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년 전쯤이었습니다. 밤낮으로 미친 듯이 피아노 음악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시절 다 썩은 고물딱지 오디오에서 나오는 그 멍청한 소리로도 피아노는 무작정 좋았으니까요. 이유는 없습니다. 아니, 모릅니다.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기억이 없으니 그냥 이유는 없는 걸로 해 놓지요. 찾아 내봐야 그럴싸한 사연이 있을 것도 아니고.


그 거대한 기계 덩어리. 수많은 나사와 역시 수많은 기어, 경첩, 희고 검은 많은 스위치(?) 그리고 자동차의 그것만큼 많은 페달. 튜닝을 하기 위해서는 거의 자동차 바퀴 빼는 연장 비슷한 걸 들고 덤벼야하는 그 괴상하고도 거대한 악기. 그 엄청난 무게의 덩치가 어쩌면 그렇게 신묘한 소리를 내는지. 그 복잡하고 난삽하기 짝이 없는 연결 장치를 거쳐서 나는 소리가 어쩌면 사람마다 다르고 손가락마다 다른 소리를 내 주는지.


겉보기에 가장 비인간적인 악기. 악기라기 보다는 가구에 가까운 물건.
직접 손가락으로 현을 긁거나 누르는 것도 아니고 입 냄새 나는 바람을 불어넣어서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닌 것이.


뭣에 홀린 듯이 닥치는 대로 사들였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나왔던 라이센스 음반은 거의 휩쓸어 샀을 겁니다. 물론 난해한, 또는 나로서는 불가해한 음악들은 빼고.


하여튼 무작정 사 놓고는 무작정 들어댔지요. 종래엔 음악과 곡명과 연주자들이 뒤섞여서 머릿속이 퉁퉁 불은 잡탕이 되어버렸고.
사람이건 기계건 용량을 초과하면 탈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급기야는 곡을 듣고 곡명이 생각나지 않으면 안달복달하는 강박증 비슷한 증세가 생겼었지요. 물론 지금은 완쾌 되었으며 이제는 오히려 뭔가를 알려 하면 매우 강력한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눈꺼풀이 저절로 덮이는 부작용까지 생겨버렸지만. 눈감고 무작정 듣고 무작정 좋아할 줄 밖에 모르는 까막눈이...


그래서 어쩌다 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면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지껄입니다.
'이론적인 배경에 초연한 거시기지. 음악은 음악일 뿐. 난 그저 들을 뿐이고.‘
어떻습니까. 조금 거시기 하긴 하지만 어물쩡 둘러대는 솜씨는 쓸 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좀 켕기는 것이 일찌감치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서 어찌어찌 그런대로 쓸만한 이론적 지식 같은 것도 같이 습득해 놓았더라면 하는 만시지탄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저 어디 가서 풀 좀 세우려면 다소 복잡하고 아리송하게 들리는 전문용어들이 딱 제격인데.


하여간에 피아노 입니다.
몇 해가 지나자 거의 미친 듯이 파고들던 피아노가 어느 순간에 좀 뜸해졌습니다. 피아노는 그렇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내게 다가 왔다가 또 그렇게 별다른 계기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이유 또한 모릅니다. 변덕일 수도 있고 용량 초과로 탈이 났었는지도 모르고.
그 대신 그 자리를 현이 메꾸었습니다. 하지만 현은 피아노가 그러했던 만큼 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있던 만큼에서 조금 더.


현재까지 내가 오디오를 세팅할 때 다른 것보다 조금 순위를 먼저 두는 첼로도 그렇고, 비올라는 그 코맹맹이 같은 비음(?)의 매력에 많이 끌리지만 판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애를 먹었습니다.
서울이나 그럭저럭한 큰 도시에 사시는 혜택 받은 문화인들은 잘 이해가 안 되실지 모르지만 그 당시 지방 소도시, 거기다가 서울에서 매우매우 멀리 떨어진 한반도 끄트머리에 처박힌 소도시의 음반시장은 생각 이상으로 열악했습니다.


원판 구경은 언감생심, 라이센스 음반들도 그저 서울, 부산 등지의 도매상에서, 그것도 반품이 안 될 만한 그렇고 그런 뻔한 레퍼터리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좀 별난 음반 하나 구할라치면 음반 가게 아가씨의 비위 맞추느라 손바닥에 지문이 닳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서울 부산 나들이 때면 적금 찾아 음반 가게 순례가 큰 행사였지요.
(인터넷은 커녕 컴퓨터란 물건조차 낯설던 고랫적 이야기입니다. 쓰다가 생각해보니 격세지감이 유난하네요.)


그러니 촌구석에 사는 게 죕니다. 그래서 아직도 내 판꽂이에는 쓸 만한 엘피 원판이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 겨우 수 십장 꽂혀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도 육, 칠십 년대 불법 해적 땡판에 비하면 라이센스라도 감지덕지이긴 하지만.


하여간에 또 피아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피아노가 좀 시들해진 건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 어설프나마 조금씩 바뀌었던 오디오가 거기 일조를 한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까닭도 있었겠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고.
그러다가 또 이 세월 저 세월 가는 사이에 피아노 음악은 내 장서 한 귀퉁이에서 그만 슬슬 찬밥이 되어갔습니다. 닥치는 대로 사재기를 해다가 마구잡이로 듣던 시절은 홀라당 다 까먹고 이제는 한 해가 지나도 손 한번 안가는 판이 다수가 되어 버렸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 당시 좀 잦은 편이던 이사 때문에 그놈의 비니루 판들에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한참 쪼들리고 핍박받던 수난기라 그것이 현금화 될 수 있다는 데 전기불이 번쩍하기도 한 거지요. 쓸모없는(?) 것들을 왜 보듬고 앉아서 사서 고생인가 하는 '대오각성'을 하고야 만 것입니다.
그래서 몽땅 쓸어냈습니다. 한나절을 퍼지르고 앉아서 퇴출 반들을 선발했습니다. 그리고는 선택받지 못한 판들은 내게서 떠나갔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독한 놈들은 이빨을 박박 갈면서. 박스에 담겨서, 뿅뿅 비닐포장지에 둘둘 감겨서, 노끈에 묶인 채로...


그렇게 단 돈 몇 푼에 눈이 어두운 주인에게 버림을 받고 어디론가 몽땅 팔려 가버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절반 가까이 휑뎅그레 비어버린 판꽂이의 형해를 보고 싶지 않아서 일부는 분해해서 불쏘시개로 꺾어 넣어버렸고 일부는 지금도 부엌에 세로로 물구나무를 서서 후라이팬, 자루달린 냄비들 등, 여러 가지 주방기구들의 수납 가구로 맹활약을 하고 있지요. 엘피 꽂이라는 조금 특이한 사이즈 때문에 갖가지 기능으로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의 지혜이긴 하지만 따라하지는 마시길. 피눈물 납니다.
아무튼 그 퇴출반들 중에 피아노가 삼분지 일은 넘었을 것 같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좀 더 흘렀습니다. 당연히 오디오도 조금씩 바뀌었겠지요. 그리고 음악에서의 편식도 조금씩 평정이 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요즘에 들어서 그 때 피눈물 흘리며 쫓겨나간 판들이 조금씩 되짚히기 시작했습니다. 발등을 찍고 싶을 만큼 아깝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이 이렇듯 간교하고 바람에 나부끼듯 가볍다는 말인지.


오늘 저녁 무렵 길렐스의 발트시타인을 들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듣는 길렐스의 발트시타인..... 컨디션이 웬만한 오디오가 쏟아 내주는 피아노 소리가 방바닥에 쫙 깔리는 쾌감에 사라진 판들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슈베르트 소나타들, 사티, 모짜르트 소품들, 군소 연주자들의 쇼팽, 일등만 남기고 쓸어 내버렸던 바하의 건반악기 음반들, 베토벤의 바가텔....


켐페인...................밉고 볼성사나운 자식이라도 덜렁 내다 버리지 맙시다.
입양이 잘 되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고약한 부모 만나 흠집투성이가 되어 있노라면 생부모 원망이 하늘을 찔러 꿈자리까지 사나워질지도 모르지요. 밉더라도 깨끗이 입혀서 잘 보관합시다. 긴 세월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효자노릇 한 번 안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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