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어질고 살갑기가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대문 밖 스무 걸음 쯤 저만치 바로 마주 보이는 낡은 집입니다. 내가 이 마을에 들 때 할머니네 밭을 사서 집을 지었지요.

집 짓고 이사 왔더니 입에 달고 하시는 말씀이, 동네 맨 윗집이라 밤이면 헛헛했는데 빈 터에 집이 들어서고 밤이면 불이 환하게 보이니 담이네가 들어와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늘 치사를 하셨습니다.


어질고 살가운데다 성정은 또 얼마나 깔끔하신지 나이 들어 눈이 어둡고는 해 지면 채소를 안 만진답디다. 혹 티끌이나 벌레를 못 볼까봐 늘 밝은 햇살 아래서만 음식 장만을 하시는 분이지요.

할아버지는 수 삼년 전에 일찍 돌아가셨지만 건실하니 아들농사 삼형제 번듯하게 잘 지어 효성 지극하고. 그러고도 아들네 며늘네 업혀 살기 불편타고 늘 혼자 사시지요. 욕심 없고 경우 바르니 책잡는 사람도 없지요. 너도나도 저런 어른이 없다고들 입을 모으고.


이 날까지 십년이 넘도록 명절이면 잊지 않고 늘 음식 나눠주시고 모내기철이면 모밥이며 갓 담근 김치며 한 양푼씩, 가을걷이 때면 갓 찧은 햅쌀 자루 이고지고, 시시 철철이 채소며 곡식이며 갖다 주시는데

아이고 품앗이할 소출도 없는데 자꾸 받기만 해서 어쩌냐고 쩔쩔매노라면 아이고 담이 아부지는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촌에 늙은이가 손 댄 거라 혹 깨끗하지 못할까봐 그것만 늘 걱정하십니다.


나는 이 할머니 김치만큼 맛있는 김치를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할머니가 갓 담근 김치는 냄새만 맡아도 입에 군침이 돌고 대번 뜨거운 밥 생각이 절로 나지요. 정말 맛있습니다. 어디서건 김치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자랑할 만큼 정말 맛있는 김치였습니다. 서슴없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분이라고 내세웠지요.


몇 년 전인가 어느 해 모내기철에는 우리 식구 모두 방금 점심 밥 먹고 막 일어섰는데 모밥 해서 가져왔다며 팥 밥 한 양푼에 김치 두어 포기 그래 주셨지요. 기왕에 밥은 먹었고 배는 잔뜩 불렀으니 맛이나 보고 아껴뒀다 저녁에 먹자, 밥 한 술에 김치 한 조각 입에 넣었다가 웬걸, 그 자리에서 밥 한 양푼을 김치 한 가지 반찬으로 꿀꺽 단숨에 해 치우고는 동산같이 부른 배를 끌어안고 숨을 못 쉬어 한나절을 식식거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일단 맛보면 안 먹고는 못 배기는 그런 마법으로 버무린 김치.


봄가을로 우리 집 어린 놈 소풍이며 운동회며 가방 싸들고 대문 밖 나서면 얼른 달려와서 천원 이 천원 손에 쥐어주시며 우리 담이 운동회 날인데 못 가봐서 어쩌냐고 정말로 미안해  하시고 여름이며 겨울이며 내 집 마당에 낯 선 차 들어서면 손님 오셨는데 반찬이라도 보태라고 수시로 김치며 채소며.


자랄 때 겪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나는 누가 날 챙겨주면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렇게 따시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내 집에 마실 오셔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에미 없는 자식이 제일 불쌍하다며 담이 아부지는 엄마가 기러바서 우째 이래 사셨냐고 안타깝다 답답하다 하시더니 달포 전 책 한 권 냈다하고 인사 드렸더니 아이고 담이 아부지 기어이 큰 일 하셨다고, 당신 아들 일처럼 그리도 기뻐하고 좋아하시더니, 엊그제 설 전날 식용유 한 꾸러미 갖다 드리고 세배를 오늘 가나 내일 가나 니미락 내미락 하고 있었더니 어제 새벽 주무시다가 자는 듯이 혼자 돌아가셨답니다. 

설 쇠고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떠나고 혼자 이불 펴고 조용히 주무시다가 그냥 그대로 혼자 저세상 떠나셨답니다.


사람이 무섭도록 깔끔한 성정도 탈이 되는지라 어찌 가시기 전에 얼굴 한 번 보여 주시지도 않고 당신 입을 수의 어느새 깔끔하게 손질해서 다려 놓으시고 그나마 가시는 날도 정월 초사흘, 아들네들 설에 모여 제사까지 한 번에 지내라고 돌아가시면서도 아들 생각하신 것인지.

어제 읍내 병원 빈소 가서 잘 가시라 인사드리는데 모질고 독한 성깔이라 좀체 눈물 없던 이 놈의 인사가 엎드려 핑 도는 눈물 감추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빈소에 놓인 영정을 돌아서서 또 보고 또 보고 굴건제복 막내아들 손 한 번 잡고 그저 허랑하니 집으로 돌아 들어오는 길에 어째 얼굴도 한 번 안보여주시고 그리 가셨는지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아서 애꿎은 한숨 끝에 눈물을 몇 번이나 삼켰습니다. 


나야 늘 어른 손이 그립고 아쉬운 터라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니처럼 그리 생각하고 기대어 살았었는데 집에 돌아와 들어서는 길에 문 닫힌 채 적막한 할머니 집을 보자 하니 그만 억장이 무너지고 허전한 마음을 가누기가 힘이 듭니다. 뉘라서 남의 자식을 그만큼 따시게 다독거려 주실 것인지,

내, 팔자에 없는 복을 얻어 할머니 같은 분을 이웃으로 두고 사는구나, 늘 그리 기꺼워했었는데 이제는 그 기억을 지팡이 삼아서 버티고 살아야 할 모양입니다.


지금도 할머니 보고 계신다면 아이고 담이 아부지는 촌 늘그이를 갖고 별 소리를 다한다고 손사래를 치시겠지요. 김치 양푼 건네주시면서 ‘짠지 기러블 때 아무따나 잡수소’ 허둥지둥 대문 나서시던 뒷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어머니보다 더 살갑고 자상하시던 할머니, 이제는 굽은 허리 펴시고 극락 가시는데 나는 받기만하고 드리지를 못해 늘 겨워하던 마음 그냥 그대로 지고 살랍니다.


사는 꼴이 허망해집니다.

모레 아침 하관이라는데 날씨라도 봄날처럼 푸근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욕을 갔습니다.


‘큰 애 때를 좀 벗겨 줄라면 이제는 나도 힘이 부쳐요. 작은 아이는 당신이 데리고 갔으면.’
‘그러지 뭐.’


나는 오동통한 작은 아이를 데리고 목욕하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아서 선뜻 동의를 하는데 큰 아이가 엄살을 핍니다.

‘앗! 엄마가 때 밀면 나는 아파 죽는데.’
‘음. 그렇겠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랑 목욕 가는 게 정말 무서웠거든. 좀 살살 해주지.’


엄마들은 정말 아이들이 질겁할 만큼 알뜰하게도 벗겨내지요. 아빠들은 상대적으로 좀 느슨한 편이고. 이야기 중에 작은 아이도 나섭니다.


‘나도 여자니까 엄마 따라 갈래.’

어릴 때부터 더러 나를 따라 남탕을 가곤 했던 작은 아이였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좀 그렇다 싶어서 결국은 둘 다 제 엄마를 따라가기로 하고 나는 혼자 가방을 따로 챙겨들었습니다. 

‘그럼 그래라. 작은 애부터 씻겨서 한 시간 있다 내보내요.’


덕분에 나는 혼자입니다.
우리 식구가 자주 가는 목욕탕은 남탕이 2층에 있습니다. 밤새 찜질방을 열어놓는 집이지만 아무래도 밤늦은 시각이다 보니 목욕탕 안은 조용합니다. 나 말고는 한사람밖에 없네요. 게다가 늦은 밤인데도 물이 깨끗하여 나는 썩 흡족했습니다.

목욕탕 물이 더러운 것을 무척 싫어하셨던 아버지는 목욕을 꼭 새벽에 가셨습니다.
늦게 가면 물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 거의 반드시 꼭두새벽에 나를 깨워 앞세우고 목욕을 가시곤 했었지요. 거기다가 강 아랫쪽 목욕탕은 강물을 끌어 쓴다던가 어쩐다면서 굳이 강 건너 시내에 있는 목욕탕으로 갔었습니다. 한겨울 동도 트지 않은 꼭두새벽에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목욕 가방을 들고 강을 건너가노라면 귀가 아주 떨어져나가는 듯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도록 싫고 귀찮은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 시절 목욕탕은 아침나절이 지나고 나면 목욕탕 아저씨가 수시로 뜰채로 때를 건져내야 할 만큼 물이 더러워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 때도 뜨거운 물에 잘 들어가지 못하던 나는 정강이까지만 담그고 노닥거리고 있는데 구십 킬로그램의 배를 가진 아버지는 살이 아주 쇠가죽인지 우람한 몸을 펄펄 뜨거운 탕에 담근 채로 얼른 안 들어오고 뭐하냐며 연신 채근입니다. 이리저리 요령을 피며 미지근한 물에서 찰박거리다가 아버지한테 붙잡혀 큰 탕으로 들어가노라면 아주 고문이었지요. 펄펄 끓는 탕 속에서 으으으 버티는데 어쩌다 다행히 조금 견딜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손뼉을 두 번 칩니다.

'남탕에 뜨신 물!'

이내 팔뚝만한 빨간 색 파이프에서는 펄펄 끓는 물이 쏟아져 나오지요. 아아, 그 뜨거운 물이 슬금슬금 몸을 휘감아 오는 그 끔찍함이란.

‘아부지, 나는 고만 나가께요.’
‘가만히 있어! 땀이 바짝 나야제!’

요행히 아버지의 마수를 피해 탕 밖으로 달아나면 다행이지만 아버지의 큰 팔뚝에 붙잡히는 날이면 끝장입니다. 그럴 때면 나도 손뼉을 짝짝 두 번 치면서 '남탕에 찬 물!' 로 반항하고 싶은 생각이 꿀떡이었지만 참말로 그러지는 못하고... 벌겋게 익은 채로 겨우 탈출했다 싶으면 '이리 오니라' 이제는 수건 뚤뚤 뭉쳐서 겨드랑이며 사타구니를 사정없이 박박 밀어댑니다. 발갛게 불고 익은 여린 살이 아프고 따갑고... 그나마 뭉친 수건은 양반이었습니다. 더께 앉은 손등은 조약돌로 때를 벗겨야 했지요. 그 시절 목욕탕에는 동글동글한 때밀이용 돌들이 여럿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초록색 신비의 때수건 이태리타올이 나오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거울 앞에 앉아 몸을 씻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다 언뜻 깨어보니 그 사이에 욕탕 속에 들어앉아있던 중년도 나가고 나 혼자밖에 없네요. 귀 기울이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말고는 괴괴한 정적입니다. 얼렁뚱땅 씻어내고 황토방에 땀을 빼러 갑니다. 그렇잖아도 목욕 시간이 빠른 나는 한 시간이면 목욕을 끝내는데 혼자 가도 두 시간을 넘게 채우는 아내는 아이들까지 씻겨 내보내느라 늘 늦습니다.
땀을 빼면 건강에 좋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확실히 인물은 한 인물 더 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구중중해지는 얼굴이 이 때 만큼은 잠시나마 회춘을 하는 듯해서 기분이 괜찮습니다. 그럭저럭 땀범벅으로 졸고 있노라면 작은놈을 위시하여 큰 놈과 아내가 차례로 나옵니다. 아이들 등쌀에 밤늦은 국수도 사 먹고 달걀도 사 먹고 재미있게 노닥거리다가 땀 한 번 더 빼고는 늦었으니 이젠 집에 가자, 다들 가서 땀 씻고 나오너라, 줄줄이 여탕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혼자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남탕은 여전히 고요합니다.
..........!.

일순간 비어있는 목욕탕과 순식간에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 그 때의 그리운 시절이 범벅이 되면서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주 맘먹고 힘차게 손뼉을 두 번 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남탕에 찬 물!'  

목 놓아 큰 소리로 외치고 나서는 바보같이 혼자 즐거워져서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습니다. 드디어 사십년 묵은 소원을 풀었네요. 웃음 끝에는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가 보고 싶어져서 공연히 콧날이 시려오는 것을 참느라 잠시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만. 



2005. 01. 22
 

/바다

아침저녁으로 지겹게 보는 바다. 그래서 그 존재감마저 희미한 바다를 오늘도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짙은 남색으로 투명해 보이는 모범적인 바다였습니다.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가고서는 바다 밑이 휘딱 뒤집어졌는지 눈 닿는 데까지 온통 누런 황토 물이었는데 어느새 다 가라앉았나 봅니다.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겠네.
어부들은 고기가 잘 안 잡힐 때 곧잘 이렇게 투덜거리지요.

'괴기가 씨가 말랐는갑다. 물밑이 한 번 뒤비씨져야지....'

진짜로 물밑이 뒤집어지면 고기가 많이 잡히는지 어떤지 나는 모릅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간에 요 며칠 사이에 밤바다엔 한 동안 뜸하던 오징어 낚시 배들이 훤하게 불을 켜놓고 있기는 합니다.


/갈매기

읍내 도서관 가는 길에 지나친 바닷가에서는 근사해 보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갈매기 떼들이 그럴듯하게 무리 지어 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놈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사실 아주 지저분하고 사나운 놈들입니다. 이놈들은 선창가에서 썩어빠진 생선 내장이니 찌꺼기들을 탐욕스럽게 쪼아 물고 다니며 먹을 게 모자란다 싶으면 저그들끼리 아우성치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갈매기의 부리는 어물전 생선 아지매들의 갈고리마냥 아주 매끄럽게 휘어져 있지요. 저렇게 사납게 구는 걸 보면 혹시 맹금류는 아닐까요?
이 부근에서 갈매기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바닷가에서 제법 떨어진 수산물 가공 공장의 덕장이나 쓰레기 더미입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꽤 낭만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갈매기들은 알고 보면 어디 주워 먹을 게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웅크리고 앉은 배고픈 놈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긴 좀 건방진 갈매기가 있다면
‘지구상에서 너희 인간이란 족속보다 포악하고 더러운 종족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보라’며 혀를 찰 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 할 말 없지요 뭐.


/시장

도서관 다녀오는 김에 대파를 사 오라길래 오일장에 들어섰습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대파를 사지 못하고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무슨 일인지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아지매들을 보았습니다. 요즘에 시골 장이라고 뜨뜻하고 푸근하고 자질구레한 재미만을 찾다간 뒤통수 얻어맞는 수도 있습니다. 살아 가야할 절박함에서는 촌 아지매들이 더 그악스럽지요. 도덕책 펴 놓고 나무랄 형편도 아닙니다. 장날 나가보면 장바닥 한 바닥은 대부분 차떼기로 끌고 온 전문 장똘뱅이들이 거의 장악했습니다. 올망졸망 남새 푸성귀 뜯어 온 동네 할매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무공해 논두렁 표라고 애호박 한 개 삼천 원!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값을 태연히 부르는 할매들도 적지 않습니다. 애호박 아니라도 이제는 국산품은 죄 비쌉니다. 동네 할매들도 중국산 수입 참깨니 곡식들을 어디선가 받아서 전을 벌이지요. 재미없는 세상입니다.



/보건소

작은아이가 열이 올라서 동네 보건소를 찾았습니다. 애매한 시각이면 어지간한 병원들은 문닫아 걸 시간이니 믿을 건 가까운 곳에 있는 국립 의료기관 뿐입니다.


보건지소.

'의사 선생님이 개인적인 볼일로 출타 하셨습니다.'

여긴 걸핏하면 출장에 툭하면 출타입니다. 간헐성 무의촌에 살고 있습니다.


면 소재지 보건소.

'무의촌에 왕진 가셨는데요....'

뭐, 답답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군 보건소.

'어린이는 소아과로 가세요....약이니 주사니 용량이 달라서 어쩌고.... 의사 선생님들이 어린애들은 안 보실라고 저쩌고.'


결국 못된 성질머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규정에 보건소에선 애들을 안 보게 그리 되었냐니 그건 아니랍니다. 그럼 의학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 여기 와 있는 거냐니 그것도 아니랍니다. 꾸부정한 목소리로 아주 조용히, 뒤집어 엎어버리기 전에 빨리 진료하고 약 처방하라고 을러댔습니다.


고래로 나는 이런 일에는 아주 싸움패입니다. 주먹이 오고 가고 날고 뛰는 싸움이면 또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이건 틀렸다 하고 결심만 섰다하면 옳든 그르든 상대방은 일단 나랑 사이좋게 뻘 구덩이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아주 못된 성질머리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

근래 들어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원래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요즘의 이 생각들은 나를 몹시 상하게 합니다.
선 곳은 선 곳대로 앉은자리는 앉은자리대로 성글다가 배다가 스름스름 제자리 찾아 가라앉습니다.
무슨 선문답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나는 다혈질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과하게 차가운 편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서투른 탓에 더러더러 허방다리를 짚습니다. 살다보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허방다리도 때로는 짚어볼 만도 하지만 이 나이쯤 되어서 한 번 휘청거리고 보면 참 입맛이 쓴 것이 기분이 더럽습니다. 이러구 변설은 풀어 쌓지만 기실은 다 내 탓이지요. 누가 날 개 목줄 걸어 끌어가기라도 했단 말인지 원.

지붕이 바람 타는 소리를 냅니다. 밤마다 내내 흐리고 바람 불었는데 지금은 별이라도 몇 떴는지.


/산

갑자기 산에 들고 싶어 허둥거렸었습니다.

하긴 우리 집 뒤에도 병풍 같은 산들이 버티고 서 있으니 딱이 꼬집어 말하자면 지리산입니다. 지리산에 들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지리산이 멉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당연히 멀지만, 사적으로도 지금은 너무 멉니다.
재삼 새삼 떠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십 여 년 전 칠선 계곡 어느 폭포 벼랑 끝에 혼자 천막 치고 벼락 치듯 요란한 물소리에 둥실 떠 오른 듯 누워서 그 미치도록 맑은 별빛보고 산 짐승처럼 목 놓아 소리소리 지르며 보았던 별빛. 그거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불현듯 어찌 세상을 잘못 살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엿 같은 날에.



2003. 07. 19
 

우선 한마디로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단어입니다.
꼰대라는 말 자체가 다분히 뒤틀려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워낙에 부정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참 곤란한 단어지요. 도대체 그 어원을 짐작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어쩐지 빈정거리는 듯한 어감도 그렇고 글자로 써 놔도 참 품위가 없습니다. 

뭐, 그 이유가 어쨌든 나는 이 단어를 잘 쓰지는 않습니다. 부러 위악적인 말이나 글, 아니면 따 와서 인용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입에도 잘 안 담는 편입니다. 쓰는 말이 거칠면 심상도 거칠어진다고 믿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젊은 날은 있었고 또한 누구나 그렇듯이 꼰대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참 불편하고 거북한 존재였습니다. 그 꼰대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걸핏하면 잘 쓰는 말이 있지요. 흔해빠진 싸구려 금언록에나 나올법한 뻔한 이야기. 


‘사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이니라...’
'모름지기 나이가 들어봐야 세상을 알고...'
'옛말 하나도 그른 거 없나니...'
'그저 成家를 해야 어른이...'
'머리 꼭지에 쇠똥도 안벗겨진 어린 놈들이란....'


귓바퀴에 딱지 않을까봐 들을 때마다 털어냈지요. 가슴 가득히 적개심을 품은 채로

집에서건 바깥세상이건 구태를 몰아내고 개혁해야 하며 너희들은 바로 그 개혁의 대상이며...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케케묵은 책장이나 넘기며 수염 쓰다듬는 소리들이냐는 것이었지요. 

마음을 도사리고 독사 대가리같이 고개를 꼿꼿이 치켜든 채 대들고 따지고 덤볐습니다. 만만찮은 세상에 채이고 꺾이고 넘어지면서도 오로지 그것은 낡은 세상 탓이라는 굳은 일념으로 초지일관이었지요.

그 생각은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겼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느 사이에 내가 한 번 멋지게 살고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새 내 자식들이 물려받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바뀌어 갔고, 그러던 그 어느 날, 나는 입이 한 자나 튀어나온 어린놈을 앞에 앉혀두고 답답한 가슴을 치며 방바닥을 두드리는 꼰대로 변해있었습니다.


‘애비 마음도 모르는 괘씸한 놈!’

‘천지 분간도 못하는 어린놈들!’

‘그저 요즘 젊은 것들이란!’

‘이놈들아, 너희들도 나이가 들어봐라!’


그 신념대로 산답시고 기를 쓰고 살다보니 어느새 나도 꼰대가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외형만 그런 게 아니라 생각조차 이미 그리 되어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그래! 내가 생각해도 참 눈부시게 변신했습니다. 

세상이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는 몰라도 나도 잔소리라면 어디 빠지지 않을 중늙은이로 근사하게 현신해버린 것이지요. 

이제는 이고지고 가야 될 짐들이 생겼다는 겁니다. 부서지거나 깨지더라도 훌훌 날려버리면 그만일 혼자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만만찮은 것은 세월의 무게였습니다. 수백 수천 년 누적되고 퇴적되어 온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세월의 무게가 사실은 알고 보니 결코 만만하게 생각할 그것이 아니었더라는 겁니다.


그랬었구나, 세월 이기는 장사도 없지만 세월만한 장사도 없구나, 딴에는 대오각성 한 셈이지요. 

젊어서 약관의 나이에 대오를 이루고 뜻을 실어 펴는 대단한 이들도 없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착실히 나이 먹어 슬쩍 돌아보는 그 평범한 무게만큼은 결국 그만큼 세상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결코 실을 수 없는 무게였더라는 거지요. 세상에 남겨져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지혜와 철학들이 몇몇의 뛰어난 천재나 위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피고 진 그 모든 이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이루어놓은 삶의 퇴적이었더라는 겁니다. 

생활이건 예술이건 또 그 어떤 것이든 거장이나 대가의 그것조차도 꼭 특별한 누군가이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라는 걸 왜 몰랐을까요. 그 특별한 이들의 재능조차도 그들이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세월의 풍상이 바탕을 깔아주지 않았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만한 경지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왜 알지 못했을까요. 


늙수구리 적당히 세파를 헤치고 지나 온 그저 그런 이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들이 주는 그 그윽하고 평범한 경지에는 신동이며 천재들이 제아무리 반짝거리며 발버둥치고 밤낮으로 발사심을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심연이 있었던 겁니다. 결국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수긍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가치들은 정작 지나간 ‘꼰대’들이 빚어 놓은 것들이더라는 말씀이지요. 

등신같이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심신의 양식을 채우리라고 그 긴 세월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당연하려니 하면서 정작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삶에서는 그걸 대입할 줄을 어찌 그리 까막같이 몰랐다는 말인지.    


쉰 고개 언저리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내 생각에 조금 끼어 들 틈을 보았는지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넌지시 묻습니다. 나이 들면서 모가 많이 깎이고 둥글어 진 거 아냐고.


‘...  내사 원래가 원만하고 그랬지 뭘 그래.’


누구한테라고도 아닌 핑계 비슷한 소릴 애매하게 던져놓고는 얼렁뚱땅 외면을 하고 일어나버렸습니다. 뭐, 그래도 아주 모르쇠로 잡아떼지는 않았으니 모쪼록 양해를 바랄 뿐입니다.


꼰대, 웬만큼 나이 들어보니 그거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모르긴 하지요.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면 또 뭐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꼰대라는 단어는 참 그렇네요. 아무리 별로 쓸모없어진 나이 든 수컷이라 해도 그렇지 뭐 그럴싸한 다른 말은 없을까요. 세상에 그래도 그렇지 '꼰대'라니.


2003. 10.30


 

귀준이는 국민학교 동창생입니다.
키는 크고 주근깨투성이로 얼굴은 못생겼고 공부도 지지리 못했지만 싸움은 고아원 출신 떡대랑 자웅을 다투는 일 이등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귀준이가 싸우는 것은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거였지만.

어느 날 누군가가 귀준이의 구두 통을 훔쳐다가 교실에다 갖다 놓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싸움을 잘한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평소에는 늘 맨 뒷자리에 앉아 별 말이 없던 귀준이는 그 날 얼굴이 하얗게 질리도록 화가 났고 웅성거리며 쑥덕대는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놀랍도록 빠르고 조용하고 위협적으로 범인을 찾아냈습니다. 당연히 귀준이에게 붙잡힌 그 녀석은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 붓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러나 귀준이는 잠시 후에 눈물 범벅으로 쌍코피 터진 녀석의 손을 잡고 들어선 선생님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지요. 


나는 똑똑하고 착한 어린이였기 때문에 까닭 없이 모욕을 당하고도 오히려 공부 못하는 싸움꾼이라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귀준이가 불쌍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했고 코피 터진 채로 징징 울면서 교무실로 달려간 그 밉살스런 녀석을 나라도 좀 더 두들겨 패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싸움을 하지 않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참말로 그 녀석을 때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만족했습니다. 나는 적어도 때린 놈이 무조건 잘못했다거나 공부를 못하고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아니었으니까요.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이었으니까.


귀준이와 그리 많이 친하지는 않았던 까닭에 나는 귀준이네 집을 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귀준이는 겨울에는 딱쇠를 했고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했기 때문에 귀준이네 집이 무척 가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대문 앞 신작로 길에 평상을 걸쳐놓고 식구들과 부채질을 하며 모기를 쫓던 나는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길모퉁이를 돌아 나가는 귀준이를 언뜻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는 얼른 달려가서 도망치려는 귀준이를 억지로 끌고 왔고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를 졸라서 귀준이의 아이스케키 통을 홀랑 비워냈습니다. 그날 우리 식구들은 커다란 양은 쟁반에 그득하게 아이스케키를 쏟아 놓고 줄줄 녹아내리는 아이스케키를 참 많이도 먹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친구를 돕는 착한 일을 실천했던 나는 이상하게도 그 일로 인해서 귀준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싸움 일등인 귀준이에게 한 대 얻어터지는 일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그 이후로 귀준이가 나랑 같이 졸업을 했는지 어땠는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도상이의 어머니는 밀수품 보따리 장사였고 상훈이네 집은 넝마 재생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인숙이네 집은 구멍가게, 진식이네 집은 쌀집, 민재 아버지는 날품팔이였습니다. 그리고 귀준이는 철따라 구두통과 아이스케키 통을 번갈아 메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던 나는 천만 다행히도 딱쇠나 아이스케키 장사는 안 해도 괜찮았고, 그래서 조금은 깨끗한 옷을 입었으며, 학교에서도 착하고 똑똑한 척 할 수 있었습니다.

귀준이와의 추억은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많은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라고 달라지면서 제 자리를 찾아 앉았을 것이고 그리고 나 또한 나대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세월을 먹고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마도 단 한 번도 귀준이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던 이즈음의 어느 날, 불현듯 사소한 계기로 귀준이를 기억해 냈고, 귀준이를 기억해 낸 후 오래지않아서 그 날의 귀준이에게는 구두 통으로 장난치다가 코피 터진 놈보다는 같잖은 영웅심으로 아이스케키 통을 붙들고 식구들 앞으로 끌고 간 내가 훨씬 더 꼴 보기 싫은 놈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으로 허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은 모닥불을 쏟아 부은 듯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그 느닷없는 수치심으로 혼자 쩔쩔매면서도 그 옛날 그날을 다시 가 본다면 참말로 그랬을지, 아니면 나 혼자 생각만으로 또 다른 잘난 체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면할 궁리도 해보았습니다만 궁리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올 리도 없거니와, 어찌어찌 잔머리를 굴려 본들 이미 망가져버린 추억을 수습할 도리는 없었습니다.
차라리 그날 자존심 상해서 화난 귀준이에게 몇 대 얻어맞고 코피라도 터졌었더라면 착하고 똑똑한 줄 알았던 내 인생이 좀 더 솔직하고 개운해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만큼은 꿀떡같았지요. 귀준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과연 나와 그 때의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내 단골 이발소는 신신이용원입니다.
서너평 되는 홀에 이발소 의자 세 개 놓고 직원은 한 명도 없습니다.
반백머리 올백한 남편이 이발하고 오목조목 수더분한 아지매가 세발합니다.
수돗물 찰랑찰랑 시멘트 물덤벙에 구멍 열 개짜리 플라스틱 물조리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흔한 순간 온수기 아직도 안 쓰고 여직 솥에 불 피워서 물 데웁니다.
빨랫비누로 두 번 감고 샴푸로 한 번 감겨 줍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닥닥닥닥 면도칼 벼르는 가죽 피대도 달려 있었습니다.
요새는 없어져서 조금 서운하지만 가죽 피대 없어도 면도 날은 잘 듭니다.  
북적북적 비누거품 수삼년 된 두컵짜리 신문지 잘라서 어깨에 턱! 올려놓고   
성인 조발에 면도하고 스팀타올까지 9천원에 모십니다.

도끼다시 바닥에 3인용 고물 쇼파
만화책 열댓권에 신문은 중앙일보.
이 칠 장날 줄 잘 못서면 앉을 자리도 없습니다.

그래도 여름에는 에어컨 나오고 겨울에는 히타 나옵니다.
이발 하고 세발 하고 머리 털고나면 담배 한가치 줍니다.
얄부리 비싼 담배 에쎄 한가치 줍니다.
두달만에 이발 가서 이 참에 담배 끊었다니까

아이고 서애임 대단하니더. 끊을 수만 있다면 끊어야지요. 나도 당최 안끊어져서.
덥은데 이양 가실라능교.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더.
아니, 아니, 대답 들으나마나 아지매는 얼른 드가서 달디 단 진한 커피 한 잔 푸르르 끓여 나옵니다.

집에는 시원치요. 서애임 집은 산 밑에 동네라 밤에는 시원할끼라요.
우리집은 시내 아스팔트 길에 세멘 집이라 밤새 선풍기 돌아가니더. 엊그제 농장에 갔다가 밤에 산기운이 을매나 선하든지. 시골 노인들 촌에 살다가 도회지 아들네 가면 이양 세상 베리는 기 다 뜻이 있디더. 암만 돈 많다고 에어컨 바람 씌아서 졸끼 머 있능교. 나도 요새는 선풍기 바람에도 삭신이 시리서.

면도하느라 누워야 보이는 엽서 넉장만한 새 그림 물어보니

저 그림 말인교. 우리 아아가 그린기라요.
어려서 그리는 재주가 있더니 대학도 미대를 가고.

딸자랑 늘어지면 부리부리 눈초리가 가물가물 가늘어집니다.

지 잘 살면 됐지요. 나도 이짓 을매나 더하겠능교. 얼릉얼릉 키와서 시집 보내고 묵고 살 걱정 없거등 고만 접어야지요. 그래도 아직은 손이 안떨린께.

나보다 두어살 윗줄에 얼굴도 두툼하고
손도 두껍고 팔뚝도 두껍고 하다 못해 눈두덩도 두껍은 이발소 사나이
언제나 싱글싱글 그 얼굴이 그 얼굴 화 내는 꼴을 못보는데
반백이라 희끗한 저 머리만 아니면 제법 동안이라 대엿살은 족히 아래로 보겠는데
세상에 염색은 꿈도 안꾸는지 저 희끗한 머리는 언제나 길지도 짧지도 않게 꼭 그만큼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혹 이덕화처럼 대머리에 가발인가. 설운도도 글타더라.
행여나 만에 하나 그래보이지는 않더라마는 가발도 반백가발이 어디 있기는 있는지
만약에 가발이 아니라 제 머리라면 허구헌날 반질반질 올백 머리
아니, 중도 제 머리 못깎는다는데 중머리도 아닌 하이칼라 저 머리는 대체 뉘가 깎아주노.
새까만 파마머리 아지매가 깎아주나?
그것 참, 생각을 두다보니 벼라별 게 다 궁금타요.
내사 궁금커나 말거나 제 머리 제 알아서 깎든지 말든지. 참 별일도 다 있어.


 



여름 저녁나절 해거름녘에 느닷없이 부다다다 말방구 소리 들리고
신작로 길 자욱하게 소독 연기 솟아 오르면
골목에 술래잡기 하던 놈들,
빈터에 공차던 놈, 자치기 하던 놈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와와 따라 붙던 소독차.
이놈 시키들아 다칠라
대나무 회초리에 맞아도 일등은 좋은 것이야. 
혓바닥이 빠지도록 길게 빼어물고 목구멍에 단내가 나도록 죽어라 따라붙던 소독차.


자욱한 연기 동네 한 바퀴 돌 무렵이면 
헐떡거리는 다이야표 통고무신 잊어 먹고 동네방네 헤매는 놈,

앞집 순자 열 두살 간장종지 젖가슴 슬쩍 만지다 따귀 맞은 놈,

앞엣놈 뒷발에 걸려 자빠져 무릎 갈아 먹은 놈,
이런 놈 저런 놈 벼라 별 놈 다 있었는데

자욱한 소독 연기 속에 식은 보리밥 덩어리같이 둥실둥실 떠 다니던 옛날 그 얼굴들은 어디 갔을까.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번질번질 땟국 땀 바르고서
누런 이빨 히죽 웃던 기계충 먹은 까까머리들은 다 어디갔냐고.


부다다다 쌍나발 소독연기는 벌써 동구 밖으로 돌아나가는데
좀만것들아 발통에 깔리죽는다
트럭 뒤에 매달려서 회초리 들고 으르딱딱 가오 세우던 오주사 아저씨도 온데간데 없고
소독차 지나간 뒤 신작로 여기저기 흩어져 뒹굴던 다이야표 통고무신도 없고.

다 삭아서 구멍난 난닝구에 건들건들 마른 팔 흔들면서
뱃속에 회충 없앤다고 양껏 들이마시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시뻘겋게 참고있던 도상아 숭규야
전봇대에 이빨 박고 아아아 입 싸짊어진 민재도 없구나.

저거 얼마나 재미있는 건데 어째 저리 적막강산으로,

사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다다다 말방구 소리만 저 혼자 여전하고
자욱한 하얀 연기 속에 숭늉에 말아 놓은 식은 밥덩어리 같던 그 놈의 손들,
기계충 먹은 까까머리들은 온데간데 없네.

시부럴.
이 나이 먹어서 나 혼자라도 따라 달려볼까나 말까나.

진식아 상모야 다들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골목 어귀에 뒷짐 지고 서서 저 혼자 신나는 소독차 말방구 소리를 듣자하니
공연히 세월이니 뭐니 쓸쓸하기만 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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