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풀밭에 있다.
그 어떠한 흔적도 없는 원시의 땅에 혼자 누워있다.

산비탈은 햇살 받아 밝게 푸르고 하늘은 온 세상을 덮어 고요하다.
보이지않는 어디선가에서는 맑은 물이 조용히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다만 어린 풀잎들만 엷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릴 뿐이다.

선악도 없고
문명도 없고
생사도 없으며
그 어떤 인과나 현상도 없이  
종교적인 고양감이나 격정의 눈물까지도 말끔히 씻어버린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맑음이며 고요함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을 넘어서버리는 기이함이다.

심신이 부대낄때면 나는 이 곡을 한없이 반복해서 듣는다.
음반을 얹고 스피커 앞에 바짝 다가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혼자 듣는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도 씻겨진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나도 때를 벗고 눈을 씻는다.

심상이 얇은 잡배의 싸구려 감상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나는 이 곡을 종교의 그것보다 더 우위에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이 음악을 쓴 사람은 말 할 것도 없이 이것을 연주한 이들조차도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 언젠가 내게 조용히 누워 숨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혹시, 나는 그 순간에 이 곡을 듣고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리해야겠다면 반드시 이 음반으로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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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 3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pf/호로쇼프스키
vn/베흐
vc/카잘스

베토벤하우스 실황







 



그 노래는 그렇게 들어야지.

깊은 밤 사방으로 짙은 커튼 드리우고 아득히 가라앉은 누우런 방.

번쩍거리는 하이엔드 오디오라면 좀 그렇겠지?

손때 삼삼하게 앉은 고물 나발 앞에 이리저리 삭아빠진 판때기들 발 끝으로 밀어놓고

침침하게 가라앉은 흐린 날에 흐린 알전구 뎅겅 노랗게 달아놓고

이불 대충 구겨서 한 쪽에 밀어두고 삐딱하게 누워서 입꼬리에 피다만 꽁초도 하나 물고 들으면 좋지.

핑게 좋은 술 한 잔으로 핏줄 속의 알콜 농도를 적당히 높여두면 감상에 더욱 도움이 되고말고.

짓무른 눈자위 축축하게 적셔서 들어야지. 듣다보면 어느 새 언뜻 이빨 빠진 쳇 베이커랑 마주앉아

엣다 너도 한 잔, 그럼 나도 한 잔.

주고 받고 수작하다보면 늬가 난지, 내가 뉜지, 고만 쑤세미처럼 헝클어지고

세수도 하지말고 발도 씻지말고 턱 밑에 깎지 못한 수염도 한 사흘 길러두면 더 좋지.

내가 반드시 그리 해서 이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뭐 어쨋거나 나는 그 노래때매 적잖이 망가지고 말았다니까.

그 노래는 냄새가 너무 진해서, 진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서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게 뭔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 거야.

희거나 검거나 가거나 말거나 울든지 말든지...

그러게 내 어깨 위에 얹힌 건 대체 무엇일까.

내 가슴 속에 쑤셔 박혀서 밤낮으로 툭탁거리는 저 시커먼 덩어리는 대체 또 무엇일까.

낡은 세월에 낡은 것들 사이에 끼어 박혀서

도리 없이 밤 낮으로 낡아가는 녹슨 베어링 같은 것인지 뭔지 말이야.

마이 훠니 발렌타인.

원 세상에 별 지독한 노래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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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는 이 녹음을 마지막으로 보름 뒤에(한 달 뒤라는 말도 있고) 네덜란드의 한 여관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재즈에는 문외한이라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입장이 안되지만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작은 정신적 손상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정말로 삶에 대한 어떤 미련이나 애착도 다 놔버리면 저렇게 지독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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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징거' 이외의 바그너를 나는 이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차이코프스키도 잊어버려도 상관 없습니다.

그는 내가 13세때, 즉 사춘기에는 중요했지요.

그렇긴 해도 그의 교향곡 5번과 6번을 안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연주만 좋다면 말입니다. 즉, 차이코프스키를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

놓았을 뿐이지요. 저 아래쪽에 말입니다.

베토벤의 소나타 한 곡보다도 모짜르트의 音符 서너개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말해 온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것은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베토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베토벤은 갈등이 많은 사람이었죠.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도 느껴집니다.

그것이 그에게 그다지 호감이 안 가는 점입니다.

그는 음악의 위대한 건축가였지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으리만큼.

집을 세우는 식으로 교향곡을 구성했던거지요. 훌륭하게 만들었지요. 단단하기 이를데 없이.

그러나 모짜르트는 단 하나의 작은 테마로 어느새 사람의 마음을 채워

버립니다. 슈베르트도 그렇습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의 순수성으로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하는 것입니다.//

-A.루빈시타인.- /페릭스 슈밋과의 대담 중에서. (스테레오뮤직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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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A.루빈시타인 영감님,

나는 마이스터징어 이외의 바그너도 더러 듣습니다.

물론 차이코프스키를 잊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교향곡 뿐 아니라 그의 많은 작품들을 즐겨 듣습니다. 특히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이나 오이스트라흐와 오먼디가 겨루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하도 들어 이제는 지겨워질 만한데도 불구하고 요즘도 더러더러 손이 자주 가는 음반입니다.

물론 나는 지금 사춘기가 아닙니다. 해만 지면 눈앞이 침침한 중년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길고 긴 베토벤의 소나타 한곡을 정신없이 빠져들어 들을 때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모짜르트의 음부 서너개를 지겨워하며 콧구멍을 후빌 때도 있습니다.

나 역시 베토벤이 갈등이 많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은 있습니다. 삼 사십년 듣다 보니 그래도 청맹과니는 아닌 듯 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브람스는 그보다 더 갈등이 많은 걸로 느낍니다. 브람스가 지금 내 옆에 있다면 머리 한 대 쥐어 박고 '좀 심풀하게 살아라!'며, 매우 진지한 충고를 남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영감님처럼 호감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오히려 친밀감을 느낍니다. 때때로 나의 곰팽이 낀 가슴팍을 열어 제껴서 나를 대변해 준다는 느낌 때문이지요.

물론 모짜르트는 아름답습니다. 나도 그의 수많은 음악들을 사랑합니다. 어느 때인가는 아직 접해 보지 못한 모짜르트의 음악이 못내 아까워서 그걸 모두 섭렵해 본답시고 딸리는 깜냥에 아둥바둥 발사심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슈베르트도 그렇습니다. 나는 요즘도 그의 녹턴을 들으면서 뼈마디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은 몽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음악의 '순수성'만이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고집하지는 못합니다.

우아한 모습으로 고상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야 갑남을녀 장삼이사 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만, 나는 때로 울부짖고 싶기도 하고 때로 천박해지고싶기도 합니다.

바하의 깊음을 늘 흠모하지만 여행길, 시골 싸구려 다방에서 듣는 유행가 자락에도 때로는 눈물 짓습니다. 아마도 그대와 같은 경지에 오르지 못한 범부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피아노도 못치고 악보도 능숙하게 읽지 못하며 당신처럼 나이가 많이 들어보지도 못했고 당신만큼 인생의 경험도 썩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럴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죄송하지만 나는 수삼년 전에 당신이 연주한 여러 음악가의 음반을 다수 팔아먹고야 말았습니다. 어느새 중년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이제 '쇼팽' 이외의 당신이 필요하지않은 때문이지요. 미안합니다.

새옹 드림.

/추신:

그래도 스크로바체프스키가 지휘한 영감님의 쇼팽 협주곡 1번은

내가 죽을때까지 팔아먹지 않을 구원의 판때기이니 너무 섭섭해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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