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이라는 이름을 이야기하자면 더러 만나게 되는 말이 있다.
‘드런 놈!’
‘독재자!’
‘상업적이지!’
‘쇼맨십이야!’
‘개폼으로 먹고 사는 싸구려!’
‘나치의 개!’
‘조미료 투성이’

일단 나치에 관련된 역사적인 논란거리에 대해서는 밀어 두기로 하자. 나는 카라얀이라는 자연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노란 간판 모양의 성음 라이센스 음반으로 만났던, 지금은 죽고 없는 어떤 음악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니까.
이런 저런 사료나 기록들을 보면 그의 전력이나 처세술 같은 쪽으로는 일면 수긍이 가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음악까지도 싸구려에 쇼맨십만으로 발라 놓은 깡통이라는 견해에는 선뜻 공감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내 입맛에 비해 조미료끼가 다소 있다는 것은 동의를 하는 편이다. 다만 그것도 느끼해서 못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 사람의 예술과 인격을 동일선상에 놓고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나는 일단 한 인간의 도덕률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을 강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도 도마에 올리려면 또 논란거리가 될 충분한 소지가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밀어 두자.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은 각자의 신념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 자칫하면 험악한 분위기를 자청할 우려도 없지 않은데다가 안그래도 심란한 봄날에 이런 무거운 주제로 갑론을박하자면 뒷심도 딸릴 것 같고. 

즐겨 뽑아드는 애장반에서는 꽤 오래전에 빠졌지만 누가 뭐래도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5번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연주다. 물론 누구에게나 각자의 추억에 뿌리박은 추억의 명반이야 한 두 장쯤 있기 마련이지만 나에게는 열 몇 살 때 호마이카 장전축 앞에 주저앉아 주술에 걸린 듯 꼼짝없이 듣고 있었던 그 땡판(그 당시 한 장에 백원, 이백원씩 하던 불법 해적판)이 절대 버릴 수 없는 추억의 명반이다.


하도 돌려 대서 이제는 바늘을 얹어 놓기가 두려울정도로 스크래치도 심하고 아주 걸레처럼 찢어져버린 재킷을 비닐 테이프로 얼기설기 땜질 해 놔서 보기에도 참 그렇다. 게다가 현역에서 은퇴한지가 벌써 수십년이라 손길도 멀어진 채 먼지들이 틈틈이 끼어 있지만 나는 그래도 이 고물딱지를 버리지 못한다.

그 때 그 시절, 술이라도 한잔 마신 날이면 젓가락이며 볼펜을 지휘봉 삼아 휘두르며 객기를 부리곤 했던 덕에 지금도 카라얀의 베토벤 5번이라면 그 호흡을 거의 기억하고 있다. 아, 악보도 제대로 못 읽는 까막눈이가 진짜로 무슨 지휘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감흥에 못 이겨 겉보기에 그럴싸하게 흉내를 낸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나도 한 때는 남들이 하도 무섭게 패대기를 쳐 대길래 공연히 주눅이 들어서 이거, 온 세상에 널린 게 카라얀이로구나, 흔해빠진 순 싸구려 음악을 나 혼자만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돈이 장에 간다니까 나도 거름 지고 따라 나서는 격으로 엉거주춤 사갈시 해본 적도 있었다만.

우연이건 필연이건 그를 통해서 서양 고전음악에 세례를 입은 지 수십 년이다. 이만큼 나이도 먹었고 이 나이 먹을때까지 그래도 끊이지는 않고 그럭저럭 서양 고전음악에 발을 적신채로 살아왔으니 이제는 웬만큼 그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가 되지는 않았을까? 
나는, 그가 최소한 세평에 휩쓸려 매도되어 마땅한 싸구려 지휘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카라얀의 베르디 서곡집을 듣고 그 몰취미함에 질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음반은 일찌감치 내 장서에서 퇴출 되고 말았고. 그 외에도 그저 그런 개성 없는 연주로, 혹은 감성의 깊이나 색깔이 맞지를 않아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음반들도 적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연주들이 모두가 그럴까.
전력이 어떻고 상업주의가 어떻다고들 말은 하지만, 음악과 오디오에 관한 글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거이 읽어 마지않는 정관호 씨가 언젠가 극찬해 마지않던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연주에 대한 평에도 공감을 하는 편이고, 나 개인적으로는 오페라 간주곡집에 들어 있던 노트르담 간주곡을 그 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만큼 소름 끼치게 깊은 기복으로 연주 할 지휘자가 그리 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게 어떤 음반을 고르면 좋겠냐고 조언을 구할 때 나는 그렇게 말한다.
‘누구 누구의 연주가 나는 좋더라. 그것이 없다면 저것. 그리고 이건지 저건지 잘 모르겠다든지 선뜻 선택하기가 망설여진다면 카라얀의 것으로 하는 것은 어떨지. 그러면 최소한 완전히 망치는 일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가장 훌륭한 연주가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완전히 망쳐버린 선택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줄일 수 있는 연주. 나는 일단 그렇게 생각한다.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서 평균 이상은 한다는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상업주의에 쇼맨십이라지만 칠팔십 년대만 해도 비주얼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정보마저도 터무니없이 취약했던 촌구석에서의 카라얀은 비주얼이건 쇼맨십이건 도대체 사진조차도 그리 쉽사리 구경 할 수 없었으니 비주얼에 의한 현혹도 미혹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듣는 비난과 악평도 음악 외적인 요소와 함께 그의 음악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불공평한 분위기에 편승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상과 철학이 구린 예술가가 어떻게 아름답고 숭고한 결과물을 내 놓을 수 있겠느냐며 추상같이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의 결연한 비판도 나름대로의 입지를 갖고는 있겠지만 나는 블라인드 테스트로 음악을 듣기만 해서는 연주자의 사상과 도덕성까지 구별해 낼 자신이 없다. 심지 깊은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도 물론 좋아하지만 굳이 선입견을 갖고 카라얀의 연주를 기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아, 혹시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도 카라얀이 대체로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냄새가 나는 곡들보다는 드라마틱하고 문학적인 색채가 짙은 곡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간혹 그렇게 느끼기도 했고. 그렇다면 나도 그에 대한 약간의 편견은 갖고 있다는 뜻일까.

그렇더라도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내가 즐겨 뽑아드는, 사춘기 때부터 내 가슴을 흠씬 적셔 온 카라얀이 남긴 수많은 명연주들을 배척하고 기피할 생각이 없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약간 구린내 나는 명언을 여기다 갖다 붙여도 될까.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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