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진 것이 없는데 안이는 가진 것이 많아서 신기해요.’


꼬맹이의 친구 하영이입니다.
반에서 제일 작은 친구입니다. 키도 작고 몸도 가벼워서 우리 집 꼬맹이랑 같이 서 있으면 아주 동생뻘로 보입니다. 우리 아이가 너무 커 보여서 좀 열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안이는 자기 방도 있고 자전거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인형도 많고 집에 화장실도 두 개고... 정말 신기해요.’

‘부럽다’도 아니고 ‘샘 난다’도 아니고 신기하답니다.
무슨 교육을 받아서 그리 표현하는 것 같지는 않고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 것으로 보여서 오히려 내가 더 신기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하영이가 생각하듯 그럴싸하게 잘 사는 집은 절대 아닙니다. 길 가다 오며 가며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보통의 서민일 뿐입니다. 시골 마을 서른 평 남짓 장마철이면 물 새는 스레트 지붕 이고 살고 있습니다. 신기한 부잣집 전혀 아닙니다.

‘안이 어머니 안녕하세요. 작년에 안이 생일날 뵈었던 하영이에요.’

애 엄마는 하영이의 인사말에 여운이 남는다고 몇 번을 거푸 들먹입니다.
요즘 ‘뵈었던’ 이라는 단어를 쓰는 애가 어디 있냐고 감탄입니다.
때로는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너무 비현실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생뚱맞고 약간은 희극적인 느낌마저 없지 않지만 아무튼 보기 드문 사고방식을 가진 열 살짜리 아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혹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겉으로 드러내고 화를 내거나 삐지는 일이 없을 그런 아이로 보입니다. 그냥 혼자 돌아 서서 눈물 찍어 내고 혼자 삭이는 그런 몽실이 같은 옛날 아이. 운전을 하면서 애 엄마와 둘이서 하영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자니 뒷자리에 있던 꼬맹이가 제 친구라고 한 마디 거듭니다.

‘하영이 착해요.’

그래. 아빠가 봐도 착한 것 같구나.
요새 세상에는 저렇게 착한 것도 신기한 일이 됩니다. 저렇게 아주 턱이 갸웃 돌아 갈 만큼 착해버리면 그것도 이 험한 세상 살아가는데 한 재산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만.
내 아이는 그렇지 않았으면, 나쁘지 않을만큼은 조금은 사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입니다. 일생 안으로만 잦아들어서 속앓이만 잔뜩 하고 살아 온 어리숙한 일생을 거듭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그래도 제 품성은 갖고 태어나는지 우리 집 꼬맹이도 어릴 때 봐서는 제법 한 가닥 할 것 같던 겉보기와는 다르게 눈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 많습니다. 요새는 좀 맹랑해야 잘 살아 남을 것 같은데.


어제도 하영이가 놀러 왔습니다.
집에는 일찍 가봐야 아무도 없다고 가방을 맨 채로 곧바로 왔습니다.
꼬맹이 방에서 한 참을 놀다가 내가 뭘 뒤적거리는 사이에 잠시 내 방에 들어 온 우리 꼬맹이를 따라 들어서면서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나즈막하게 인사를 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생각하던 바가 있어서 응 그래, 하고 무심히 내색은 안했지만 하영이는 참 신기한 아이입니다. 하영이의 부모님이 그리 가르쳤을까요?
그리 가르쳤다면 그 부모님도 대단하지만 엄마 아빠가 그리 가르쳤다고 또 그대로 따르는 아이가 잘 있을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말과 글이 미쳐 날뛰는 광속으로 변해가는 이 시대에.



흥해에서 포항으로 넘어가는 나즈막한 언덕받이 검문소가 있던 자리에 황색 깜박이 신호등이 있습니다.
 그 신호등 바로 뒤에 어느 솟대에서 날아와  앉은 듯한 새 두마리가 마주 보고 있습니다.


누가 앉혀 놨는지 참 예쁘게도 앉혀 놨습니다.
자주 오가는 길이라 늘 보면서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쇳조각 몇 개로 저렇게 예쁜 새를 만들어 앉힐 생각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설마 도로 교통법규에 신호등 끄트머리에 새 만들어 붙이란 조항이 있을리는 없고 아마도 신호등을 설치하던 누군가가 살짝 멋을 부려 본 모양인데 삭막한 도시 한 귀퉁이에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다가 저런 여백을 만들어 둘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요.
새를 만든 솜씨도 아주 빼어나서 군더더기 없이 균형이 잘 잡혔습니다.


예쁘지요? 참 예쁘고 고마운 생각입니다.
오고 갈 때마다 눈길이 가고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새 두마리 입니다.
이런 게 진짜 예술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는 헛바람 들어가지 않은 진짜 예술. 


K200/4


내 방의 커튼을 열고 본 오늘 아침 일출이다.
어쩌다보니 며칠 연속 하늘 그림만 올라간다.
그저 하늘은 아무렇게나 찍어도 별로 표도 안나고 탓을 안하기때매...

그림 속의 새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행물체(?)다.
해를 찍는다고 들이대고 있는데 예고 없이 찬조 출연.

동해 바다에서 방금 건져 올린 싱싱한 해는 아니더라도 간혹 저런 먼지 낀 듯한 일출도 볼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글거리는 오메가나 금빛 물결 찰랑대는 근사한 바다 일출보다는 동네 일출을 더 좋기는 하다.
더군다나 잠옷 입은채로 찍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 @@...




/별도 보고 해도 봤으니 오늘은 일찌감치 챙겨서 기절한 내 컴퓨터나 살리러 가야겠다.
그저께 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 나자빠져서 회생할 기미가 안보인다. 컴퓨터는 깡통. 맞습니다.



H 58



요즘 해 지자 말자 서쪽 하늘에 나타나는 저 별이 금성이라더라. 
지금이 지구와 가깝게 있는 때라서 저리 밝게 보인다나.
다른 별들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일찌감치 저리 밝게 빛나고 있다. 
 
3월 말 경까지 서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다가
태양과 아주 가까워지면 해질 무렵에만 잠깐 보이다가 이후로 몇 달은 보기가 힘들어진다. 
해질 무렵이면 꼭 눈에 띄길래 사진으로 남겨 봤다. 

그런데 컴퓨터에 걸어서 봤더니 빈 하늘에 저 별만 있는 게 아니라 또 누군가가 하나 더 찍혔다. 
사진을 찍을 때는 전혀 못 그꼈었는데 언제 끼어들었을까.
처음에는 무슨 UFO인가 싶어 확대를 해 봤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어스름하게 날개 형상이 보이는 걸 보면
아마도 지나가던 비행기겠지.


이건 이삼년 전의 사진인데 왼쪽 상단에 이상한 물체가 하나 있다. 
잡지 같은 데서 본 UFO 형상과 비슷하길래 몇 사람에게 보여봤더니 누구는 그런 것 같다기도 하고 또 헬리콥터가 찍힌 거라는 사람도 있고. 새라는 사람도 있네. 새는 아닌 것 같구만 그래.


확대 해 봤다.
사진 찍을 당시에는 헬리콥터 같은 것이 날아다니지는 않았는데. 글쎄올시다. 뭐든 상관은 없다만.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 앵글을 하늘로 치켜 드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날아다니는 것들이 간혹 찍히기는 한다. 그 중 두어 번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형상을 보기도 했고.
한 때는 UFO며 초고대문명 같은 것에 관심을 두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게 뭐든 별 상관은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내가 주장하고 믿는다고 해서 있는 것이 없어지거나 없던 일들이 생겨나지는 않을테니까. 또 어떤 사실이 바뀌거나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고.
하지만 여전히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저것들이 대체 뭘까.  

늘 곁에 끼고 살아서 별로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는 바다지만 오늘같은 날은 바다라는 존재에 은근히 마음이 좀 쓰입니다. 해안선까지 이렇게 높은 파도가 들이닥치는 걸 보면 오늘 바닷 속에 뭔 일이 있나봅니다.

방파제 위에 서 있어도 부서진 포말들이 날아듭니다. 
바람하고 파도는 별로 상관이 없던데 오늘은 둘 다 힘 좀 쓰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파인더에 눈을 갖다 대고 있다가 높은 파도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리 흔히 볼 수는 없는 바다 날씨였습니다.


좀 더 멋진 그림을 기대했는데 솜씨가 그만 여기까지입니다. 춥기도 꽤 춥고 바람도 불고 그래서.... @@...







'벙!'
있는 듯 없는 듯 윤곽이 희미하던 팀파니가 어느 날, '떵!'하고 선연하게 떠올라 가슴을 친다. 

오디오 시스템의 어느 일부분을 개선했을 때 흔히 느끼는 일이다. 때로는 매끈 일변도이던 바이올린이 흔히 쓰는 말로 '송진가루가 풀풀 날리는' 현장감 넘치는 찰현음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또, 전혀 존재가 느껴지지 않던 악기가 저기 혼란한 오케스트라의 뒤편에서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오디오라는 괴물에게 자진해서 납공을 하기 시작하는 단초가 된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끝없는 소리의 세계로 빠져들어서 천하의 명기를 찾아서, 또는 절세의 매칭을 찾아서 거의 구도자적인 고행의 길을 자초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적당한 곳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절묘한 타협안을 고안해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별로 동요 없이 고요히 조촐한 기기에서 나는 소리로도 쉽게 삼매경에 잠겨 들기도 하고.

'음악은 안 듣고 뭔 쓸 데 없는 돈지랄이냐' 
'저걸 소리라고 듣고 있는 거냐, 귀에 말뚝 박은 막귀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삿대질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리지만 일단 소리가 명징해지고 해상도가 증가하면 음악적 감흥도 어느 정도 증가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한계의 모호함에 염증을 느끼고 일찌감치 자신의 범위를 찾아 안주하는 현명한 이들도 많다.(개인적으로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오디오에서 현장음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라, 어리석은 생각 집어치우고 연주회장이나 부지런히 댕기라는 대단히 엄숙한 말씀도 있다.
뭐, 당연히 옳은 말씀일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가급적 대도시 인근에 거주해야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하다는 현실을 망각한 망언으로 이 나라의 지역적 문화적 차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사는 촌사람들에게 욕 얻어먹기 딱 알맞을 잘난 척이다.

또, 오디오는 오디오다. 현장음과 비교치 말라, 그것은 또 다른 소리의 세계다. 이런 말씀도 있다.
어느 말씀이 구극의 진리인지 나는 잘 모른다. 어쩌면 이 두 세계 사이에는 구극의 진리라는 것이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소리와 음악의 혼돈 속에 갇혀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한 삼십년 넘게 음악이랍시고 끼고 살다보니 나름대로 할 말은 많다. 그러나 할 말이 많다고 해봤자 재미없는 자기변명에 합리화가 거개인 그렇고 그런 백인백색의 중구난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꺼내 놔 봤자 본전도 못 건지고 얼른 주워 담을 객소리.

굳이 어거지로 결론을 내려 본다면, 좋으면 좋은 대로,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그 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좋은 감동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게 대충 버무린 나의 생각이다. 정답이 없거나, 있다 해도 답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박쥐같은 생각일 수도 있고.

칼날 같은 핀 포인트 맞춰놓고 꼭지점에 망부석처럼 앉아서 듣든지, 대구마구 양껏 볼륨 올려놓고 마당 쓸면서 듣던지 그건 각자의 몫이다. 

돈지랄이다 싶으면 조촐하게 갖춰 들으면 될 일이고 일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무엇이다 싶으면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덤벼 볼 일이고.
다만 옆집 사람이 제 배짱에 안 맞다고 삿대질은 마시라는 거다. 다들 하시는 말씀대로 궁극의 목적은 음악을 듣는 데 있는 것이지 상대방을 꺾어서 던져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까.

진공관이 좋다 티알이 좋다 갑론을박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시디가 좋다 비니루가 낫다 옥신각신도 잊을만하면 또 올라온다.
나는 마구 듣기만 할 줄 알았지 이론에는 맹탕인 청맹과니라 그 논쟁(언쟁?)들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기에 몰입하지 말고 음악을 듣자는 근사한 말씀들과는 달리 같은 문화적 입맛을 매개로 모여든 공간에서 재생장치와 소스에 대해 증명하고 반박해야 할 무슨 이론과 주장이 그렇게도 사납고 드센지 곁에서 얼쩡거리며 구경만 하다가 앗 뜨거라 싶어서 빠져나오곤 한다.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무찌르고 나서 듣는 음악은 더욱 더 감동적일까?

육군 졸병 때 손바닥보다 작은 산요(소니?)라디오에 이어폰(요즘 나오는 근사한 몇 만원, 몇 십만 원짜리 전문가용 스테레오 이어폰이 아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한 개짜리(only one ear !!!) 상아색 백 원짜리 싸구려, 그야말로 이어폰이ek.)꽂아서 야간 입초 때 주번 사관의 눈을 피해서 듣던 에프엠 방송과, 오디오쟁이들의 집을 방문해서 듣는, 그 지극정성으로 다듬고 맞춘 그들의 소중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입 음반들의 소리는 그 감동의 격이 다른 것일까?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

그 때와 비교하자면 아마도 순수하게 음악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경우는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 더 좋으면 더 좋은 것이다, 뭐 두리뭉실 그런 생각이겠지.
오로지 희미한 라디오 소리에서도 가슴 설레고 콧마루를 비비던 열정은 식은 듯해서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음악적(?.. 마땅한 수식어의 고갈이다....)으로 타락한 지경에 이르렀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때와 비교해자면 욕심이 좀 더 많아졌다고 할까. 아님 좀 뻔뻔스러워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만으로는 안 돼, 이제 난 좀 비싸졌거든? 내게 좀 더 깊은 감동을 바란다면 한 결 나은 품질로 승부를 걸어 보란 말씀이지.'

한 마디로 음악과 오디오에 바라는 것이 많아진 것이겠지. 물론 음악에 대한 생각이나 관점, 이런 것도 그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본 글귀를 여기 그대로 대입한다고 그리 무리는 없을 듯.

'아는 만큼 들리고 지금 들리는 것은 그 때와 같지 않으리라.'


늘 일찍 자고 싶어도 늘 늦다.
몸이 곤하여 자리에 누워 그냥 그대로 잠들면 얼마나 좋으리. 오랜만에 숙면으로 몸을 개운하게 하고싶다.

'삼쾌'만 되어지면 아이는 별 걱정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도 잘 안다. 쾌식, 쾌변, 쾌면이다. 지극히 타당하고 합당한 말이다. 육아의 기법(?)중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백한 거의 최고의 금언이다. 더욱이 어른에게조차 더 이상의 첨언이 필요 없을 건강의 삼원색이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 얼마나 몸이 개운할까!

나는 잠이 짧은 것이 체질화 되어버린 데다 그나마 잠귀마저 밝아서 좀처럼 숙면에 빠져들지를 못한다. 그런데 편법이기는 하나 방법이 있기는 있다. 심신이 부대낄 때 적량의 알콜을 첨가하면 그만 벼락같이 코를 골며 서너 시간을 뻗어버린다. (코를 곤다는 것은 들은 풍문일 뿐 도저히 내가 확인 할 길이 없다.) 다만 가까운 사람들이 음주가무 뒤에는 내 곁에 자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걸로 봐서는 낭설은 아닌 듯하다.

나는 잠들기가 힘들어지는 밤이면 자주 술을 찾는다. 속병이 나서 한동안 술을 멀리 했더니 이제는 술이 적적해서 나를 찾는 모양이다. 그래. 반갑구나. 기왕에 만났으니 천년만년 살고지고.
뭔 놈의 술을 참 겁나게도 마셔댔던 시절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저 놈 술 세더라고 추켜세우면 무슨 벼슬 얻은 듯 우쭐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창피하고 한심한 일이다. 그리 철딱서니 없이 살다가 결국은 몸이 견디지를 못하고 서른 안팎 언저리에서 두어 번 호된 꼴을 보고야 말았다.
그 뒤로 술이 거의 일할 정도로 꺾여버렸다. 이제는 술이 무섭다.
지금도 굳이 작정을 하자면 어지간한 주량으로 마시고 즐길 수는 있으되 그 뒷날이 도대체 수습이 안 되니까. 썩어도 준치라고 몇 번 버텨봤지만 이제는 뒷날을 생각하면 그만 손사래를 치고 꽁무니를 뺀다. 자연히 술잔에 손이 뜸 할 밖에.

게다가 그다지 강건하지 못한 체질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한 밤의 유흥이 끝난 뒤 쪼개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에 물기 하나 없이 종잇장처럼 말라 비틀어진 혓바닥, 목구멍에서는 썩은 홍시냄새가 진동하는데다 시도 때도 없이 아랫배가 사르르 뒤틀려 오는 아침을 맞노라면 뭐 굳이 지옥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지옥이 있다면 두통 지옥하고 설사 지옥이 그 중 무서울 거라고 생각한다.
설사....... 무섭다. 그거 며칠 하고나면 살이 쑥 내린다. 핼쓱해지고말고.
하지만 지금까지도 술을 저주하거나 원망해 본 적은 없다. 염병할, 그 팍팍하던 시절을, 그 팍팍하던 시대를 눈물어린 술잔 없이 어찌 살아왔을 거란 건가 말이다.

아. 이 역시 장삼이사 핫바지 출신의 범부임에 지껄이는 헛소리인 것은 잘 알고 있다. 누구라 그 황량한 시절에 그런 무용담 한 보따리 품지 않은 자, 그런 아릿한 기억들 전설처럼 가슴에 품고 허위허위 살아오지 않은 사람 있을까보냐. 낯 간지러운 무용담은 각설하자. 다만, 기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술버릇. 이거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자랑하고자 해서도 안 되고 자랑하고자 할 건덕지도 안 되는 사안이지만 나는 이것에 특히나 민감하다.
일단, 부푸
는 풍선껌처럼 풀 세운 목에 턱을 땡기고 장광설에 도덕 강의까지 겸하는 대가연 형. 이건 아주 거룩하다. 술자리가 지겨워져서 가능한 빨리 파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독특한 방법으로 동석의 인사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깨우쳐 주는 계몽주의 형도 있다. 그 방법이 매우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것이 특이하다. 반면교사 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시도 때도 없이 으르릉거리며 털을 세우고 근육을 부풀리는 투사형도 있다. 때로는 실제 물리적으로 놀기도 한다. 종국에는 인간이 비닐 봉지에 담긴 고깃덩어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처절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콤플렉스로 똘똘 무장한 꽈배기 형도 있다. 이 유형은 때때로 가시가 돋혀 있는 경우가 많다. 꽤 신간스럽고 많이 짜증스러운 경우다.

모든 것을 망라해서 완전히 망가지고 마는 종합 선물세트도 있다. 이는 심신이 같이 그러하므로 동석의 인물들을 취중에 과중한 노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 중 압권이 될만한 유형은 중언부언 형이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자는 척하면 깨워서 하고 변소 가면 따라 오면서 하고 딴 짓하면 소매 끌고 가서 또 한다. 그냥 한 두 번 겪고 나면 같이 안 마신다. 그게 피차에 이롭다.

깨고 나면 멀쩡한 사람이지만 술만 취하면 금수로 변하는 몇 가지 인품들은 정말 싫다.
에라 인간아 취중 인품이 그따위 밖에 안 되냐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그런 건 정말 싫다. 왜 취중에는 내 빈정을 상해 가면서까지 필요 이상으로 관대해져야 하지? 나는 주석은 무조건 유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돈 날리며, 시간 죽이며, 건강까지 담보로 해 놓고 벌이는 술판이 기분마저 오지게 망가진다면 그게 어디 멀쩡한 사람이 자진해서 할 짓인가 말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술에 씻겨서 화장이 지워지는 거라고.

하긴 유독 화장이 진해서 좀처럼 분칠이 지워지지 않는 유형도 있을 수 있겠다. 탱탱 큰 소리치는 내가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뭐 하지만 그 정도 세척에도 벗겨지지 않는 변장 수준의 특수 화장이라면 일생을 그리 살아도 별 탓할 일은 없지 않을까! ......☜호언 장담이 뒤끝이 좋은 경우는 대체로 없는데....

그렇다고 앞 뒤 싹둑 잘라 낸 맨드름이가 어디 있나. 나도 과거를 들춰보면 낯 뜨겁고 망신스러운 전과가 더러더러 담장에 호박같이 대롱대롱 달려 있기는 하다. 그런 주제에 반찬 투정 하듯 시치미 떼고 앉아서 남 탓하는 것도 사실 남사스럽고 웃기는 노릇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사는 것도 사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술자리만큼은 결사적으로 유쾌하게, 필사적으로, 목숨 걸고, 환장할 만큼 즐겁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미망인지, 삶이라는 것이 미망 속에 허우적거리는 것인지, 이것인지 저것인지도 모르는 것이 미망인지, 아둔한 머리로 뭘 알겠노라고 애써봤자 손에 잡히는 것은 없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결사적으로 유쾌하게!! 

하여튼 술이란 게 요물이지.
소화제, 마취제, 수면제, 하제, 독약에 마약에 때로는 미약으로도 쓰이는 걸 보면.....
그래도 인간세계에 술이란 물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다들 사이보그 같이 맨질맨질한 얼굴로 네모 반듯하게 살아가지 않을까. 아, 그건 좀 끔찍하다. 차라리 술주정이라도 하는 게 나을지. 그래도 저 재활용도 안될 더러운 버릇들은 좀 안봤으면 해. 정말 싫거든.

사실은 어젯 밤에도 잠이 안 와서 혼자 한 잔 했다. 소싯적 같이 소금 놓고 깡술 먹는 호기는 꿈도 못 꾸고 안주가 없어서 급조한 얄궂은 안주로 먹었더니 아직도 뱃속이 편찮다. 그래서 또 헛소릴 하는 건가 보다.
저 산은 꿈쩍도 않는데 나는 왜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끼고 혼자 앓고 있는지 속이 상하고 울적해서, 그래서 마셨다. 마시고 나서 깨어보니 꼭 나 혼자만 손해 본 것 같아서 공연히 술에다 시비를 걸어 보는 거지. 너 또 마실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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