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간한 빵집들은 명함도 못내민다. 가히 파운드 케익의 종결자다. |
그냥
빵
첫 경험
// 육칠십년대 거리를 주름잡던 국적 불명의 마이크로 버스
중학교 때는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이놈의 시내버스란 게 요새처럼 큰 버스가 아니고 요즘의 미니 버스보다 더 작은 마이크로 버스였습니다. 이 마이크로 버스란 물건은 중학생쯤만 되어도 똑바로 설 수도 없이 작고 낮은 버스라 아침 등교시간이면 마구잡이로 구겨서 밀어넣은 남녀 학생들로 북새기통이었지요.
그날따라 그 속에서 설 자리 잡느라고 비비적거리다보니 묘하게 이웃학교 여고생과 마주보고 딱 붙어 서게 되었는데 민망해서 어떻게 자세를 바꿔볼라해도 워낙에 콩나물 시루라 도대체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학생도 어쩔수가 없는지 서로 다른 쪽을 쳐다보며 외면한 채로 그 자세로 실려 가는데 우리 학교 앞에서 정차를 하면서 급정거를 했는지 차가 울컥합니다. 모두들 자빠지고 넘어지고 아수라장이 되었지요. 각중에 몸이 확 쏠리는데, 엔진룸 위로 여학생이 자빠지고 내가 그 위로 엎어져버린 겁니다.
그당시 버스들은 운전석 옆 가운데 앞쪽으로 엔진룸이 툭 튀어나와 있었지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세가 참 거시기하게, 하여튼 그런 자세가 되어버린 겁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랬는지 혼비백산해서 일어나는데, 차가 또 한번 울컥 하면서 이번에는 왼손으로 그 여학생 가슴을 정통으로 짚어버린겁니다.
큰일 났다, 어디, 어리버리하게 얼쩡대고 있다가는 뺨따구라도 한 대 맞을 일이로구나 싶어서 단추가 튿어지는 줄도 모르게 아주 총알같이 튀어 내리는데, 아이고, 그 복잡한 난리통에 고만 아뭇소리도 안들리고 눈앞이 캄캄한데도 거 참 희안한 것이 왼손의 그 포근한 감촉은 또렷하게 기억이 되더란 말이지요.
그래봤자 얼띠기같이 순진하던 시절이라 머리통에 땀이 바짝 나서는 얼렁뚱땅 애들과 섞여서 황망하게 교문으로 향하는데, 발바닥이 땅에 닫는지 마는지 머리끝이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어린 마음에 이거 참 사껀이다 싶은 생각도 들고 해서 친한 친구를 복도로 불러 내다가 숨을 몰아쉬면서 자랑을 했지요.
'자슥. 복도 만타!'
그 친구는 밑도 끝도 없이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탄식을 했습니다. 거 참. 그것도 뭔 복인지. 뭐 어쨌든 나는 그날 둥실둥실 구름 위에 떠서 하루를 보냈지요.
그 다음날 아침.
시내버스를 내려서 로타리를 돌아 교문쪽으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내 앞을 누가 가로막습니다. 보니, 어제의 그 여고생이었습니다. 어제 엉겁결에 지나쳐서 잘 몰랐더니 약간 상기된 얼굴이 꽤 이쁜 얼굴입디다.
아이고, 인자 나는 꽃피는 봄날인가보다. 그런데 연상의 여인도 괜찮을라나. 뭐, 사실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아침 그 바쁜 시간에 대로상에서 이놈 저놈 지나가며 다 기웃거리는데 그 여학생 대담하게 내 앞을 딱 가로막고는,
'너 어제 글마 맞지'
'.....응'
'자. 이거'
딱지 접기를 한 쪽지를 하나 줍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목덜미가 화끈한 것이 그 순간의 기분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몇반에 뉘뉘한테 좀 전해주라.'
'.................'
내가 댕기던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운동장을 건너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젠장.
'알았지!!'
'^&#$^$%@!$!@$!..........고등학교 들어갈라믄 무섭은데.'
'니 만날라고 여기서 한참 기다렸는데!'
'...........(아이 쉬..)......................'
아니 이런.
조금 이상한 협박 비슷하게 눈을 흘기며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얼토당토않은 그 백주대로의 희안한 공간에서 밀어붙이는 그 여학생의 부탁을 내가 들어줬는지 어떤지는 진짜로 기억이 희미합니다만 그 쪽지를 받아 든 것은 확실합니다. 특별한 사연이 없는 한 아마도 전해줬것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네 시작은 심히 창대하였으나 네 끝은 매우 미미하리라. 이런 젠장.
자의건 타의건(자의 반 타의 반이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내가 처음으로 여자의 몸을 만져 본 경험이었습니다.
첫 경험이지요 뭐.
///이전자전에 글자 그대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자료를 찾아 뒤적거리다가 저 위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 당시의 마이크로 버스와 그 여학생이 순식간에 연상되어 살아난 기억입니다. 이제는 그런 기억까지 공연히 가슴이 아릿하고 그러네요.
쓰면서 혼자서 조금 웃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서운한 웃음이었습니다. 세월이 참 많이 지났습니다.
때로는
때로는 그런 날이 있지요.
새끼들 다 건강하고 마누래도 별 탈 없고 나도 뭐 잘 먹고 잘 자고 괜찮아요.
세끼 밥 굶을 일 없고 냉장고에는 과일도 몇 개 뒹굴고.
으랏차차 날씨가 좋은날이면 투덜투덜 고물 차에다가 네 식구 담아싣고 산천경개 구경하러 더러 구불러 댕기니... 뭐 별일 없지요. 잘 있어요.
그러게 말이지요. 콧구녕만한 집구석에 별 걱정거리 없는데도 말이지요.
어쩐지 잠도 안오고 일도 손에 안잡히는 그런 날이 있잖소?
그래, 혼자 오밤중에 이런저런 토달고 앉았노라면 공연한 개똥철학이 오락가락 하는 그런 날 말이야..
어쩌다 생각해보면 기십년 살아온 그 인생 누구 건지 아리송 할 때도 있고
이날 입때껏 살아오면서 대체 어딜 갈려고 쎄가빠지게 열심하여 달려온건지 어리둥절 할 때도 있지요.
그래봤자 구구절절 콩팔칠팔 풀어노면 그거 뉘가 쳐다나 봐준다나.
지 입에 풀칠하기도 바뿐 세상에 남으 숟가락 세고 앉았다더냐.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고 그런 때도 있는갑더라 그러니 시거나 떫거나 대충 그리 여기소서 하는 심사겠지요 뭐.
이만큼들 살아봤으면 너나없이 대충은 알잖아요?
.......
작은 놈 곁에 누워서 졸리는 마누래는
아니, 밤중에 뭘 먹는다고 그러요. 밤중에 먹어 좋을거 읍는데 뭐 어짜고 잔소리를 해싸도
아이고 원수야.
잔소리좀 고만하고 오늘 같은 날은 그냥 혼자 청승 좀 떨다 자게 내버려 둬.
그저 이런 날은 냉장고 뒤져서 한 잔 마시고 곧장 뻗어버려야지.
스티븐 시걸이 부다다다 총질하는 그렇고 그런 뻔한 헐리우드 영화나 켜놓고 말이야.
인생이란게 말이야, 매사에 매순간마다 보람차야 하는 건 아니거든.
때로는 이런 무망한 시간이 지극한 평강일 때도 있는법이야. 어째서 그걸 몰라. 이 웬수야.
창문 열어봤자 창밖으로 들고양이 흘레붙는 소리에 머리카락만 삐죽 곤두서고
이런때는 어두운 마당에 나서서 담배한대 뿜어대면 좋으련마는 그나마 끊어버렸으니 재미없네요.
일없이 어두운 마당에 내려서봤자 오는지 가는지 대숲 너머 귀신새 소리 휘이 휘이 마음만 얄궂지.
뭐가 뭔지도 모르고 공연한 심사만 붙들고 앉았으니 혼자서 한 잔 마시고 투덜댄다고 해서 해결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밤새 다들 안녕하신지 안부나 물어보지 뭘.
대체 촌구석에서 어데다 다 쓰는지 한달에 육칠만원 전기세가 적잖이 거시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밤은 내사 모르것다 오디오 벌겋게 달궈서 한 곡 듣다 자야겠수.
뭘 들을지는 나도 몰라요. 메누리도 모르지 뭘. 곰팡내 나는 판때기들 이리저리 뒤져보면 뭐 하나 나오겠지.
눈물이 핑 돌도록 한 곡 찐하게 듣고서 인자는 자야지. 다들 밤새 안녕히들 주무시오들. 나는 좀 취했거든.
아, 그럼요. 별일 없어요.
멀쩡한 사지육신도 쓰다보면 몸살도 하고 그러는데
수십년 시들어 온 너덜너덜 사나운 심사도 때로는 지 혼자 몸살도 하고싶것지 뭘.
휴일 와병기
한 이삼일 전부터 감기가 왔는데...
칭병하고 드러누울만큼에는 좀 모자라고 그렇다고 멀쩡한 척 팔다리 걷어부치고 나서기도 좀 거시기하고.. 딱 사람 고단하기 좋을만치 그래요.
좀 많이 아프면 마누래며 새끼들한테도 애비 아프노라고 생색도 좀 내고 물 가져와라 약 가져와라 드러누워서 심부름 시키는 재미도 있고 살다보면 그것도 또 한재미 하기는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그래노니 지난 주에 마지못해 약속해놨던 교회 가족창도 못빼먹고 그래도 마침 오늘은 추수 감사절이라 교회에서 밥준다던데. 그래도 약속했던 노래라도 불러야 밥 한사발 얻어먹을 염치가 있지않겠냐는 애 멈마의 채근에 못이겨 네식구 꾸역꾸역 나가서 찬송가 한자락 부르고 투닥투닥 박수 한번 받고 가자미 조림에 매운탕에 한 상 잘 받아 먹기는 먹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아무래도 몸이 으시시한 게 기분이 별로 좋지를 안해요.
그래 좋다.
그럼 어디 오늘 한번 제대로 드러누워 볼까 염을 뒀더니 마누래는 또 붙잡아 놓은 약속이라고 휭하니 출타해버리고... 큰놈은 내일부터 기말고사라고 코가 석자나 빠져서 공부한다고 복대기를 치고 작은 놈은 디비디 켜놓고 쏙 빠져서는 정신 못차리고. 명색이 가장이 와병중인데 뭐 누구하나 들여다보는 코끄트머리도 없구나. ..아니, 도대체가 집구석이 계통이 안서요 계통이... 이 무슨...
에라 모르것다 그럼 아주 축수를 해서라도 골병이 들어볼까,
차는 마누래가 갖고 가버렸고 마음은 섭섭한김에 터덜터덜 들판길 걸어 건너 가 보니 날은 흐리고 바람은 불고... 스산한 빈 들판에 온갖 새들만 이리 날고 저리 날고... 에잇! 재미도 한개도 없구나. 고만 집구석에 들어가서 이불이나 뒤집어써야겠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집 지붕 위로 웬 놈이 빙빙 돌다가 공중에 못박힌드끼 딱! 멈추는데,
아뿔사, 저놈 저거 솔개 아니냐. 들판에 새가 많다 싶더니 한 마리 잡아 먹자 하고 망 보는구나 아니면 빈 들에 들쥐 새끼라도 노리는 건지.
내 어릴 때야 솔개가 하도 많아서 우리집 마당에 병아리 채 가는 것도 보고 그랬었는데 말 안듣는 놈 있으면 솔개가 확 채간다고 겁나는 소리도 더러 들었었는데 어디 보자 솔개야 너 거기 가만 그대로 있거라. 얼른 집에 뛰어 들어가서 사진기 들고 나오니 이런, 그 새에 제법 멀리 가버렸구나. 기념으로 한 방 박아 줄랬더니 그 새를 못참고. 멀리 내뺐으나따나 한 방 찍어서 기념으로 올려놓고지고..
그래서 컴퓨터로 솔개 사진 뺀다고 뒤적거리자니 전화가 한 통 왔는데 말이지요, 웬 영감님이 어디어디서 비니루 음반 좋은 거 많이 샀다고 뜬금없이 자랑을 하시는데 폴리니며 조지 쉘이며 클리블랜드에 제르킨에 칼리히터... 레미제라블.
시방은 멀고도 가까운 당신들이구나. 도대체 그 할배들의 그 소리들을 들어 본 적이 그 언제였더냐 그 영감님 염장은 제대로 질렀다. 타이밍이 절묘하구나.
형님. 좋은 판 많이 사셔서 좋으시것습니다아. 대충 들어보니 팔할은 건진듯 하옵니다아....
배는 아프나마나 멀쩡하게 덕담이야 했다마는 장유유서에서 밀리니 욕도 못하지 양반 체면에 얼굴 붉힐 수 있나.
머리는 띵하고 뼈마디는 쑤시고... 치사하게 비니루 음반 몇 장으로 염장 질렀다고 온순하케 칼쌈을 할 수도 없고...
그러게 아프다는 화상이 책상 앞에서 온갖 해작질에 온갖 간섭 다하고 앉았으니 이러니 아파도 대접을 못 받고 글치요 뭐. 그래도 명색이 와병 중인데 참 문병도 없고 안부 전화도 한 통 없고 말이지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그럴 수 있는거요? @@.. 늙어가면 그저 드문드문 얼굴 들여다보는 재미로 사는법인데 거참.
아니다. 앉아서 떠들고 앉았으니 와병이 아니고 좌병인가.
이렇거나 저렇거나 하여튼 나 아파요. 아프다고 자랑하는 거라니까.
큰 병이라오. 약 먹어도 잘 안낫는 병. 난치병이지. 감기래니까 감기.
무서운 사나이
어제 목욕을 다녀왔습니다.
볼 일이 있어 먼데 다녀 오는 바람에 목욕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씻고 불가마 들어가서 땀좀 빼고 나오니 한 시가 넘었습니다.
푹 삶겨져서 늘어져 있다가 인자는 샤워하고 집에 가야겠다.. 그래서 비누칠 한 번하고 개운하게 씻었습니다.
선풍기 앞에 서서 거울 보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지요.
내 뒤쪽에서 근육질의 한 사나이가 종이 컵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커피는 부어 넣었는데 저을 티스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나이 박력있게 바로 내 앞에 있는 귀지용 면봉 하나를 집어 들고 아주 능숙하게 커피를 저었습니다.
그러면서 선풍기 옆에 서있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 사나이와 잠깐 마주 보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순간 나와 그 사나이는 동시에 멈칫 했습니다.
그 사나이가 집어들었던 면봉 상자는 '사용 후' 상자였습니다.
숨이 멎을듯한 그 찰라의 순간동안 그 사나이는
면봉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매우 미묘한 표정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나를 힐끗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시바, 그냥 먹지 뭐.'
그리고 체중계 쪽으로 걸어가며 그 귀짓물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나서 종이 컵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는 옷장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착하게 살자' '一心' 따위의 상투적인 문신조차도 하나 없었으나
내 생전 그만큼 박력있는 사나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당분간 커피를 못마실듯 합니다.
날씨 탓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오래 메말랐던 겨울 대지에 꽤 심상찮은 찬비가 뿌리고 빗방울 따라 바람도 꽤 설레어서 그랬었는지도 모르지.
그 동네에는 왜 갔었을까. 오래 전 살던 그 동네는 이제 별로 남은 기억이 없는데. 낯 익은 문패는 더러 남아 있었지만 문패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는 내가 문을 두드려서 반겨 달려 나올 이도 없을 것을.
하루 내 내린 비로 젖어 주황색 나트륨 가로등에 검은 껍질을 드러낸 감나무며 얼굴을 부비면 얼굴조차 시멘트로 변해버릴 듯 냉담하기 짝이 없는 회색 압축 공법의 콘크리트 전봇대며 빗물에 젖어 더 음험하게 검붉어 보이는 빨간 벽돌 담.
그 곁의 깨끗하지 못한 개천조차 복개 하다가 도중에 방치 된 모양 그대로 모두 담합하여 내게서 등을 돌려버린 듯한 난감함에 잠시 두려웠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그대로를 눈에 담은 채 그 자세 그대로 운전석을 한껏 뒤로 젖혀 잠시 버티어보다가 이내 그 의미 없는 오기에 미련없이 감자를 먹이면서 얼른 시동 키를 돌렸다.
흐린 유리창으로 보이는 헤드라이트에 비친 무기질의 시멘트 담들은 비좁은 골목에서 나를 밀어내듯 앞뒤로 옹색한데 나는 그 옹색한 공간에서 낡은 내 자동차의 껍질에 흠집이 생길까 조심하며 용케도 차를 돌려낸다. 솜씨도 좋지.
공간에 비해 턱없이 큰 덩치의 짐승이 궁싯거리며 비비적대는 꼴은 절망적이다. 그것은 이미 그 짐승이 자존과 자유를 박탈 당하고 구속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나도 그런 꼴이었을까. 내 차가 네 발달린 짐승에 속한다면.
좁은 골목을 돌아나와 검은 들판을 가로질러 고르지 못한 길을 우당탕 덜컹거리며 달려서 바다를 낀 또 다른 마을로 들어섰다. 몸은 그 마을은 벗어 났으되 마음은 벗어나지 못해 어마지두 어쩌지를 못하고 그냥 맹목 바닷가 쪽으로 차머리를 돌려 댔다.
달리는 동안 빗방울은 부나비 처럼 하나같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향해 쏟아지고 미처 따르지 못한 놈들은 자동차의 앞유리창을 부딛고 죽는다. 모터가 부실한 와이퍼는 힘겹게, 그렇지만 매우 고집스럽게 그 시체들을 밀어낸다. 이런 날이면 늘 그렇지만, 참 권태로운 풍경이다. 그것도 밤이면 더욱 더.
온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히 가라앉고 오늘은 파도 소리조차 없다.
전봇대에 기생하는 갓 쓴 외등 하나만 빗줄기를 달고 서 있을 뿐이다.
그랬다. 그 때 전봇대 아래 갓 쓴 외등 불빛을 받고 있던 그 여자는 연인의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연인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시점에서는. 다만 그 여자는 온 몸에 아련한 연인의 냄새를 머금어 있었고 나는 다만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 전봇대 아래 신발을 벗어 두고 맨발로 해안선을 따라 걷던 하얀 종아리는 꽤나 색정적이었지만 나는 그 때 낭만적인 연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은 돈이었으니까.
약간의 술과 안주를 곁들여 한 두 끼의 끼니를 해결하고 그 다음으로 젖은 군복을 벗어 말리면서 으스스한 맨몸에 조금이라도 깨끗한 이불을 덮고 그 날 밤을 잘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꼭 그만큼의 돈 만이 필요했던 것이지.
실연이었지. 그것도 사랑이었다면.
바다는 비를 먹고 더 검게 가라앉아 낭떠러지 처럼 까마득할 뿐이고 이런 밤에는 새도 날지 않는다.
아니, 원래가 밤에는 새가 날지 않던가?
....무슨 상관이냐고. 새야 날건 말건.
//갯펄에 주저앉은 갈매기를 구워 먹겠다고 생으로 털을 잡아 뽑던 잔인한 놈.
대검으로 목줄기를 관통 시켜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듯 근육질의 말대가리처럼 절망적으로 완강하던 싸리섬의 고참 하사.
지금 네가 내 눈앞에 있다면 이제는 내 손에 죽는다. 그 때 네 손아귀에서 생으로 털을 뽑히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똥갈매기처럼 단말마로 괙괙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죽어 갈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때는 간파하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그 때 네놈이 기대고 서 있던 그 힘의 정체를 알았거든. 그 허약하기 짝이 없는 뒷배를 말이다. 그것이 세월의 힘이다. 이제는 이름도 잊고 얼굴도 잊었지만 언뜻 뒷모습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네 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지. 그러한 존재들의 맨 앞줄에 서서 잔악함의 실재를 싸우는 개처럼 목덜미를 부풀려 내게 각인 시켜 주었던 덕분에 말이다. 죽일 놈.//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라디오를 켰다. 낯 익은 선율인데 불현듯 가슴을 적셔오길래 끝까지 들어야만 했다. 레스피기의 모음곡.
결국 세상은 순간의 선택들의 연속인가 보다.
내가 그대를 잊지 않으려 메모를 하려던 참이었지만 결국 당신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레스피기가 내 가슴 속에 먼저 들어와버렸다.
그래. 그건 절망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야. 까까머리 시절 그토록 못잊어 가슴 설레어 짝사랑하던 그 아이. 차마 고와서 손 끝하나 댈 수 없을 것 같아 말도 한 마디 못 붙여보고 몇 달을 생가슴만 앓던 그 아이가 어느 날 동네 양아치같은 지저분한 놈들과 히히덕거리며 집 앞을 지나가던 날 나는 알았지. 세상사가 대개 그렇듯이 더우기 여인네는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걸. 또한 필요에 따라서는 겉만 봐야 한다는 것을.
그 때의 낙심과 허망함은 오히려 그 아이를 잃었다는 상실감보다는 세상의 알지 못할 이치와 어쩌면 그것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의 굴레에 대한 슬픔이었지.
고주망태가 된 육군 졸병 곁에 꼭 붙어 앉아서 끝끝내 손을 놓지 않던 영하. 뭔가 사연이 있어보이는 술집 아가씨와 치기 만만한 로맨틱 육군 일등병이 영화에서처럼 맺어졌더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하지만 로맨틱 육군 일등병과는 달리 그 술집 주인은 로맨틱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였던 모양이라 그날 밤의 섬싱은 낫싱이 되고야 말았지만 그날 외박나온 군바리 친구를 하룻 밤 맺어 줄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술집 주인과 싸우던 내 친구는 지금도 참 고맙지. 아마도 그 날 영하와 영화처럼 맺어졌더라면 지금 내 곁에 앞치마를 두른 영하가 날 닮은 아이들을 재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 한 번 맺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때였으니까. 흐흐.
글쎄 무슨 말인지는 나도 몰라. 아마 오늘 밤새 내릴 듯한 이 놈의 심상찮은 겨울 비 때문인 듯 한데
거 참, 무슨 심사로 가슴은 덜거덕거려서 오래된 영사기 돌리며 먼지 털고 앉았는지.
그래도 상처는 자랑하되 아까징끼는 바르고나서 보여야지. 시뻘건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까뒤집고 나 이만큼 다쳤노라고 동네방네 외고 다닌다면 자상을 입은 상처의 모양은 굳이 세세히 관찰 할 수 있겠으나 그게 피아에 반드시 무슨 득이 되겠냐는 말이다.
적당히 치료를 하고 약도 바른 연후에 절반이나 아물거든 그 때서야 내, 모일 모시에 이런저런 연유로 상처 하나 얻었노라고 차분히 뇌까리자면 고개 끄덕일 여유도 있을 것이고 어디보자 붕대 감은 팔뚝을 매만져 볼 마음도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말하자면,
어젯밤의 그 화려했던 술자리를 회상하려면 번지르르하게 채색되어 오고갔던 기름기 섞인 인사 말씀이라든지 혀끝을 자극하던 옥반 가효며 불현듯 코 끝을 스치던 어느 여인네의 분 냄새라든지 때때로 드물게나마 주먹을 부르쥐던 고담준론들을 떠올리며 지그시 감은 눈으로 완상하면 될 일이지 구태어 손가락을 목구멍으로 집어 넣어 토악질한 오물을 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덜 삭은 술과 안주를 분석해야 할 절박함은 어지간만 하면 없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원, 그렇다고 삼대구년 지난 기억을 끄집어내서 고름딱지 떨어져나간 자국 들여다보며 뭘 하자는건지.
난들 아나. 그냥 날씨 탓이라고 대충 뭉개어놓고 말지 뭘. 그러게 사람이란 짐승은 철들만 하면 저물어 가는지.
그래도 그리 어리석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제 앞길 훤히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끝끝내 그 인생 꾸역꾸역 살아갈 사람 몇이나 될까.
그러니 한 치 앞도 모르고 또 살아 보는 거지. 그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너도 속고 나도 속고...
좋은 전화번호 팝니다
일단 번호가 좋습니다. 0*4*3*2*1*
안보이는 글자는 모니터에 침발라서 박박 닦아내면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 더해서 짓고 버리면 따라집니다. 고로, 섯다판에서 고민할 필요없이 바로 죽으면 됩니다.
그 외에도 일단 재수가 수시로 좋아서 자주 당첨되는 번호 올습니다. 심심할만하면 전화벨이 울립니다.
리리리~
여보시요.
축하합니다. 당첨 되셨습니다. 빰빠라빰~
딸깍.
리리리~
여보시요.
금번 우리 인삼 영농조합에서는.....
딸깍.
리리리~
여보시요.
안녕하세요 이번 모비씨 방송국 사은 행사에서.....
딸깍.
리리리~
여보시요.
안녕하세요 여기는 니서치내서치 여론조사 팀인데 대체 당신은 몇살이며 남잔지 여잔지...
딸깍.
리리리~
여보시요.
안녕하세요 한국겔포스 여론조사 상황실인데 당신은 핵폐기장을 엇다 팔아묵는 것이 좋다고...
딸깍.
리리리~
여보시요.
아! 박서방이가! 내 금수이 아부진데......
딸깍.
리리리~
여보시요.
누고?
.......내다!
딸깍.
리리리~
여보시요.
거 어데요?
.............우리집이요!
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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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돌릴 새 없이 바쁠때 이런 전화 한 번 받으면 아드레날린이 대량 생산됩니다. 짜 내서 장에 내다 팔면 돈 될지도 모릅니다.
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색깔의 기억이 슬슬 올라옵니다.
이삼십년 전에 시외버스 타면 기사 올라오기 전에 삼인조 선수가 얼른 올라옵니다.
....바쁜 여정에 잠시 광고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첨단 반도체 기술로 국위선양에 앞장서고 있는 모렉스 시계 홍보 팀으로써......
..중략.......(표쪼가리 하나씩 나눠주고...)
저기! 안경 낀 할아버지 당첨 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시계는 무료이며 제세 공과금 이만 오천원만 내시면 싯가 십오만원의 모렉스 시계를 드리겠습니다! 아! 예! 저기 뽀골머리 아주메도 당첨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보도시 해방되어 인자는 출발하나 싶으면 중간 정류장에서 꼭 하나 올라옵니다.
....안냐심까. 저는 모년 모일 신문지상에 보도 된 꽃제비 나이트크럽 칼부림 사껀에 연루되어 멫년간을 복역하고 엊그지 출감한 깡 모시기라고 합니다.
....중략.......
이를 악물고 착실히 살아보려 했으나 사회의 질시와 냉대에.....(슥 한번 둘러보고)
.....중략.......
여기 이 고급 볼펜 한다스를 이천원씩에 사 주신다면.....(모른 척 팔뚝에 문신 한 번 보여주고)
만약 여러분이 외면하신다면 이 사람 또 다시 어두운 뒷골목에서 지나가는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을 노리게 될지도 모르는......
..........이런 조옷도....협박이잖아...... 뭐 어쨌든 오십원짜리 모나미 볼펜 한다스에 이천원씩 받아먹고 ..... 헐렁한 레자가방 들고 유유히 내립니다.
볼펜 장사는 요즘 잘 안보이지만 그 시절 시계 장사랑 요즘 전화통 붙들고 당첨 장사하는 거시기들이랑 많이 닮았습니다. 참 촌스럽고 낯 간지러운 수법입디다마는 수십년이 지나도 이런 수법이 남아있는 걸 보면....아니 오히려 더 창궐하는 걸 보면 촌스럽기는 해도 썩 괜찮은 아이템인 모냥입니다. 아니라면 이나라 백성들이 아직도 그만큼 순진하다는 건지 어리석다는 건지.
아, 그거요?
시계는 나도 두어 번 당첨 되어 봤지요. 이거 그냥 세금은 은행 가서 내고 시방은 그냥 가져 가면 안되겠냐고 물어 볼라다가 삼인조한테 얻어 터질까봐 암말도 못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볼펜 역시 한 번도 안 사봤습니다.
사실 좀 꿀리고 켕기긴 하던데 못 이겨서 샀다가는 내 못된 소가지가 더 켕길 거 같애서 안사고 버텼습니다. 안 산다니 스윽 째려보기는 합디다만. 뭐, 늬가 볼펜 한타스때매 종점까지 가것냐 똥배짱으로 뭉개고 앉았노라니 못 마땅하나마 그냥 갑디다. 뭐 지가 내 따라서 먼 데까지 갈 일은 없었것지요 뭐.
한동안 당첨 됐다는 전화가 뻔질나게 와 쌓더니 근래에는 좀 뜸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 들어 다시 잦아집니다. 어제 오늘 연거푸 세 번을 받았는데 그 중 두 번이 같은 데서 걸려 온 전화라서 그냥 암말도 안하고 아까 오전에도 전화 왔었지요........했더니 그 아가씨도 멋적은지 피식 웃으면서 안녕히 계세요 하고 그만 끊습디다.
짜증도 나고 우습기도 합니다만 세상이 여기저기 많이 어려운 모냥입니다. 다들 굳건하게 버팁시다.
그건 그렇고 전화번호 안사실라오?
........좋은 번호 놓치시면 손해를 보심은 물론이고 여러분의 외면으로 이 사람 다시 어두운 골목길에...... ......새끼들 데리고 가서 오뎅이나 사 먹고 와야지요 뭘.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