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근 사십년 전쯤인 1967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과학이 발달하여 너그들이 어른이 될 쯤이면
아마도 구닥다리 열두시간짜리 시계는 사라지고 스물네시간짜리 시계가 나타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고가 과학적이지 못한 나는 스물 네시간짜리 시계가 과연 실용적일지, 디자인이나 기능적인 면에서 무리는 없을지 등등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입을 헤 벌리고 ‘우와’ 감탄만 했지요.
그로부터 삼사십년이 흘러서 세상도 변했고 잘은 모르지만 당연히 과학도 좀 발달했겠지요.
그런데 어째 과학이 아직 이푸로쯤 덜 발달했는지 몰라도 존경하는 선생님의 예언과는 달리 아직도 스물네시간짜리 시계는 소식이 없고 뜬금없이 바늘 없는 시계들만 오락가락 하지요.

...................
이런 젠장. 바늘이 없는 시계로는 시간 대중을 어떻게 짐작하지?

모름지기 시간이라 함은 가없는 시공을 인간의 임의로 줄 긋고 매겨서 그 살림에 윤택을 주리라 맹근 것이니 시계라는 물건이야 어쩌다 슬쩍 일별하여 바늘의 진행 속도와 각도로 대강의 시각을 짐작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7시43분39초...40초...41초...깜빡깜빡깜빡 .............환장합니다.

거기다가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여덟시 약속인데 7:43분이라하면 그 남은 시간이 얼른 짐작이 가지를 않는다는 것이 고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놈의 디지털 액정 시계가 최첨단인지는 몰라도 깜빡깜빡하는 숫자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놈의 것이 앞인지 뒨지 당최 짐작이 가야말이지요. 그래서 내딴에는 머리에 과부하를 걸어가면서 짜 낸 방법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디지털 시계에 찍힌 7:43을 아날로그 시계바늘에다가 대입합니다. 물론 초 단위 이하는 절삭해야합니다. 다 챙기면 용량 딸립니다. 다음으로 분침과 시침이 이루는 각도를 머릿속에 그려넣고 잠시...
....아하, 드디어 얼추 남은 시간의 길이가 겨우 짐작이 됩니다. .......이런 젠장, 최첨단은 뭣이 최첨단. 무턱대고 7:43:45...46초...47초...48초... 깜박거리는 숫자만 들여다 보노라면 막 숨만 가쁘지요. 이게 도대체 걸어가서 될 일인지 조금 늦었으니 뛰어야 할지, 아니면 택시라도 잡아타야할지 도무지 시간이 짐작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거 뭐, 문명 시대의 기물들을 제대로 선용하지 못하는 것이 자랑은 아닙니다. 아닌데, 그 때 그 시절, 바야흐로 시대를 만나 세상에 범람하던 디지털 시계가 구닥다리 아날로그 시계들을 일거에 절단낼 것처럼 거리마다 골목마다 심지어 구루마 좌판 장사들까지 만수로 싣고 다니던, 그 마구마구 찍어낸 지극히 절망적인 디자인의 플라스틱 디지털 시계가 절망적으로 창궐하던 절망적인 시절.
급기야는 밧데리를 교환하는 것 보다는 고만 하나 새로 사는 게 이문이 낫다는,
일회용 시계라는 전대미문의 용어까지 등장하던 팔십년대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 다행히도 시계의 겉보기에서만큼은 아날로그 바늘 방식이 다시 자리를 잡은듯 해서 그나마 나는 내심 몹시 다행스러운 중이올시다.

..
다행은 뭘, 당연지사. 사필귀정이지. 보기에도 얼마나 아름다우냐고요.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확보되어야만 하는 원만하고 고집스러운 둥근 원판의 미덕. 거기다 가일층 아라비아 숫자며 로마 숫자며 기기묘묘 형형색색으로 그 모습이 사뭇 예술적이거나 또는 거의 예술인 문자판 도안들... 그 위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조용히, 가뭇없이 돌아가는 길고 짧은 시계바늘. 거기에 목매어 허위허위 살아가는......... 아, 그 처절하고도 거룩한 삶의 상징이며 심볼이며... @@...

게다가 굳이 숫자를 떠 올릴 필요도 없이 한눈에 딱 떠오르는 그 시간적 공간적 시인성이야말로 소리없는 디지털 액정이 흉내 낼 수 없는 지극히 생물적인 감각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일견 멀쩡하게 생긴 아날로그 문자판의 이면에는 AA사이즈 밧데리를 하나씩 짊어진 대량생산의 싸구려 플라스틱 톱니바퀴들이 음흉하게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음.

하긴 그것들의 위력인지 덕분인지 엊그제 아내랑 쇼핑 다니던 중에 보니 세상에, 옷 파는 가게에서조차 보기에 그럴듯한 벽시계며 괘종시계들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적 사명감에 불타는 내가 안빠지고 또 한마디 했지요.

‘아지매. 이거 보나마나 싸구리들이지?’

그랬더니 겉보기에는 일단 우아하게 생긴 옷집 아지매 曰,

‘슨생님은 취향이 고상하신갑다. 요즘 시계가 다 그렇지요 뭐.’

겉보기에 우아하게 웃으면서 고객의 하이엔드 유머(?..@@..)에 감응하는듯 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호 걸린 김에 곰곰 생각해보니

/등신아, 요즘 세상에 누가 쇳덩어리 태엽 벽시계 맹근다더냐?... @..@...

아뿔사. 졸지에 촌놈 되고........ 하기사 촌놈이기는 하지요.
5.1채널이니 7.1채널이니 날고 기는 홈 av 시대에 진공관 앰프 보듬고 앉아서 구관이 명관 타령이나 하고 앉았지요, 엠피쓰리가 광속으로 날아다니는 시대에 아이들러 턴테이블에 쌓인 먼지를 털고 닦고.... 아직도 삐리리 전화기가 마음에 들지않아서 어디서 따르릉 체신부 전화기 구할 데 없나 두리번거리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심지어는 led가 번쩍거리는 시대에 노란 불빛의 부이유메타만 보면 환장을 하고 까만 창에 시푸르딩딩 녹턴형 리시버만 보면 꺼뻑 넘어가서는 괜히 허전한 주머니만 뒤적뒤적...

그래, 이 시대착오적인 꼬라지를 어쩔거냐고요?  아니 뭐 그래도 나는 최소한 태엽 감아서 나발로 듣는 유성기는 차마 구하지 못했수다. 그러니 날더러 갈데없는 골동취미 갖고 설레발 친다고 가재미눈 하지 말자고요. 그냥 내가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보고 듣고 겪어왔던 각종 물품이며 기구들이 몸에 배어 그렇거나 아니면 워낙에 새 세상에 대한 적응력이 일반인에 비교하여 두루 열등하다보니 그래 그런건지.

모르긴해도 지금 두들기고 있는 컴퓨터도 그럴수만 있다면 아마도 철거덕 삐거덕 진공관 기계식을 구매하지 않았을까 의심도 해보는데, 왜 아닐까봐. 그런 옵션만 있다면 두말 없이 얼릉 그랬을걸.

헤헤이........거 뒤에 비시시 웃고 있는 분들, 잘난척 비웃지 맙시다. 멀쩡한 척 하던 컴퓨터 한 번 사보타지 하고 자빠져 보라지. 석달 열흘 쎄가 빠지게 궁리하고 두들겨 넣어놨던 거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휭! 날아가면 뚜껑 열리나 안열리나.

만장하신 여러분의 최신형 새깔깔이 컴퓨터는 절대로 그럴 일 없을거라는거지요? .... 내 장담하건대 이 시대가 가기 전에 장담는 일이 안생기면 내 손에 장 지지지요. 그 증거로 이 광속으로 달리는 첨단 세상의 그 경박한 디지럴 액정 시계의 값없음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멀쩡한 바늘 다 뜯어내고 숫자판으로 개비한 멍텅구리 손목시계며 번쩍번쩍 시뻘건 발광체가 점점이 박힌 디지털 벽시계의 몰취미함은 한 수 접고 밀어두고서라도 전화기에도 시계, 핸드폰에도 시계, 밥솥에도 시계... 그 얼마나 값없고 헤프고....
떠그럴, 이러다가 한 오십년 뒤에는 손가락에도 시계, 발톱에도 시계, 눈구녁에도 시계, 콧구녕에도 시계를 달고 다니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촌동네 시곗방 개업 사은품으로 돌리는 2색볼펜에도 액정시계는 깜빡거리는데...

그래... 그렇다면 순수 골수 호모 아날로그 크로마뇽인 니 시계는 그럼 십팔금 쇠줄 묵직한 로렉스나 뭐 그쯤 되냐고요?
...........
어느 대학에 견학갔더니 납작한 디지털로 방문 기념품 하나 줍디다. 년전에 밧데리 한 번 갈아 준 거 말고는 몇년 지나도 안서고 잘 가길래... 모양도 그저 괜찮고해서 말이지요... 아, 그래도 시침 분침에 초침까지 멀쩡하다니까요. 음.. ..
.....
거 날씨도 꽤 싸늘한데 아무리 그래도 눈 흘기지는 맙시다.. 횡설수설이나마나 얼마나 고민이 됐으면 그랬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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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무이, 이거 이름이 뭐다요?’
-‘산나물이라요.’

/‘에고. 산나물인줄은 나도 알지요. 거 이름이라도 알고 묵어야지....’
-‘고만 묵으믄 되지 이름을 알아야 묵능교. 이거는 원추리, 이거는 참나물... 요거는 꽃나물...
아이고 이걸 다 우찌 안대요. 고만 다 산나물이라요.’

/‘이거 할무이가 산에서 캐 오신 거 아입니까?’
-‘맞니더.’

/‘그럼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는 건지 아닌지 알고 캐요.’
-‘못묵는기 어데 있어요. 봄에 나는 거는 다 묵어요.’

/‘아니, 참, 그래도 독이 있는 것도 있을끼고,
묵어봤자 득도 실도 없는 별 신통찮은 풀들도 마이 있을 거 아이라요?’
-‘참, 아저씨도 벨 소릴 다하요.
독풀은 캐믄 안되제요. 뉘가 사람 죽으라꼬 독풀을 캐요. 크일 나제.’

/‘..........%%$@!^&^**&(!........그러니 독풀인지 아인지 그걸 우째 아냐고요.’
-‘우째 알기는.... 보믄 알제요...’

/‘....@@...... 거 참...그러니까 내 말이,
산비탈 그 많은 풀 중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
몸에 좋은지 안존지, 묵는 긴지 아인지 우째 다 아냐고요....’
-‘그라이께네........ 호메이 하나 들고 산비딱에 가서 요래- 보믄 뷔요.
조거는 묵는 거, 조거는 묵으마 섯바닥이 아리~~ 한 거, 저거는 손발 저릴 때 묵으마 존 약풀....’

/‘...&((())(_%$@#~@......헛, 그거 참..... 그럼 할무이는 이걸 언제 다 배웠어요?’
-‘배우기는 뭘 배와요. 그깐녀러 산나물 배울 꺼나 뭐 있어요. 핵교 가서 높은 공부를 해야제.’

/‘안배우고 이름도 모르는 그 많은 걸 다 우째 알아요?’
-‘촌사람인게 그냥 알제.’

/‘나도 그리 딱 보고 알면 참 좋것그만....’
-아이고 아제씨야. 그거 알아서 어데 쓸라꼬. 고만 장에 오다가다 한번씩 사서 묵어요.
그래야 장에 앉은 할마이들 점심값도 버얼고 그러제요.‘

/‘!!.......’

빼도 박도 못하게 맞는 말씀이라 끽 소리 안하고 이천원어치 한 소쿠리를 사 왔습니다.

역시 세상에는 고수가 많습니다.
그 많은 고수들은 얼굴에 분칠도 안하고 문패도 안 걸고 그리그리 조용히 살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지는데. 그런 고수들이 부럽고 거시기해서 시늉이나 내볼까해도 역시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神藥으로 유명한 김일훈 선생도 생전에 뉘가 그걸 다 언제 배웠냐고 묻자 툭! 한마디 했답디다.

‘배워서 아나. 나면서 알아야지.’

이런 젠장.... 배워도 소용 없다는데야 야코가 팍 죽어서...
말하자면 生而知之라는 말씀이겠지요.

고수는 도처에 불시로 부단히 존재하거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자세를 낮추고 좀 어버버하게 굴어야 낭패를 안당하지요. 대충 둘러보고 어릿하게 잘난 척 하다가는 딱 임자 만나서 이래저래 더듬거리다가 죽도 밥도 막걸리도 아닌 꼬라지로 고만 얼치기 소리나 듣고.....  그런 날은 그만 딱 죽고싶어서 잠도 안옵니다.

내가 사람에 대해 경이롭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산나물 할매의 그것과 같은 자연친화적인 ‘능력’입니다.
땡볕에 밭 매다가 한줄기 바람냄새 딱 맡고는, ‘저녁답에 비오것다.’ 무당같이 중얼거리는 할배라든지, 일기예보는 듣지도 않으면서 방파제에 올라가서 ‘앗따 큰 바람 오것는디.’ 손 끄트머리 침 테테 발라서 이래저래 돌려보는 할배며....

뭐 어쨌든 대충 영감 할마이가 돼서야 얼추 고수의 반열에 드는 모양인데 나도 늙어지면 그리 될라는가요. 어깨 신경통으로 날궂이 알아맞히기같은 그런 얄궂은 거 말고....

아이다.
고만 산나물 할매 말대로 그냥 장에서 사다 묵고 일기예보나 잘 챙겨보고 그래야지.
뭐, 가당찮은 흉내 내쌓다가 비 두들겨 맞고 고뿔하고 그러다 시난고난 갱신도 못하고 어질러질라. 원 참.     


1.
매일 작은 배낭을 지고 산을 오릅니다.
한시간 반이면 다녀 오고도 남을 작은 산이라 물 한병, 수건 하나면 충분하지만 그래도 굳이 납작한 스포츠 배낭을 지고 갑니다. 내용물은 수건 한장, 물 한병, 핸드폰, 면장갑, 주머니칼 정도. 배낭이 등에 붙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든든하지요.

2.
나는 오래 전 지리산에서 잠깐동안 배낭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혼자 산을 오르면서 시간에 쫓긴 나머지 등산로를 버리고 희미한 산길을 택했다가 낭패를 당했었습니다. 빤히 보이던 길이 돌아서자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 낭패감은 당해 보지 않으면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낭패감은 그래도 사치였습니다.
가벼운 몸으로 잃어버린 길을 찾겠노라고 배낭을 잠시 벗어놓고 맨몸으로 안개 자욱한 덤불 속을 헤매던 나는 그만 배낭을 둔 자리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지요. 급기야 해는 지고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그 막막하던 공포와 절망.  
배낭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이의 시각은 짐작에 한 삼십 분에서 한 시간? 거의 어두워진 산골짜기에서 참 다행히도 돌 덩어리만큼 크고 무거운 배낭을 되찾아 짊어지는데 그 때처럼 등을 압박하는 짐의 무게가 반갑고 고마운 적이 없었습니다.

큰 산을 며칠 일정으로 오르는 장기 등반때 등에 진 배낭은 크고 무겁습니다. 정말 그 압도적인 무게는 살인적이지만 그래도 그 웬수 덩어리같은 배낭 속의 내용물이 없다면 그 깊은 산 속에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람은(최소한 나는) 자연 속에서 맨 손으로 살아가기에는 완벽하리만치 무능한 존재인가 봅니다. 여기서 쓸데 없는 생각 한 토막... 현 시점에서 인류가 졸지에 석기 시대로 돌아 가야 한다면 대체 몇 명이나 살아 남을 수 있을까요?..

3.
희거나 껌거나 간에 이 풍진 세상, 세상의 모든 너희들을 위해서 어금니 물고 허위허위 살아 가는 거라며 유세 꽤나 떨고있는 우리들이지만 기실은 세상의 그 모든 짐들이 오히려 우리를 붙들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짐들을 ‘붙들고’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짐들이 우리를 ‘붙들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족이란 서로에게 닻이며, 혹은 덫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덫 보다는 닻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입니다. 가족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그런 면에서 나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장삼이사, 범부의 범주에 드는 모범 생활인일 수도 있겠다는 안도감 쪽으로도 곁눈질 해 봅니다.
거친 항해도 때로는 더 없이 낭만적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배는 항구와 가까울때 비로소 더 멋있어보이는 법이지요. 그러자면 적당한 곳에 닻을 내리고 갈매기 벗삼아 다소 촌스러운 기념사진이라도 늦기 전에 박아 놓을 일입니다.
......
왼갖 잡설 중에 참 장한 생각 하나 했지요?... @@..

4.
어쩌다 초저녁에 잠이 들어버리는 날이면 더러 한밤중에 잠이 깨어 황망한 경우가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다시 잠 들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불끄고 억지로 누우면 온갖 잡생각으로 오히려 더 심난하기때매 일부러 긴치않은 일거리를 만들어서 밤중에 부시럭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찮아서 미뤄두었던 것들이나 조용할 때 혼자 해 보고싶었던 일이라든지......
하지만 거의가 다 먹고 사는데 별로 요긴하지 않은 일들이라 c/p가 그다지 높지않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때 얼핏 드는 생각은.... 내가 지금 이 늦은 시각에 대체 뭣때매 이러고있지?

오늘 밤이 꼭 그런 날입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갈 수록 잠이 부족한 날은 명줄이 짧아진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지금같은 때가 꼭 그렇지요. 청춘은 피고지고 세월은 이고지고..

......그러니 될수 있는 한 얼른 한식경이나마 만사 제쳐두고 잠이나 잘 요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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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분을 싫어하는 것은 아버지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때 살던 진주 칠암동 집 백평남짓 마당에 꽂힌 수십 그루의 갖가지 꽃과 나무들로도 모자라서 이백여개의 크고 작은 화분을 보듬고 사셨습니다.
갖가지 기화요초로 백화만발한 분재들은 아마도 훌륭한 취미임에 틀림없으며 가족들의 정서 순화에도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는 칭송도 들어마지않았겠지요. 옳고말고요. 꽃과 나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이로운 물상입니다.. 다만 문제는, 우아하게 매만지고 그윽히 완상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지만 그 화분에 물 주고 들어 나르는 노가다는 순전히 우리 4남매의 몫이었다는겁니다. ..말이 좋아 이백개지.....

비가 옵니다.
‘비 온다. 화분 내다 놔라~~!!’
밤이고 낮이고 없습니다.
젖은 고무신짝이 헐떡거리도록 마루에서 마당으로 들락날락 화분을 내놓습니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납니다.
‘화분 들여놔라~~~~!!!’
이건 더 하기 싫습니다.
화분도 물을 흠씬 먹어 훨씬 무거워졌을 뿐더러
빗물에 튀어서 미끈미끈 시퍼렇게 이끼 덮인 오지화분에 흙모래까지 잔뜩 묻어있습니다.

때때로 젖은 화분 밑에 거머리며 지렁이도 붙어서 따라옵니다. 달팽이는 기본입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대청마루를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지렁이, 거머리, 달팽이. 그 외에도 이루 형용할 수 없이 많은 각종 발 많거나 발 없는 족속들.......... 질색입니다.

그리 좁지않았던 왜식 구조의 기와집 마루들은 사람 다닐 통로만 남겨둔 채로 그 수많은 화분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나마 조금 끗발이 떨어지는 화분들은 마루 밑 축담 옆이나 굴뚝 부근에서 찬밥 신세였지요.
아버지는 그 끗발 떨어지는 꽃나무들이 차마 애련하고 가엾은 나머지 급기야 마당에 두평 남짓 구덩이를 파다가 반지하 온실을 만듭니다. 남향으로 비스듬히 눕힌 천장에 비닐을 덮고 그 위에 가마니를 두 겹으로 덮어놓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해 뜨면 가마니를 걷어놓습니다. 저녁에 해 지면 가마니를 덮어야합니다. 그 짓을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해야합니다.
혹시나 까먹거나 삐딱하게 버티다가 잊어버리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빌어묵을 놈들이 고거 하나 제대로 못덮어서 화초들이 다 얼어죽을라..$%^^*&&^@$!.......’

.........

-쉬이벌, 그라마 아부지는 이 삼동에 손발 얼어터지는 자식들보다 그깟녀러 화분이 더 좋단 말이요?

억울하고 신경질나서 이렇게 항거 해보고싶어도 시대적 배경이 일천구백육십년대올습니다.
어디를. 아버지한테는 끽 소리도 못냅니다. 그랬다가는 죽을만치 두들겨맞고도 온 동네 씨도 못받을 말종자로 찍혀서 덕석몰이를 당할....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 없을 때 마당에서 제일 굵은 아름드리 은행나무에다 주머니칼 던져 박는 걸로 스트레스를 풉니다. 그 늙은 은행나무는 껍데기가 울퉁불퉁하도록 나한테 수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덕분에 표창 던지기 솜씨가 꽤 괜찮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 그 실력 시방도 갖고 있으면 어디 조폭 영화 단역이라도 한번 꿈꿔보는건데!...

하여간에 그놈의 화분들은 화분 주제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호강을 하다가 마당이 좁은 서부시장 뒤쪽으로 이사를 가서는 대형화 하기시작합니다.
칠암동 시절의 화분들이 그나마 올망졸망한 오지화분들이었다면 서부시장 시절의 화분들은 사람 몸뚱아리만한 덩치에 분재의 키도 보통 일미터를 넘나드는 도자기 화분들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니미, 혼자 들고 들어갈려다가 허리 뿌러집니다. 이 때도 아부지는 변함없이 턱 끄트머리로 분재 취미를 즐기십니다.

‘바람 분다. 디라 놔라.’
‘비 온다. 내다 놔라.’

그 시절까지 출가를 안하고 집에 있던 세째누나와 나는 띵빠리같이 살찐 화분을 마주 들고 낑낑 게걸음을 걸으면서 맹세를 했습니다.

‘내가 커서 분재를 한다면 개자슥이다.’

상대적으로 집을 일찍 떠났던 큰 누나와 둘째 누나는 그래도 좀 덜한 편이라서 시방도 위로 두 분 누님들 집에 들어서면 그렇게 열성적이지는 안해도 아파트 베란다에 보면 더러 볼만한 분재들이 십수개쯤 펄럭이고 있습니다만 상기한 세째 누님과 나는 한세월 아주 오지게 질려버린데다 타고난 게으름도 만만치 않아서 어쩌다 생긴 화분이 아니고서야 내 돈 주고 화분을 사 볼 생각은 꿈도 안꿉니다. 그나마 공으로 생긴 화분들도 시난고난 말려죽이기를 다반사로.....

.............
세월이 가고 결혼을 하고 ....... 어쩌다보니 마당이 있는 집을 지어 이사를 했습니다.
꽃집 딸이었던 아내는 이것도 심자 저것도 심자 화분이 예쁘네 꽃이 어떻네, 아니, 사람의 탈을 쓰고 어째서 식물을 싫어하냐, 세상에 살다보니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다 있구나 긁고 쑤시고 들썩거리지만 그래봤자 내사 요지부동입니다. 웃기지 마라. 분재와 나무와 풀과 그 모든 식물에 얽힌 그 신간스런 인고의 나날들을... ‘니가 내를 아나?’


...........
.......
이 자리에 발 붙이고 산지도 벌써 어언 십오년. 일상에 코가 꿰어 동분서주 살다가 어느 틈에 허리 한 번 펴고 하늘 한 번 보았더니 엇주?
처음 집 짓고 준공검사때매 마지못해 마당에 꽂았던 회초리만했던 묘목들이 지깐에는 나무랍시고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낙엽 떨구더니 이것봐라? 어느새 가지들이 넘실넘실 지붕을 넘어다봅니다.
나도 그동안 그럭저럭 먹은 나이가 있다보니 한번씩 그 나무들이 새삼스럽게 돌아다 보입니다. 아무 애정도 없이 되는대로 사다 꽂은 천원짜리 싸구려 묘목들... 나무는 십년을 보고 사람은 백년을 본다더니 그게 그거였던가.

수일 전에 마당에 나무 몇 그루 심고 나서 뭔 심사가 선듯만듯 하더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마음에 내켜 화분 두어 개 만들어봤습니다. 흙 갈고 구근 두어개 옮겨 심고는 물 적셔서 테라스에 두었습니다.
꽤나 무거운 도자기 화분을 영차! 들어 옮기면서 인자는 세상에 안계신 아버지 생각도 잠깐 했습니다. 깐에는 멋낸답시고 마당에 깔린 잔자갈도 한 줌 집어다가 어설프게 깔아놨더니 그걸 본 마누래는 뭔 뜻인지 혼자 씩 웃습디다. ...... 주글래?

....작심삼일로 또 말려 죽일지는 메누리도 모르지만 그래도 근 사오십년만의 변신이니 칭찬할만하지 않은가요. 아니면 어릴 적 그 맹세대로 기어코 나는 개자슥이 되어야할까요. @@....





뒷다리/ 사진 설명
발육상태가 좀 쇠어 꼬부라지긴 했어도 맹세코 내가 마음에 내켜서 만들어 본 첫 화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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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 가로줄/ 이것을 뜯으면 자식이 썩는다
맨 아래 가로줄/ 썩기 시작한다. 푹푹 썩어간다

본문/ 자전거 가지고 간
        사람 갖다 놓아라.
        갖다 놓지 않으면
        눈알이 썩고 다리
        가 부러질 것이다.



....................

장에 다녀온 이튿날 아침에 아내가 그럽디다.

'여보. 우리 그 할배한테 자전거 하나 선물하까?'
'뉜줄 알고.'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었으면 저리도 처절하게 써놧스까 싶어서..'
'사람을 어떻게 찾냐고.'
'다음 청하 장날 끄꼬가서 수소문...'

가망없는 이야기지만 기특한 생각이라고 자랑합니다. 흠.

염천에 객이 왔다.
묵은 된장같은 옛 친구 중의 하난데, 그나마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고 삼 사년 만에 얼굴 디민거는 고맙다마는 그렇다고 이 염천에 처자식 거느리고 이박 삼일이 뭐냐. 너긋들은 한 이틀 즐거운 휴가지만 바닷가에 오막살이는 여름 내내 손님 설겆이에 물 마를 날이 없다.
게다가 예고없이 들이닥쳤다고 아내의 눈꼬리가 심상찮게 올라갔다.

아니, 얼추 늙어가는 차제에 그래도 옛 친구가 왔는데 말이야...
나도 섭섭한 김에 마주 보고 쌍심지를 올려 볼까 싶다가 나이가 벼슬이라 한 박자 늦춰 잡았다.
이 사람아, 사람이 찾을 때가 존 때니라 중얼중얼 대충 말 막음으로 덮어 놓고 얼렁뚱땅 넘어갔다. 입밖으로 꺼내다가 시비를 가려볼작시면 한 여름에 살얼음 끼지 싶어서. 그게 피아간에 도무지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거지. 늙어서 좋아진 건 이런 요령밖에 없다.

아무튼지간에, 옛 친구랑 더불어 새벽 어판장에서 물괴기 사다가 회떠먹고 끓여먹고 튀겨먹고 ...
실컷 먹고 마시고 나서 심심도 하고 해서 가까운 공원에 올라가 어슬렁 거렸다.
한 잔 했겠다, 바닷바람은 살랑거리지, 밤하늘에 은하수는 흐리멍덩... 촌구석 공원에 처음 와본 된장같은 놈이 쭝얼쭝얼 한마디.

‘거.... 촌구석에 차도 많고 사람도 꽤 만쿠나’
‘........ ’
‘그럭저럭 대충 늙어가는 부부들이 어짜구....’
‘...... 부부가 아니니라’
‘...........?’
‘남녀가 앉은 거리를 보아하면 그 진위를 알 수 있거늘, 대저, 그 거리가 이격 없이 밀착되어 있음은 그들이 미혼 내지는 신혼이요, 그 사이에 어린 놈이 한 둘 낑겨 있으면 얼추 몇년 경과한 거시기 일진대... 중간에 어린 놈도 없이 늙수구리 중장년들이 이 염천에 끈적끈적 밀착 되어 있음을 보고도 그들이 대략 부적절한 관계임을 알아 채지 못하겠느냐. 니 같으며는 오늘 저녁같은 날씨에 니 마누래랑 딱 붙어서 여기저기 만지작거리고싶으냐?‘
‘올커니’
‘된장아, 다시 보아라... 세상은 아는만큼 보이나니.... ’
‘그리보니 그렇구나. 상호간에 페로몬을 양껏 발산하고 있구나’

된장이 센스는 없지 않아서 멋진 단어를 생각해 낸 덕분에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
삼복의 열대야 그 끈적끈적한 바닷바람을 타고 발산하는 페로몬은 얼마만큼의 접착력을 갖고 있을까. 그리고 이제 한 고개를 넘어선 우리는 얼마만큼의 페로몬을 남겨놓고 있을까. 아니, 이런 날씨에 페로몬이 생산 되기는 될까.
게다가 만약에 누군가가 나를 향해 페로몬을 발산하고 있다면 나는 대체 그것을 알아차리고 답장 보낼 페로몬이나 갖고 있는 것일까. 된장은 가고 나 혼자 앉아서 그놈의 페로몬 찾느라고 뒤적뒤적...




 

기계/

읍내 오일장에 갔었습니다.
개천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보니 앞차가 닭장차네요. 여러 칸으로 높다라니 쌓아올린 네모난 철망 속에 털이 숭숭 빠진, 비루먹은 닭인지 중병아린지 수십 수백 마리가 쓰레기 뭉치처럼 엉켜 쑤셔 넣어져 있어서 그냥 지나쳐 보기에도 마음이 불편한데 맨 뒤쪽을 보니 낯 선 형상의 큼직한 기계가 놓여있었습니다. 까닭 없이 섬찟한 느낌에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 의심스러운 기계의 출구 쪽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중충하게 젖어있는 기계 구멍 주변에 여기저기 닭털이며 썩 유쾌하지 못한 부산물들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닭을 모가지만 뎅겅 잘라서 퍼덕퍼덕 하는 놈을 기계 아가리에 던져 넣으면 자동으로 웅웅 돌면서 후다닥 털 뽑고 내장 털고 해서 순식간에 식용 생닭으로 둔갑시키는 물건으로 보였습니다.


일순간에 자동화라는 미명하에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인간의 매우 비도덕적인 행위의 일면을 본 듯하여 에잇, 살다가 못 볼꼴을 보고야 말았구나, 참담한 심사를 어쩌지 못하고 장을 보는 둥 마는 둥 어마지두 간에 돌아오기는 했는데 몇 날이 지나도 참 얄궂은 마음이 쉽사리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계에 던져 넣건 목을 비틀어 잡건 모든 도축 방법이 짐승의 목숨을 끊기는 매한가지인데 그렇다고 해서 진작부터 먹어오던 닭고기나 육류들을 당장에 끊거나 삼가 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유독 닭 잡는 기계를 보고 참혹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일인지요.

혹시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인간이란 종족의 값싼 지적 유희는 아닌지, 기왕에 먹을 음식이야 쌔고 쌨으니 그 경로나마 트집을 잡아서 조금 우아해보고 싶어 흘리는 악어의 눈물은 아닌지 이런 저런 궂은 생각으로 우울해졌습니다.


생명/

어떤 절대자가 생명의 저울을 걸어놓고 한 수도승을 시험하는데 저울의 한 쪽에 죽은 비둘기를 얹어두고 이윽고 말씀하시기를


‘이 비둘기의 생명에 걸맞은 값을 얹어보라.’


그 말씀에 공력이 대단하던 그 수도승, 선뜻 자신의 허벅지 살을 그 비둘기 만큼만하게 베어 저울 맞은편에 얹어 보았으나 저울추는 까딱도 않았습니다. 당황한 그 수도승, 이번에는 자신의 한 쪽 팔을 잘라 저울에 던졌으나 그래도 무정한 절대자의 추는 묵묵부답이었다지요. 그제야 아차, 깨달음을 얻은 그 수도승은 자신 스스로 그 저울에 올라섰고 비로소 저울은 수평으로 서더라는 이야깁니다.
무릇 온 세상의 온갖 미물들이라 하더라도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깨우쳐 주고자하는 거룩한 이야기겠지요. 어린놈이 즐겨듣는 어린이 동화 테이프에 있던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값/

사람의 몸을 용도에 따라 값으로 환산해 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성인의 몸에 있는 지방으로 비누 일곱 개, 인으로 성냥 대가리를 만들고 철분과 탄소로 못과 연필심 등을 만들 수 있답니다. 돈으로는 오 만 원 쯤 받을 수 있다던가. 이건 공업적 해체 방법이랍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화학 약품으로 추출하면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말도 있었습니다. 인슐린, 알부민, 콜라겐, DNA와 호르몬 등은 매우 고가의 물질이라 그러네요. 촌부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이야기라, 거 참, 세상에는 별 괴이한 짓을 하는 사람도 다 있구나, 그러고 넘기기는 했습니다만 가만 생각해보자니 그럼 나는 도대체 얼마짜리인지. 공업적 해체 방법이나 화학적인 방법은 매우 어려운 방법이라 제쳐 두고서라도 다소 엽기적이기는 하나 알기 쉽게 마트나 식육점에 널린 삼겹살 따위의 고깃덩어리로 환산을 하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고기로 치자면 개나 소나 나이 든 수컷의 고기는 그 중 질이 떨어지는 정육이니 파는 사람이 몰래 속여 팔지만 않는다면 그 중 헐값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도대체 동네 뒷산에 목 매인채로 복날만 기다리며 살찌고 있는 개 값보다 나을지 어떨지.


사람의 값을 매긴다는 것부터가 다분히 특이한 궁금증을 가진 이들의 호기심을 만족 시키는 것 외에는 딱히 실효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데, 그럼 공업적, 화학적, 식육적 방법 이외에 좀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값을 매기자면 무엇이 있을까요. 수천 년 이래로 그 잘난 인간들이 짐승과 다르다고 우기는 정신적인 가치. 말하자면 개개인에 얽힌 인간관계의 경중에 따른 추상적인 값이나 어떤 사람의 숭고한 정신세계에 대한 무형의 가치. 아름다움, 소박함, 선함, 타인에 대한 긍휼이나 감사함 같은 것도 가능할까요?


말 해보나마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지인의 눈물 몇 방울, 남은 세월동안 쏟아 놓을 밑바닥 허전한 한숨들, 조금 더 현실적으로는 누군가가 소멸됨으로 해서 받게 될 경제적 이득이나 손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 인간 살아생전에 보험을 얼마나 들어놨던가, 혹은 자식에게 남겨 줄 재산이나 여타 자산이 얼마 만큼이냐는 따위, 이런 것들로 사람의 가격이 정해지는 세상이라 생각하다보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 치이고 채이고 찢어지고 부서진 나머지 몸과 마음에 남겨진 기기묘묘한 형상의 온갖 흉터자국들, 그거 말끔히 지우고 새로 깨끗한 인생 하나 만들려면 견적이 얼마나 나올까요? 정말 온 세상에 무슨 전염병처럼 창궐하는 보험 광고처럼 죽어서 타게 될 보험금으로 모든 것이 정산되고 탕감이 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린 건가요. 그것 참, 아무리 궁리 해봐도 나는 그다지 값이 안 나갈 것 같은 생각에 불현듯 인생이 쓸쓸해져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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