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쯤 한참 음악에 불붙기 시작했던 어떤 후배 녀석. 어느 날 박하우스의 베토벤 소나타 판때기를 들고 와서는 인상 팍 쓰면서 묻기를,
'형님! 도대체 버투소(virtuoso)가 누구요?'
(아시다시피, virtuoso는 ‘거장적’이라는 뜻입니다. 되는대로 비르투오조라고 읽기는 합니다만. 하기야 어지간한 판 자켓에는 거장적인 연주라는 뜻으로 너도나도 virtuoso 라고 써 놓긴 했었습니다. 피아노도 치고 바이올린도 잘 키고 못하는 것 없던 그 놈의 버투소....)


/처자들 앞에서 있어 보이는 척 하는 데 있어서 고전음악이 꽤 유용한 도구임을 간파한 어떤 만화방 쥔. 뭔가 이야기 끝에,
'나도 어제 드보르(Dvor.....作?) 판 하나 샀는데.'
(Dvořak.... 뭐, 처음 듣는 사람들은 헷갈리기 좋을만한 이름입니다. 드볼작에게 가서 왜 이름을 그딴 식으로 지었냐고 멱살 잡고 따져 볼까요?)


/어느 소 연주회에서 어떤 기타리스트 왈,
'아노니모스(anonymous)의 로망스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anonymous. 작자 미상, 작자 불명이란 뜻으로 쓰입니다. 그날 객석에서는 여기저기 소소한 웃음이 났었습니다만, 뭐 어때요? 연주만 잘 하면 됐지.)


/오래 전 어느 다방에서 어떤 아저씨가 바하 관현악 조곡 중에서 G선상의 아리아를 켜달라는데 판때기 뒤적거리던 디제이 란 놈은 잘난 체 한답시고,
'아저씨. 지 선상의 아리아는 바이올린 곡이라우. 뜬금없이 관현악은 무슨.‘
(G선상의 아리아는 바하 관현악 조곡 3번에 나오는 아리아를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편곡 한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놈의 디제이는 바로 납니다. 반풍수.... 좀 들었답시고 시건방이 늘었었지요. 자다가 벌떡 일어나 식은땀이 날 일입니다. 아주 망신살이 뻗쳤습니다.)


/팔십 년대 중반, 모 음대 앞에서 찻집 하고 있을 때 웬 음대생 하나.
'아저씨, 베토벤 영원 교향곡 좀 부탁합니다. 듣고 리포트 써야 되는데.'
(베토벤에게는 ‘영원’이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이 없습니다. 교향곡 3번 ‘영웅’은 있습니다. 이 고집 센 친구, 그게 아니라고 말 해 줘도 영원이라고 우기길래 교향곡 전집을 꺼내 놓고 보여주며 혀를 찼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저 음대생이라면 이정도 상식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백수 시절 아지트로 삼고 죽치던 어느 지하 찻집에 여대생들 우르르 끌고 와서 한참 장광설 풀던 어떤 음대 교수.
'쇼팽의 첼로 협주곡을 켜 주시오!'
(쇼팽은 첼로 협주곡이 없습니다. 첼로 소나타는 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차마 말하기가 민망해서 지금은 그 음반이 없노라고 얼버무리고 넘어 갔습니다만, 그 잘 생긴 음대 교수님, 언제 쯤 실수 했다는 걸 눈치 채셨을라는지.)



우리 시대에 클래식 음악이 가졌던 좀 묘한 스탠스가 던져 준 가벼운 웃음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되고 보면 등허리에 진땀이 빠질 순간들이었지요. 그저 콩이나 팥이나 모르는 건 모른다고 자복 하고 납작 엎드리는 게 후환을 없애는 길입니다.



'아빠! 이것 봐요!'
아침에 꼬맹이가 학교 간다고 나서다가 호들갑이다.

우리집 마당의 앵두 꽃이다.
어디서 보고 왔는지 우리집도 앵두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졸라대서
작년 봄에 묘목을 사다가 저랑 같이 심었었다.
작년 한 해 꽃도 없고 열매도 없이 되다 만 이파리만 몇 개 달고 있더니 올 해에는 드디어 꽃이 피나보다.
꼬맹이 녀석 어제까지도 모르고 있다가 억세게 반가운 모양이다. 하긴 나도 몰랐다. 
 

봄 꽃들은 기다리지 않아도 밤 사이에 언뜻 찾아 온다.
그래서 좋으냐고?

꽃이야 누가 싫어 하나. 꽃 피고 새 우는 사이에 세월을 슬쩍 속여 넘기는 것이 괘씸한 거지.
한 살 더 먹은 걸 실감나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저놈의 봄 꽃이거든.
또 한 겨울 잘 넘기셨습니다. 올 한 해도 무사히....

그런데 앵두꽃이 흰색인가? 앵두 꽃은 막연히 빨간색일거라고 생각했었나보다. 

나무며 꽃이며 아는 것이 있어야지. 주는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그만이다.
그래. 긔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앵두 나무가 아니라서 앵두가 안열리면 꽃 만 보고 앵두는 한 사발 사 먹으면 되지.

봄이 오긴 왔나보다. 꽃 볼 일이 많아지는 걸 보니. 
우리집 꼬맹이,
작년 한 해 틈틈이 우리집은 앵두 안열리냐고 조르더니 올해는 혹시나 몇 개 맛 볼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쩐지 노래가 좀 안어울리는 것 같지만.... @@...

16-45 DA


자동차 검사 받으러 갔던 정비공장 주변에서.

나는 벚꽃이나 매화같은 꽃들을 보면 공연히 답답하다.
이른 봄부터 잎이 피기 전에 서둘러 피는 꽃들은 다 그런 편이다.
목련이나 개나리도 그렇고 진달래도 그렇고..


성급하게 꽃부터 피웠다가 질 때는 아주 처참할 정도로 무너지니 하는 말이다.
초록색 새잎들이 돋을 무렵이면 꽃이 떨어지고 짓무르기 시작하는데 나는 그게 공연히 보기가 안쓰럽다.
이제 저 놈들은 가을 들어 잎이 지도록 꽃은 피우지 못할 것이다. 꽃이 없으면 잎으로 산다지만, 글쎄.  
그렇게 어렵게 필려거든 질 때는 왜 또 그렇게 허무하게 짓물러 버리는지. 기왕에 그리 서둘러 필려거든 잎이 피어서 웬만큼 무성해질 때까지라도 기다리든지. 그 때쯤이면 지더라도 그리 허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벚꽃이 맞다. 벛꽃이 아니다. 이제는 철자법도 오락가락 하는구나.
 




A28-135



어제 OCN을 켰더니 '해바라기'를 한다는 자막이 떠 있었다.
잠을 설친 채로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참이라 많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일단 보기로 했다.
까닭없이 간혹 생각이 나던 영화였다.

그런데, 이런, 다른 해바라기였다.
이름이 얼른 생각 나지 않는데, 우리집 큰 놈이 좋아한다던 그 배우였다. 드라마 식객의 성찬이 역을 맡았던.
맥이 빠져서 삼사분 정도 잠깐 보다가 그냥 꺼버렸다.




해바라기. 꽤 오래 된 영화.
소피아 로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늘 그 음악이 생각나고 간혹 다시 보고싶어지기도 하는 영화다. 
전쟁때문에 꼬일대로 꼬인 인생과 사랑에 대한 회한, 체념, 뭐 그런 더러 볼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그 놈의 막막하던 우크라이나의 평원에 넘실대던 해바라기 밭의 영상과 음악때문에.

 



해바라기 꽃은 등신이다. 
별로 멋지거나 그다지 슬퍼보이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사람 쓸쓸하게 만드는.

영화 스토리는 다 생각나지는 않는다.
그냥 보고나면 그날 하루는 족히 울적하게 만들만큼 여운이 오래 남던 영화였다는 기억만.
그 언젠가는 OCN에서 해바라기를 돌려 주리라 믿고 오늘은 음악만 듣기로 한다. 해바라기.
눈 감고 그 억장 무너지게 광활하던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 평원을 생각하면서. 선플라워. 해 꽃이란다.
해바라기.




  


차를 갖고 다니기에는 고속도로 보다 국도가 낫다.
국도 보다 좀 더 재미 있는 길이 지방도나 도로 번호도 제대로 붙지 않은 샛길들.
오가는 길에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나는 혼자서 엉뚱한 곳으로 잘 새는 편이다. 
내가 끌고 다니는 고물 밴 뒤에는 자전거도 실려 있고 간단한 취사도구도 있으니 맘만 먹으면 어느 골짜기를 가든 한 나절 지내는 건 별 걱정 없지. 혼자 있는 걸 싫어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별로 폼 나지 않는 좀 적적한 취미생활(?)이기도 하고.
 

갈매기들이 미칠듯이 날아 오르던 포항 송라면 방석리 바닷가 

방어리 선착장. 배를 타는 건 싫어해도 보는 건 좋아한다.

영덕 원척 앞바다에서 접선(?) 중인 배 두 척. 너무 멀어서 잘라서 펼쳤더니 윤곽이 조금 뭉개졌다. 200을 들고 나갈 걸.

포항 오도리 방파제. 눈이 쨍 하도록 선명하던 불가사리들 

영덕 삼사리에서 본 먼 바다. 역시 배는 타는 것 보다 보는 것이 훨씬 좋다.  

바다는 늘 가까이 있지만 마음 먹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늘 해 뜨는 바다만 보면서 살다보니 해 지는 바다도 보고싶다. 그게 꼭 바다가 아니더라도. 


      


‘나는 가진 것이 없는데 안이는 가진 것이 많아서 신기해요.’


꼬맹이의 친구 하영이입니다.
반에서 제일 작은 친구입니다. 키도 작고 몸도 가벼워서 우리 집 꼬맹이랑 같이 서 있으면 아주 동생뻘로 보입니다. 우리 아이가 너무 커 보여서 좀 열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안이는 자기 방도 있고 자전거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인형도 많고 집에 화장실도 두 개고... 정말 신기해요.’

‘부럽다’도 아니고 ‘샘 난다’도 아니고 신기하답니다.
무슨 교육을 받아서 그리 표현하는 것 같지는 않고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 것으로 보여서 오히려 내가 더 신기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하영이가 생각하듯 그럴싸하게 잘 사는 집은 절대 아닙니다. 길 가다 오며 가며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보통의 서민일 뿐입니다. 시골 마을 서른 평 남짓 장마철이면 물 새는 스레트 지붕 이고 살고 있습니다. 신기한 부잣집 전혀 아닙니다.

‘안이 어머니 안녕하세요. 작년에 안이 생일날 뵈었던 하영이에요.’

애 엄마는 하영이의 인사말에 여운이 남는다고 몇 번을 거푸 들먹입니다.
요즘 ‘뵈었던’ 이라는 단어를 쓰는 애가 어디 있냐고 감탄입니다.
때로는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너무 비현실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생뚱맞고 약간은 희극적인 느낌마저 없지 않지만 아무튼 보기 드문 사고방식을 가진 열 살짜리 아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혹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겉으로 드러내고 화를 내거나 삐지는 일이 없을 그런 아이로 보입니다. 그냥 혼자 돌아 서서 눈물 찍어 내고 혼자 삭이는 그런 몽실이 같은 옛날 아이. 운전을 하면서 애 엄마와 둘이서 하영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자니 뒷자리에 있던 꼬맹이가 제 친구라고 한 마디 거듭니다.

‘하영이 착해요.’

그래. 아빠가 봐도 착한 것 같구나.
요새 세상에는 저렇게 착한 것도 신기한 일이 됩니다. 저렇게 아주 턱이 갸웃 돌아 갈 만큼 착해버리면 그것도 이 험한 세상 살아가는데 한 재산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만.
내 아이는 그렇지 않았으면, 나쁘지 않을만큼은 조금은 사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입니다. 일생 안으로만 잦아들어서 속앓이만 잔뜩 하고 살아 온 어리숙한 일생을 거듭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그래도 제 품성은 갖고 태어나는지 우리 집 꼬맹이도 어릴 때 봐서는 제법 한 가닥 할 것 같던 겉보기와는 다르게 눈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 많습니다. 요새는 좀 맹랑해야 잘 살아 남을 것 같은데.


어제도 하영이가 놀러 왔습니다.
집에는 일찍 가봐야 아무도 없다고 가방을 맨 채로 곧바로 왔습니다.
꼬맹이 방에서 한 참을 놀다가 내가 뭘 뒤적거리는 사이에 잠시 내 방에 들어 온 우리 꼬맹이를 따라 들어서면서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나즈막하게 인사를 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생각하던 바가 있어서 응 그래, 하고 무심히 내색은 안했지만 하영이는 참 신기한 아이입니다. 하영이의 부모님이 그리 가르쳤을까요?
그리 가르쳤다면 그 부모님도 대단하지만 엄마 아빠가 그리 가르쳤다고 또 그대로 따르는 아이가 잘 있을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말과 글이 미쳐 날뛰는 광속으로 변해가는 이 시대에.



흥해에서 포항으로 넘어가는 나즈막한 언덕받이 검문소가 있던 자리에 황색 깜박이 신호등이 있습니다.
 그 신호등 바로 뒤에 어느 솟대에서 날아와  앉은 듯한 새 두마리가 마주 보고 있습니다.


누가 앉혀 놨는지 참 예쁘게도 앉혀 놨습니다.
자주 오가는 길이라 늘 보면서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쇳조각 몇 개로 저렇게 예쁜 새를 만들어 앉힐 생각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설마 도로 교통법규에 신호등 끄트머리에 새 만들어 붙이란 조항이 있을리는 없고 아마도 신호등을 설치하던 누군가가 살짝 멋을 부려 본 모양인데 삭막한 도시 한 귀퉁이에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다가 저런 여백을 만들어 둘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요.
새를 만든 솜씨도 아주 빼어나서 군더더기 없이 균형이 잘 잡혔습니다.


예쁘지요? 참 예쁘고 고마운 생각입니다.
오고 갈 때마다 눈길이 가고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새 두마리 입니다.
이런 게 진짜 예술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는 헛바람 들어가지 않은 진짜 예술. 


K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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