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가는 경전선 철길. 오래 된 기억.
친구야.
지난번 고향에서 만났을 때 내게 한 약속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니가 지킬 의사가 있다면, 그 약속은 파기 되어야 하고,
그 기념으로 술잔을 한 번 더 기울여도 좋아.
단, 같이 시작해서 같이 망가진다는 조건으로.
하지만 내게 한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다면 넌 개뿔이야.
아, 사십년 지기의 취중 약속에 그리 야박하게 구냐고,
도대체 취중 인품이 그것 밖에 안되냐고 입을 모아 비난하더라도 나는 이제 너랑 술은 안 마셔.
우리가 이 나이 되어 내가 널더러 술 먹어라 말아라 참견할 일은 아니니
각자 알아서 각자의 인품은 각자 챙기기로 하고.
그 약속을 기억하든 못하든, 지키든 안지키든, 그 약속 자체는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다만 늬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
아하, 그렇다고 해서 널 안보겠다는 말은 아니야. 달리 기분이 상했다거나 속이 꼬인 것은 아니니까.
나이 들어 갈 수록 더 자주 봐야지. 넌 멋진 놈이고 오래 묵은 좋은 친구니까.
다만 이제는 그 오래된 술을 같이 마시지 않아야겠다는 것 뿐이야.
오래 묵은 친구야. 그러니 이제는 만나거든 술은 같이 먹지 말자.
술을 같이 안마신다면 너는 내게 기억도 잘 나지 않을 그런 제안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며칠동안 머리를 기우뚱거리면서 생각을 되작거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거든.
그럼으로 해서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마음 부대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자꾸 뜬금없이 생각이 떠오르는 바람에 여태 생각을 이리저리 뒤집다가 올려 놓기로 했네.
내 딴에는 오래 생각했다는 뜻이지.
무슨 약속인지 생각이 안난다면 너무 골 싸매지 마.
그냥 놔두면 세월에 씻겨서 그대로 흘러가버릴 정도의 일이니까.
그리고 이건 니가 달라져서라기보다는 내가 변한 셈이니까.
이제는 속병도 나고, 뒷감당도 잘 안되고
꼭 술잔을 들자하면 그나마 즐거운 시간에 기대어 몇 잔 마실 뿐인데
몸이건 마음이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음을 접어 놓고 술잔을 들기 싫다는 말이지.
안이든 밖이든 참고 견디는 건 싫거든. 술잔을 들면서까지 그래야 한다는 건 더 싫어.
그건 정말 지긋지긋 해.
여태 살아오면서 나도 꽤 지쳐서 그런가 봐. 이제는 좀 쉬고싶다는 거야.
요새 말로 정말 쿨하게 말이지.
아하, 그래도 맛있는 밥집이 있다면 같이 밥 먹고 떠드는 건 언제든지 대 환영이야.
아, 물론 밥은 내가 사야지. 요 다음번 밥은 내가 예약이야.
다음에 만나거든 어디든 좋은 곳으로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가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