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
있는 듯 없는 듯 윤곽이 희미하던 팀파니가 어느 날, '떵!'하고 선연하게 떠올라 가슴을 친다.
오디오 시스템의 어느 일부분을 개선했을 때 흔히 느끼는 일이다. 때로는 매끈 일변도이던 바이올린이 흔히 쓰는 말로 '송진가루가 풀풀 날리는' 현장감 넘치는 찰현음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또, 전혀 존재가 느껴지지 않던 악기가 저기 혼란한 오케스트라의 뒤편에서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나 가슴을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오디오라는 괴물에게 자진해서 납공을 하기 시작하는 단초가 된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끝없는 소리의 세계로 빠져들어서 천하의 명기를 찾아서, 또는 절세의 매칭을 찾아서 거의 구도자적인 고행의 길을 자초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적당한 곳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절묘한 타협안을 고안해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별로 동요 없이 고요히 조촐한 기기에서 나는 소리로도 쉽게 삼매경에 잠겨 들기도 하고.
'음악은 안 듣고 뭔 쓸 데 없는 돈지랄이냐'
'저걸 소리라고 듣고 있는 거냐, 귀에 말뚝 박은 막귀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삿대질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리지만 일단 소리가 명징해지고 해상도가 증가하면 음악적 감흥도 어느 정도 증가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한계의 모호함에 염증을 느끼고 일찌감치 자신의 범위를 찾아 안주하는 현명한 이들도 많다.(개인적으로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오디오에서 현장음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라, 어리석은 생각 집어치우고 연주회장이나 부지런히 댕기라는 대단히 엄숙한 말씀도 있다.
뭐, 당연히 옳은 말씀일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가급적 대도시 인근에 거주해야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하다는 현실을 망각한 망언으로 이 나라의 지역적 문화적 차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사는 촌사람들에게 욕 얻어먹기 딱 알맞을 잘난 척이다.
또, 오디오는 오디오다. 현장음과 비교치 말라, 그것은 또 다른 소리의 세계다. 이런 말씀도 있다.
어느 말씀이 구극의 진리인지 나는 잘 모른다. 어쩌면 이 두 세계 사이에는 구극의 진리라는 것이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소리와 음악의 혼돈 속에 갇혀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한 삼십년 넘게 음악이랍시고 끼고 살다보니 나름대로 할 말은 많다. 그러나 할 말이 많다고 해봤자 재미없는 자기변명에 합리화가 거개인 그렇고 그런 백인백색의 중구난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꺼내 놔 봤자 본전도 못 건지고 얼른 주워 담을 객소리.
굳이 어거지로 결론을 내려 본다면, 좋으면 좋은 대로,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그 시간, 그 장소, 그 상황에서 좋은 감동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게 대충 버무린 나의 생각이다. 정답이 없거나, 있다 해도 답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박쥐같은 생각일 수도 있고.
칼날 같은 핀 포인트 맞춰놓고 꼭지점에 망부석처럼 앉아서 듣든지, 대구마구 양껏 볼륨 올려놓고 마당 쓸면서 듣던지 그건 각자의 몫이다.
돈지랄이다 싶으면 조촐하게 갖춰 들으면 될 일이고 일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무엇이다 싶으면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덤벼 볼 일이고.
다만 옆집 사람이 제 배짱에 안 맞다고 삿대질은 마시라는 거다. 다들 하시는 말씀대로 궁극의 목적은 음악을 듣는 데 있는 것이지 상대방을 꺾어서 던져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까.
진공관이 좋다 티알이 좋다 갑론을박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시디가 좋다 비니루가 낫다 옥신각신도 잊을만하면 또 올라온다.
나는 마구 듣기만 할 줄 알았지 이론에는 맹탕인 청맹과니라 그 논쟁(언쟁?)들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기에 몰입하지 말고 음악을 듣자는 근사한 말씀들과는 달리 같은 문화적 입맛을 매개로 모여든 공간에서 재생장치와 소스에 대해 증명하고 반박해야 할 무슨 이론과 주장이 그렇게도 사납고 드센지 곁에서 얼쩡거리며 구경만 하다가 앗 뜨거라 싶어서 빠져나오곤 한다.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무찌르고 나서 듣는 음악은 더욱 더 감동적일까?
육군 졸병 때 손바닥보다 작은 산요(소니?)라디오에 이어폰(요즘 나오는 근사한 몇 만원, 몇 십만 원짜리 전문가용 스테레오 이어폰이 아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한 개짜리(only one ear !!!) 상아색 백 원짜리 싸구려, 그야말로 이어폰이ek.)꽂아서 야간 입초 때 주번 사관의 눈을 피해서 듣던 에프엠 방송과, 오디오쟁이들의 집을 방문해서 듣는, 그 지극정성으로 다듬고 맞춘 그들의 소중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입 음반들의 소리는 그 감동의 격이 다른 것일까?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
그 때와 비교하자면 아마도 순수하게 음악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경우는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 더 좋으면 더 좋은 것이다, 뭐 두리뭉실 그런 생각이겠지.
오로지 희미한 라디오 소리에서도 가슴 설레고 콧마루를 비비던 열정은 식은 듯해서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음악적(?.. 마땅한 수식어의 고갈이다....)으로 타락한 지경에 이르렀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때와 비교해자면 욕심이 좀 더 많아졌다고 할까. 아님 좀 뻔뻔스러워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만으로는 안 돼, 이제 난 좀 비싸졌거든? 내게 좀 더 깊은 감동을 바란다면 한 결 나은 품질로 승부를 걸어 보란 말씀이지.'
한 마디로 음악과 오디오에 바라는 것이 많아진 것이겠지. 물론 음악에 대한 생각이나 관점, 이런 것도 그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본 글귀를 여기 그대로 대입한다고 그리 무리는 없을 듯.
'아는 만큼 들리고 지금 들리는 것은 그 때와 같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