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신을 경배하며 바하를 연주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하늘의 천사들은 모여서 모짜르트를 노래할 것이 틀림 없다.‘

‘길고 긴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모짜르트의 음표 서너개가 주는 감동이 더 크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내게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밖에 주시지를 않으셨나이까.’


......그리하여.........

‘나이가 들 수록 시도 때도 없이 모짜르트가 좋아지더라.’

‘궁극에는 모짜르트에 이르리라.’

‘모짜르트, 그 천진함에 눈물이 난다.’

‘나이가 들 수록 시도 때도 없이 모짜르트가 좋아지더라.’

‘음악은 모짜르트에서 시작해서 결국엔 모짜르트로 돌아온다.’

모짜르트 모짜르트 모짜르트 모짜르트 모짜르트 모짜르트 모짜르트 모짜르트........
...........

내노라는 연주가들이며 평론가등등,
음악 꽤나 긁어댔거나 들었다는 할배들이 방덕모자에 빨뿌리 물고 끄덕끄덕 하는 말씀이십니다.
앞집 뒷집 영감 할마이 할 것 없이 나이가 들 수록 시도 때도 없이 모짜르트가 좋아진답니다.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말씀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참 마음에 안드는 말씀입니다.
어째 사람이 덜되어 그런지 아니면 그 빵떡모자 할배들만큼 근사하게 늙지를 못해 그런지 나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모짜르트가 그리 썩 눈물겹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의례 그래야만한다는 우격다짐으로까지 눈치뵈이는 모짜르트 예찬론을 듣다보면,  

-아니, 그렇다면 모짜르트가 그리 사무치지 않는 나는 쎄가 빠지게 반평생 음악을 들어왔거나 말거나 얼추 좀 모지래는 반편이나 팔푼이란 말씀이지? 이런 떠그럴!

-아니면 대충 낫살이나 먹을만큼 먹었으면 의무적으로 모짜르트를 좋아하든지 아니면 대세를 거스르지 말고 대충 모짜르트에 경도되는 척이라도 하란 말씀이지? 염병!

아니, 그렇다고해서 헤블러 아줌마가 연주한 변주곡집이나 하스킬 할매의 소나타 등속조차도 그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짜르트라서 심취한다기보다는 헤블러라서, 하스킬이기때문에, 굴드니까, 그래서 귀 기울여 듣는다는 혐의가 훨씬 더 짙을 뿐이긴 합니다만.
난들 제아무리 먹통 귀를 가진 잡배라 한들 그 선율이나 화성의 아름다움조차 모르겠습니까? 일찌기 하스킬과 그루미오의 소나타 듀오를 두고 어느 지인은 건반과 현의 넘나듦이 하도 오묘하고 절묘함에 거의 섹스를 방불케한다는 표현을 한 바 있고 나 또한 그 사람의 그 썩어 문드러질만큼 짙은 감성에 무릎을 치고 탄복한 적이 있을만큼 공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모짜르트는 왜 내게 그 이상의 사무침을 허락하지 않는가.

고적한 밤이면 습관처럼 꺼내 듣는 바하만큼,
낙심한 날, 반술에 취해 억장으로 무너져내리던 브람스만큼,
격정으로 휩쓸려 눈 감고 한숨 쉬던 브루흐만큼, 그리 절절히 젖어오지를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
이몸의 성품이 고결하지를 못해 그런가.
잡배라서 그런가.

베토벤. 아.. 과연 베토벤이지요.
흔해빠진, 상투적이다못해 읍내 오일장 좌판에서 울려퍼지는 뽕짝 메들리에서도 더러 떨이로 팔아제끼는 그놈의 베토벤은 이제 어지간히 지겨워질만도 한데 까까머리때 처음으로 카라얀의 땡판으로 얼떨떨 음악 세례를 받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곁을 내 주지않던, 내게는 이미 절실함을 떠나 그 이름만으로도 귀에 딱지가 앉아버린 베토벤도 있습니다.

..........
그렇지요. 잘났습니다. 어쩌자고 하나같이 B란 말이냐고요.
요한 세바스찬 B하.
루드비히 반 B토벤.
요한네스 B람스.
막스 B루흐.

그러게. 또 모르지요. 모짜르트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B짜르트였다면 나도 일찌감치 모짜르트로 돌아왔을까요? 뭐, 그래 보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도 알파벳 대문자 하나에 목숨걸고 작두타는 박수무당은 아닌가봅니다만.... 벤자민 브리튼, 안톤 브루크너 처럼 같은 B짜 항렬이라도 썩 탐탁찮은 위인들도 없지않으니 말씀입니다.
브리튼은 내사 질겁을 하는 근대 이후의 난해음악 작가이므로 일단 제껴놓고서라도 더러더러 종교적이며 숭고하며 경건하기가 그 짝을 찾기 어렵다는 그놈의 브루크너 교향곡에 적셔볼라고 어느 한 때 기를 쓰고 그 길고 긴 교향곡을 생짜로 붙들고 씨름을 해봤으나 B짜 돌림이라 어딘가에 분명히 내 속살과 맞아떨어지는 주파수가 있으리라 지레짐작으로 덤볐던 기대와는 달리 단 한곡도 맨살을 만져보지 못하고 나가 떨어져버린 가슴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뭐 어쨌든. 나는 지긋한 나이가 되면 그 체온이 저절로 느껴진다는 모짜르트를 아직 근접하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아직 파릇파릇하여 지긋한 나이가 아니든지, 아니면 지긋한 나이인데도 나이값을 제대로 못한 얼치기 광팔이인지 그건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안다고해도 굳이 그걸 여기서 밝혀서 얼굴 값을 바겐세일하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요. 하지만 여전히 내심 찜찜하고 뒤숭숭한 것은 사실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바하가 더 좋아진다든지 늙어가면서 베토벤을 재조명하는 재미로 산다든지 브람스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침잠하여 적셔볼만한 거시기라든지 브루흐의 감성에 눈물짓지 못하는 순간 청춘은 끝장이라는 둥의 그럴싸한 말씀들은 아니 들리고 어째서 주최측의 농간도 아니면서 하나같이 내 마음에는 별로 안드는 모짜르트만 찬송하고 있냐는 말씀이란 말이지요...

그래 뭐, 아무튼 좋습니다.
그대들이 끝끝내 그놈의 천진하고 순진무구한 모짜르트를 찬송하거나 말거나 나는 내 아름다운 청년시절부터 초지일관 나를 길러 온 저 아름다운 B씨 들에게 감사하며 오늘 밤도 변함없이 경배드리려 함이니, 바하의 그 끝모를 심연의 깊이라든지 베토벤의 퀴퀴한 살냄새에 브람스의 무젖은 청승. 곁다리로 끼어든 브루흐까지 그 누구라도 내 생각에 찬동하여 한다리 담궈보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불 속 구들장 내어드리고 말고지요.

.........
아이 참, 기왕에 그리 될려거든 내 혈액형마저 우연히 'B'였다면 얼마나 근사할 뻔했을까요?
그렇게만 됐더라면야... 유시유종, 시종일관, 수미상관, ..........
뭐 어쨌든 그럴싸하게 아구가 딱 맞아떨어지지않았겠냐고요. 그렇지요? @@..





옛날 소리가 듣고싶어서 우드베이스의 오래 된 구식 턴테이블을 하나 구했다.
목을 빼고 이틀을 기다렸더니 운송 중에 쥐어박혀서 두껑은 깨지고 하판은 박살이 났다.
그 서슬에 대미지를 입었는지 한쪽 채널도 먹통이다.
판매자와 통화끝에 환불 받기로 하고 카드리지와 헤드셀은 돌려주고 나머지 큰 덩어리는 내던지기로 했다. 손 떠나면 나몰라라 오리발 신사들이 많은 인터넷 장터에서 그래도 점잖은 분을 만났으니 내가 사는 건 이모양이라도 인덕은 마르지 않았나 싶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 못쓰는 물건이거니 내다 놓으려다가 가만 보니 적당히 낡은 우드 베이스가 아깝다.
오디오쟁이라봤자 뚜껑만 열면 까막눈이지만 기왕에 내던지기로 한 것이니 죽이되건 떡이 되건 주물러보기로 했다. 한 시간쯤 인두를 꼬나들고 야단법석을 치다보니 소리가 나기는 나는데 찌---  험 소리는 죽어도 안잡힌다. 고약하다. 어딘가에 단단히 쥐어박힌 모양이다.
어쨌든 소리가 나니 판을 한 장 얹어 본다. 70, 80년대 우리나라 노래들이다. 속 빈 강정같은, 그렇지만 목질의 통울림이 묻어나는 둔탁한 소리에 가슴이 착 가라앉는다.

그랬다.
십년 가까이 백원짜리 압전형 세라믹 바늘로 듣다가 포노 이퀄라이저라는 게 반드시 붙어야만 소리가 난다는 마그네틱 카드리지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소리와 흡사하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귀족들의 행진, 트윈폴리오, 송창식, 정태춘, 조동진... 장드롱의 무반주 첼로. 장드롱은 사놓고 차마 듣지를 못했었다. 백원짜리 바늘이 다 긁어먹을까봐.

지금은?
고물이나마 한 때는 방송국에서 깃발 날렸다는 꽤 쓸만한 턴테이블에 시방 구식 빅터 턴테이블에 달려있는 카드리지 보다도 열배는 더 비싼 꽤 유명한 바늘을 달아 두었는데도 그 때만큼 눈물나게 좋지를 않아 쓸쓸하네. 기계가 좋아지면 심성도 기계를 따라가는지.

학교 잔디밭에 드러누워서 건전지 다 돼가는 택트 야전으로 베토벤을 듣고 가슴 벅차하던 그런... 그 때는 순진했다는 이야긴가. 그럼 지금은 뭔지. 교활해진 건가 아니면 까다롭고 삭막해진 건가. 그럴지도 몰라. 귀만 간사해지고 가슴팍은 시멘트처럼 굳어서.

식구들 깰라 소리 낮춰서 박은옥의 비오는 나루를 듣고 있자니 잘 어울리는구나. 어디론가 한없이 흘러가고야 말 것 같은 겨울 새벽. 아주 조용해요. 바람도 없고 개도 짖지 않아 막막한 겨울 새벽. 골목엔 오가는 사람도 없고 별만 시리게 빛나는 적요. 아. 지금 한림정 갈대밭 사이로 달리는 완행 기차 속이면 좋겠다.
좋기는. 서릿발 같은 겨울 새벽, 화살처럼 꽂힌 갈대밭에서 억장만 무너지지. 그래도 물 뚝뚝 흐르는 병맥주 따서  홍익회 후랑크 소세지랑 먹고 마시면 에헤라디여, 아아, 그 가슴 저린 삼등열차의 싸구려 낭만이라니!

아서라.
그러다가 해질 무렵 술 깨어나 보면 낯 선 시골역 대합실 톱밥 난로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그 허망함을 어찌 할라고. 쓰고 버릴 말이라도 그 옛날은 꺼내 놓으면 가슴만 다치지
신새벽에 공연한 소릴. 오늘은 구식 턴테이블 돌리다가 시골역까지 갔구나. 정말 세월은 가나보다. 어느 새 판도 다 돌아 툭탁거리고 있구만 그래.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갖고 있는 오래된 비닐판 중에 유로디스크에서 나온 외르크 데무스의 슈베르트 피아노 곡집이 있습니다.
즉흥곡, 왈츠, 등등 잡동사니로 섞인 판인데 그중에 1면 네번째 곡이지요.

Klavierstu"ck Es-dur op.posth. No.2 D 946,2(Komp. 1828).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녹음도 별로 많지않은 그렇고 그런 곡입니다.
하지만 때로 친지들이 뭐 하나쯤 녹음을 부탁할시면 거의 빼놓지않고 중간에 끼워넣는 감초입니다.
뭐 그래봤자 이게 대체 무슨 곡이냐는 반문은 지금껏 단 한 번 밖에 받아보지 못했지만.
게다가 어떤 이는 그 곡 별로더라고 김을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 차별해서 넣거나 빼거나 합니다. 순전히 내 맘입니다.

이걸 듣고 있노라면 얼핏, 베토벤의 아델라이데가 그려내는 이미지와 엇비슷한 듯도 하고,
그보다도 조용조용 좀 더 아득한 이야기를 하는듯 하고 어찌 보면 슬픈듯, 어찌 보면 또 지극히 아름다운듯,
겉으로 드러나기를 고요하고 행복해보이나 그 속에 어쩐지 흠씬 젖은 가슴팍 한두개 품어있는듯도 보이고.
그러다가도 그저 아늑하게 잠기고만 싶은,
그래서 드물게 음악을 듣다가 이 음악 그저 끝나지 않고 한없이 계속되기만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데무스 판으로 연주시간이 8분 21초라 소품 치고는 별로 짧은 편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혼자 생각에 혹시 슈베르트가 이 곡을 노래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혹시 이 곡을 뼈대로 해서 꾸민 절절히 아름다운 노래가 유럽 어느 고서점 구석에 꼭꼭 숨어 있지는 않을까 허튼 생각도 해봤고. 뭐 역시나 그 이상은 아는바가 없습니다. 이 곡도 이 음반 외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고.
듣자하니 브렌델이 연주한 것이 일찌감치 발매가 되었더라는 말은 들었는데
어쩐지 그리 열나게 찾아헤매고싶은 생각은 들지않았습니다.
내가 느끼는 브렌델의 연주 스타일이나 이미지가 이 곡과는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뭐 어쨌든 혼자 생각으로는 이건 반드시 노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다 안되면 누군가 아무나 독문학에 정통한 이를 꼬드겨서 맘에 드는 가사를 붙여 달래서
분더리히 처럼 곱게는 못해도, 피어스처럼 유장하게는 못해도,
(이 곡에는 디스카우는 안 맞을 것 같습니다. 하기사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독일어를 모르니 그 뜻이나 음을 달달 외기만이라도 해서
남 안볼 때 힘들여 한번 불러 보고싶은 욕망을 꽤 강하게 느껴보았던 곡입니다.
혹, 이게 노래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슈베르트는 일생의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라고 박박 우기고싶기도 할만큼
그 선율이 가곡적(?)인데.......
이거 누가 독일어로 가사 붙여서 신곡 발표회라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
슈베르트 곡에 노래아닌 것이 어디 있냐는 말씀이지요?
무식하게 자다깨어 봉창 두드리는 소리 말라는 말씀일 것이고.
원 참, 그렇기는 합니다. 뜬금없이 뭔 신곡 발표회라니. 좋으면 그냥 좋았지 느닷없이 무슨 학예발표회도 아니고... 그래도 하도 좋아서 그래봤지요.
그래도 참 궁금하고 아쉽습니다.
때로는 별로 감흥없는 곡에도 열심히 가사를 붙인 슈베르트가 왜 이 아름다운 곡을 그냥 콩나물로만 남겨 두었는지.

.....
것도 무식한 이야기란 말씀이신데..
그 아쉬움이 이 곡을 들을때마다 무럭무럭 자라서 급기야는 눈물 콧물 땟국물로
가슴을 아예 젓담아버리게 할라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요?
슈베르트가 그런 잔머리까지 굴렸다고요?
엣기! 앞뒤 꽉 막힌 로맨티스트 슈베르트 짱구로는 그런 잔머리 못 굴리네요.  

하기사 이 애잔한 곡에 절절한 가사를 완성시켜 그 누군가의 절창으로 불러제껴버리면
그 자리에서 가슴이 터져서 칵 죽어버릴 사람도 더러 몇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요.
아픈 사랑 한 두개 쯤 가슴에 품어안고 이 풍진세상 허위허위 살아가는 이들,
너덜너덜 코 푼 손수건 같은 그리움 가슴에 품어 밤마다 앓아눕는 화상들,
사는 것이 아쉬워 아쉬워 그저 밤이 더디가기만을 고대하는 사람들.

나 아닌 척 뒷짐 지고 먼산 두리번거릴 것 없네요.
암만 청맹과니 촌놈이라도 꽤 쓸만한 촉수 하나쯤은 갖고있는 법이랍니다.
시방 이 곡을 피아노 소리로만 듣기에도 때때로 공연히 코 끝이 시큼시큼 기분이 얄궂그만.
일단 한 번 들어나 보시고 아니라고 장담을 하시든지 장을 담그시던지 말든지.

2003. 11. 9





눈감고 듣노라면
안개가 멋들어지게 휘감고 지나가는 아일랜드의 삐딱한 초원은 사라지고 시뻘겋게 갈라터진 아프리카의 황무지가 나타난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까만딱지도 몇 개 앉은 동화 속의 아일랜드 목동은 사라지고
기계충 먹은 머리통에 파리 몇 마리 달고 앙상한 가슴팍에 풍선처럼 부른 배.... 먼지투성이에 눈꼽 낀 아프리카의 깜둥이 소년이 생각난다.

웅성웅성 객석에 소란스럽던 희멀건 양키들도 쥐죽은 듯 자지러지고
지그시 눈 감은 벨라폰테는 그 때쯤 바작바작 타 들어가는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 서 있었을까.
하마도 졸고 코끼리도 지겨운 그 뜨거운 아프리카의 말라 비틀어진 초원에 그렇게 서 있었을까.

사자에 뜯긴 얼룩말의 시체 위에 잉잉 쉬파리처럼
강바닥도 타들어가는 가뭄에 제 허물처럼 말라 비틀어진 배암의 시체처럼
지겹게 뜨겁기만 한 아프리카의 사나운 평원 한 귀퉁이에 배고파 징징 우는 그 못난 깜둥이 아이처럼 그렇게 서 있었을까.

ANDREAS TRIO

녹음:   ★★★☆☆
연주:   ★★★★☆
신선도: ★★★★★ ..... @.@..



별표에 나타나있다시피
녹음은 그냥 그렇고
연주는 그냥 괜찮고
신선도는 아주 맛이 갔습니다.

.................
날이 갈수록 가슴패기가 삭아 빠져서 까닭없이 옛것이 그리운 분들
팽팽 돌아 가는 세상 살이가 어지럽고 숨 차기만 하여 몹시 못마땅 하신 분들
저녁나절 가시버시 커피 한 잔 놓고 조명 어둡게 해놓고 편안하게 듣다 보면
가슴패기 저 한구석이 조금 간질간질 해 집니다. 공연히 코 끝이 시큼해서 재채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로 아는 곡이거나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곡들입니다.
개인적으로 2,4,육팔장으로 짝수 트랙이 조금 더 끌리고 홀수 트랙은 좀 덜 끌립니다.

참고로,
찌릿찌릿한 애인하고 들을만 한 곡은 아닌 걸로 사료됩니다.



토셀리 세레나데
라프 카바티나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아 목동아
브라가 천사의 세레나데...

이런 매우 상투적인 곡들을 별로 광택 없는 퍼석한 고물 트리오로 듣고싶은 분들...
눈이 침침해지고 손끝이 무디어져서 각종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시는 분들...

후회하셔도 책임 안집니다.
순전히 엿장수 마음입니다.





나는 풀밭에 있다.
그 어떠한 흔적도 없는 원시의 땅에 혼자 누워있다.

산비탈은 햇살 받아 밝게 푸르고 하늘은 온 세상을 덮어 고요하다.
보이지않는 어디선가에서는 맑은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다만 어린 풀잎들만 엷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릴 뿐이다.

선악도 없고
문명도 없고
생사도 없으며
그 어떤 인과나 현상도 없이  
종교적인 고양감이나 격정의 눈물까지도 말끔히 씻어버린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맑음이며 고요함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을 넘어서버리는 기이함이다.

심신이 부대낄때면 나는 이 곡을 한없이 반복해서 듣는다.
음반을 얹고 스피커 앞에 바짝 다가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혼자 듣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도 씻겨진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나도 때를 벗고 눈을 씻는다.

심상이 얇은 잡배의 싸구려 감상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나는 이 곡을 종교의 그것보다 더 우위에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이 음악을 쓴 사람은 말 할 것도 없이 이것을 연주한 이들조차도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 언젠가 내게 조용히 누워 숨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혹시, 나는 그 순간에 이 곡을 듣고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리해야겠다면 반드시 이 음반으로 들어야겠다.


//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pf/호로쇼프스키
vn/베흐
vc/카잘스

베토벤하우스 실황







 



그 노래는 그렇게 들어야지.

깊은 밤 사방으로 짙은 커튼 드리우고 아득히 가라앉은 누우런 방.

번쩍거리는 하이엔드 오디오라면 좀 그렇겠지?

손때 삼삼하게 앉은 고물 나발 앞에 이리저리 삭아빠진 판때기들 발 끝으로 밀어놓고

침침하게 가라앉은 흐린 날에 흐린 알전구 뎅겅 노랗게 달아놓고

이불 대충 구겨서 한 쪽에 밀어두고 삐딱하게 누워서 입꼬리에 피다만 꽁초도 하나 물고 들으면 좋지.

핑게 좋은 술 한 잔으로 핏줄 속의 알콜 농도를 적당히 높여두면 감상에 더욱 도움이 되고말고.

짓무른 눈자위 축축하게 적셔서 들어야지. 듣다보면 어느 새 언뜻 이빨 빠진 쳇 베이커랑 마주앉아

엣다 너도 한 잔, 그럼 나도 한 잔.

주고 받고 수작하다보면 늬가 난지, 내가 뉜지, 고만 쑤세미처럼 헝클어지고

세수도 하지말고 발도 씻지말고 턱 밑에 깎지 못한 수염도 한 사흘 길러두면 더 좋지.

내가 반드시 그리 해서 이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 어쨋거나 나는 그 노래때매 적잖이 망가지고 말았다니까.

그 노래는 냄새가 너무 진해서, 진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서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게 뭔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거야.

희거나 검거나 가거나 말거나 울든지 말든지...

그러게 내 어깨 위에 얹힌 건 대체 무엇일까.

내 가슴 속에 쑤셔 박혀서 밤낮으로 툭탁거리는 저 시커먼 덩어리는 대체 또 무엇일까.

낡은 세월에 낡은 것들 사이에 끼어 박혀서

도리 없이 밤 낮으로 낡아가는 녹슨 베어링 같은 것인지 뭔지 말이야.

마이 훠니 발렌타인.

원 세상에 별 지독한 노래도 있더라.

//

쳇 베이커는 이 녹음을 마지막으로 보름 뒤에(한 달 뒤라는 말도 있고) 네덜란드의 한 여관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재즈에는 문외한이라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입장이 안되지만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작은 정신적 손상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정말로 삶에 대한 어떤 미련이나 애착도 다 놔버리면 저렇게 지독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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