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런던.
노래를 알기 전에 먼저 이름부터 알게 된 여자.
오래 전 어느 잡지에서 처음 만났던 꽤나 촌스러운 이름의 여자 가수.

내가 줄리 런던의 노래를 듣기 전부터 막연한 예단을 가지게 된 것은
줄리 런던의 노래에 관한 에피소드를 쓴 사람의 글솜씨가 훌륭해서였을까.

아니라면 5,60년대식의 구닥다리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줄리 런던이라는 약간 촌티나는 이름때문일 수도 있었겠고.

몇 년이 지난 뒤에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 여자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
나는 조금의 괴리도 없이 줄리 런던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낯선 집에서 들리던 이 여자의 노래를 골목길에서 끝까지 듣고 있었다던 그 사람의 이야기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았으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날에는 혼자 술이라도 맛보면서 혼자 추억에 잠기고 싶기도 하고
생전 가 보지도 못한 샌프란시스코에 내 마음도 어디 한 귀퉁이 떼어놓고 와버린 듯 애틋해지는, 
우울한 날에 듣자하면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온 누군가가 못견디게 그리워질 것 같은 노래.

반 쯤 술에 취한 내 앞에서 나직하게 이 노래를 불러 준다면
다짜고짜 끌어안고 까닭도 없이 그만 울어버릴 것 같은.
아, 
이름만 들어도 목소리가 느껴지는 참 묘한 여자의 묘한 노래.

..............
아니, 생긴 건 못생겼어. 내 타입이 아니야. 목소리만.... @@ 




포항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삼자현 휴게소 뒷뜰에서.
이름이 三者峴인 걸 보면 아마도 세사람 이상이 되어야 넘을 수 있는 고개라는 뜻인듯 한데
이름으로 짐작해보면 예전에는 꽤나 악명 높았던 고개였나보다.  

길도 예쁘고 휴게소도 나즈막하니 볼만하드만
다행히 뒷뜰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도 한 장 건졌으니 망정이지
그러게 아무리 그렇더라도 오백미리 콜라 한 병에 이천원이 뭐냔 말이지. 턱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휴일.
한산한 열람실에서 만화 삼매경에 빠진 아이.


세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디지털이지만 텅 빈 도서관에서 책 읽는 꼬맹이는 좀 달라 보인다.
어른이 되어도 최소한 값싸게 살지는 않을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믿음 같은 거.

..
아하,
혹시라도 구닥다리 아날로그 세대의 기억에 대한 집착이나 편견같은 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큰 아이와 수시 지원 상의하러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도서관.
서고에서 책 뒤적거리던 중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

하늘은 갑자기 컴컴해지고
열려있던 창으로 마구 튀어들어오는 빗물에 도서관 사서는 창문 닫느라고 허겁지겁.
나는... 그 틈에 슬쩍 한 컷.

삽시간에 홈통으로 물이 콸콸 쏟아지고.
닫힌 창문으로 둔해진 빗소리 때문에 어수선한 바깥 풍경은 무성영화가 돼버렸다.  
....
어쨌든 쾌적하고 조용한 건조한 실내에서 창 밖으로 소란스럽게 쏟아지는 비를 보는 건 공연히 기분 좋은 일이다.  

도서관을 나서서 굴다리 지나가다보니 굴다리 아래에 꼼짝없이 갇힌 꼬맹이들이 보인다.
자전거 끌고 나들이 나왔다가 오도가도 못하고 소나기에 붙잡힌 모양이다.
마침 애 엄마는 점포정리 파격세일 옷집에 갑자기 볼 일이 생기고
나도 갑자기 볼 일이 생각나서 얼른 굴다리로 되돌아왔다.
다행히도 꼬맹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비는 언제 그치냐.
아이들은 집에 가고싶어 마음이 급하고 나는 비가 그칠까봐 마음이 급하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하고 빗 속으로 나가는 아이들.

내가 좋아하는 대상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가 있어서 잠깐 행복했다.
비. 아이들. 자전거.



벌초할 필요가 없는 공원 묘지에 있는 아버지는 아들이 둘이고
지리산 끄트머리에 누워있는 어머니는 아들이 하나다.
여차한 사정으로 고향을 등지고 공원묘지에 누우신 관계로 올 때마다 그럭저럭 말끔하던 아버지 산소가
올해는 적잖이 덥수룩하다.
여기저기 예초기 소리가 아득한 걸 보니 지금 한참 추석 성묘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이쪽 라인은 좀 늦는 모양이지.
날짜를 너무 일찍 잡은 탓인 듯 생각했다.

아버지 상석에는 늘 깡소주에 과자 부스러기다.
그나마도 내가 우겨서 갖고 오는 것이니 아버지는 날 원망하지 마시길,
돌아가시기 이삼년 전에 기독교로 전격 개종하지 않으셨다면 혹시라도 머리 깎은 사과 몇 알과 부침개 한 두접시라도 놓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야 순전히 아부지 탓이오.
웃자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기야 뭐 그렇다고 나 또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사진을 올리고보니 참 휑뎅그렁해 보이는 것이 마음이 조금 그렇네.
모든 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고 살아 남은 자들의 가슴을 달래는 일이니 이 다음부터는 진주의 누님을 귀찮게 해서라도 부침개 몇 개라도 올려 놓을까싶은 생각이 든다. 아부지. 기대 하이소.
 

시간은 한정이고 돌아갈 길들이 아득하니 벌초는 아직 안되었으나마 걸음 한 김에 인사는 드리고 갈 밖에.
다듬지 못해 비죽비죽한 풀들이 좀 거시기하기는 하네. 부산 큰 누님은 지각이라 아버지 산소는 불참이다.


진주에서 한 시간 걸려 닿은 지리산 끄트머리의 어머니 산소.

꼬맹이가 보더니
'아빠, 산소가 없어요.'
......

조금만 더 가까이 있다면 한 해에 두어번은 더 손질을 할 수 있겠는데 한식 성묘하고는 겨우 이맘때 한 번이다보니 참 볼 때마다 기가 막히긴 하다.
하기사 뭐 그랬더라면-- 하는 것도 핑계지. 마음이 그걸 넘어서지 못하는 때문이지. 그저 내 탓이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낫 두자루 달랑 들고 올라 와보면 참 엄두도 안 나고 그랬는데 작년에 마음 먹고 가스 예초기를 하나 준비했더니 그래도 어지간히 덤빌만은 하다.
여태 낫 두 자루로 이 짓을 어떻게 했나 싶은 생각이 수삼번도 더 든다. 
지금 다시 낫 들고 하라면 다시 못하지싶은데.

한 시간 넘게 패대기를 치고 나니 그럭저럭 봉분은 찾아 냈다.
수안아, 할머니 산소 찾았다.

그래, 찾기는 찾았다만, 일을 하다보면 참 마음이 구깃구깃해지는 것이,
이놈의 집구석은 어찌 된 영문인지 사내가 참 드물다.
벌초꾼 여덟 중에 나 혼자.
저기 갈쿠리로 풀 걷어내는 양반이 올해 환갑 된 둘째 누님이란 말이지.

아, 누님들이며 조카들이라고 못하리란 말은 아니지만 
어깨와 허리가 부실한 나도 그렇고 그런데다가 세상에 환갑 전후의 누님들이 갈쿠리며 낫을 들고 덤비는 걸 보자하니 참 그렇다는 말이지.
그나마도 조카 둘이 팔 걷고 나서서 거들었으니 그만했지.
조카 놈들도 사내라고는 달랑 둘 밖에 없더니 한 놈은 뭐가 그리 급했는지 몇 해전에 먼저 떠나버리고.
나머지 한 놈은 의사 노릇 한다고 밤낮으로 뺑뺑이를 돌고 있으니 데리고 와서 일도 못 시키지.
하기사 키만 꺽다리로 솟았지 손재주라고는 아주 손방이라는데 델고 와봤자 어디 써 먹을 수나 있을라는지. 


보다시피 어깨에 예초기 걸머 진 나 빼고는 모두 여자들이다.
여자들이라고 자식이 아니랴마는 그래도 이런 바깥 일에는 사내 손이 있어야하는데.


하지만 이제는 나도 나 혼자서는 힘도 부치고 여기저기 고장도 나고....
거기다가 혼자 오면 공연히 쓸쓸하고 막막한 마음이 들어서 그것도 참 싫다. 
모쪼록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한 걸음이라도 더 다닐 일이다.  ...... 한 살이라도 더 늙기 전에...  

그 와중에 경로 우대 부산 큰 누님은 꼬맹이 둘 데리고 열외.
시퍼런 하늘 배경으로 소풍 나온듯 그림이.... 흥.

예초기 다루는 솜씨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기는 하나
그럭저럭 봉분도 찾고 비니루 꽃이나따나 꽃도 꽂아놓았으니 생전에 좋아하셨다던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아니나 다를까 어마이 산소 앞에는 소주는 커녕 맹물도 한 잔 없다.

찬송가 부른 뒤에 큰 누님이 기도를 시작하니 진주 누님이 털썩 주저 앉는다.
형제 중에 어머니 산소를 가장 각별히 생각하는 양반이기는 하지만 세월이 이렇게 지나도 어머니 앞에만 오면 그리 마음이 젖어오나보다.  

'최신형 예초기'로 돌려도 워낙에 울창하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처음에 예초기란 물건에 겁 먹고 충전식을 샀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가스 예초기로도 간신히 할 일을..

그림자가 길다란 걸 보니 해가 제법 기울었다.
힘이 들기는 했지만 해 놓고보면 좋은 일이지.
그러니 이 다음에는 김밥이라도 몇 줄 사다가 아주 가족 소풍을 겸해서 정례화 시켜 볼 일이다. 
올해처럼 참석자들이 많으니 좀 보기 좋으냐고. 즐비하게 서 있는 자손들 보고 어마이 입이 귀에 걸리셨겠구마.
게다가 뜻밖의 일로 예정에 없이 따라 붙은 며느리까지.
일 안하고 카메라 들고 땡땡이 친 애 엄마 덕분에 생각보다 사진이 많이 남아서 잘 됐네.

출발할 때 준비가 조금 소홀했으니  내년엔 무딘 낫도 날을 세우고
손도끼며 톱이며 갈쿠리도 두어개 더 들고 올 일이다.
깜빡 잊어버리기 전에 아카시아를 박멸할 방법도 어디 찾아봐야 하는데.... 

 


 



역마살이 끼가 있는지 전 부터 길만 보면 셔터를 날려댔으니
아마 컴퓨터 속에 이런 저런 길 사진이 더러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봤자 어지간해서는 사방 십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동네 주변만 뱅뱅 도는 앉은뱅이 꼴이지만.... 

지난 6월에 도로공사에서 길 사진 공모전이 있다길래 
아니, 길 사진에서 내가 빠질 수야 있나 싶어서 그럼 나도 한번, 괜히 들썩거려 봤었다.
그 중에서 몇 장 만들어 봤던 사진 중에서 남은 것이다.
나머지는 지난번 '대란'때 몽땅 날아가버렸다.
이것도 USB에 남아있던 걸 우연히 찾아 낸 것. 물론 당연히 '낙선작'이다.

당선작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고소공포증 환자는 꿈도 꾸지 못할 항공사진부터 시작해서 아주 기가 질릴 작품들이라
이건 뭐 주최측의 농간 운운하면서 면피를 해 볼 가능성은 아예 없었음.
뭐, 그래도 아침 운동하는 길에 틈틈이 박은 내 그림도 그럭저럭 괜찮지 않으냐고 철판을 깔아 보는 거지.
버리기는 아까우니까.
다만 낙선작의 상징으로 모조리 흑백처리..... 에잇!



동네 앞의 7번 국도.

1022번 지방도. 어느 절 아래 마을이었는데...

비 그친 날. 포항시 방석리 부근의 길

새벽 등산길에서 내려다 본 7번 국도. 산 정상에서.

역시 같은 산의 중턱에서. 
수풀 사이에서 산모기에게 물려가면서 찍었던 사진.



  




9월은 굳이 九月로 써 보고싶은 달이다.
구월은 한글로 구월이라고 써도 괜찮아 보인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매달아 둘만하기도 한 달이다.
벌써 구월이냐. 해마다 이맘때면 내딛는 걸음이 한번씩 휘청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생긴 버릇이다. 
별 관심없이 처박아 두었던 블로그를 뜬금없이 열어서 쓸고 닦고 처음 몇 달은 꽤나 의욕적으로 시작했었는데
날이 갈 수록 점점 힘이 부친다. 동력이 상실된 때문인지. 글쎄.


하늘이 높아졌고
창을 닫아 두어도 별로 갑갑하지 않으며
손에 잡히지않는 무엇인가 때문에 허둥거리고 있는 구월이다. 

저녁 나절 마을 길을 걸어가는데 하늘도 구월이다.
욕심에 카메라를 들고 나서기는 했는데 욕심의 반에 반도 못 담았다. 
내심 카메라며 렌즈가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기실은 내공이 개발인 탓이다.
그 탓도 있지만 사실 사진을 기다리는데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come september / Billy Vau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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