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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징거' 이외의 바그너를 나는 이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차이코프스키도 잊어버려도 상관 없습니다.
그는 내가 13세때, 즉 사춘기에는 중요했지요.
그렇긴 해도 그의 교향곡 5번과 6번을 안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연주만 좋다면 말입니다. 즉, 차이코프스키를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
놓았을 뿐이지요. 저 아래쪽에 말입니다.
베토벤의 소나타 한 곡보다도 모짜르트의 音符 서너개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말해 온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것은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베토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베토벤은 갈등이 많은 사람이었죠.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도 느껴집니다.
그것이 그에게 그다지 호감이 안 가는 점입니다.
그는 음악의 위대한 건축가였지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으리만큼.
집을 세우는 식으로 교향곡을 구성했던거지요. 훌륭하게 만들었지요. 단단하기 이를데 없이.
그러나 모짜르트는 단 하나의 작은 테마로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채워
버립니다. 슈베르트도 그렇습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의 순수성으로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하는 것입니다.//
-A.루빈시타인.- /페릭스 슈밋과의 대담 중에서. (스테레오뮤직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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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A.루빈시타인 영감님,
나는 마이스터징어 이외의 바그너도 더러 듣습니다.
물론 차이코프스키를 잊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교향곡 뿐 아니라 그의 많은 작품들을 즐겨 듣습니다. 특히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이나 오이스트라흐와 오먼디가 겨루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하도 들어 이제는 지겨워질 만한데도 불구하고 요즘도 더러더러 손이 자주 가는 음반입니다.
물론 나는 지금 사춘기가 아닙니다. 해만 지면 눈앞이 침침한 중년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길고 긴 베토벤의 소나타 한곡을 정신없이 빠져들어 들을 때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모짜르트의 음부 서너개를 지겨워하며 콧구멍을 후빌 때도 있습니다.
나 역시 베토벤이 갈등이 많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은 있습니다. 삼 사십년 듣다 보니 그래도 청맹과니는 아닌 듯 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브람스는 그보다 더 갈등이 많은 걸로 느낍니다. 브람스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머리 한 대 쥐어 박고 '좀 심풀하게 살아라!'며, 매우 진지한 충고를 남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영감님처럼 호감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오히려 친밀감을 느낍니다. 때때로 나의 곰팽이 낀 가슴팍을 열어 제껴서 나를 대변해 준다는 느낌 때문이지요.
물론 모짜르트는 아름답습니다. 나도 그의 수많은 음악들을 사랑합니다. 어느 때인가는 아직 접해 보지 못한 모짜르트의 음악이 못내 아까워서 그걸 모두 섭렵해 본답시고 딸리는 깜냥에 아둥바둥 발사심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슈베르트도 그렇습니다. 나는 요즘도 그의 녹턴을 들으면서 뼈마디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은 몽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음악의 '순수성'만이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고집하지는 못합니다.
우아한 모습으로 고상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 갑남을녀 장삼이사 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만, 나는 때로 울부짖고 싶기도 하고 때로 천박해지고싶기도 합니다.
바하의 깊음을 늘 흠모하지만 여행길, 시골 싸구려 다방에서 듣는 유행가 자락에도 때로는 눈물 짓습니다. 아마도 그대와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한 범부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피아노도 못치고 악보도 능숙하게 읽지 못하며 당신처럼 나이가 많이 들어보지도 못했고 당신만큼 인생의 경험도 썩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럴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죄송하지만 나는 수삼년 전에 당신이 연주한 여러 음악가의 음반을 다수 팔아먹고야 말았습니다. 어느새 중년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이제 '쇼팽' 이외의 당신이 필요하지않은 때문이지요. 미안합니다.
새옹 드림.
/추신:
그래도 스크로바체프스키가 지휘한 영감님의 쇼팽 협주곡 1번은
내가 죽을때까지 팔아먹지 않을 구원의 판때기이니 너무 섭섭해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