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근 사십년 전쯤인 1967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과학이 발달하여 너그들이 어른이 될 쯤이면
아마도 구닥다리 열두시간짜리 시계는 사라지고 스물네시간짜리 시계가 나타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고가 과학적이지 못한 나는 스물 네시간짜리 시계가 과연 실용적일지, 디자인이나 기능적인 면에서 무리는 없을지 등등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입을 헤 벌리고 ‘우와’ 감탄만 했지요.
그로부터 삼사십년이 흘러서 세상도 변했고 잘은 모르지만 당연히 과학도 좀 발달했겠지요.
그런데 어째 과학이 아직 이푸로쯤 덜 발달했는지 몰라도 존경하는 선생님의 예언과는 달리 아직도 스물네시간짜리 시계는 소식이 없고 뜬금없이 바늘 없는 시계들만 오락가락 하지요.

...................
이런 젠장. 바늘이 없는 시계로는 시간 대중을 어떻게 짐작하지?

모름지기 시간이라 함은 가없는 시공을 인간의 임의로 줄 긋고 매겨서 그 살림에 윤택을 주리라 맹근 것이니 시계라는 물건이야 어쩌다 슬쩍 일별하여 바늘의 진행 속도와 각도로 대강의 시각을 짐작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7시43분39초...40초...41초...깜빡깜빡깜빡 .............환장합니다.

거기다가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여덟시 약속인데 7:43분이라하면 그 남은 시간이 얼른 짐작이 가지를 않는다는 것이 고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놈의 디지털 액정 시계가 최첨단인지는 몰라도 깜빡깜빡하는 숫자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놈의 것이 앞인지 뒨지 당최 짐작이 가야말이지요. 그래서 내딴에는 머리에 과부하를 걸어가면서 짜 낸 방법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디지털 시계에 찍힌 7:43을 아날로그 시계바늘에다가 대입합니다. 물론 초 단위 이하는 절삭해야합니다. 다 챙기면 용량 딸립니다. 다음으로 분침과 시침이 이루는 각도를 머릿속에 그려넣고 잠시...
....아하, 드디어 얼추 남은 시간의 길이가 겨우 짐작이 됩니다. .......이런 젠장, 최첨단은 뭣이 최첨단. 무턱대고 7:43:45...46초...47초...48초... 깜박거리는 숫자만 들여다 보노라면 막 숨만 가쁘지요. 이게 도대체 걸어가서 될 일인지 조금 늦었으니 뛰어야 할지, 아니면 택시라도 잡아타야할지 도무지 시간이 짐작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거 뭐, 문명 시대의 기물들을 제대로 선용하지 못하는 것이 자랑은 아닙니다. 아닌데, 그 때 그 시절, 바야흐로 시대를 만나 세상에 범람하던 디지털 시계가 구닥다리 아날로그 시계들을 일거에 절단낼 것처럼 거리마다 골목마다 심지어 구루마 좌판 장사들까지 만수로 싣고 다니던, 그 마구마구 찍어낸 지극히 절망적인 디자인의 플라스틱 디지털 시계가 절망적으로 창궐하던 절망적인 시절.
급기야는 밧데리를 교환하는 것 보다는 고만 하나 새로 사는 게 이문이 낫다는,
일회용 시계라는 전대미문의 용어까지 등장하던 팔십년대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 다행히도 시계의 겉보기에서만큼은 아날로그 바늘 방식이 다시 자리를 잡은듯 해서 그나마 나는 내심 몹시 다행스러운 중이올시다.

..
다행은 뭘, 당연지사. 사필귀정이지. 보기에도 얼마나 아름다우냐고요.
시각을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확보되어야만 하는 원만하고 고집스러운 둥근 원판의 미덕. 거기다 가일층 아라비아 숫자며 로마 숫자며 기기묘묘 형형색색으로 그 모습이 사뭇 예술적이거나 또는 거의 예술인 문자판 도안들... 그 위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조용히, 가뭇없이 돌아가는 길고 짧은 시계바늘. 거기에 목매어 허위허위 살아가는......... 아, 그 처절하고도 거룩한 삶의 상징이며 심볼이며... @@...

게다가 굳이 숫자를 떠 올릴 필요도 없이 한눈에 딱 떠오르는 그 시간적 공간적 시인성이야말로 소리없는 디지털 액정이 흉내 낼 수 없는 지극히 생물적인 감각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일견 멀쩡하게 생긴 아날로그 문자판의 이면에는 AA사이즈 밧데리를 하나씩 짊어진 대량생산의 싸구려 플라스틱 톱니바퀴들이 음흉하게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음.

하긴 그것들의 위력인지 덕분인지 엊그제 아내랑 쇼핑 다니던 중에 보니 세상에, 옷 파는 가게에서조차 보기에 그럴듯한 벽시계며 괘종시계들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적 사명감에 불타는 내가 안빠지고 또 한마디 했지요.

‘아지매. 이거 보나마나 싸구리들이지?’

그랬더니 겉보기에는 일단 우아하게 생긴 옷집 아지매 曰,

‘슨생님은 취향이 고상하신갑다. 요즘 시계가 다 그렇지요 뭐.’

겉보기에 우아하게 웃으면서 고객의 하이엔드 유머(?..@@..)에 감응하는듯 했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호 걸린 김에 곰곰 생각해보니

/등신아, 요즘 세상에 누가 쇳덩어리 태엽 벽시계 맹근다더냐?... @..@...

아뿔사. 졸지에 촌놈 되고........ 하기사 촌놈이기는 하지요.
5.1채널이니 7.1채널이니 날고 기는 홈 av 시대에 진공관 앰프 보듬고 앉아서 구관이 명관 타령이나 하고 앉았지요, 엠피쓰리가 광속으로 날아다니는 시대에 아이들러 턴테이블에 쌓인 먼지를 털고 닦고.... 아직도 삐리리 전화기가 마음에 들지않아서 어디서 따르릉 체신부 전화기 구할 데 없나 두리번거리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심지어는 led가 번쩍거리는 시대에 노란 불빛의 부이유메타만 보면 환장을 하고 까만 창에 시푸르딩딩 녹턴형 리시버만 보면 꺼뻑 넘어가서는 괜히 허전한 주머니만 뒤적뒤적...

그래, 이 시대착오적인 꼬라지를 어쩔거냐고요?  아니 뭐 그래도 나는 최소한 태엽 감아서 나발로 듣는 유성기는 차마 구하지 못했수다. 그러니 날더러 갈데없는 골동취미 갖고 설레발 친다고 가재미눈 하지 말자고요. 그냥 내가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보고 듣고 겪어왔던 각종 물품이며 기구들이 몸에 배어 그렇거나 아니면 워낙에 새 세상에 대한 적응력이 일반인에 비교하여 두루 열등하다보니 그래 그런건지.

모르긴해도 지금 두들기고 있는 컴퓨터도 그럴수만 있다면 아마도 철거덕 삐거덕 진공관 기계식을 구매하지 않았을까 의심도 해보는데, 왜 아닐까봐. 그런 옵션만 있다면 두말 없이 얼릉 그랬을걸.

헤헤이........거 뒤에 비시시 웃고 있는 분들, 잘난척 비웃지 맙시다. 멀쩡한 척 하던 컴퓨터 한 번 사보타지 하고 자빠져 보라지. 석달 열흘 쎄가 빠지게 궁리하고 두들겨 넣어놨던 거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휭! 날아가면 뚜껑 열리나 안열리나.

만장하신 여러분의 최신형 새깔깔이 컴퓨터는 절대로 그럴 일 없을거라는거지요? .... 내 장담하건대 이 시대가 가기 전에 장담는 일이 안생기면 내 손에 장 지지지요. 그 증거로 이 광속으로 달리는 첨단 세상의 그 경박한 디지럴 액정 시계의 값없음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멀쩡한 바늘 다 뜯어내고 숫자판으로 개비한 멍텅구리 손목시계며 번쩍번쩍 시뻘건 발광체가 점점이 박힌 디지털 벽시계의 몰취미함은 한 수 접고 밀어두고서라도 전화기에도 시계, 핸드폰에도 시계, 밥솥에도 시계... 그 얼마나 값없고 헤프고....
떠그럴, 이러다가 한 오십년 뒤에는 손가락에도 시계, 발톱에도 시계, 눈구녁에도 시계, 콧구녕에도 시계를 달고 다니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촌동네 시곗방 개업 사은품으로 돌리는 2색볼펜에도 액정시계는 깜빡거리는데...

그래... 그렇다면 순수 골수 호모 아날로그 크로마뇽인 니 시계는 그럼 십팔금 쇠줄 묵직한 로렉스나 뭐 그쯤 되냐고요?
...........
어느 대학에 견학갔더니 납작한 디지털로 방문 기념품 하나 줍디다. 년전에 밧데리 한 번 갈아 준 거 말고는 몇년 지나도 안서고 잘 가길래... 모양도 그저 괜찮고해서 말이지요... 아, 그래도 시침 분침에 초침까지 멀쩡하다니까요. 음.. ..
.....
거 날씨도 꽤 싸늘한데 아무리 그래도 눈 흘기지는 맙시다.. 횡설수설이나마나 얼마나 고민이 됐으면 그랬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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