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큰 아이를 데리러 갔다 왔습니다.
가던 중에 시간이 좀 남아서 바닷가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이 사진을 찍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내 또래거나 나보다 조금 어리거나 한 정도의 사나이가 하나 다가왔습니다.

‘뭐 하시는 분인데 사진을 찍으십니까?’

힐끗 쳐다보고 그냥 무시를 해버렸습니다.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많이 싫어합니다.
긴한 용건도 없으면서 은근히 턱을 치켜 들고 사람을 간보는 타입.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이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면 나도 웃는 얼굴로 답할 줄 압니다.
카메라를 들고 변두리 동네를 어슬렁거리다보면

‘거, 뭐 좋은 게 있어서 그리 찍습니까.’

하고 물어오는 사람들은 더러 있습니다. 그럼 나도 좋은 얼굴로 답 해 드립니다.

‘지나가다가 보기 좋아서 그럽니다.’ 하고.

하지만 대뜸 목에 풀 세우고 접근하면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십 중 팔구 말도 안 되는 지분 내세우면서 참견해 댈 허세들이 분명하니까.
제 딴에는 턱 치켜들고 시작했는데
뭐라거나 말거나 씹어버렸더니 기분이 좀 상했던 모양입니다.

‘사진을 왜 찍으시냐고요.’
‘왜 그러시는지부터 말씀 하셔야지?’

좀 귀찮은 생각도 들고 이런 상황이 지겨워서 좀 비틀어 날려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몇 장을 더 찍고 확인을 한 후에 돌아서서 차에 오르는데 이 친구 수첩 꺼내들고 내 차 번호를 적는 시늉을 합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픽 웃고는 물었습니다.

‘거 차 번호는 왜 적고 그러슈?’
‘내가 동네 청년회장이고 새마을 지도잔데 동네에 수상한 사람이 보이거나 하면 감시하고 신고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고, 대단한 분이셨구만. 거, 잘 보고 또박또박 적어 노세요. 숫자 틀릴라.’

빈정대는 기색이 느껴졌는지 얼굴이 좀 불편해 보입니다.
이런 상대에게 더 이상
이야기 할 건덕지도 없고 
길게 끌어서 나도 유쾌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그럼 계속 욕보세요.’ 한 마디 던져 주고 출발 해버렸습니다.
가면서 백미러로 들여다보니,
이 완장맨, 멍 하니 선 채로 내 차 꽁무니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못됐습니까?
뭐, 인정합니다. 내 성질머리가 솜털같이 보드라운 편은 아니니까.
하지만 아직도 저런 완장들이 목에 풀 세우고 다니는 꼴을 보면 용납이 잘 안됩니다.
생각보다 세상은 참 더디게 개명합니다. 아니, 거꾸로 가는 건지?
이래저래 많이 갑갑합니다.
 

이건 완장 없는 동네에서 찍었습니다.
갑갑한 이야기를 꺼낸 것, 품앗이 용입니다. 부디 더 갑갑해지지는 않으시기를.

 

 

 

 




악보를 보고 익히고 되새겨서 힘써 빚어낸다고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지. 아니고 말고.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울컥하고 쏟아져버리는 이것이다. 내가 미치는 것은.
연주가 어떻고 곡의 해석이 어떻고를 따지기 전에.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그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아니, 그것이 존재하기도 전에.
무심한 척 슬쩍 당겼다가 놓아버리는 완급은 아주 넋이 달아나고 .

그의 음악은 음악 이전의 것이다. 그의 음악은...
모든 연주자를 망라해서 음악의 원형질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사람.
인간에게 왜 음악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사람.

조금만 더 나은 음질로,
스테레오는 바라지도 않지만,
조금만 양호한 환경에서 녹음한 음원으로 남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나도 동의한다. 백 번 천 번이고 동의를 하지만
그나마 그의 음악이 이런 정도로나마 우리 곁에 남아있어 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아아. 카잘스.
나는 그가 느린 템포만 잡아도 무턱대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바하의 아다지오.
바하가 듣는다면 다짜고짜 덥석 껴안아버릴 것 같은 카잘스의 바하. 
그래서 이번만큼은 바하가 아닌 카잘스의 아다지오로.


/하동 가는 경전선 철길. 오래 된 기억.

친구야.

지난번 고향에서 만났을 때 내게 한 약속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니가 지킬 의사가 있다면, 그 약속은 파기 되어야 하고,

그 기념으로 술잔을 한 번 더 기울여도 좋아.

, 같이 시작해서 같이 망가진다는 조건으로.


하지만 내게 한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다면 넌 개뿔이야.

, 사십년 지기의 취중 약속에 그리 야박하게 구냐고,

도대체 취중 인품이 그것 밖에 안되냐고 입을 모아 비난하더라도 나는 이제 너랑 술은 안 마셔.

우리가 이 나이 되어 내가 널더러 술 먹어라 말아라 참견할 일은 아니니

각자 알아서 각자의 인품은 각자 챙기기로 하고.


그 약속을 기억하든 못하든, 지키든 안지키든, 그 약속 자체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다만 늬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


아하, 그렇다고 해서 널 안보겠다는 말은 아니야. 달리 기분이 상했다거나 속이 꼬인 것은 아니니까.

나이 들어 갈 수록 더 자주 봐야지. 넌 멋진 놈이고 오래 묵은 좋은 친구니까.

다만 이제는 그 오래된 술을 같이 마시지 않아야겠다는 것 뿐이야.

오래 묵은 친구야. 그러니 이제는 만나거든 술은 같이 먹지 말자.

술을 같이 안마신다면 너는 내게 기억도 잘 나지 않을 그런 제안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며칠동안 머리를 기우뚱거리면서 생각을 되작거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거든.

그럼으로 해서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마음 부대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자꾸 뜬금없이 생각이 떠오르는 바람에 여태 생각을 이리저리 뒤집다가 올려 놓기로 했네.

내 딴에는 오래 생각했다는 뜻이지.


무슨 약속인지 생각이 안난다면 너무 골 싸매지 마.

그냥 놔두면 세월에 씻겨서 그대로 흘러가버릴 정도의 일이니까.

그리고 이건 니가 달라져서라기보다는 내가 변한 셈이니까.

이제는 속병도 나고, 뒷감당도 잘 안되고

꼭 술잔을 들자하면 그나마 즐거운 시간에 기대어 몇 잔 마실 뿐인데

몸이건 마음이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음을 접어 놓고 술잔을 들기 싫다는 말이지.

 

안이든 밖이든 참고 견디는 건 싫거든. 술잔을 들면서까지 그래야 한다는 건 더 싫어.

그건 정말 지긋지긋 해.

여태 살아오면서 나도 꽤 지쳐서 그런가 봐. 이제는 좀 쉬고싶다는 거야.

요새 말로 정말 쿨하게 말이지.


아하, 그래도 맛있는 밥집이 있다면 같이 밥 먹고 떠드는 건 언제든지 대 환영이야.

, 물론 밥은 내가 사야지. 요 다음번 밥은 내가 예약이야.

다음에 만나거든 어디든 좋은 곳으로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가자.

안녕.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狗商 윤영모 씀. 제목 없음.



비 오는 날은 비만 바라보고 비만 생각한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 그럼 넌 비만 생각 해. 

나는 비가 오면 비만 빼고 온갖 것이 다 생각 나. 
오늘은 雨요일이야.
술을 멀리 하면 술이 나를 찾아 헤멜지도 몰라. 나 찾지 마.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狗商이 사람 잡네.




4월도 절반이 꺾였다.
이 세월을 잊을까봐 하루하루 낙인을 찍듯이 살지만  
때로는 그냥 정신을 놓아버리고싶기도 하다. 우울해지기 싫어서. 하지만 어느게 나을 지는 나도 모르겠다.

마당의 민들레


저 솜털만 털어내면 저 놈들은 할 일을 다 끝내는구나. 좋겠다.

이렇게 겨운 봄날도 지나가나보다. 


시골로 여행을 하다보면 한적한 국도변 여기저기 용도변경 되어 좀 뜨악한 모습으로, 혹은 제 딴에는 제법 그럴싸한 모습으로 변신한 폐교들을 더러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 변신한 폐교사에 구경삼아 들어갔다 나오신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넓고 큰 빈 집을 흉물스럽게 비워놓는 것 보다야 조금 손 봐서 각종 수련장이며 야영장, 예술마을, 도예촌, 박물관, 경로당, 노인 병원 등등 그나마 사람 냄새가 끊이지 않도록 그렇게라도 해 주는 것이 마을을 위해서나 폐교를 위해서나 더 나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 또한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나는 그 어떤 경우이든 학교가 문을 닫는다는 것부터 틀려먹었다고 생각하는데다가 기왕에 폐교가 된 학교를 다른 용도로 바꾸어 쓰는 것은 더 못마땅합니다. 중이 떠났다고 절을 여관으로 바꾸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요. 비유가 좀 억지스럽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마는.
하여간 그만큼 못마땅하다는 겁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합니다. 학교가 문을 닫은 마을이 얼마만큼 빠른 속도로 생기를 잃어 가는지. 아이들이 재재거리며 뛰어놀지 않는 골목은 졸지에 적막강산입니다.
집집마다 사람이 들어있는 것 만 해도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칠십 팔십 꼬부랑 할매 할배들 허리 짚고 호미 들고 논밭 나들이에 숨만 차지요. 햇볕 쨍한 한낮에 골목에 나가보세요. 사람새끼 그림자 하나 보이나 안보이나. 
학교가 없는 마을은 떠났으면 떠났지 더 이상 사람 안 들어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들어옵니다.
귀농이요? 귀향이요?
어떤 미친놈이 제 새끼 공부시킬 학교도 없는 동네로 귀향한답디까?
도시인들의 전원생활? 아이고 꿈도 크셔라.
학원 없는 마을만 해도 억장이 무너질 엄마들이 버티고 있는데 학교 없는 마을에 뭘 믿고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 온답니까. 어이가 없어서 턱이 떨어져 나갈 소립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가 오십 년인가 육십 년인가 이 동네 중학교 꼬라지 보면 한숨 납니다.
전국의 시골 학교들이 장삼이사로 비슷한 꼴일 것은 자명합니다만 과목은 열 세과목에 선생님은 일고여덟 되나마나. 대충 짐작이 가시지요? 그나마 예체능 교사들은 시수 채우느라 수십 킬로 떨어진 두 학교 세 학교 겸무 뜁니다. 학부모에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대접 받으면서 어떤 교사가 시골학교 오려고 합니까? 그러니 틈만 나면 시내로 튀려고 호시탐탐, 촌에 발령 받으면 에라 모르겠다, 자빠진 김에 쉬어 가자.

그저 대한민국 촌구석에 사는 것들은 사람도 아닙니다. 제 자식 이모저모 뜯어봐서 한 구석이라도 될성부르다 싶으면 이런 더러운 대접 받으면서 촌에서 안삽니다. 땡빚을 내서라도 도시로 나가는 게 맞습니다. 뭐 안 그래도 나도 음으로 양으로 압박은 많이 받습니다. 큰 놈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어떻게든 작은 놈을 데리고 포항 인근으로 나가봐야 할 참입니다. 내가 나가기 싫으면 애 엄마랑 둘이 묶어서 방이라도 얻어 내보내야합니다.
강남 팔학군에서도 망할 놈은 망하고 변방 깡촌에서도 날 놈은 나느니라, 잘 살고 못 살고는 니 하기에 달린 것이지 학교 좋은 데 나온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라, 알듯 말듯한 고집으로 촌에서 살자고 고집을 부렸던 나도 이제는 뒷심이 딸려서 더 버티지를 못합니다.

이놈의 나라는 본교가 분교가 되고 분교가 폐교가 되는 나라입니다. 손바닥만 한 시골학교를 우습게 보는 나라라면 국토 균형발전은 개나 물어가라고 던져 주는 것이 옳습니다.
구십 년대 후반, 순전히 경제적 잣대를 들이대어 재적생이 적어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전국에 산재하던 분교장의 문에 못질을 하고 공식적으로 학교 통폐합을 추진하던 어떤 정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정부는 국가 재정의 긴축을 이유로 교사 정원까지 줄였습니다. 그 돈 아껴서 얼마나 대단한 데 썼을까요? 이런 나라가 도시의 인구집중을 걱정하고 인구분산을 도모해요? 헛소리.

그래서 나는 예술 마을이다 도예촌이다 뭐다 그럴싸하게 화장한 채로 뻔뻔스럽게 길가에 간판까지 걸고 서 있는 廢校舍들이 곱게 안보입니다.
이름만 비단으로 얄궂은 뼁끼 칠 뒤집어 쓰고 서 있는 폐교사들.
나는 그거 보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정치모리배들의 위장술로 보여서 아주 배알이 꼴립니다. 차라리 서까래가 썩어 내려앉아 귀신이 들락날락 하는 꼬라지 그대로 내비 둬야, 아니, 사람 사는 동네에 학교 꼬라지가 왜 이 모냥이냐, 나라 꼬라지가 같잖다 보니 백년지대계가 허물어지는 거 아니냐, 뭐 이런 경각심이라도 일깨워야 한다는 그런 얼척 없는 고집입니다.


국토 발전의 균형이나 기회의 균등을 생각했다면 교사 정원을 늘여서라도 학교를 지켜야했고 어쩔 수 없이 통폐합을 하기로 했다면 기존의 정원이라도 유지시켜서 소외된 지역의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양질의 교육을 도모했어야 옳았습니다. 긴 호흡으로 본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반드시 마이너스가 될 등신 같은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도 두 세 개의 분교가 하루아침에 폐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거는 아니다 싶은 생각에 촌구석에서 혼자서 개새끼들 소새끼들 욕을 하고 뒤지게 부애를 질렀었습니다. 그 대통령 찍었다던 애 엄마까지 핍박하면서 고래고래 성질을 부렸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일본의 어느 산골 분교의 입학식인지 졸업식인지를 보았습니다. 그 해에 졸업하는 단 한명의 학생을 위해서 그 나라 교육부 장관까지 행차해서 무게를 실어주던 그 나라의 교육행정을 보고나서는 그 후로 용도 변경 된 폐교만 보면 자꾸만 속이 뒤틀리고 배알이 꼴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도 매사가 디테일에서 저 나라에 뒤지는 거다. 두고 봐라, 백년지대계라는 교육을 계산기 하나로 또닥거려 내팽개치는 나라는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고 말거다. 두고 봐라, 두고 봐라, 내가 명도고 내가 남해보살이다. 그리되나 안 되나 내기를 해도 좋아... 악담을 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
그런데 그 치러야 할 대가 속에 나나 내 새끼가 포함 된다면?
이런 빌어먹을, 염병할.   
아,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니 숨이 찹니다. 마지막으로 내 작은 놈 이야기만 하나 하고 끝내지요.

내가 살고 있는 이쪽 변방 깡촌 초등학교에는 인근 분교장들 통폐합하면서 교육부에서 하사한 노랑 버스가 두 대 있습니다. 동네 인근에 분교장을 못질 해버렸으니 그 동네 사는 학생들 본교까지 실어 나르라고 보내 준 버스지요. 그런데 그 버스, 오백 미터 떨어진 동네 아이들은 태워다주고 오리, 십리 떨어진 동네 학생들은 안태워줍니다.
마침 내가 사는 동네가 혜택이 없는 동네라 거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한다는 말씀이, 오백 미터 떨어진 옆 동네는 폐교 된 저쪽 분교장에 해당 되던 동네라 태워 주고 오리, 십리 떨어진 우리 동네랑 그보다 더 먼 산 넘어 동네랑 갯가 마을은 원래 이쪽 본교 해당이라 차 태워주면 안된답니다. 그 지침, 그 썩어 문드러질 교육부에서 내려왔답디다.

우리 집 꼬맹이, 날씨 어지간만 하면 자전거 타고 씩씩하게 잘도 댕기지만 춥거나 덥거나 일기 불순한 날은 이 몸이 몸소 수송을 해야 합니다. 큰 놈 태어나서부터 여태껏 그래도 깡촌이 좋다하고 뭉기적거리며 버티고 살고는 있는데 날이 갈수록 한심해지는 이런 순 드런 놈의 학교 정책을 보자 하니 과연 이 잘난 나라의 썩을 놈의 촌구석에서 계속 똥고집으로 버티고 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목하 고민이 열두 보따리올시다.



아침 연무가 끼어서 흐릿해진 내 고향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고향은 좋은 곳이다.
떠난 지 이십년에 너무 많이 달라져버렸지만 그래도 참 예쁜 곳이다. 내 고향은 진주다.
아침 일찍 잠이 깨어서 어릴 때 숱하게 올라다녔던 남강변의 망경산에 올라 내 살던 동네를 내려다 봤다. 
..... 나즈막하던 우리 동네는 어디 가고 이 무슨 낯 선 스카이라인? 내 고향은 어디 갔어?

내 친구가 살던 동네.
그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산 아래 마을의 아침. 친구야 밥 먹고 학교 가자.

늘 붙어 다니던 두 친구와 같이 셋이서 쇳덩어리 주으러 다니던 경전선 철길이다. 
나와 같이 쇳덩어리를 주으러 다니던 한 친구는 죽었다. 재작년에 죽었다. 나와 또 다른 친구 하나를 각각 남겨 놓고 저 혼자 소식도 없이 죽었다. 나쁜 놈. 
죽은 지 석달만에 묘지를 찾았던 살아있는 친구와 나는 말 없이 소주만 한 병 들이붓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었다. 죽은 친구의 엄마는 내 전화를 받고 한참을 울었다. 나쁜 놈.
어머니. 울지 마세요. 병하 대신 세배 드리러 가겠습니다. 친구 어머니에게 철석같이 약속 해 놓고는 아직 작년 세배도 미뤄놓고 있다. 나도 나쁜 놈이다. 
친구야 일어나서 학교 가자. 철길에 노란 유채꽃 피었더라. 



이 철길 따라 가면 나동 나오고 유수리 나온다. 더 멀리 가면 하동도 나온다. 아주 멀리 가면 목포도 간다.
내 친구는 나동 공원묘지에 누워 있다.

하동 가는 길. 나동도 간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막혔다.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삼십분 넘게 기어가다가 결국 중간에서 지방도로 빠져나왔다.
돈 밭는 톨게이트 직원이 꽃놀이 때문이라며 미안해 한다.  
궁리 끝에 갔던 길을 되돌아 오기로 했다. 얼핏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된 셈이다.
그러게 사는 건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의 내일은 별 일 없으십니까?

만장하신 여러분들의 꽃놀이 덕분에 정말 가는 길에 생각했던 그대로 그 길을 되짚어 오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쁜 사진을 한 장 더 찍을 수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낙동강을 끼고 달리는 1022번 지방도.
예쁜 길이다. 또 가고싶은 길로 치부책에 꼭꼭 적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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