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 곡을 들으며 운전을 하다가 3악장에서 교통사고를 낼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2악장 까지는 아주 안전하게 별 탈 없이 잘 듣고 있었는데
3악장 도입부에서부터 잔잔한 오케스트라 사이로 오르내리던 바이올린이 아득하게 치솟았다가  오케스트라의 총주와 함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부분이었지요. 
현 합주가 휘감아 돌면서 좁은 자동차 속이 어마어마한 음향으로 출렁이는 순간 까닭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면서 눈 앞이 아득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오른 발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지요. 
갑자기 시프트 다운이 되면서 급가속.
하마트면 앞차를 들이받을 뻔했지요. 진땀이 바짝 났습니다. 얼마나 시껍을 했던지.

이전에도 이후에도 집에서는 물론 녹음을 해서 갖고 다니면서 운전 할 때도 자주 들었지만
오디오를 바꾸거나 고장 났던 오디오를 수리하고 나면 세팅 후에 거의 반드시 얹어보던 곡입니다.
그 커다란 파도와 같은 3악장의 선율 때문에.

물론 네 악장이 다 좋지만 그 중에도 이 3악장은 이전에도 좋아했고
또 그 사건 이후로는 더더욱 각별하게 좋아져서 늘 그 넘실대는 음향의 해일 속에 몸을 얹습니다.
정말 눈 감고 몰입하노라면 무슨 커다란 물결을 타고 앉은 느낌이지요.
그 중에서도 오이스트라흐 연주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워낙에 좋아하는 연주자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냥 여러 연주를 나란히 놓고 들어봐도 독주가 가장 아름답고 다이나믹한 오케스트레이션도 일품이어서 가장 좋아하는 연주입니다. 아, 물론 안전 운전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곡이라 때로는 좀 흘겨 보기도 합니다만. 
엘피가 속절없이 낡아가는 것이 걱정스러워서 연전에 레전드 시리즈로 나온 시디를 또 사두었습니다. 걱정도 미리 땡겨서 하고 있는 걸 보면 참, 걱정도 팔자에 있기는 있나봅니다. 하긴, 페렌치크의 베토벤을 깨 먹고 난 뒤 방심하다가 절판 되어버려서 크게 낙심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니까 그래도 이런 조바심은 조금 면피가 될라는지. 
 



Max Bruch / Scottish Fantasia (3악장)
Violin / D. Oistrakh
J. Horenstein / London Symphony Orchestra


ole guapa

russian gypsy swing


혼자 집을 지킨다.

밤이다. 밑도 끝도 안 보이는 적막이고 적요다.

혼자 있는 이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막막함이다. 바람 소리도 없는.


손에 집히는대로 뽑아 든 음반들이다. 집시. 탱고.. 플라멩고...

방바닥에 널려진 음반들은 거의 엘피. 시디는 별로 없다. 다 오래 된 음반들이란 이야기지. 

베르너 뮐러. 만토바니. 스탠리 블랙. 에드문도 로스. 피아졸라. 퀸테토 부에노스아이레스. 렌드바이...


아니, 내가 탱고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를 춤꾼으로 오해는 마시라.

나는 새파랗게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은 구경조차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순 말라 비틀어진 고목나무 장작개비다. 탱고와 집시는 내게는 그냥 추억일 뿐이다.

어럽쇼, 그것 또한 그렇고 그럴듯한 사연으로 분홍 칠 한 그런 추억이 아니다.
그냥 음악으로서의 추억일 뿐이다. 부디 믿어 주시기를 바란다.


한때 지독하게 집시 음악만을 찾아 듣던 적이 있었다.

무슨 까닭이 있어서도 아니고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마냥 좋아서. 왜 좋은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그냥 무작정 들을 뿐이다.

그 리듬을 듣고 있노라면 내 속의 뭔가가 꿈틀거리며 응답을 하기 때문이고

죽어 있던 무엇인가가 다시 살아나 부스럭거리며 기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탱고와 플라멩고를 바하의 첼로를 듣듯이, 브람스를 듣듯이 그렇게 눈을 지그시 감고 듣는다.
깊이 깊이 뼛골이 시리게 새기면서 듣는다.

까짓 것, 집시 음악 나부랭이를 그리 폼 잡고 듣느냐고 핀잔 주셔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렇다. 나는 집시 음악을 그렇게 들어야만 한다. 처음이 그랬고 그 다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으니까. 

그렇게 죽은 듯이 누워 눈을 감고 듣다보면 메말라 따가운 눈동자에 까닭없는 눈물이 번지고
마른 나무토막처럼 아무렇게나 던져진 팔다리에 이끼가 덮이고,
그리고 어느샌가 나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바람을 안고 달리며 안개 낀 숲을 지나고
젖은 풀잎의 검은 벌판도 지나고 허름한 시골 마을 우물가의 쭈그렁 노인들도 만나고
낯 선 산골짜기 부엉이 울음 따라 온 도깨비도 만난다. 아아 그리고는 드디어 만난다. 그 사람들이 보인다.


한번도 본적도, 아는 것도, 그 아무것도 아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사람들의 헐떡이는 시뻘건 심장도 보인다.
헐떡이는 심장처럼 펄쩍펄쩍 모닥불 주위를 뛰고 돌며 썩 풍기문란하게 미쳐 날뛰는 그들이 보인다.


나는 짐작한다.

그 족속들은 태생적으로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

기뻐 날뛰고 행복에 겨워하고 갖은 황홀과 아름다움에 기꺼워하더라도 결국에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제 아무리 발악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제 아무리 잘난 놈도,
제 아무리 뻔뻔스런 세상에 둘도 없는 뻔칠이도
절대로, 결단코 벗어날 수 없는 생명의 소실점을, 이 거룩하고 잘나빠진 생명의 일회성을,
그 바닥없는 절망을 그들은 이미 생득적으로 가슴에 묻어 살고 있다고 짐작한다.
그들의 음악을 듣다보면 그것이 들리고 보인다.


그들의 애수는 뜨겁다.

입 냄새가 적당히 섞인 헉헉 뜨거운 날숨이다. 그리고 눈물이다.
하지만 만져 볼 수는 없는, 이미 바삭바삭하게 말라버린 눈물이다.
그들은 그렇게 소금 버석거리는 마른 눈물 자국으로 울면서 춤추고 춤추면서 미쳐간다.
그렇게 미친 듯이 춤추고, 먹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잠을 자고,
그렇게 하루하루 발악하듯이 서럽게 미쳐간다.

불같이 뜨겁고 술보다도 향기로운 짙은 사랑도 그들의 음악 속에서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서러움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러운 가슴으로 뜨겁게 미쳐 서로의 몸을 탐하기도 할 것이며

그렇게 삶과 사랑에 미쳐버린 그들의,
낯선 이들과의 내일 없는 사랑도 그들의 음악 속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럴만한 핑계가 있으리라 섣불리 짐작해 본다.

(그렇다고 지금 내 앞에 붉은 장미를 입에 문 카르멘이 서 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혼자다.)


저들의 음악은,

가슴속에 숨어 있는, 나도 모르는 내 속의 무엇을 자꾸 건드린다.
그들의 뜨겁고 서러운 선율이 거듭 육신을 훑어 내리면 나는 비로소 조금씩 미쳐버리고 싶다.
그들처럼 땀으로 번들거리는 목울대로 눈물을 삼키면서 미쳐버리고 싶다.


..............

밤이 깊어가도 나는 저 집시들과 탱고 속에 묻혀있으며

또한 아무도 나를 위로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술이라도 한 잔 권할만한 벗들은 모두 멀리 있어 지금쯤 각각 술이 곤드레가 되었든지
아니면 각종의 삶에 짓눌려서 숨죽여 불쌍한 잠에 빠져 있기가 십상이며
온 세상의 연인들은 오래 전에 죽거나 헤어져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디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어찌할까. 이 갑작스런 몽상의 구덩이에 그대로 잠겨 있어야 할까?

그래. 이제는 핑계처럼 저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땡볕같이 달구어진 목소리로 더운 숨을 헐떡이면서 이제는 저들이 나를 붙잡는다.

그래도, 서러워도, 그 소실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없더라도
너희들처럼 그렇게 끈적끈적하고 뜨겁고 서러운 사랑을 한 번 해보라고?

그러게.
눈물나게 고맙지만, 이 사람아, 난 이제 청춘이 아닌데 그래도 괜찮을까?



플라토체크

dark eyes



 


소비에트 아미 코러스. 직역하자면 소련 육군 합창단쯤 될까.

어쩐지 이름이 좀 으스스 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어릴 때부터 받았던 냉전적 세뇌교육의 효과겠지?

이미 해체되어 흔적도 없는 소련이라는 공룡.

미국이라는 괴물과 맞붙어 겨룰만한 거의 유일한 괴물이었던 소련.


썩어빠진 이데올로기나 정치 같은 건 제껴 두자.

지구를 수십 번 결딴 낼 수 있다는 몇 천개가 넘는다는 끔찍한 핵미사일도 지금은 잊자.

문어발을 가진 불가사리같이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을 빨아들여 거대한 예술적 잡탕을 만들어놓은 잡동사니 미국을 비롯해서 그 알토란같은 아티스트들을 수시로 서방에 빼앗기면서도 또 다시 어디선가 귀신같이 홀연히 나타나곤 하던 겨울나라의 우울한 아티스트들. 그 추운 나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악의 심연,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강철같은 타건의 호로비츠, 엄청난 스케일과 절제가 공존하는 길렐스, 검은 타이즈의 긴 생머리 뮬로바,

감성 과다로 허구헌날 손수건을 쥐어 짤 것 같은 우울한 첼리스트 다닐 샤프란.

니콜라에바, 오일장 장바닥 좌판 어디에선가 만날 것 같은 뚱댕이 할머니...

오이스트라흐, 아아... 그 존재만으로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을 그 드럼통 아저씨.

그 뿐인가, 리히테르, 코간, 유리 바쉬메트, 등등, 이름만으로도 능히 그 주변의 별들이 빛을 잃을 거성들.

그들의 바탕 위에서 생겨났을지, 아니면 그들의 바탕이 되었을지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대륙의 뿌리. 소비에트 아미 코러스라는 괴물들의 집단.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구경도 못해 본 그 얼음 덮인 대륙이 느껴진다. 

이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그들의 등 뒤에 언제나 거인처럼 누워 있다는 순백의 우크라이나 산맥이 눈에 보인다. 

끝없는 동토를 거세게 할퀴고 지나가는 눈보라 속에, 노쇠하고 지친 거인처럼 더러 눕고 더러 버티고 선 산맥들. 새까만 바탕에 시뻘건 글씨로 공산당 기분을 한껏 살린 EMI의 재킷을 보면서 그들의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 추운나라를 그리워한다.


다듬지도 않은 듯, 꾸미지도 않은 듯, 제 하고 싶은 소리, 지르고 싶은 소리는 제 멋대로 꽥 꽥 질러대는 듯한,

저 가슴 속 깊은 아래쪽의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후벼 파고 긁어내는 듯한 그들의 야만적인 목소리.

정수리를 벌겋게 강타하는 불덩어리 같은 원색의 테너,

가슴팍을 부르르 떨리도록 후벼 파는 꺼칠꺼칠한 바리톤,

땅 속까지 긁어내는 듯한 까마득한 베이스.

번쩍이는 금관의 압도적인 울림 속에 언뜻언뜻 날선 비수처럼 가슴을 베어내는 발랄라이카의 트레몰로.


애니로리, 초원의 노래, 반두라, 벌판에 선 자작나무, 슬라비앙카, 카츄사, 제비, 손으로 꼽기에도 벅찬 그들의 절창들. 그들이 부르면 연가도 군가가 되고 군가도 연가가 된다.

그들은 지금 남아 있는지? 나라는 찢어지고, 군대가 재편되고, 그래도 그들의 예술 혼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서 저렇게 우울한 망령 같은 노래들을 쏟아내고 있는지.


아아,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다지 씩씩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명색이 사내로 태어났건만

그 놈의 거칠고 야만적인 슬라브 족속의 사내들이 쏟아내는 군가들은 어쩌면 그리도 이 나이 들 만큼 든 사내의 살을 저미고 가슴을 에는지 말이다.





 

공연 문화의 불모지인 변방이라 늘 여의치는 않지만 어렵게 기회가 맞아떨어지면 가족을 대동해서 더러 공연장을 간다. 하지만 인근의 소도시라 해봐야 그리 문화적으로 우수한 여건이 갖추어져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렵사리 찾아오는 공연이라야 수도권 인구들에게는 그리 눈길도 끌지 못할 그렇고 그런 공연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불모지에 살다보면 이거다 저거다 하고 입맛 가릴 처지가 아니다. 포스터 하나 붙으면 와르르 몰려가서 기갈에 물 한 방울 격으로 냄새라도 맡고 싶은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들지. 그러니 내용이 어떠니 색깔이 어떠니 그래봤자 그 뒷 궁리야 어떻든 촌구석까지 와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뭐. 그런데 그 중에서 얼굴 좀 알려지고 그 중에 입심 꽤나 있는 이들의 공연장을 가 보면 심심찮게  따라 다니는 것이 '따라 해보기'다.


-'자, 그러면 이렇게 소리 내어 보세요.'

(그게 아무나 진작에 쉽게 될 것 같았으면 당신들이 시방 그 무대에 서서 용을 쓸 일도 없었을걸?)

-'손을 이렇게 올리고, 좌우로 흔들면서, ...'

(흥이 나 봐라. 이 민족은 흥만 나면 도시락 싸다니면서 말려도 남녀 쌍쌍이 붙들고 못 말리게 흔들고 돌아간다니까. )

 

이보슈들. 
나는 당신들에게 그것들을 배우고 싶어서 그 곳에 간 것은 아니야. 나는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상에 지친 대부분의 나를 멈춰두고 당신들의 그 아름다운 소리나 몸짓을 보고 들으러 간 거야. 따라 하기도 그렇고 안하고 버티고 앉아있기도 어정쩡한 그런 난처한 꼴로 불편한 시간을 보내러 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대부분의 당신들은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대들의 재능을 펼쳐 보이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해 보세요.' '저렇게 해 보세요.' 때로는 어느 특정인을 지목해서 망신(?)을 주기도 한다. 

'거기 얼룩무늬 티셔츠 입고 안경 끼신 분 일어나 보세요.'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그런 시간이 닥치면 그저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황급히 옷차림이나 소지품 같은 것을 살펴 본다. 하는 사람은 진땀나고 보는 사람은 닭살이 돋는 그런 시간. 그걸 꼭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도 굳이 뭔가를 비싼 돈 내고 앉은 관객들에게 배워주고 싶다면 공연 안내 포스터에 반드시 그것을 명기 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누구의 무슨 공연- (즐겁고 유익한 따라하기 시간도 있음).-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런 불평분자는 당신들의 훌륭한 공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늘 하던 대로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편안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당신들은 이런 불순한 관객의 오염 없이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마음껏 그대의 재능을 빛 낼 수 있겠지. 그렇지 않고 무슨 무슨 공연이라는 표기만 되어있다면 알차게 그것에 충실 하라는 이야기다. 물론 공연 중의 분위기에 기름을 치기 위해서 한마디씩 던지는 재치는 나쁘지 않다. 나도 그쯤의 융통성은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객석의 반응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거나 바라고 하는 행위라면 그것 역시 떫다. 열성적인 오빠부대나 팬들의 환호성은 그럴 만한 대상과 그럴만한 장소가 갖추어졌을 때 기대 해 볼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대다수의 우리는 대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뜯어 고쳐져야 할 좋지 못한 습관도 아니며 좌중 앞에 나서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미덕인 것도 아니다. 나 같은 경우는 공연장에서 박수를 치는 것조차도 인색한 편이다. 그야말로 마음이 벅차올라서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예의상 몇 번 맥 빠지게 두드리고 만다.

아, 물론 모범적인 관객의 태도가 아닌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썩 신통하지 못한 내용으로, 게다가 연습부족이 여실한 내용으로 한 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이 겨워 기진맥진 때우고 있다든지, 그런 모자라는 재능을 입심에 기대어 그럴 듯 하게 포장하고 있다는 눈치가 보이기라도 한다면 이 고약한 관객의 박수는 미안하지만 단 한 번도 받지 못하고 말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들의 뛰어난 쇼맨십을 발휘하고 싶거든 공연 안내에 그걸 친절히 명기 해 주면 좋겠다는 부탁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공연에 충실해 달라는 이야기고. 그래도 못내 자신의 재능을 떨쳐 보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면 박수소리가 채 멈추기 전에 펼쳐 보일 앵콜이나 한 두 개쯤을 더 준비 해 오는 것은 어떠실지.    













 Panis Angelicus / Frank

The choir of Paisley Abbey

사람이 성정이 여물지를 못하여서 그런지 이 나이에도 듣다보면 콧머리가 시금털털해지는 곡들은 더러 있었지만
어떻게 수습할 겨를도 없이 왈칵 쏟아져버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수년 전에 부산에 사는 동갑내기 지인에게서 얻은 복사 시디입니다. 스피커 회사에서 나눠주는 샘플러 시디라 뭐 되잖은 곡들도 이것 저것 섞여있기도 한데다가 대부분의 그런 류의 음반이 그렇다시피 이것 또한 한 두 곡을 제외하고는 음악보다는 음향효과를 극대화 한 그런 효과음악(?)들이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곡의 배열도 두서가 없어 내내 이어 듣자면 몇몇 곡은 좀 짜증스럽기도 했지요.

그랬었는데...
몇 해 전 어느 날 오후에 여느때와 다름없이 별 생각없이 볼륨 열두시까지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순간, ‘저 먼 우주로부터 날아 온 아지못할 그 무엇’ 에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 찌리릿! 관통 당하여 엉거주춤 무심결에 고만 팍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 왜 눈물이 났는지는 나도 몰라요. 며느리도 모르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건지 비위가 약해 그런건지 소화불량이라 그랬는지. 뭐 어쨌거나 그 이후로도 들을때마다 그 양이 적거나 많거나간에 눈물이 납니다.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로구나, 라든지, 혼신의 힘으로... 라거나,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음악성이로구나...  뭐 이따위 각종 수식어들이 무색해지는, 그야말로 神에게 영혼을 다 바쳐 부르는 듯한 숭고한 목소리입니다.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넘어선 숭고함입니다. 神이건 누구건, 그 어떤 존재가 이 사람이 부른 이 곡을 듣는다면 그 자신도 한번 쯤은 헛기침하며 눈을 끔벅거리지 않을까 그리도 생각해봤습니다.  

아니, 뭔 촌뜨기 주제에 뭐 얼마나 보고 들어 봤답시고 따따부따 설레발이냐 삿대질 한다면 섭섭합니다만, 그래도 할 수 없지요. 나는 고만 이 여인네에게 홀딱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혹시 뭔 일 없는 편집 시디 만들 때는 거의 빼지않고 끼워넣는 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돌려댑니다. 오늘 아침에도 들었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곡을 부른 독창자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잡는 독창자를 알고싶은 마음에 인터넷을 있는대로 뒤지면서 난리 법석을 떨어봤지만 이 소프라노가 도대체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몇 살이나 먹었는지, 기혼인지 미혼인지....(대체 이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마는...) 또한, 이 소프라노가 내놓은 또 다른 음반이 있는지, 특히 이 소프라노가 부른 성가곡 음반들이 있는지, 검색 솜씨가 형편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결국 그 외의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짐작에 페이슬리라는 수도원의 성가대에 소속된 무명의 수녀가 아닐까 짐작하는 바, 이 수녀님(혹은 아줌마, 또는 아지매, 혹은 처자,)는 이 한 곡만으로 거의 천사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라고 내 혼자 멋대로 결정해버렸습니다.
어쨌든 이름도 모르는 이 소프라노는 딱 이 한 곡만으로 동아시아의 동쪽 변방에 쭈그러져 살고있는 촌뜨기의 열렬한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말이야 하기 나름이지만 이만큼 넋을 놓고 들었던 음악이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추신/
또한 목소리의 음색과 성량과 음악적 감성 등등으로 미루어보아
이 여인은 절대로 도무지 도대체 못생길래야 못생길 수가 없는 것으로 확신되는 바,
혹시 그간 심경의 변화 있어 환속을 하시거나 파문을 당하는 불상사가 있다면
주저치 마시고 얼른 우리집으로 전화 하시기 바랍니다. 버선 발로 마중 나간다니까요. 그럼요...


 

우리는 오디오쟁이라는 핑계로 너무 근사한 소리만 찾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쳇 베이커의 이빨 빠진 보컬과 그의 김새는 트럼펫 소리를 듣다가 하게 된 생각입니다.

물론 음악이란 것이 온갖 예술 일반과 마찬가지로 기초란 것이 무척 중요하긴 하겠지만, 그리고 그 기초가 튼튼히 말뚝처럼 박혀 있어야만 대체로 좋은 소리가 나오게 되어있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쳇 베이커의 김새는 트럼펫 소리가 기초가 없다고는 강변하지 못할 것이 그 기초란 것이 무엇에 기준을 두느냐가 관건이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학교에서 우수한 선생님들한테 도제식으로 강 훈련을 받았다 하더라도 일껏 불어 제낀 나발이, 또는 팔뚝에 알통이 배기도록 긁어댄 비올이 가슴패기 한 구석도 달싹거리지 못할 맹물인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습니까?

태권도 팔 단짜리하고 뒷골목 쌈대장 하고 붙으면 누가 이기냐고 소싯적에 골목 어귀에서 참 숱하게 박박 우기고 옥신각신 한 것처럼, 꿩 잡는 게 매라고 무엇이 어떻게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느냐가 문제이지 실크 브라우스 입고 나비넥타이 맨 근사한 연주자들의 우아하고 고상한 연주라야만이 우리가 감동을 받는 건 아니지 않느냐,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쥐도 죽고 새도 잠든 시꺼먼 오밤중에 새끼들 다 재우고 혼자 소주 한 잔 놓고 퀭하니 풀어져서 듣는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에서 그 옛날 남강 고수부지가 흥건하도록 낭자한 나발 소리에 취해서 아 그 이뿐 채색 옷 입고 허리가 활처럼 휘고 얼굴에는 백새같이 분칠하고 쥐 잡아 먹은 듯 새빨갛게 연지 칠하고, 그래도 절대로 웃지 않던, 웃지 않아서 너무 예쁘고 너무 예뻐서 눈물나게 슬프던 계집아이가 보고 싶어서 컴컴하게 어두운 천막 안에서 그 아이 휙 휙 날아다닐 때 혹시나 다칠까 떨어질까 조마조마 박수치다가 아쉽고 애틋하고 ... 나도 그만 저 계집아이 따라서 서커스나 따라 갈까, 어리둥절 허랑한 채로 천막 나서면 원숭이 두어 마리 말뚝에 매 놓고 거기 늙수구리 사나희 두어 사람 다음 파수 손님 끌라고 울긋불긋 나이롱 채색 옷 입고 찬바람 부는 하늘로 불어제끼던 혼비백산 고만 스산한 가슴패기 발기발기 뜯어 놓던 처량한 나발소리, 쳇 베이커의 김빠진 트럼펫에서 그걸 들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예술의 기본정신일진대 그 소리 사진으로 백혀 놓을 수만 있었다면 지금 어떨까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봤던, 댐 수몰 지역으로 지정 된 학교에서 마지막 운동회. 거기서 맑은 하늘로 솟아오르던 브라스밴드 소리를 사진으로 박아놓지 못함을 한탄하던, 그럼요, 소리에도 적막한 쓸쓸함이 있고말고요!


그러게 예술이란 것이 억만금 비싼 돈 들여서야 거드럭거리며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예술이 아니지요.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개뿔도 없으면서 으리으리하게 차려놓은 오디오며 장비들을 보면 으라차차 엄청나고 대단 하구나 감탄은 할망정 거기서 팍 삭아빠진 나발소리나 물 빠진 듯한 낡은 소리 안나오면 그래, 오늘 비싼 물건 구경 했구나, 그거 이상 감흥이 없는 거지요. 


기왕에 쳇 베이커 이야기로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오디오란 것도 그 트럼펫 소리처럼 이게 정답이다 하고 기막히게 뽑아 주는 오디오라는 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귀마다 다르고 추억의 근저부터가 다들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값이나 브랜드가 문제가 아니라, 뭐라고 딱 집어 낼 수는 없어도 어쩐지 지한테 안 맞아서 석 달 열흘을 시난고난 바꿔대면서 패대기를 치다가 어느 날, 그때의 제 감성하고 딱 맞아 떨어지면 아이고 이게 최고다, 내가 여태 어딜 헤메고 다녔더냐, 가진 물건 다 갖다 버리고 거품 물고 온 동네 쌍 나발 불어대지만 그거 실눈 뜨고 흘겨보는 옆집 사는 김 서방은 그 사랑 몇 달 가나 두고 보자 시큰둥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기야 뭐 세상 사는 꼴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불현듯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연 가슴을 파고들어 눈물짓는데 그거 같이 들어보자고 일껏 불러 낸 친구는 이게 뭐냐 뭔 소리냐 연신 하품일 수도 있지요. 암사슴 다방에 미쓰 리가 지 눈에 콩팥이라 가슴 밤마다 쥐어뜯으며 죽고 못 살아도 만두집 왕 서방은 콧구멍만 후비고 앉았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겨울이다.
낯 선 도시다.
차고 매운 소주 몇 잔으로,
그 잔 속에 말아 마셔버린 단념과 낙심으로,
간절한 정욕으로 함께 부대끼던 어두운 골목길이다.   


오래 전 내 속에 죽어 수십번 썩어 문드러지고, 육탈하고,

또 썩고, 또 다시 썩어 문드러지던,

그래도 뼈를 남겨 늙은 나를 지탱하는 지독한 연인아

지금 듣고 있는가. 이 흔해 빠진 추억을.

그 지긋지긋한 통속함에 오늘은 내 그대에게 한 잔 따르지. 깊고 큰 잔으로.


그리하여 잔 들어 그 날을 기념하자. 그리고 오늘 밤은 같이 죽자.

내일 아침,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내리는 숙취와 상실감으로 잠시 그대를 잊더라도
오늘 밤은 비로소 같이 죽자.

아무 딴 생각 없이 그냥 칵 죽어버리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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