽤 오래전에 빠졌지만 누가 뭐래도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5번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연주다. 물론 누구에게나 각자의 추억에 뿌리박은 추억의 명반이야 한 두 장쯤 있기 마련이지만 나에게는 열 몇 살 때 호마이카 장전축 앞에 주저앉아 주술에 걸린 듯 꼼짝없이 듣고 있었던 그 땡판(그 당시 한 장에 백원, 이백원씩 하던 불법 해적판)이 절대 버릴 수 없는 추억의 명반이다.
게다가 상업주의에 쇼맨십이라지만 칠팔십 년대만 해도 비주얼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정보마저도 터무니없이 취약했던 촌구석에서의 카라얀은 비주얼이건 쇼맨십이건 도대체 사진조차도 그리 쉽사리 구경 할 수 없었으니 비주얼에 의한 현혹도 미혹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듣는 비난과 악평도 음악 외적인 요소와 함께 그의 음악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불공평한 분위기에 편승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상과 철학이 구린 예술가가 어떻게 아름답고 숭고한 결과물을 내 놓을 수 있겠느냐며 추상같이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의 결연한 비판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갖고는 있겠지만 나는 블라인드 테스트로 음악을 듣기만 해서는 연주자의 사상과 도덕성까지 구별해 낼 자신이 없다. 심지 깊은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도 물론 좋아하지만 굳이 선입견을 갖고 카라얀의 연주를 기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아, 혹시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도 카라얀이 대체로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냄새가 나는 곡들보다는 드라마틱하고 문학적인 색채가 짙은 곡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간혹 그렇게 느끼기도 했고. 그렇다면 나도 그에 대한 약간의 편견은 갖고 있다는 뜻일까.
그렇더라도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내가 즐겨 뽑아드는, 사춘기 때부터 내 가슴을 흠씬 적셔 온 카라얀이 남긴 수많은 명연주들을 배척하고 기피할 생각이 없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약간 구린내 나는 명언을 여기다 갖다 붙여도 될까.
.............안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