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가의 기법을 듣는 순간 음악이 문학적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래전 어느 LP 재킷 뒷면에서 읽었던 글인데 아직도 간혹 생각이 난다. 정확한 문장이 저랬던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튼 대강 그런 뜻으로 쓰여 진 말인 듯하다.
'문학적 상상력' 이라는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문장을 썼지만 이것은 내가 느끼기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 음악에 자극된 감수성이 무작위로 건져 올리는 과거 자신의 궤적이나 상상력이 계통 없이 혼연, 조합된 막연한 느낌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말대로라면 푸가의 기법을 들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는' '무아의 경지' '열반'  뭐 그런 상태가 된다는 걸까? 잘못 이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일단은 그런 것 말고는 딱히 어떤 상태인지 가늠해 보기가 힘 든다.


나의 경우, 어떤 곡을 듣기만 하면 한없이 청명한 하늘과 싱그럽기 짝이 없는 풀밭이 정확하게 수평으로 나누어진, 그리고 꽤 멋지게 보이는 나무 하나가 달랑 바람에 휘감기며 서 있던, 오래 전 살던 방의 한 쪽 벽에 걸려 있던 달력 그림이 줄기차게 생각난다든지, 슈베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몽롱한’ 환상곡 바 단조의 초입부를 들으면 어쩐지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유년기의 어느 봄날 언덕 위로 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서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일로 혼자 울면서 풀만 집어 뜯고 있던 그런 기억이 꼭 떠오른다든지, 이런 저런 기억과 상념의 연상들이 이른바 ‘문학적 상상력’이 아닌가 짐작해 보고 있다.
주로 상쾌하거나 즐거운 기억보다는 어쩐지 우울하고 침침하고 외로운 기억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떠들썩한 기억보다는 고요하고 적막한, 하여간에 어떤 음악에는 어떤 류의 기억들. 이런 등식이 성립되는 경우가 많다.


하긴, 또 이런 경우도 있다.
늘 듣던 곡인데도 연주자를 바꾸어 들었을 때 그 연주를 비교하자 치면 마냥 '소리'만으로 음악을 듣는 경우도 적잖이 있기는 하다.
그것 아니라도 대부분 바하 전후의 음악을 들을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소리, 주로 작곡한 이가 주장한 선율과 연주자의 역량에서 배어나오는, 단지 '소리가 주는 어떤 느낌'을 즐기면서 그냥 듣는 그런 경우도 더러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푸가의 기법을 듣는 순간에 다가오는,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깨달음과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여간 뭐가 뭔지 정확한 의미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 때 성악은 가사의 내용으로 인해서 그 이상의 상상력을 제한해버린다는, 그래서 그 가사 내용 이하의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연상 작용만큼만 아름다운, 그래서 질이 좀 떨어지는 음악이라는 예단을 가지고 음악을 들었던, 좀 시건방진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것 역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섣부른 금 긋기였다고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


큰 놈이 어렸을 적에 녀석과 잠자리에 들면서 자주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그 곡을 들으면서 아무거나 생각나는 걸 서로 이야기하는 놀이를 꽤 오랫동안 했었다. 해 보면, 듣는 곡에 대한 선입견을 이미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는 늘 한다는 것이 대부분 선율에 이끌려 나오는 이런 저런 풍경이나 서정이나 정경이다.
반면에 어린놈은 어느 때는 귀찮은 듯이 아주 간단하게, 또 어느 때는 지루할 정도로 무슨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데, 듣고 있노라면 대부분 낄낄 웃음이 나오는 그런 유치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랑 놀면서 다툰 이야기라든지 어디 여행을 가거나 놀러 가서 보고 들었던 이야기에 자의반 타의반 윤색을 한 이야기들, 그리고 동화에 나올법한 이야기들의 짬뽕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그 놀이는 꽤나 오랫동안 꾸준히 했었다. 나 또한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노력했었고. 어린놈이 나름대로 서양 고전음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며 통로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지금에야 뭐 내가 듣는 음악들은 콧방귀도 안 뀌고 힙합에다 알앤빈지 뭔지 지 혼자 잘났지만.


다시 푸가의 기법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글쎄, 그 이야기가 오로지 화성이나 멜로디의 유희만으로 음악을 즐기는 것이 더 고급하게 음악을 즐기는 방법이라는 뜻이라면 나는 선뜻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물론 소리 그 자체에 감동받아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부동자세로 끝까지 듣게 되는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리고 솔직히 그런 경험은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문학적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라는 문장의 미묘한 뉘앙스는 그것이 좀더 상급의 무엇이라는 주장인 듯해서 그다지 유쾌하지가 않다. 물론 일단은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그리고 그 사람은 글의 끝머리쯤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미완성 된 열아홉 번 째 마지막 곡의 끝에서 별안간 뚝 끊어지는 마지막 음표 뒤에 이어지는 정적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글쎄. 지금 생각해봐도 이건 좀 과장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뭔가 좀 쓸쓸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긴 했지만 아이고, 그렇다고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까지 느끼게 될까 싶긴 한데,
오늘도 현악 사중주로 편곡된 푸가의 기법을 듣다가 그 마지막 곡에 대한 해설이 생각나서 또 한번 느껴보려 잔뜩 짓누르고 기다려봤지만 뭐 별 무신통이었다.
아무래도 그 해설가가 너무 '문학적'으로 근사하게 포장을 했거나, 아니면 내가 가진 음악적 감수성이나 내재율이 푸가의 기법 같은 곡에서는 족탈불급으로 턱없이 부족하든지 무슨 사단이 있을 수도 있겠다. 뭐 그렇다고 음악 듣고 억장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내 발등 찍으며 장탄식을 할 노릇도 아니고.


연주회장에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한 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워낙 고답한 생각이 없지 않은 문화적 울타리를 갖고 있는 분야인지라, 무턱대고 '개혁적인 코드'를 갖다 들이밀며 혁명의 깃발을 흔들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하지만 그 때 그 문제로 가까운 지인과 의견 상충으로 평소 그리 생각치 않았던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개운치 않은 느낌마저 들었던 기억을 되새겨 보면서 서양 고전음악이 연주되는 연주회장에서의 어떤 '예의'의 경계에 대한 생각으로 이것저것 연결 되지 않는 뜬금없는 생각들이 줄을 이어 따라 나왔다.


그래서 혹, 그 예절이라는 것이 어떤 류의 '격리감'이나 작위적인 '청결감' 같은, 은밀하게 제한된 공간에서만 거래되는 무슨 '선민의식'같은 것들이 아니기 만을 바라는 마음에서 주제넘게 한 마디 꺼내 본 것이지.


고전음악은 그것대로 좋은 것이로되 고전음악을 향유할 줄 안다는 것이 즐거움을 넘어서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을 은연중 업신여기는 도구로 사용되거나 귀부인의 목이며 가슴에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치장 된 브로치나 목걸이처럼 자랑거리나 과시용의 장식품으로 저자에 유통되는 것은 음악, 또는 예술 전반보다 명확하게 우위에 있어야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 사건은 사건 그것대로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막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냐고?
늘 그렇듯이 내가 말 해 놓고도 도무지 정리가 잘 안되긴 하지만, 이야기 끝에 따라 나오는 걸 보면 어디선가 맞닿은 곳이 있기는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서양 고전음악을 듣는 방법이나 태도 같은 곳에서 가끔 보이는 그 쪽 계통 사람들의 묘한 선민의식 같은 것들과 푸가의 기법을 이야기 했던 그 해설가의 요령부득의 해설이 어쩐지 색깔이 비슷해 보여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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