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벌똥
나는 세차하기가 싫다.
웬만한 자동 세차기에는 넣어주지도 않는 고물 밴 숏바디.
손 대 본지 이년인가 삼년인가.
비오는 날이 세차하는 날이고 볕 나는 날에 말려서 쓴다 왜.


그런데 이웃에 양봉하는 할배, 버릇도 더럽게 들여 놨지.
이놈의 벌들이 꽃에 꿀만 따먹고 가면 좋으련만 배설까지 우리 집 마당에서 끝내고 간다는 말이지.
내 차는 회색인데.
옆구리에 까만 띠 둘러놓은 회색인데.
지붕이고 본넷이고 황금색 벌똥이 수백 개 아로새겨지면 내 차는 회색도 아니고 똥색도 아니고. 이런 제길.
벌똥은 봄볕에 바짝 말라붙으면 손톱으로 긁어도 잘 안 떨어져.
젠장. 차 닦기 싫다니까.


2. 벌꿀
벌똥으로 관련하여 나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부여하는 이웃의 영감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꿀 한사발 갖다 준 적이 없다.
나쁜 할배.

토종꿀 몇 년 건드려 본 내 사촌에게 그 소릴 했더니 아주 맛 간 사람 보듯 날 본다.
토종 꿀 한 단지 맹글라면 몇 년을 패대기를 치는데 그걸 줄까보냐고.
그런가.
뭐 그렇거나 말거나 나도 아주 어릴 적엔 외할아버지 댁에서 토종꿀 꽤나 퍼 먹었었잖아.
꿀 한 되에 수십 만 원이든 수백 만 원이든 내 알 바 없단 말이지. 아 근데 그게 그리 비싸냐.


3. 벌집
우리 집에는 꿀벌은 없다. 대신,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말벌은 산다.
처마 밑에 떡 당생이만 한 벌집 지어놓고 허가도 없이 세 들어 산다. 두 개나 있었다.
꼬맹이가 무서워서 마당에 못나가겠단다.
금쪽같은 내 새끼 벌에 쏘일까봐 그 벌집 뜯어냈다. 뭘로 발라놨는지 더럽게도 안 떨어졌었다.
말벌에 쏘일까봐 한 손에 간짓대 한 손에 에프 킬라 들고 전투하듯 뜯어냈다.
떠그럴. 꿀벌이나 올 것이지.


4. 벌 알레르기
내 친구 마누라는 벌침 알레르기다.
몇 년 전 저그 선산에 벌초하러 갔다가 땅벌에 쏘여서 죽을 뻔 했다더라.
벌 독이 오르면 기도가 부어올라서 숨을 못 쉰다던가.
친구 놈은 그때 마누라 업고 산길 몇 리를 냅다 뛰었다고 생색이 대단하다. 지 아니면 지 마누래 죽었을 거라고. 

드런 놈.
그럼 니 마누라 숨넘어가는데 구경만 하고 있을라 그랬더냐.
크다가 만 쬐끄만한 마누래 업고 뛴 게 뭔 용상에 오른 일이라고.
그나저나 벌 알레르기가 무섭기는 무서운가보다. 우리 집 뒷산에도 땅벌들이 있을까?
아이들 뒷산에 함부로 안 올려 보내야겠다.


5. 벌
봄이 왔다. 제대로 왔다.
뭘로 아냐면 벌똥 보고 안다.
겨우내 꼭꼭 처박혀서 자빠져 자던 벌들이 살 판 났다 앵앵 돌아 댕긴다는 증거다.

봄이야 오건 말건
꽃이야 피든 말든 내 코가 석자라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벌똥은 싫다.
그래서 봄도 싫다.

.....
아, 세차하기 싫다니까!!


하늘. 비현실적인 색이어서 그랬는지 보고 있다가 나른하게 멀미끼를 느꼈던 하늘.


해변의 연인.
최소한 부부는 아니었을 거야.  
저 두 사람 곁을 지나서 내가 사진을 찍은 언덕을 떠날때까지 꼼짝 않고 저리 서 있던 걸 보면.
부부일 수도 있다고요? 백원 걸까?

봄이면 누구나 다 찍는 꽃 사진. 이파리가 군청색으로 나온 이유는 메누리도 몰라요. 

누구나 다 찍는 사진이 그나마 보기에도 좋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참 멍청한 사진. 미나리 꽝.


나와 나란히 달리던 7번 국도. 나는 왜 밤이고 낮이고 길만 보면 환장을 하고 울렁증이 생기는 걸까.

/경북 동해안

식이 어마이 사우 잘 났다꼬 온 동네 시끄럽그러 주끼쌓드마는 가실에 저그 기집을 패 갖고 눈티가 시퍼러이 울고불고 친저어 와가꼬 지기뿐다꼬 날리났다카이. 사나가 하마나 못났시모 기집을 패나. 설에 끄꼬 온 차도 우리 아아가 보이께네 빌리 온 차라카드마. 내 그래 그캤지. 그 사우 잘났시모 시사아 잘난 놈 개락이라캤다.

아이고 선생님 잘 오소. 저녁 드싯니껴. 떡 좀 자실라니껴? 머 디리껴? 무꾸 디리껴? 다발이 너무 많으마 무거바 들고 가것니껴. 옷다 갖다디리껴?

/경북 안동(내륙)

식이 어매 사우 잘 났닥고 온 동네 분주케 주께대드라마는 갈게 지 기집을 자들어가주고 눈티가 시퍼러이 방티를 만들어가주고는 울고불고 친저어 와 가꼬 주게뿐닥꼬 난리났다그이. 사나가 을매나 못났으머 지 기집을 패나. 설에 끌고 온 차도 우리 아아가 보이께네 빌래 온 차라 그드라마는. 내 그래 그캤지. 그 사우 잘났으머 세사아 잘난 놈 개락이라그랬다.

아이고 선샘요. 잘 오소. 지역 드셨니껴? 떡 좀 자실라니껴? 머 디리까? 무꾸 디리까? 다발이 너무 많으머 무거워 들고 가겠니껴? 내중에 갖다 디리까요?

/대구(경북)

시기 조곰마 사우 잘 밨다꼬 온 천지 시끄럽꾸로 언성시럽기 지끼쌓티마는 팔월에 저그 가씨나를 팼는지 공갔는지 눈티 퍼~러이 해가 울고불고 친저에 와가꼬 지기뿐다카민서 쌩찌랄삥을 다했다 안카나. 사나가 을매나 몬났시마 기집을 다 공구노. 설에 타고 온 차도 우리 아가 카던데 그거 빌리온 차라 카데. 그카길래 내가 안캤나 그 사우가 잘났시마 잘난놈 쌔비렀다 안캤나.

아이고 샘 오싰서예. 지녁은 잡싸아심미꺼. 떡 좀 자실람미꺼? 머 디리까예? 무꾸 디리까? 다발이 너무 많으모 무거바 들고 가겠심미꺼? 내재 갖다디리까예?

/진주(경남 서부)

식이 저그매 사우 잘 났다꼬 온 동네 시끄럽구로 짜다라 씨부리쌓드마는 추석 안에 저그 가수나를 때리가꼬 눈티가 시퍼러키 울고불고 친저에 와가꼬 지기삐리끼다꼬 지랄지랄했다 아이가. 사내가 올매나 못났시모 계집을 때리것노. 설에 끌꼬 온 차도 우리 아아가 봉께 빌리 온 차라 카대. 그래서 내가 글캤다. 그 사우가 잘났시모 세사아 잘난 놈 천지 삐까리라 안캤나.

아이고 샘 오싯심미꺼. 저녁 잡샀심미꺼. 떡 좀 잡술랍니꺼? 머 디리까예. 무시 찾심미꺼? 다발이 너무 많으모 무거버서 가아 가것심미꺼. 난중에 갖다디리까예?

/울산(경남 동부)

시기 어무이가 사우 잘났딱꼬 그래 마 온 마실에 시끄럽구로 씨버리 쌋티마는가실게 저거 안들을 눈티가 반티가 대도록 패갔고 마 울고 불고 친저어 와갔고 주기뿐닥꼬 날리가 난능기라. 사나가 을매나 몬났시마 저거 안들을 패노?설에 끄꼬온 차도마 우리 아아가 보이 빌린 차라 카더마는 내사마 그 사우가 잘났으면 시사 잘난 놈이 천지 갈백까리다 안핸나?

아이고 선상님 오시능교? 저역 자싰능교? 떡쫌 잘술랑교? 무시쫌 디리꾜? 따바리가 너무 마나서 무거버 들고 가겐능교? 마 이따가 갓따드릭까요?




내 고향은 경남 진주. 사는 곳은 경북 동해안.
같은 경상도라고?
처음 이사 와서 몇 달 동안은 말을 못 알아들어서 애를 묵었다니까.
특히 할매들 이야기는 외국어 같애서 아주 까막눈이야. 이십년이 다 된 지금도 팔 할밖에 못 알아들어요.
아, 위에 예문들을 대충 삼천만이 통하는 말로 번역을 하자면 얼추 이래요.


식이 어머니 그 사위 잘 봤다고 온 동네 떠벌이고 다니더니 그 사위란 놈, 지난 가을에 제 안사람을 줘 패서 눈탱이가 아주 시퍼렇게 밤탱이가 돼서 친정으로 왔다데. 울고 불고 그놈의 자식 죽여 버릴 거라고 길길이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사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를 두들겨 패냐고. 설에 타고 왔던 차도 우리 집 애가 보니 빌려 온 차라드만.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아따, 그 사위 놈이 잘났으면 세상에 못난 놈 하낫도 없겠다고.

아이고, 선생님 오셨어요? 저녁은 드셨는지 모르것네. 떡 좀 드실래요? 뭐 찾으세요? 무 찾으세요? 다발이 너무 커서 못 들고 가실 건데. 이따가 댁으로 배달해 드릴까나?


TV 드라마에 나오는 동서남북 짬뽕으로 섞어 놓은 경상도 말을 듣고 있자니 공연히 속이 니글거리고 심통이 사나와져서 말이지.
기왕에 사투리를 흉내 내자면 제대로 알고나 쓰던지. 게다가 배우라는 것들은 도대체 억양 연습이나 하고 녹화를 하는지. 억양은 서울 경기도 억양에다 말은 아주 동서남북 국적불명으로 마구잡이.... 모국어가 아니라서 정 어려우면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려고 애를 써야지. 경기도 사투리에 경상도 억양 붙여 놓은 거나 뭐가 달라. 

당연히 저 예문들은 각자 그 쪽이 제 고향인 내 벗들이 수고를 해 주었지요. 경상도에서 수십년을 살아 온 나도 아는 곳만 알거든. 
그러니 이 사람들아. 이 나라는 서울 경기도 태생의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니야.  경상도 말은 동서남북 어디나 다 똑같은 줄 아는 당신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라고. 대체 드라마를 그 모양으로 만들어놓고도 너그들은 밤에 잠이 오나?
아, 예문들은 어느 날 저녁에 동네 가게에 들어섰더니 아지매 둘이서 수다를 떨고 있다가 들어서는 날 보고 하던 말로 대충 재구성해봤지.
저걸 읽어 보고도 이거나 저거나 똑 같구만 그거 뭐 다른 게 있냐는 사람은 난공불락. 그렇다면 더 할 말 없고.

'단순히 신발을 만든다는 생각으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야 한다.'


언젠가 어떤 갖신쟁이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말이다. 이름 뒤에 무슨 번호도 붙은 국가 공인 갖신 장인이라던가.
나 같은 사이비가 일생을 두고 한 가지만 매만져 온 장인의 심오한 정신을 쉽사리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단순히 신발을 만든다는 생각으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없다.' 는 말에는 그다지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것이 신발이라면 가장 먼저 신발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바꿔 듣자면 그 사람의 말은 단순한 ‘신발’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세칭 ‘예술가’들의 ‘예술적 오만’은 아니었을까?
나는 신발을 제대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기능이 우선하다 보면 자연히 기능에 따른 아름다움이 배어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것이 꼭 신발이 아닌 그 무엇이더라도.)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고 신발로서의 충실한 기능보다는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작품성에 지우치게 되어 정작 신발이 가져야 할 본연의 미덕인 발을 편안하고 안전하게 감싸는 역할에는 등한시 될 것이 아닌가.
신발이 신발로서의 기능보다 작품으로서의 그것이 우선하게 되면 발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감싸고 보호한다는 원래의 본분을 잃고 발 보다 훨씬 높은 곳에 제 할 일을 잃고 진열되어 호사를 누리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나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신발을 빚어내어 세간에 널리 보이는 것도 또한 가치 있는 일이겠지만 튼튼하고 편안한 신발을 발에 잘 맞게 맞춰 신고 거친 땅 위를 걸어 낡고 헤지면서 천천히 배어나오는, 그 자연스러운 마모가 주는 친숙한 아름다움 또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신발은 신어야 신발이고 그릇은 온갖 물건을 담고 비울 수 있어야 하며 북은 쳐서 소리를 내야 북이다. 도난방지 유리 진열장 속에 북채와 헤어져 덩그러니 걸려있는 북은 이미 북이 아니라 '옛날 옛적 그 언젠가 북으로 쓰였던 물건'일 뿐인 것이다.

나는 이전부터 공예적 수준의 물건들에는 어쩐지 호감이 가지 않았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보고나서 비로소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 할 수 있었다.
박물관이건 여염집이건 대단히 화려하고 엄밀한 장식성을 자랑하는 물건들의 모습이 그 길고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당시의 반듯하고 말짱한 모습을 온전히 받아 간직하여 장식장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까닭 없이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보다는 어딘가 답답하고 지겹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생활에서 멀어짐으로 나타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의 손에 부대끼며 닳아가는 생활 도구로서의 그것들이 아니라 다칠라 깨질라 어화둥둥 모셔놓고 조심조심 보존하며 완상하기 위한 공예품적인 그것이 되고야 만 것을 나는 오히려 답답해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러니 나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쓰이고 부딪히고 닳아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장식이 필요하다면 기능이 완성되고 난 이후에 기능과 기능미를 다치거나 넘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기능을 따라 흘러가는 최소한의 장식이 좋지 않을까.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기능적인 구조가 아름답게 배열되어 더 이상의 군더더기의 장식이 필요치 않은 경우다. 대개 완성도가 높은 물건들은 기능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생활에서 늘 가까이하는 물건들도 어지간만 하면 중고품을 별로 꺼려하지 않고 때로는 오히려 새 것보다 더 정겨워하는 것도 이런 데서 나온 습성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나는 옷을 사러 가서도 나는 헌 옷 같은 느낌이 드는 옷을 먼저 집어 든다. 편하니까. 신발도 그렇고 집에서 쓰는 가구들도 마음에 들기만 하면 재활용 센터에서 덜렁 주워 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애 엄마는 궁상이라고 질색팔색을 하지만.
또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단골집 몇 곳을 줄기차게 반복해서 간다. 갔던 곳을 또 가는 것이 새 밥을 찾아 헤매는 것 보다는 얼마나 편안한가 말이다. 물건이건 생활이건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겠지.


허구헌날 만지고 쑤셔대는 오디오는 어떤가. 내 기억으로는 새 것을 사 본 것이 한 번인지 두 번인지? 명색이 오디오라는 것에 눈을 뜨고 난 뒤로는 새 것을 사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새 것에 비해 값이 싸다는 것도 큰 매력이지만 같은 값을 주고라도 뒷 세대의 물건들에는 선뜻 손이 나가지를 않는다. 요즘 만들어내는 그렇고 그런 물건들의 만듦새며 디자인들은 한 세대 이전의 물건들에 비하면 일단 그 관능적인 느낌에서 많이 가볍다.(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뿐만 아니라 상당한 고가의 물건들도 그 디자인은 같은 급수의 예전 물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 쓰고 있는 물건만 해도 십여 년 지난 물건들이 대부분에다가 심지어는 삼사십년 묵은 물건들도 있다. 당연히 외관이 조금 낡았다는 것 외에는 기능이나 만족감에 하등 하자가 없다. 오히려 요즘의 날렵하고 어딘지 얍삽해 보이는 디자인과는 다른 구시대의 투박하면서도 진지한 디자인에 저으기 만족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아, 물론 진공관 앰프의 관 이름을 새겨 둔 글자가 지워져서 형번을 찾아 내느라고 진공관을 뽑아 들고 가재미 눈으로 끙끙 앓아보기는 했다.


하지만 중고 물건들에도 이상하게 배짱이 맞지 않는 물건들은 있다.
낡은 품새며 손때들이 어쩐지 내 그것과는 곱게 오버랩 되지 못하고 사납게 느껴지는 물건들 말이다.
아마도 주인을 잘 못 만나 이 손 저 손 하염없이 흘러 다니면서 거칠고 험악하게 다뤄졌거나 대단히 부주의한 사람을 만나 끔찍한 자상을 입거나 심한 타박상으로 몰골이 바뀌어버린 물건들은 그 외관에서도 내, 이렇게 모진 풍상을 겪었노라는 고약한 성정이 배어 정내미가 뚝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잘한 일상에 부딪히고 시달려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낡음’을 갖고 있는 물건들은 잡티 하나 없이 번쩍거리는 '신품 동(新品 同)'의 물건보다 편안하다. 그 편안함은 친숙함과 취급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중고 물건을 하나 갖게 되면 한동안 그 물건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닦고 매만진다.
내가 알지 못했던 좋은 점이 보이면 기꺼워하기도 하고
혹 조금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다듬어 보기도 한다.
내 나름대로 새로운 물건에 정을 붙이는 방법이다.
그러다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손에서 사랑을 받다가 또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연유를 가만히 그려보기도 하고 크고 작은 흠집이나 닳은 자국에 묻혀 있을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풍상이나 내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사연들을 상상해 보기도 하는데, 그럴 여지가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이 세월의 흔적을 담은채로 내 눈 앞에 온전히 놓여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멋진 매력인가.


그렇다고 중고품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더라.
몇 년 전에 동해안의 바닷가에 있는 어느 밥집에 묵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낮은 구릉에 바다를 보고 앉은 일견 고즈넉한 너와집이어서 바깥 풍경은 썩 나쁘지 않았으나 정작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물레며 죽부인이며 다듬돌에 다듬이 방망이까지 구색으로 갖추어 놓고 가마니 틀에다 골자리 틀이니 이런 보기 어려운 옛것들이 방 한가득 걸리고 쌓여 있는데 그 물건들의 계통 없는 놓임새며 모습들이 우격다짐으로 갖다 재어놓은 창고를 연상케하여 도무지 정겹지 못하고 저희들끼리도 따로 노는 듯 느꼈었다.


쓰일 곳에 쓰이고 놓일 곳에 놓여야 틀이 잡히는 물건들, 물론 그것들이 사람이 쓰던 물건이 아니었더라면 아예 돌아 볼 것도 없었겠지만 중고품들이 갖고 있는 매력은 그것들을 썼던 사람들의 손자국이고 풍상의 흔적도 그렇지만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 엉터리 한지를 바른 방 한 구석에 한두 가지 물건이라도 다소곳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더라면 모르긴 해도 나는 저으기 안도하며 아주 편안하게 허리띠를 풀고 묵밥을 먹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헛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귀신 나올 듯 쌓아 둔 모습은 끌어다 모으는 욕심은 넘치면서 맵시 있게 쓸 줄은 모르는 요즘 사람들의 몰취미를 그대로 보는 듯해서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일별하고 말아, 그나마 맛이 괜찮았던 파전도 두어 점 뜯어 먹고는 그냥 일어서고 말았을 뿐이다.


그래도 그 집 마루 한 켠에 되는대로 쌓아 두었던 누군가의 젓가락 자국이 남은 양은 도시락이며 중고등학생용 책가방, 모표 달린 모자 같은 물건들은 강시처럼 썰렁하게 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는 했었어도 한 때 나도 직접 만지고 부대껴 봤던 물건들이라 불현 듯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애틋하게 쓰다듬어 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목공소에서 새 것을 깎아다가 진열 해 둔 것 보다야 훨씬 낫지.
그렇고말고. 옛 것들이야 상태만 좋다면 묵은 것이 낫다. 타임캡슐에 진공 포장을 해 두었다가 훗날에 기념할 일이 아니라면 그저 사람의 손때가 묻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중고품을 마다하지 않는다. 손때 묻지 않은 말짱한 새 것이야 꼴은 멀쩡하겠지만 몇 백 년 묵은 무덤에서 느닷없이 불쑥 불거진 무슨 부장품같이 그 생경하고 메떨어진 느낌은 다소 끔찍하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 갖신 장인이 만든 신발도 발에 잘 맞는 이가 신어보면 아연 그 아름답고 정교한 솜씨에 대단히 만족하면서 아껴 신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아마도 그렇지 않겠는가. 명색이 장인이라는 칭호가 시정잡배며 우수마발에 계통 없이 되는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닐테니까. 그런데도 내가 끝끝내 마뜩치 않아서 앙앙불락하는 것은 그런 장인이 만든 훌륭한 신발이 정작 사람의 발에 신겨져서 흙 맛을 보지 못한 채로 고스란히 진열장에 갇혀서 미이라처럼 일생을 보낼 생각을 하니 마냥 답답하고 안쓰러워 그래 보는 것일 게다. 아무리 그래도 그저 신발은 신어야 맛인데.



그렇게 오며 가며 음악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학 생활을 하다가 어느 해 쯤엔가 드디어 그런대로 오디오 냄새가 나는 물건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지고 있던 양철쪼가리 오디오가 수명을 다하면서 하나씩 사라지고 난 다음 한동안을 소리를 듣지 못해서 전전긍긍 하다가 아르바이트 반 아버지께 공갈 반 등등으로 간신히 마련했지요.

앰프/ 인켈AK 625 (요즘도 심심찮게 인터넷 장터에 거래되는 AK 650의 동생뻘입니다.
그 때야 황홀했던 건 당연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냥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까만색의 타원형 푸시버튼이 접점 불량이라 애를 먹었지만.)
스피커/ 역시 인켈. 모델은 기억나지 않고 유닛이 한국 마샬의 것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10인치 우퍼가 달린 3-Way였는데 일단 모양은 그저 그랬고 덩치와 무게는 봐줄 만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인켈 상표만 붙은 12인치 양은 플래터가 얹힌 허깨비 턴테이블.
카드리지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piezo YM-121


싸구려 턴테이블에 딸려 나온 이 별 것 아닌 카드리지가 왜 기억에 남아있나 하면 먼저 이야기했던 그 무시무시한 ‘엘피 절삭용’ 세라믹 압전형 바늘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디오를 새로 구입한 기념으로 거금을 들여서 새로 사온 라이센스 판 위에 처음으로 그 piezo YM-121라는 마그네틱 카드리지를 올려놓는 순간 압전형 바늘의 경직되고 불안한 움직임과는 달리 조금씩 휘청거리는 듯 소리 없이 트래킹하는 그 자태와 부드럽고 청아한 소리를 듣는 순간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물 핑 돌았을 만큼 감동 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그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어디서 만든 얼마 정도의 물건인지도 모르면서.

이 때 들었던 엘피가 장드롱 연주의 바하 첼로 조곡입니다. 이 엘피는 지금도 내 장서에 건재하고 있으며 꽤 자주 돌려 댄 음반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깨끗하고 깊은 음질을 유지하고 있어 나는 아주 흡족해 하고 있습니다. 해설집이나 명반 가이드 같은데서 이 장드롱의 연주를 본 적은 없지만 그 노래하듯 유려한 보잉이며 유장하고 부드러운 해석은 여타의 거장들과 비견해서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명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박박 우겨봅니다.


이후로 몇 달 동안의 꿈결같은 음악과의 동거.
친구들과 소주 몇 잔을 나누고 돌아 온 늦은 저녁에 작은 스탠드 불빛만을 밝힌 채 콧구멍만 한 내 골방에서 조용히 흘려 듣는 바하는 열락이었습니다. ....그 뼈마디 저리던 열락이여...
...
적어도 그 소중한 오디오를 내 방에 잠궈 두고 까까머리 장정으로 변신해서 입영열차를 탈 때까지만 말입니다.


김포반도 끄트머리 임진강 하류, 강화도 부근.
멀리 아심하게 우렁찬 한국화약 굴뚝이 보이고 밤이면 바닷물 소리에 두견이만 우는 곳.
말이 좋아 해안경비지 이게 무슨 해안이야.
만조 때나 겨우 발밑에 찰싹거리는 바닷물 구경. 물 빠지면 갯냄새 진동을 하는 진흙 구덩이 갯벌.
그늘이라고는 지푸라기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 소금기 버석이는 갯벌에서 조석으로 노가다,
말뚝에 되똑 올라앉아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개망둥어(짱뚱어)와 먹지도 못하는 외다리 게딱지.
1미터가 넘는 붉고 푸른 갯지렁이, 니가 무슨 지렁이야 거의 뱀이드만.
한 발 빠지면 두발 곧 이내 빠져야하는,
그리하여 파충류처럼 벌벌 기어야 살아 돌아 올 수 있는 곳.
아아 여보시오. 여기는 또 다른 혹성. 생존 해 있는 지구인은 응답 하시오.
분 냄새 나는 애인은 면회도 안 오고 말이야. 염병.

씩씩하게 건빵을 물고 국방의 의무에 전념하던 육군 100번 알보병.
대한민국 국방의 초석 육군 일등병이었던 나는 꼴등병때 통합병원에 누워 듣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부대로 갖고 오지 못하게 되어 곧 음악에 대한 금단증상 때문에 마음고생을 자심하게 하게 되었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지금은 어디서 구했었는지 기억도 희미한 초소형 라디오를 외박 길에 하나 구해갖고 왔습니다. 이건 지금의 초박형 전자계산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인데 백원짜리 상아색 이어폰 -진정한 빈티지 이어폰- 을 반드시 꽂아야만 한쪽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겉모양도 계산기와 너무 닮아 정말 전자계산기같이 비닐로 된 수첩 표지 같은 것이 덮여 있었는데 접어서 전투복 상의의 가슴팍 주머니에 넣으면 거의 있는지 없는지 자국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얇고 작았습니다. 아마도 보나마나 일본 것이었겠지요?

하여튼 어디선가 이걸 하나 구해서 야간 입초 때마다 멀리 김포 공항으로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의 불빛을 보면서 한 쪽 귀로는 주번사관의 순찰을 살피고 남은 한 쪽 귀로는 심야 음악방송을 들으면서 혼자 득의만만 기꺼워했습니다.
하지만 이 물건은 워낙에 두께를 줄이려다 그리되었는지 도대체 서울 인근에서도 방향을 얼마나 심하게 타는지 지글거리기 시작 할 때는 방향 잡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지. 거기다가 참
호 속에 폭 파묻혀서 눈만 빼꼼 불빛이라고는 없는 새까만 갯펄이며 바다 쪽을 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에 방향 잡느라 뒤돌아서서 라디오를 듣자하면 그게 소린들 제대로 들리겠으며 또 휑하니 비워 둔 뒤통수는 간첩이 오는지 구신이 오는지 뒤숭숭하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몇 달을 올빼미로 살다보니 해 뜨면 터덜터덜 둑길 걸어 돌아와서 오전 한 때 비몽사몽 자고 일어나 잠만 깨면 삽 들고 노가다에 보수작업인데 해만 뜨면 음악은 뭔 음악. 다만 점심시간 시작을 알리는 연병장 가득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엄정행의 오오 내 사랑 목련화만 수도 없이 피고지고 그랬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엄정행이나 목련화 노래만 생각하면 바로 그 땡볕 자욱하던 시뻘건 연병장만 생각납니다.

그렇게 음악과 슬슬 뜸해져가던 어느 날 서울 시내로 외박을 나갔던 나는 딱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었던지라 귀동냥으로 주워들었던 명동의 필하모니를 물어물어 찾아 갔습니다. 군바리 외박에 혼자서 음악 감상실이라.... 참 주변머리 없는 육군 쫄병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날 일생을 두고 벗어나지 못할 깊은 내상을 입게 됩니다. 
명동 필하모니의 그 야박하도록 두꺼운 크리스탈 유리잔에 부어 주는 음료수 한 잔을 앞에 놓고 침침한 감상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참 간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몇 곡 듣는 척 하다가 졸다가 거의 잠결이었는데 그 잠결에 가슴을 제대로 울리는 낮은 피아노 소리를 듣고는 화닥닥 잠이 깨어버렸습니다. 분명 낯익은 곡인데 이게 왜 새삼스럽게 가슴을 쿵 내려 앉히는 거냐는 말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2번이었습니다. 1악장 도입부의 피아노의 어둡고 깊은 타건. 처음으로 음악이 아닌 '소리'를 듣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리히테르의 연주였습니다. 
막간에 오디오실을 찾아가서 음반 자켓을 보여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요. 그 때까지는 이 음반만 구해 얹으면 그래도 비슷한 소리는 나와 줄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전역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렵사리 이 음반을 구해서 내 오디오에 얹어 보고는 아니나 다를까 아주 좌절하고 말았지요. 그렇게 좋기만 하던 내 오디오는 이제 아주 천덕꾸러기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제대로 노래도 못하는 것이 왜 쓸 데 없이 덩치만 크냐고...
내가 고향을 떠나 있던 사이에 집 부근에 새로 생겨 있던 작은 찻집이 내 병을 아주 부채질을 해 대는데, 내 또래의 젊은 친구가 주인장이었던 그 찻집에는 내 인켈 스피커의 절반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조그마한 AR 북셀프에 불빛도 흐릿한 구닥다리 산스이 리시버를 물려서 가라드 턴테이블로 비닐 레코드들을 돌려대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아주 가당찮았거든요.


별로 값나가지 않는 물건들로 절묘한 소리를 들려주었지요. 모델을 기억하지 못하는 좀 묵직해 보이는 일제 산스이 리시버 앰프에다 가라드 턴테이블(301 이니 이런 유명한 것은 아니었고 그 보다는 조금 하위 기종으로 보였습니다.)에 슈어 91을 달아서 AR-4X를 울리고 있었는데 이게 참 절세의 매칭이었습니다. 따뜻하면서도 흐리멍덩하지 않은 그 속 깊은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군 제대 후에 복학때까지 애매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그 곰팡내 나는 지하 찻집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기로 굳게 결심을 했지요.

밤이 늦도록 그 찻집에서 뭉기적거리는 날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곳의 골수 당원들과도 교분을 트게 되었고 내 방에서 엄격한 출입금지 처분을 받고 있던 내 소중한 LP들이 이제는 뻔질나게 그 곳을 드나듭니다. 물론 밤늦은 시각, 문을 닫은 뒤에는 소주와 깡통 안주와 컵라면 따위로 성찬을 마련하고는 밤을 새워 입씨름을 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아, 물론 그 때의 입씨름은 오디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 때 만큼은 오디오에 관한 한 더 이상의 소리도 욕심나지 않았고 남쪽 끄트머리의 작은 소도시에서는 욕심을 내 본들 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무튼 밤이 늦도록 몇 몇 악당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기염을 토하는 일이 피 끓는 백수 시절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괜찮은 백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껏 나름대로 음악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줄기를 잡게 된 것이 그 때의 그 늦은 시간들이 내게 남겨주고 간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때때로 그 시간들과 사람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 찻집 주방에서 잘 생긴 얼굴로 커피를 끓이면서 나무 숟가락을 들고 열심히 지휘를 하던 아르바이트 주방장은 지금도 때때로 가족을 대동하고 만납니다. 때로는 학교 동창이나 옛 친구들보다 더 허물이 없이 편안하기도 합니다. 음악이 얽어 준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고온도 꽃 샘 추위도 다 소용 없습니다.
아이구나 벌써 덥네 벗어 던질 때는 기척도 안하다가 이 쌀쌀한 날씨에 굳이 밀고 나온답니다.
원수야 악수야 지청구를 해싸도 만사 때가 되면 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늦다니 이르다니 암만 날씨 탓을 해 봤자 해마다 우리 동네에서 두릅이 먹기 좋을만큼 자라는 시기는 양력 4월 10일 전후입니다. 이제 막 순이 터져 나옵니다. 



이제 곧 시장에는 산나물들도 쏟아져 나올겁니다. 
봄은 싫지만, 봄나물은 기다려집니다.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니까.   



/사진 생각 없이 올린다고 집에 온 큰 아이한테 구박 받고 포토샵 강의 들었습니다. 
  실컷 키워 노니 잔소리만 합니다.    





내가 처음 고전음악이라는 것을 들어 본 것은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흔히 보기는 어려웠던, 그리고 우리 형편에는 좀 과분했던 장전축이라는 것이 집에 있기는 했지만 그 전축 아래 칸에 꽂혀 있던 음반이라야 아마도 아버지께서 사 놓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백아가씨, 돌아가는 삼각지, 또, 무슨 아리조나 카우보이 따위의 판들만 몇 장 뒹굴어 다닐 뿐, 음악은 무슨 개뿔을 음악, 나도 덩달아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나 시건방지게 따라 해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장전축/ 네 발 달린 가구에 가까운 일체형 전축.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은 아마도 거의 골동품으로 분류해야 할 겁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장전축 아래에 놓인 아주 낯선 판때기를 한 참 들여다 봅니다.
판 앞쪽은 누런 간판 같은 곳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개발새발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시꺼먼 배경에 어떤 사람이 허연 실루엣만 드러낸 채로 팔을 벌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판의 뒤 쪽에는 낯설지 않은 사람의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베토벤의 초상화였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이라고는 그 때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에 무슨 영문인지 그 빨간 마후라를 두르고 겁나게 노려보고 있는 쑤세 머리 베토벤의 근엄한 초상화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 저기 많이도 걸려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국민학교 앞 동네 이발소에도 하나 걸려 있었지요.)


쉽게 말해서 뭔가 있어 보이는 껍데기에 끌렸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뭐, 그 때나 지금이나 이론적인 배경에는 초연한 내 습성대로 뭐가 어찌 되었든 말든 그 뭔가 있어 보이는 판때기를 꺼내서 무작정 호마이카가 번쩍이는 장전축에 판을 올려놓고 들어 보았는데, 이게 뭐가 상당히 시끄럽고 야단스럽기는 한데 또 전혀 그렇지만은 않은, 좀 묘한 기분을 들게 하는, 말하자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 본 서양 고전음악이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묘하게 가슴팍을 설렁거리게 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서 그 생면부지의 소리를 미련스럽게 꽤나 오래 듣고 앉아 있었습니다.

나중에 확인된 바, 그 판은 그 당시에 열애에 빠져 있던 둘째 누나가 연인과 주고받은 선물 중의 하나였는데 그게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이었습니다. 당연히 흔해 빠진 카라얀의 연주였고.
이렇게 어설프게 첫 음악 세례를 땡판(내가 불법 해적 복사판에 부여한 호칭. 매우 멋진 호칭이라고 혼자 우겨 봅니다. 음.)으로부터 받은 나는 그 뒤로도 간간히 연인의 선물에 현혹 된 둘째 누나에게서 반 강제적으로 음악 고문을 당해야 했고, 사실 당시에는 별 대단한 감흥을 받은 바도 없던 나는 겨우 곡 이름 몇 개를 외워서는 그 당시에 그야말로 문화의 불모지인 지방남도의 끄트머리에서 삭막하게 서식하던 친구들에게 은근히 잘난 체를 하는 유용한 도구 정도로 써 먹고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가고 솜털만 있던 입 언저리에 슬금슬금 꺼먼 털이 듬성듬성 솟아 날 무렵에는 그래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제법 귀에 익은 멜로디 들은 조금씩 흥얼거리게 쯤 되었는데 게다가 주변의 주변머리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같잖게도 '클래식 도사'정도로 인식되는 불미스러운 일도 생겼지요. 그 시대 지방 소도시의 문화적 황폐함에 축복 있으라!
그 때만해도 교향곡이나 협주곡 같은 큰 곡들을 끝까지 듣는다는 것은 무제한의 인내심과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과중한 정신노동 이었으니 그 클래식 도사라는 칭호는 모자라는 내실을 무표정으로 감추기에 능했던 나의 포커페이스에 기인한 99프로 야바위 수준으로 생각하면 딱 맞을 겁니다.

그 사이, 우리 집의 호마이카 장전축은 아마도 폐기 처분 되었는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침 지방 방송국 중계소에 다니고 있던 세 째 누나가 그 중계소의 기술자가 얼렁뚱땅 꾸민 리시버 앰프와 막통 스피커를 어떻게 구해 왔는데 거기다가 플래터가 손바닥만 한 플레이어도 하나 따라 왔습니다.
거 참, 다리 넷 달린 일체형 장전축만 보던 눈에는 그게 참 묘하게 보였습니다. 어떻게 전축을 갈가리 찢어서 만들어 놨느냐- 이거지요.
그래도 소리 하나는 꽤 그럴 듯 했습니다. 곡에 따라서는 제법 스테레오 흉내를 내기도 했으니까. 말하자면 장족의 업그레이드가 된 셈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황당한 조합이었습니다.

앰프- 묻지마 표 자작 리시버.
플레이어- 8인치 플래터가 달린 동네 전파사 표.
- 플래터가 작은 접시만 해서 엘피 판을 올려놓으면 절반은 허공에 뜹니다.
톤암- 영구 고정식 그냥 톤암.
카드리지-압전형(싯가 100원-200원. 양면 사용가능하므로 매우 경제적임.)
스피커-출처를 알 수 없는 국산 6인치 풀레인지 막통 나발
(이것은 유닛이 풀레인지 용이라는 것이 아니고 네트워크니 뭐니 아무것도 없이 달랑 양철 프레임의 유닛 하나만 달려 있었습니다. 아, 그러고비니 도니 모니 따질 거 없이 풀레인지가 맞기는 맞습니다.)

특히 세라믹 압전형 바늘은 그 중 압권이어서 새 바늘을 하나 갈아서 픽업(헤드 셀 뭉치를 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을 올려놓으면 바늘 끝이 레코드판을 '치익-'하고 파먹는데 바늘 끝에 비닐 레코드의 살점이 깎여서 도르르 말려 올라오기도 하는 기막힌 물건이었습니다. 아주 기겁을 했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버려 먹은 판들이 상당수였는데 그나마 그거라도 쓰다가 바늘 끝이 닳아서 소리가 흐리멍덩해 지면 기발한 생각이랍시고 헤드 셀 위에 십 원짜리 동전 몇 개를 테이프에 붙여서 잔뜩 눌러서 듣고는 했으니, 그게, 레코드판들이 성하게 남아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매우 폭력적인 해결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며 지금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버려 먹은 땡판들의 일부는 아직도 내 손에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현역으로 뛸 수는 없는 고령자에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상병들이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한정 없이 랙 한 구석에 꽂힌 채로 '사랑'만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영영 턴테이블에 얹힐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그걸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이렇게 음악 소스의 대부분을 땡판으로 충당하면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음질이니 뭐니 고음이 어떻고 저음이 어쩌구 스테이지니 뎁스며 해상도가 어땠냐고요? 
그런 어려운 용어를 구사할 수준이 아닙니다. 고만 넘어가지요.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레코드점에는 보기에도 근사한 성음, 지구, 오아시스,등 국내 굴지의 레코드 회사에서 발매하기 시작한 번쩍번쩍 라이센스 음반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주머니가 빈약한 학생의 신분으로서는 아주 그림의 떡인데다가, 또 라이센스 음반과 같은 곡을 그대로 담은 카세트테이프들도 꽤 많이 보였지만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장치조차 없었으니 그건 더더욱 그럴 밖에요. 그 당시 카세트 데크들은 엘피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귀했고 고가의 장비였습니다.

대학을 갔습니다.
마침 음악 감상 서클이 있길래 뭐 더 이상 볼 게 있어야지요. 앞뒤 안 가리고 덜렁 가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입을 하고보니 명색이 대학의 서클이라는 것이 여건이 열악하기가 차라리 내가 가진 양철 오디오 찜쪄먹을 수준입니다.
서클룸은 언감생심, 명색이 음악 감상 서클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이라는 것이 고작 라이센스 음반 기십장에 땡판이 백여 장. 감상방법은 학교 잔디밭에서 각자 가장 편한 자세로 널부러져서 LP 크기보다 더 작은 휴대용 야전(야외전축) 으로 듣되 될 수 있는 한 각자 가장 심오한 표정으로 듣기.

물론 상당수의 대학 서클이 그러했듯 2차(한 잔!)에 눈독을 들이고 참가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그 열기 하나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참 순수하고 대단 했었습니다. 지금은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 그립고도 징그러운 화상들.
 

(/야전: 아마 이 물건은 지금 젊으신 분들은 아예 해독이 안 될 것으로 압니다. 물론 그 당시 음악 꽤나 좋아했던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정말 눈물 나는 추억의 오디오이기는 하지만.)

이 야외 전축이라는 것이 AC 전원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아심하기는 한데 뭐 있거나 말거나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이 꽂을 데가 있어야 말이지요. 하여간에 이 물건에다가 건전지를 여러 개 넣어서 '주간(週間)감상회'를 하는데 이게 최신 기술의 초절전형 하이테크가 아니다보니 얼마 가지 않아서 곧 탕진이 되고야 맙니다. 좀 오래 들을라치면 '꽝'하고 두들겨야 할 팀파니가 '구우우웅'하고 슬슬 늘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지요.절망적으로 늘어져 버린 카세트테이프의 소리를 연상하시면 거의 비슷합니다.

그나마 스피커는 판때기 얹으면 그 밑으로 숨어버리는 몸체에 붙은 간장 종지만 한 것 하나가 전부였으니, 하이파이에 스테레오? 그거 꿈도 꾸지 말아야지요.
꿈도 꾸지 않았으니까 불만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바람 부는 저녁나절의 캠퍼스 잔디밭에 혹은 앉고 혹은 드러누워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때로는 감흥을 못 이겨 그 산만하게 흩어지던 소리들을 지휘하던, 지금도 간혹 생각이 나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어쩌면 학과보다도 더 열심히 드나들었을지도 모를 그 서클은 일 년에 한 두 번씩 시내의 다방이나 예식장을 빌려서 정기 음악 감상회를 하고 적자건 흑자건 간에 뒤풀이도 거나하게 하곤 했었는데 그놈의 스폰서 구하느라 이뿐 여학생들 앞세워서 시내 상가 일대를 누비던 추억도 지금 생각하니 참 아릿하네요.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런 시대착오적인 서클은 아마도 이전자전에 고려장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손만 뻗으면 지천에 음반이고 오디온데 누가 그런 곰팡내 나는 서클을 들어가겠냐는 말입니다. 박물관에나 보관을 하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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