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마감시간입니다.


열한시가 넘었는데 집에 안가고 대체 뭘 하는지.

콧구멍만한 찻집 주인에게도 사생활은 있는 법이지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십여 년 전 어느 해 초겨울 어느 때. 남도의 어느 소도시 지방 대학의 캠퍼스 후문 앞. 저녁 시간에만 시간제로 뛰는 아르바이트 여학생도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간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 이 손님들은 도무지 나갈 생각을 안 합니다.


구석자리 웅크리고 앉아서 서로 열심히 상대방의 신체를 탐구하며 도무지 나갈 생각을 않는 마지막 손님에게 일부러 커피 잔을 덜그덕 덜그덕 소리 내어 씻는다든지, 설거지 하던 사이폰 스프링을 일부러 그 쪽으로 튕겨 날려서 찾는 척 옆에서 서성거린다든지 창문 열고 환풍기 켜 놓고 청소기 돌리고 근 삼십 분 가까이 있는 눈치 없는 눈치를 다 줘서 겨우 내 쫓고는 셔터를 내리고 간판 불을 껐습니다.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남녀상열지사는 참 아름답고도 쓸쓸한 일이지만 어지간만하면 때와 장소를 좀 가려서 해주면 좋으련만.


손님이 나가자 나는 하는 체 하던 청소를 얼렁뚱땅 마친 뒤 난로 앞에다가 소파 세 개를 붙인 다음 느긋이 드러누워 게으름을 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종일 벌겋게 달아올랐던 갈탄 난로의 열기가 식어 으스스 추워지기 전까지 순전히 나만을 위한 복된 시간을 가질 참입니다.


아, 물론 이 시간쯤 되면 얼추 어슬렁거리고 찾아와서 손끝에 닿는 맑고 차가운 소주잔을 예찬하며 나를 유혹하는 사탄의 자식들이라든지, 아니면 초저녁부터 마감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바에 죽치고 앉아서 커피 한 잔 값으로 저녁 한나절을 낭비하면서 되잖은 음악론을 거품 물고 지껄이다가 간판 불이 꺼짐과 동시에 쩝쩝 은근히 입맛을 다시며 인근 모퉁이 포장마차의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닭똥집이나 시들어빠진 쑥갓 구겨 넣은 뜨거운 우동 국물을 찬양하는 단골손님들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오늘은 다행히도 그 원수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아마도 초저녁부터 종강 기념으로 망태가 되어서 학교 앞 막걸리 집 탁자 위에 안주와 함께 어질러져 있든지 밀린 리포트 때문에 빈 머리 채우느라 도서관 로비에서 줄담배나 뻑뻑 빨아대고 있을게 틀림없지요.
그 원수들이 없으니 어쩐지 조금 허전한 기분이긴 하지만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내 스스로 깨고 사탄의 유혹을 자청할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사탄은 내 속에도 몇 마리 들어 있지요. 그것이 다만 그 며칠 사이에 그동안 임시변통으로 쓰던 양철쪼가리 싸구려 앰프를 내다 버리고 개비한 근사한 파이오니아 리시버 때문에 뒤집어 진 리비도의 서열에 눌려있을 뿐이지만.
게다가 이 녹턴형 리시버의 시꺼먼 창에 새파랗게 밤하늘 같이 푸른 문자색은 그것만으로도 그냥 예술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자태만으로도 내 마음을 빼앗는 마물이지요.


이걸 가져와서는 십만 원은 받아야겠다는 오디오쟁이 후배를 얼르고 달래고 협박하다가 공짜 커피를 수시로 제공한다는 미끼를 던진 뒤에야 근근이 만 원쯤 깎아서 사고 보니 주머니는 당장 허전해졌지만, 그 댓가로 벙벙거리던 피아노 소리는 댕글댕글하게 바뀌었고 떡덩어리처럼 뭉텡이로 나오던 오케스트라는 가닥가닥 풀어헤쳐져서 제자리를 잡으니 며칠 몇 끼 굶은 들 뭐 대수겠습니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


스위치 박스로 가서 실내등을 대충 끄고 난로 옆의 작은 전구만 몇 개 켜 두었습니다. 아직도 조금은 발그레 하게 달아있는 갈탄 난로에 화목 조각을 두어 개 더 던져 넣고 나면 물 날은 두툼한 쥐색 카페트 때문인지 이런 때면 실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아하. 조용한 밤에 들으니 역시 별 소리가 다 납니다. 조용하기만 한 줄 알았던 듀얼 1219의 아이들러 구르는 소리가 나직하게 우르릉거리고 이내 그 비할 수 없이 당차고 선명하고 맑고 매끄러운 파이오니아 리시버의 맑은 소리가 텅 빈 홀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오디오를 바꾸고 난 뒤 그 결과가 만족스러울 때의 희열은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참 이해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합니다. 열락이지요. 아무튼 그렇게 한 밤중의 복된 시간은 조금씩 흐르고 종일 서빙하느라 지쳐버린 나는 음악에 취해 있다가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었나봅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요?


머리끝이 쭈뼛 섰습니다. 졸다 깨서 헛소리를 들은 건가요? 아닌데?
아니 대체 누가 어둑한 구석에서 중얼중얼 흥얼거리는 건지. 내가 조는 사이에 술 취한 주정뱅이가 들어 와서 웅크리고 앉은 것도 아닐 테고 아니면 어떤 간 큰 도둑놈이 장물 챙겨놓고 콧노래를 부른단 말인지. 내가 필시 잠이 덜 깬 거지. 그럴 리가 있나.
화들짝 일어나서 불을 다 켰습니다.
홀에는 아무도 안 보입니다. 주방 뒤의 커튼을 열고 방안을 살펴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저 윗자리 책장 있는 원탁 쪽을 봐도 아무도 없네요.
그럼 혹시 화장실에서 귀신이 쭈그리고 앉아서 만두를 주워 먹고 있는 건지. 화장실도 말끔히 비었습니다. 그럼 대체 아까 그 소리는 뭐지요? 아차! 또 들립니다.
저게 지금 피아노 소리를 따라 흥얼거린다는 말이지요. 이게 대체 뭔 조화인지.


나는 그만 부리나케 외투를 집어 들고 찻집을 나서버렸습니다. 누구든지 내 역성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야 할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무서웠거든요.
다행히도 찻집 앞 아파트 모퉁이 포장마차에는 후배 녀석 하나가 소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막 술심이 오르기 시작하는 녀석을 다짜고짜 뒷덜미를 잡은 채로 끌어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술 마시다 졸지에 끌려나온 녀석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뭔 귀신이 씨나락 까먹고 앉은 이야기를 하냐고 핀잔입니다.
이런 나쁜 놈.
나만 하니까 그래도 귀신이랑 용감하게 싸워 무사히 탈출을 한 거지 너 같으면 그 자리에 까무라쳐서 지금쯤 거품 물고 있을 거라고 허풍을 쳤습니다.


못내 가기 싫다고 주리를 트는 후배를 얼르고 달래다가 결국은 해결사 노릇을 해주면 돼지 갈비로 근사하게 한 잔 사겠다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약조를 하고서야 후배를 귀신 밥으로 삼아 노래 귀신이 중얼거리는 찻집으로 끌고 들어갔지요.
푸근하고 정겹던 내 찻집은 그 날 저녁 잠시 사이에 귀기가 흐르는 무시무시하고 어둠침침한 귀곡산장으로 변해 있었고 화목이 다 타버린 난로는 그 사이에 거의 식어서 어슬한 냉기까지 감돌고 있었습니다. 내버려두고 갔던 턴테이블에서는 다 돌아간 톤암이 제자리걸음을 하느라 직직거리는 소리만 나오고 있었고.


그제서야 가만 살펴보니 내가 참 놀라기는 놀랐던 모양으로 내실 방문은 열어 놓은 채로 커튼은 말려서 한쪽으로 밀려있었고 화장실 문은 훤하게 열린 채 의자까지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었네요. 아이고 망신스러워라.
일단은 그래도 귀신 밥을 하나 데리고 왔으니 조금은 진정이 되어서 다소 여유를 찾았습니다. 톤암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대충 정리를 한 다음 후배와 조용히 앉아서 또 다시 그 귀신이 중얼거리기를 기다렸지요. 하지만 이게 뭔 눈치를 챘는지 이젠 끽 소리도 없습니다. 한동안 기다리던 그 녀석은, 거봐라 대명천지에 무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냐며 핀잔이었고 나는 졸지에 헛것을 보고 자지러진 겁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가만 다시 생각을 해보자. 귀신이 설마 나보다 못생긴 후배를 더 무서워해서 내 뺀건 아닐 테고, 나하고 놀자 하다가 내가 달아나니 심심해서 가 버린 건지?
잠시 궁리 끝에 언뜻 생각이 난 것이, 옳거니! 그 귀신은 피아노 소리를 따라 중얼거렸었지. 그러니까 내려놓았던 톤암을 다시 음반 위에 올리고 음악을 다시 흘려보자니까요. 그럼 혹시 그 귀신이 또 찾아올지도 몰라요. 가만, 떠들지 말고 잘 들어보라니까!


..............!!!!


거 봐! 들리지!
드디어 사라졌던 중얼거림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자 그 녀석도 아연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윽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귀신을 찾아내기 시작했는데, 모가지만 달랑 남은 달걀귀신이건 스르르 치마 자락 미끄러지는 처녀귀신이건 뭐가 보여야 찾지. 형체는 없고 소리만 중얼거리는 귀신을 무슨 수로 찾는다는 건지.
뭔가 찜찜한 가운데 홀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이게 혹시 바하의 유령은 아닐까, 내가 몹시도 음악을 사랑하여(....) 구천에 떠돌던 바하의 유령이 지가 만들어 놓은 피아노 소릴 듣고 얼른 날아와서 내 찻집 구석 어느 한켠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우울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별 황당무계한 추리까지 하고 있었는데,


눈치 빠르신 분은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그건 음반에 녹음된 피아니스트의 중얼거림이었고 그 판때기는 굴드의 골드베르크 연주였다는 싱거운 이야기입니다.
아니, 원, 그 괴팍 맞은 굴드의 괴상한 연주 버릇도 얄궂기는 하지만 왼 종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대던 음반인데 왜 그때서야 그 소릴 들었냐고요?
그거야 낮에는 장사한다고 분주하고 밤에는 한 잔 하러 나간다고 바쁘고, 그리고 음악이라고 맨 이 음반만 들어대는 것도 아니니 그렇지요.
그래도 그렇지 아닌 밤중에 그런 등신같은 난리 법석이 어디 있냐는 말이지요.


사실 뭐 그 음반도 그렇고 프랑스 조곡도 그렇고 가만히 귀 기울여 듣다보면 굴드의 중얼거림이 더덕더덕 뭍어 있지만 바꾸기 전의 고물 앰프로 들을 때는 잘 안 들렸어요. 그러니까 그 귀신 소동의 범인은 이 잘생긴 파이오니아 리시버라는 얘기입니다.
때마침 기말 시험 무렵이라 술친구들이 안 찾아오고, 밤은 이슥하여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게다가 며칠 전에 개비한 앰프를 제대로 들어본 첫 날이었고, 이런 게 우연히 딱 하나로 맞아 떨어져서 그야말로 ‘아다리’가 된 거였지요 뭐.


그 난리법석의 주인공인 잘생긴 파이오니아 SX 1500 TD라는 리시버는 내가 몇 년 뒤 찻집을 그만두고 어찌어찌 대충 장가를 들고 난 후 내 방에서 양껏 사랑을 받다가, 사는 것이 허랑하여 고향을 떠나 동해안으로 이사를 와서까지 수 년 동안 깡통 출력석 하나 갈아 준 것 말고는 별 고장 없이 내게 견마지로를 다하다가, 나 때문에 이 몹쓸 길로 접어들어 지금은 럭스만 앰프에 프로악 스피커 매어서 듣고있는 동생의 입문기로 시집갔다가, 그럭저럭 천수를 다하고 어느 고물상으로 실려 갔지요.


그래도 스물 네 시간 돌려대는 찻집에서 몇 년을 버티다가 오갈 데 없는 백수 손에서 아침부터 밤중까지 또 몇 년을 돌려대고, 어지간히 오래 버틴 셈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쓴 걸로 치면 수십 년은 쓴 셈 일겁니다.
지금도 그놈과 비슷한 걸 보면 그냥 괜히 하나 가지고 싶어서 침을 꿀꺽 삼키지요. 나의 그 구식 일제 리시버들에 대한 애정은 어딘가 좀 맹목적인 데가 있어서.
미국제나 유럽제들도 이뿐놈들이 많지만 크게 호화롭지도 않으면서 은근히 아름다운 일제 구식 리시버들이 나는 하염없이 좋아요. 거기다가 문자 창이 새까만 녹턴형이면 그만 나는 무장해제가 되고 맙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놈을 하나 만난다면 하나 끼고 살고 싶은데 운이 안 닫는지, 아니면 워낙에 나이가 많은 놈들이라 만나는 놈들마다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은 일생 보듬고 갈만한 놈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틈만 나면 산수이나 파이오니아 녹턴형 리시버 하나 챙겨 볼 욕심은 늘 꿀떡같이 품고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전혀 궁금하지 않으시겠지만, 그 귀신 밥으로 삼았던 후배에게 돼지갈비를 샀냐고요?
흥.
지가 해결해 준 것도 아닌데 왜 삽니까? 그래도 내가 자린고비는 아니라서 그럭저럭 이슥해진 오밤중에 둘이서 사이좋게 한 잔 하기는 했지요. 그냥 싸고 양 많은 안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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