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여행을 하다보면 한적한 국도변 여기저기 용도변경 되어 좀 뜨악한 모습으로, 혹은 제 딴에는 제법 그럴싸한 모습으로 변신한 폐교들을 더러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 변신한 폐교사에 구경삼아 들어갔다 나오신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넓고 큰 빈 집을 흉물스럽게 비워놓는 것 보다야 조금 손 봐서 각종 수련장이며 야영장, 예술마을, 도예촌, 박물관, 경로당, 노인 병원 등등 그나마 사람 냄새가 끊이지 않도록 그렇게라도 해 주는 것이 마을을 위해서나 폐교를 위해서나 더 나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 또한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나는 그 어떤 경우이든 학교가 문을 닫는다는 것부터 틀려먹었다고 생각하는데다가 기왕에 폐교가 된 학교를 다른 용도로 바꾸어 쓰는 것은 더 못마땅합니다. 중이 떠났다고 절을 여관으로 바꾸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요. 비유가 좀 억지스럽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마는.
하여간 그만큼 못마땅하다는 겁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합니다. 학교가 문을 닫은 마을이 얼마만큼 빠른 속도로 생기를 잃어 가는지. 아이들이 재재거리며 뛰어놀지 않는 골목은 졸지에 적막강산입니다.
집집마다 사람이 들어있는 것 만 해도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칠십 팔십 꼬부랑 할매 할배들 허리 짚고 호미 들고 논밭 나들이에 숨만 차지요. 햇볕 쨍한 한낮에 골목에 나가보세요. 사람새끼 그림자 하나 보이나 안보이나. 
학교가 없는 마을은 떠났으면 떠났지 더 이상 사람 안 들어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들어옵니다.
귀농이요? 귀향이요?
어떤 미친놈이 제 새끼 공부시킬 학교도 없는 동네로 귀향한답디까?
도시인들의 전원생활? 아이고 꿈도 크셔라.
학원 없는 마을만 해도 억장이 무너질 엄마들이 버티고 있는데 학교 없는 마을에 뭘 믿고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 온답니까. 어이가 없어서 턱이 떨어져 나갈 소립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가 오십 년인가 육십 년인가 이 동네 중학교 꼬라지 보면 한숨 납니다.
전국의 시골 학교들이 장삼이사로 비슷한 꼴일 것은 자명합니다만 과목은 열 세과목에 선생님은 일고여덟 되나마나. 대충 짐작이 가시지요? 그나마 예체능 교사들은 시수 채우느라 수십 킬로 떨어진 두 학교 세 학교 겸무 뜁니다. 학부모에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대접 받으면서 어떤 교사가 시골학교 오려고 합니까? 그러니 틈만 나면 시내로 튀려고 호시탐탐, 촌에 발령 받으면 에라 모르겠다, 자빠진 김에 쉬어 가자.

그저 대한민국 촌구석에 사는 것들은 사람도 아닙니다. 제 자식 이모저모 뜯어봐서 한 구석이라도 될성부르다 싶으면 이런 더러운 대접 받으면서 촌에서 안삽니다. 땡빚을 내서라도 도시로 나가는 게 맞습니다. 뭐 안 그래도 나도 음으로 양으로 압박은 많이 받습니다. 큰 놈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어떻게든 작은 놈을 데리고 포항 인근으로 나가봐야 할 참입니다. 내가 나가기 싫으면 애 엄마랑 둘이 묶어서 방이라도 얻어 내보내야합니다.
강남 팔학군에서도 망할 놈은 망하고 변방 깡촌에서도 날 놈은 나느니라, 잘 살고 못 살고는 니 하기에 달린 것이지 학교 좋은 데 나온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라, 알듯 말듯한 고집으로 촌에서 살자고 고집을 부렸던 나도 이제는 뒷심이 딸려서 더 버티지를 못합니다.

이놈의 나라는 본교가 분교가 되고 분교가 폐교가 되는 나라입니다. 손바닥만 한 시골학교를 우습게 보는 나라라면 국토 균형발전은 개나 물어가라고 던져 주는 것이 옳습니다.
구십 년대 후반, 순전히 경제적 잣대를 들이대어 재적생이 적어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전국에 산재하던 분교장의 문에 못질을 하고 공식적으로 학교 통폐합을 추진하던 어떤 정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정부는 국가 재정의 긴축을 이유로 교사 정원까지 줄였습니다. 그 돈 아껴서 얼마나 대단한 데 썼을까요? 이런 나라가 도시의 인구집중을 걱정하고 인구분산을 도모해요? 헛소리.

그래서 나는 예술 마을이다 도예촌이다 뭐다 그럴싸하게 화장한 채로 뻔뻔스럽게 길가에 간판까지 걸고 서 있는 廢校舍들이 곱게 안보입니다.
이름만 비단으로 얄궂은 뼁끼 칠 뒤집어 쓰고 서 있는 폐교사들.
나는 그거 보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정치모리배들의 위장술로 보여서 아주 배알이 꼴립니다. 차라리 서까래가 썩어 내려앉아 귀신이 들락날락 하는 꼬라지 그대로 내비 둬야, 아니, 사람 사는 동네에 학교 꼬라지가 왜 이 모냥이냐, 나라 꼬라지가 같잖다 보니 백년지대계가 허물어지는 거 아니냐, 뭐 이런 경각심이라도 일깨워야 한다는 그런 얼척 없는 고집입니다.


국토 발전의 균형이나 기회의 균등을 생각했다면 교사 정원을 늘여서라도 학교를 지켜야했고 어쩔 수 없이 통폐합을 하기로 했다면 기존의 정원이라도 유지시켜서 소외된 지역의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양질의 교육을 도모했어야 옳았습니다. 긴 호흡으로 본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반드시 마이너스가 될 등신 같은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도 두 세 개의 분교가 하루아침에 폐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거는 아니다 싶은 생각에 촌구석에서 혼자서 개새끼들 소새끼들 욕을 하고 뒤지게 부애를 질렀었습니다. 그 대통령 찍었다던 애 엄마까지 핍박하면서 고래고래 성질을 부렸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일본의 어느 산골 분교의 입학식인지 졸업식인지를 보았습니다. 그 해에 졸업하는 단 한명의 학생을 위해서 그 나라 교육부 장관까지 행차해서 무게를 실어주던 그 나라의 교육행정을 보고나서는 그 후로 용도 변경 된 폐교만 보면 자꾸만 속이 뒤틀리고 배알이 꼴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도 매사가 디테일에서 저 나라에 뒤지는 거다. 두고 봐라, 백년지대계라는 교육을 계산기 하나로 또닥거려 내팽개치는 나라는 언젠가 반드시 대가를 치르고 말거다. 두고 봐라, 두고 봐라, 내가 명도고 내가 남해보살이다. 그리되나 안 되나 내기를 해도 좋아... 악담을 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
그런데 그 치러야 할 대가 속에 나나 내 새끼가 포함 된다면?
이런 빌어먹을, 염병할.   
아,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니 숨이 찹니다. 마지막으로 내 작은 놈 이야기만 하나 하고 끝내지요.

내가 살고 있는 이쪽 변방 깡촌 초등학교에는 인근 분교장들 통폐합하면서 교육부에서 하사한 노랑 버스가 두 대 있습니다. 동네 인근에 분교장을 못질 해버렸으니 그 동네 사는 학생들 본교까지 실어 나르라고 보내 준 버스지요. 그런데 그 버스, 오백 미터 떨어진 동네 아이들은 태워다주고 오리, 십리 떨어진 동네 학생들은 안태워줍니다.
마침 내가 사는 동네가 혜택이 없는 동네라 거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한다는 말씀이, 오백 미터 떨어진 옆 동네는 폐교 된 저쪽 분교장에 해당 되던 동네라 태워 주고 오리, 십리 떨어진 우리 동네랑 그보다 더 먼 산 넘어 동네랑 갯가 마을은 원래 이쪽 본교 해당이라 차 태워주면 안된답니다. 그 지침, 그 썩어 문드러질 교육부에서 내려왔답디다.

우리 집 꼬맹이, 날씨 어지간만 하면 자전거 타고 씩씩하게 잘도 댕기지만 춥거나 덥거나 일기 불순한 날은 이 몸이 몸소 수송을 해야 합니다. 큰 놈 태어나서부터 여태껏 그래도 깡촌이 좋다하고 뭉기적거리며 버티고 살고는 있는데 날이 갈수록 한심해지는 이런 순 드런 놈의 학교 정책을 보자 하니 과연 이 잘난 나라의 썩을 놈의 촌구석에서 계속 똥고집으로 버티고 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목하 고민이 열두 보따리올시다.



아침 연무가 끼어서 흐릿해진 내 고향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고향은 좋은 곳이다.
떠난 지 이십년에 너무 많이 달라져버렸지만 그래도 참 예쁜 곳이다. 내 고향은 진주다.
아침 일찍 잠이 깨어서 어릴 때 숱하게 올라다녔던 남강변의 망경산에 올라 내 살던 동네를 내려다 봤다. 
..... 나즈막하던 우리 동네는 어디 가고 이 무슨 낯 선 스카이라인? 내 고향은 어디 갔어?

내 친구가 살던 동네.
그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산 아래 마을의 아침. 친구야 밥 먹고 학교 가자.

늘 붙어 다니던 두 친구와 같이 셋이서 쇳덩어리 주으러 다니던 경전선 철길이다. 
나와 같이 쇳덩어리를 주으러 다니던 한 친구는 죽었다. 재작년에 죽었다. 나와 또 다른 친구 하나를 각각 남겨 놓고 저 혼자 소식도 없이 죽었다. 나쁜 놈. 
죽은 지 석달만에 묘지를 찾았던 살아있는 친구와 나는 말 없이 소주만 한 병 들이붓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었다. 죽은 친구의 엄마는 내 전화를 받고 한참을 울었다. 나쁜 놈.
어머니. 울지 마세요. 병하 대신 세배 드리러 가겠습니다. 친구 어머니에게 철석같이 약속 해 놓고는 아직 작년 세배도 미뤄놓고 있다. 나도 나쁜 놈이다. 
친구야 일어나서 학교 가자. 철길에 노란 유채꽃 피었더라. 



이 철길 따라 가면 나동 나오고 유수리 나온다. 더 멀리 가면 하동도 나온다. 아주 멀리 가면 목포도 간다.
내 친구는 나동 공원묘지에 누워 있다.

하동 가는 길. 나동도 간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막혔다.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삼십분 넘게 기어가다가 결국 중간에서 지방도로 빠져나왔다.
돈 밭는 톨게이트 직원이 꽃놀이 때문이라며 미안해 한다.  
궁리 끝에 갔던 길을 되돌아 오기로 했다. 얼핏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된 셈이다.
그러게 사는 건 알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의 내일은 별 일 없으십니까?

만장하신 여러분들의 꽃놀이 덕분에 정말 가는 길에 생각했던 그대로 그 길을 되짚어 오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쁜 사진을 한 장 더 찍을 수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낙동강을 끼고 달리는 1022번 지방도.
예쁜 길이다. 또 가고싶은 길로 치부책에 꼭꼭 적어 둬야겠다.

일년 가도 한 두 번 갈까말까 한 고향이 가자 하니 한 주일에 두 번도 갈 일이 생긴다.
엊그제 성묘 갔던 길을 또 되짚어 다녀 왔다.
가는 김에 기억을 더듬어 엊그제 길 잃었던 곳을 찾아 복기를 해 봤다. 

1022번 지방도.
물금역인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지만 눈맛이 시원한 것이 좋구나.
이런 맛에 한번 쯤은 길도 잃어 볼만 한 것인가. 이래서 사는 건 재미있다. 언제 어디로 튀어서 누구를 만나게 될 지 누가 알아? 삶의 굴곡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눈 아래 아슴하게 뻗은 철길을 보고 차를 세운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경부선.
타이밍이 잘 맞아서 꽤 그럴싸하게 황혼녘의 들판을 달리는 열차를 볼 수 있었다.
달리는 기차를 보면 공연히 나도 그 속에 있고 싶어진다. 나도 기차 속에서 후랑크 소세지랑 맥주 마시고 싶다.

산골 야경.
아주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가 내리막 길에 들어서면서 본 산 아래 마을.
생각하지 못했던 각도에서의 야경이라 묘한 느낌이었다. 
그 시각 그 길을 지나치던 몇 대의 차들은 껌껌한 산비탈에서 카메라 들고 왔다갔다하던 나를 뭘로 생각했을까?
색다른 시각때문인지 이 마을을 낮에 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마음 먹은 김에 돌아 오는 길도 이리로 와 볼까?

  

꽃이 아니다. 화단 경계석 돌 틈에 자라난 무슨 풀이다. 얼핏 정구지 같기도 하고.
별 것 아닌 것이 제법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민들레.
우리집 마당은 민들레 꽃밭이다. ......... 이건 순 잡초 밭이라는 말이구나.
그래도 뱀 나올만큼 우거진 수풀만 아니면 없는 것 보다 낫다. 흙 밟고 살자면 풀도 봐야지.

내 집 마당에서 십 수년을 자라고 있지만 이름도 모르는 꽃.
누가 물어 보면 그냥 빨간 밥풀떼기.

엊그제 나를 우울하게 했던 앵두 꽃 원본. 
세상이 흑백으로 보이면 어떨까? 어쩌면 지금하고는 좀 다른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부서진 대문 한켠에 핀 시계꽃. 내 집 마당에는 이것도 민들레 못지않게 많다. 
   

어머니 산소 앞에 피어있던 이름 모르는 들꽃.
남겨 두려고 생각은 했었는데 예초기로 날려버렸다. 덕분에 셋째 누님한테 한 마디 들었다.


수민이네 집 마당의 벚꽃. 오른쪽 아래에 두릅도 희미하게 찬조 출연.


역시 수민이네 마당의 배꽃. 이화에 월백하고........
달 뜨는 날에 한 번 나가 봐야겠다.      


풀 숲의 들꽃. 이름은 몰라요. 


  논둑에는 꽤 많다. 저 놈들은 이름을 알 수 없으니 모두 그냥 '들꽃'이다. 
그러고보니 식물에게는 왜 이름이 없을까. 들꽃 뿐이냐? 국화는 열 송이 백 송이가 있어도 그냥 '국화'들이고
장미가 백만송이 있어도 그냥 '장미'일 뿐이다. 왜 그렇지?


한동대 복도 계단에서. 
바깥의 벚꽃이 아우성치듯이 벌어 있길래.


꽃이 있어서 봄이 겨운 것인지. 아니면 꽃이라도 있어서 겨운 봄을 그나마 견디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카메라 들이 댈 꽃이라도 있으니 그럭저럭...  


                


밤길을 달렸다. 고속도로가 오랜만이라서 조금 감각이 무디어졌나보다. 더듬이가 낯설어 한다. 가속 차선에서 속도를 내지 못해 멈칫거리기도 했다. 사람이 좀 달라져버린 것 같다.
가다가 휴게소에서 밥도 먹는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그리고 터널 속에서. 

시속 120Km짜리 패닝 샷이다. 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냐고?
...........야간 운전은 조용하고 적막하다. 졸릴 때나 온갖 생각들이 끼어들어서 생각이 번잡해질 때는 오히려 이게 낫다. 물론 좀 위험하긴 하다.

네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내 고향이다. 진주.
도착이 늦었다. 누님들과 성묘를 가기로 한 길이다.
진주에서 하루 밤을 자고 내일은 지리산 자락 끄트머리 어머니 산소까지 한 시간을 더 가야 한다.

풀이 그다지 많이 우거지지는 않았다. 한식 벌초는 별로 할 게 없다. 잠깐이면 된다.

누님들도 많이 늙었다. 
나란히 서서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걸 물끄러미 보자니 이렇게 다 모일 수 있는 날이 언제까지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좀 적적해졌다. 큰 누님은 찬송가를 부르다가 운다.
어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나보다. 원래가 눈물이 좀 많은 양반이긴 하다.
큰 누님은 예순 넷.
어머니보다 더 많이 늙었는데도 어머니 사랑은 못내 그리운가 보다.
내 어머니는 서른 다섯에 생을 마쳤다. 자식을 두고 죽기에는 좀 쓸쓸한 나이다.  

어머니 산소에서 먼 산을 보면 멀리 지리산 자락이 보인다.
저 고개를 넘어서 조금 더 가면 지리산 국립공원 입구가 나온다. 그러니 나는 지리산 촌놈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늦게 출발했다. 
핸들을 잡으니 또 멍하니 잡생각이 끼어 든다. 그래서 또 카메라로 장난을 친다. 이 생각은 나를 많이 상하게 하니까. 위험하다고? 그래. 좀 위험하기는 해. 그래도 생각에 붙잡혀서 실수하는 것 보다는 낫거든.
고래고래 노래도 부른다. 요즘 꽂힌 노래가 있다. '서른 즈음에'.
김광석의 노래라는데 나는 이은미가 부른 게 더 좋다. 이 여자는 노래를 제대로 할 줄 안다.
캄캄한 길을 내달리면서 창문을 열어 놓고 이 노래를 미친듯이 따라 부르다보면 때로는 울컥 할 때가 있다. 
그래. 노래건 인생이건 뭔가 좀 울컥 할 때도 있어야지. 속에 젓을 담더라도 말이야. 염병할. 

그러다가 길을 놓쳤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 놓쳤을까. 여태 수십번, 백번은 넘게 오갔던 길이다.
대충 짐작으로 고속도로를 내려 서서 방향을 잡아 봤지만 방향 감각은 백리나 천리나 날아 가버리고 길이 아주 꼬여버렸다. 한 시간이 넘도록 산골짜기를 헤메고 다녔다. 무턱대고 죽어라 한쪽 방향으로 가다보니 한시간 이십분 만에 아는 길이 나왔다.  
얼이 빠져버린 것 같아 뒤숭숭하다. 근 이십년을 운전 하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오밤중에 초행길을 가도 한 번도 길을 놓친 적은 없었다. 속이 텅텅 비어버린 것 같다.
그냥 이대로 까마득이 가라앉아버리는 걸까.   

사진을 꺼내 봤더니 묘한 사진이 있다. 그 날 밤 귀신에 홀렸던 이정표일까. 








     

몇 해 전 애 엄마와 큰 애의 교통사고로 온 식구가 두 달 넘게 병원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둘 다 중상이라 처음 며칠은 정말 넋이 나갈만큼 바빴었지요.
입원한지 사나흘 쯤 꼼짝 못하던 환자 둘 눕혀놓고 정신없던 날이었습니다.
애 엄마 수발하랴 큰 놈 수발하랴 2인실 양쪽으로 침대에 눕혀 놓고 동분서주 진을 빼고 있자하니
그 때 다섯살이던 어린놈이 지 애비를 물끄러미 보며 한마디 툭 던집디다.

'아빠가 아팠으면 좋겠다.'
'?....'
'아빠가 아프면 가만 누워 있을 수 있잖아. 힘들게 일 안해도 되고 다른 사람이 물도 떠 주고 밥도 먹여주고....'

다섯 살 어린 놈에게 듣기에는 너무 벅찬 말이라 두고두고 생각이 납니다.
꽤 괜찮은 놈이지요?
병원에서 먹고 살던 그 때
어느 날 아침 나절 병실 바닥에서 바둑이 끌어안고 늦잠 자던 놈입니다.



어제 저녁에 이 놈이 뜬금없이 불쑥 말합니다.
'혼자 자는 거 언제부터 해 봐요?'
젖먹이때부터 지금까지 지 애비 팔베개를 해야 잠이 오는 놈이라
그 말이 기특하긴 한데 갑자기 겨드랑이가 썰렁해집니다.
그래서 어젯 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 방에 이불 따로 펴고 혼자 잠을 잤습니다.
아, 물론 잠이 들 때까지는 아빠가 옆에 누워서 팔베개를 해 줘야 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거나 일기 불순할 때는 언제든지 안방에서 자도 좋다는 조건입니다만.


속은 여려도 구김 없이 꽤 씩씩하게 잘 자라는 것이 고마운 놈입니다.
요즘은 자전거 타고 학교 갑니다. 간혹 자전거 처박고 무르팍에 멍도 들고 그럽니다.
요새는 공부가 좀 하기 싫어지나 봅니다.
뭐 어때요.
공부건 사랑이건 제 물미가 터져야 하는 겁니다. 또 그래야 행복하고.
저 놈이 혼자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오래오래 곁에 있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당에 핀 앵두꽃을 찍었다.
보기에 괜찮은 듯 해서 조금 매만지다가 별 생각 없이 채도를 죽여보았다.
꽃의 이미지는 사라져버리고 꽃이라는 형태와 개념만 남은 셈이 되었다.
미묘한 느낌.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마찬가지일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바라고 기다리던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을까?
이런 등신.
어렵든 쉽든. 그것은 내 몫의 것이 아니다.
등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겠지. 듣기 싫어서 귀를 막았거나.
이제 알았나? 시간은 잔인한 것이다.

무망한 기대는 사람을 상하게 한다. 
무망한 기대로 열어 두었던 창이라면 닫아야지. 닫아야 할 것 같다.
나는 몽상가였을까?
또 하나를 접는구나. 많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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