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사는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호가 장가를 갔단다, 처녀 장가란다.’
‘다 늙어서 장가는 왜 가지?’

실없는 소리로 몇 마디 웃다가 소식 주고 받다가 그 친구는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와 통화를 한 끝이라 조금 마음이 들떴었나보다.
책상에 꽂힌 명함들을 뒤져서 서울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설 잘 쇠었냐. 한 살 더 먹었구나.‘
'그렇구나. 너무 빨라서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야기 못 들었지. 신경이가 죽었다. 얼마 안 됐다.'
'!.......'
'혈액 암이라던데 외국 있다가 들어와서 얼마 안돼서 그리 됐다.'
'.......'

몇 마디 탄식 끝에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갔다.
작은 놈은 피아노 두껑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고 애 엄마는 이불 감고 앉아서 책을 본다. 큰 놈은 밤늦게 뭘 하더니 아직 자는 모양이다.

아직 우리는 살아 있구나.
죽은 친구의 아내나 아이들은 본 적이 없다만 평범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는 지금 우리 집 거실 풍경도 그들에게는 다시 찾을 수 없어 피눈물 나는 추억이겠지. 언젠가는 너 나 없이 누구나 다 그리 될 테지만. 세상에 오고 가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나이 들어가면서 더러 이런 말을 전해들을 때면 한없이 쓸쓸해진다.

사는 것이 다들 분주하니 세세한 소식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대학 동창이라든지 누구누구가 어쩌다 세상을 떴다더라는 말들은 몇 번 들었었다. 그 때마다 그 친구들과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들의 귀퉁이가 조금씩 부서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이른 세월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조금씩 다 부서지고 나면 뭐가 남아있을까. 아니면 내가 먼저 친구들의 가슴 귀퉁이를 마모시키며 먼저 떠나게 될까.

'깨끗이 치워놔도 어질러지지를 않아서 쓸쓸해요.'

누군가가 그랬단다. 마루바닥이 반들반들하게 치워놔도 먼지만 곱게 앉을 뿐 다시 어지러워지지를 않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어질러 진 것 치우고 사는 게 넌덜머리가 나는 인생이라 그 무슨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소릴 하냐고 눈을 치뜨기는 했다만 그 말 들은 지 며칠 만에 그 말이 새록새록 다시 생각나는데, 아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것이 아주 빈말은 아닌 것 같아서 새삼스럽다.

어질러지지를 않는다는 것은 저지레를 할 아이들이 없거나 아니면 아주 장성하여 제 앞가림 제가 다 할 만큼 잘 키워놓았다는 역설도 되겠는데, 그렇네. 어린놈들과 싸우며 다투며 쉴 새 없이 치우고, 이놈아 그만 좀 어질러라, 집구석이 이게 뭐냐 치우다가 지쳐 늘어져서 혀를 석 자나 빼 물고 지청구를 하다 보면 글쎄, 입가에 기가 막힌 웃음도 같이 물리는 수도 없지 않으니 그것도 그럴싸한 행복이라고 수긍을 해야 할까. 이만한 나이에 남 다 가진 그 놈의 행복 나만 가졌다고 동네방네 유세하고 자랑 할 일은 아닌 듯 한데.

얼마 전에 세상을 뜬 그 친구는 가족과 함께 가졌던 행복을 다 갖고 떠났을까.
아니면 어떤 행복을 남겨두고 갔을까.
행복이란 것이 공유했던 사람이 떠나면 그 자리에서 모두 소멸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시 싹이 돋아서 조금씩 그 사람의 떠난 자리를 메우고 지우는 것일까.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조금씩 지워지고 무디어져야하는 것이겠지만
그럼 떠난 사람은 잊혀지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일까.

지친 육신을 땅에 눕히고 아주 떠난 사람들은
이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안식을 찾은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격리 된 것일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세상에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서 가족보다 먼저 가고 싶다던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먼저 격리되는 것은 두렵지 않은 일일까.
생명은 왜 일회용일까. 왜 한 번 더 고쳐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일까.
삶이니 행복이니 그런 진부하고 흔해빠진 단어들이 가슴에 낙인처럼 아프게 각인 되는 날이다.




이날 입때껏 나는 나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무엇에 관심을 두고 무엇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는지를 모른다. 아니면 천성이 게을러서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도무지 귀찮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보면 매사에 그 때 그 때 순간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미지만으로 혼자 기초도 없는 공중누각을 짓고 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나는 일단 웅크리고 앉으면 표정이나 행동거지만 봐서는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다면서 니 노선이 뭐냐 정체를 밝혀라 그런 말을 더러 듣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포커페이스라는 이야긴데 아마도 살아 온 세월동안 이리저리 다치고 넘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습득한 방어본능이리라 짐작만 하고 있다. 다만 내가 직접 연관된 사안에는 포커페이스는 백리나 천리나 멀리 벗겨져 달아나버리고 도무지 중심조차 못 잡고 허둥댄다는 것은 일단 비밀이지만, 어찌됐든 나는 겉보기에 참 재미가 없고 닝닝한 사람이다.

무슨 신기한 볼거리가 있어 저것 좀 보라고 다들 난리법석 야단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멀거러니 응 그렇구나 하고 맥 빠진 반응으로 일관해서 김을 빼버리기 일쑤고 온 나라가 들썩이던 축구나 야구를 볼 때도 가슴 속은 조마조마해서 자반 뒤집기를 하는데 겉으로는 도무지 표정이나 말로 나타내지를 못한다. 일부러 그런다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된다. 그러니 남들이 볼 때는 도대체 열정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밖에.

하지만 나 혼자 몰래 열어보는 가슴팍은 일없는 바람에 온 밤을 혼자 서성이기도 하고 인적 없는 골짜기의 마른 가랑잎처럼 저 혼자 풀썩 뒤집히기도 하는, 나름대로 나 홀로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다만 때에 따라서, 혹은 경우에 따라서 그런 변화를 섣불리 내보이기 싫어한다는 것 뿐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가슴팍까지 버썩 메말랐다고 손가락질 하지는 말자.

누구나 마찬가지로 나 또한 세상을 보는 기준을 나름대로 가지고는 있지만 나는 큰 줄기로 봤을 때 만사를 유기체로 이해하는 습관이 있다.
요 수삼년 안에 나라가 들썩일만한 일이 정치판에서 더러 있었다. 그 요란한 난리벅구통을 멀거니 지켜보면서도 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데도 일단은 크게 열성이 없었다. 그저 그 당시의 내 의사에 따라서 어느 한 쪽에 투표를 하든지 기권을 하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는 무효표를 만들어서 나름대로 야유를 하는 것이 내 정치 성향의 거의 전부다.

당시의 내 상황이나 오락가락하던 상태에 따라 사보타지를 하기도 하고 일단 머리부터 디밀며 쇠고집을 부릴 때는 있어도 나 또한 다중 속의 한 세포에 불과한 존재이므로 머리통이나 팔다리가 가자면 가고 서자면 설 수 밖에 없는 것이 소시민의 가장 온순한 삶의 형태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꼭 맞는 지도자를 선택한다.'
얼마나 멋진 말이냐. 개살구 민주주의에 관한 한 내가 금과옥조로 받들어 모시는 금언이다.

좋다, 저 놈은 분명히 때려죽일 놈이니 저 따위가 선민으로 뽑힌다면 멀쩡한 내 손에 장을 지질 것이라거나, 오로지 저 근사하고 멋진 놈을 보필하여 위대한 역사 창조에 일생을 걸어보리라, 뭐 이런 시나리오는 내 사전에는 애시당초 택도 없는 이야기란 거다.
혹시나 그렇다면 결과론에 기대어 면피를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 또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열정이나 의로움도 없이 흥타령이나 하고 자빠져서 이삭줍기나 하는 잡배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하지만 나도 젊어 피가 끓을 때는 같잖게도 뭔가를 도모해본답시고 꿍꿍이를 굴려도 보고 시대에 절망하여 소주병 꿰 차고 울분으로 밤을 하얗게 새어도 보고 그러다가 시껍을 먹고 꼬랑지가 빠져라 내빼기도 하고 뭐 그저 그런 남들 만한 청춘도 겪어 본 적은 있다.
다만 어느 한 시점에서 나름대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놈의 물 큰 정치노름판에서 오랫동안 얼쩡거리는 놈들은 그 심도의 차이가 다소 있을 뿐 일백 이십 프로 도둑놈 아니면 사기꾼이라는 가열찬 확신을 뼛골에 깊이 새겨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도둑질을 하건 사기를 치고 댕기건 내사 그럴 수 있는 재목도 아니고 능력도 없으니 도둑놈이건 사기꾼이건 제 식구들 먹여 살리는데 소홀하지만 않으면 가장으로 인정하겠다는 기특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사나희 이 세상 태어나서 한 살림 듬뿍 챙기고 싶거든 욕바가지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그 판에서 초지일관 얼쩡거려 보든지,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거든 잘난 체 흰소리 지껄이고 사는 대신 다소 배고프게 살 각오를 해야 한다.
흑묘든 백묘든 딴 짓 하지 말고 쥐나 잡으란 이야기다. 걸레쪼가리 같은 정치판에서 정의나 이상 따위를 기대하는 얼빠진 생각은 최소한 하지 않겠다는 각성이기도 하고. 

아, 그렇지만 지금도 그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적지 않은 성원을 보내는 이들을 폄하하거나 업신여긴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만약 그 중 누군가가 날더러, ‘이 비겁하고 게으른 자야 너는 왜 위대한 역사 창조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거룩한 비난을 날린다면 나는 그에게 되묻고 싶다. ‘아침은 챙겨 드셨습니까?’ 

늬들이 존중받고 싶으면 늬들도 나를 존중하라는 이야기다. 먹고 살고 새끼들 기르고 하는 일에 궁리를 하다보면, 그 자질구레한 먹고 살기나 새끼들 기르는 일이 그놈의 위대한 역사 창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때때로 내게 골치 아픈 화두를 던지는 오디오만 해도 그렇다.
오디오라는 마물에 마음을 빼앗겨 삼십년 가까이 귀신 나올듯한 고물딱지들을 주물딱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태 내 취향이 어떠하므로 나는 반드시 그 소리를 향해 일로매진해야 한다는 그런 줄기가 아직 없다. 환경적인 여건이나 경제적인 이유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지간만 하면,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다. 다만 생긴 것에 많이 좌우가 되는 편이라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인이나 내 기준으로 가벼워보이는 물건은 아무리 소리가 좋아도 일단은 눈 밖에 난다.

물론 소리를 가리는 취향도 아주 없지는 않아서 늘씬하고 미끈한 소리보다는 조금 삭은 듯한 조금은 까칠까칠한 소리를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앞이건 뒤건 그 질만 우수하다면 싫어할 이유는 없다. 다만 어느 것이 조금 더 낫다는 정도에서 그치는 거지.
오히려 그러한 차이보다는 한 곡 얹어놓고 자다 깨다 눈을 들었을 때 내 시각적 욕구를 저으기 만족시켜주는 그런 편안한 색조나 질감, 적당히 감각 친화적인 모양들에 좀 더 민감한 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일까?

뭐 그렇더라도 싸구려 티가 역력한 천편일률 날림공사 판넬을 쳐다보고 있느니 나는 차라리 삐걱삐걱 고물딱지라도 감격시대의 그윽한 정취가 가득한 한 시대 이전의 쇳덩어리를 보듬고 사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생긴 것이 고만고만하고 무게가 그럭저럭 하다면, 그리고 좌우의 발란스가 깨지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만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다. 나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래도 어쩌다가 더러 한 번씩 뜬금없는 고집을 부리자 하면 주변 사람들이 복장이 무너져라 가슴을 칠만큼 어구쇠로 불통이기는 하다. 그것이 매우 보편타당하고 불편부당한 그런 만고불변의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 생각만으로 혼자 밥통을 굴려서 만든 고집일 경우에는 거의 반드시 삶의 한 귀퉁이가 너덜너덜 넝마가 될 때까지 끝을 보고야 만다. 한 번 꽂히면 모두 다 던져요.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는 말이다. 하긴 그 고집도 나이 들면서 웬만큼 무디어지고 마모가 되기는 했지만.

이 나이쯤 되면 내 맘대로 못한다. 내가 세상에 내 놓은 새끼들이 눈앞에 밟히면 그게 뭐든 끽 소리 못하고 접어야 한다. 발등에다 못을 박아놓고 싶어도 안돼요. 거기다가 살아 온 세월도 이고지고 가야하니까. 그러게 어느 날 한밤중 조용한 시간에 지나간 세월들이 나를 돌아보며 슬쩍 말을 걸더라.

-이것 봐, 온갖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누적이 만들어 낸 평범함의 무게가 장난인줄 아나? 그대의 지금의 고단하기 짝이 없는 꼬라지도 그 쓸데없는 똥고집의 파편에 부상을 입은 결과일지도 모를걸.-

하기사 그 무게에 납짝 깔려서 압사 당하지 않은 것 만해도 천만 다행인 일일 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나는 아직까지도 도대체 내 주된 관심사를 모른니다. 모른다는 것이 나를 찔러대거나 닦달 하지 않으므로 굳이 알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지만 생각의 저 밑바닥에서는 막연하나마 어떤 종류의 자괴감이 없지는 않다.
아직은 좀 더 살아가야할 이 세상에 내가 몸과 마음을 던져서 진력해야 할 그 무엇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나그네처럼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일까?

아니, 의식주나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에 관련한 삶의 당연한 명제는 일단 제껴 두기로 하자. 먹고 사는데 관계된 거룩한 일상이야 다시 말 해 뭐 할까. 그것마저도 다 던져버리고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방담을 하자면 잡배건 위인이건 간에 어지간한 경지에는 올라서야만 보도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뉘가 모르겠냐고. 
혹 조금 안다 치더라도 삶이란 것이 글이나 말로 풀어내기에는 너무 벅차지 않느냔 말이지. 아니면 뒷심이 딸려 그냥 모른 체하는 것일 수도 있고.

 


뭘 해도 손에 안 잡히는 날이 있다.
앉아도 선 듯 서도 앉은 듯 까닭 없이 가슴만 설렁거려 서성거리기만 하고.
요 며칠 그래.
그냥 그런 날인가보다 뭐 그리 생각은 하지만. 왜 그런지는 나도 몰라. 

날은 가고 또 오고, 그리하여 낮과 밤이 합하여 하루가 되고.
또 하루 이틀 지나가고
눈 감은 새에 찾아오는 세월은 하나 둘 어깨에 무겁게 내려 앉을 것이고.
보내지 않으면 기다림도 없고 기다리지 않으면 내일도 없지.
세월은 본시 온전한데
가없는 무단한 세월을 쪼개고 갈라 붙여 줄 긋고 사는 것이 사람의 삶인 것이지.

봄은 아직 올 생각 없는데 나는 봄을 어찌 보내나 벌써 숨이 차다.
또 한 고비 크게 굽이쳐 꺾여지나 보다.
세월이 내게 오고 가는 것일까 내가 세월 속에 왔다 가는 것일까.
까닭없이 억이 막히면 어디 외진 곳 찾아 가서 아이처럼 악악 울어버릴까.
나이 들어 뭔 짓이냐고 흉 될까.
그러게 나이 들면 흉 될 일도 참 많아. 남이사 울든 말든.


.........

날씨가 추워지려는지 제법 큰 바람이 분다. 바람 설겆이를 하러 나갔더니 바람에 동네 뒤 대숲이 우수수 눕고 난리가 났는데 웬 참새들이 옆집 텃밭에 오글거리고 있다.

전선 위에 앉은 놈들은 바람을 못이겨서 고개를 돌리고 자세를 잘 못 잡은 놈은 깃털이 뒤집혀서 아주 스타일을 구겼다.
 
꾀 많은 몇 놈들은 이웃집 텃밭에 내려 앉아 두릅나무 끄트머리에 조롱조롱 달렸다. 

새들은 바람이 불면 모두 한 방향을 본다.

아마도 깃털이 뒤집히는 것이 싫어서 그런가보다 짐작하지만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어쩐지 새들이 바람이 불어 오는 곳을 보고 뭔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 본다.
뭔 쓸데없이 감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살면서 또 어느만큼은 부러 감상에 젖어보는 것도 뭐 어떨까봐.
내일은 추워진단다. 다시 추워질 바람이라 그런지 오늘 바람은 많이 신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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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꼬맹이랑 애 엄마가 '설거지'로 써야한다고, 것도 모르냐고 잔소리를 한다.
몰라서 그리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예전에 쓰던 대로 고집을 부려 본 것임.
'장맛비'라든지 '무'라든지 이런 경우와 같이 절실한 이유도 없이 말과 글을 뜯어고치는 짓들을 싫어해서 그렇기도 하고 
어법상으로도 '설겆이'가 맞다고 생각하는 고집불통 구닥다리라서 그렇다 왜.  



사무엘 바버를 올려놨다가 아차 싶어서 금방 꺼버리고 TV를 켠다.
밑도 끝도 없는 섹스 앤드 시티. 재미없어서 돌려버린다. 

이건 또 장총 들고 뛰어 다니는 구식 전쟁이네.
그렇고 그런 미국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느끼는 미국 놈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섹스, 돈, 주먹, 전쟁, 그리고 죽으나 사나 저그 나라 만세다.

게다가 이놈들은 길 가다가, 구두 사러 갔다가, 밥 먹으러 갔다가, 오줌 누러 갔다가, 

어디서든 배꼽 높이만 맞으면 아무데서나 한다. 무슨 개 아들 딸도 아니고.
화장실에서도 하고 차 안에서도 하고 길바닥에서도 하고 엘레베이터에서도 하고.
저런 드런 놈들. 

일생 살아가다 불같은 사랑을 하나 만나서 목숨 걸고 저질러 보는 건 차라리 처절하기라도 하다지만. 이거야 원.


안주는 냉장고 뒤져서 찾아 낸 반찬 토막들이다. 

빈속에 일단 한 잔 부어 넣어보니 식도부터 찌르르 한 것이 황홀하다. 이 맛에 겨울 소주를 마시는 거지. 여름 밤 독작처럼 비질비질 덥지도 않고.


밤에 혼자 술을 마시면서는 이제는 나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거의 절대로. 

생각에 빠지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 

아니, 생각에 빠지는 것이 무서워서 그렇다. 

어떻게든 눈을 번잡하게 해 두어야 잡생각이 덜 끼어 든다. 하다 못해 간장게장 홈쇼핑이라도 켜놔야 생각이 흐리멍덩해진다. 눈을 닫고 귀만 열어놓았다가는 뇌세포의 급격한 신진대사로 수명이 짧아진다. 생각에 치어서 죽고 싶은 때가 오기 전에는 이제는 아마도 이 버릇 안 바꿀 걸.

술에 조금씩 빠져들면서 브람스의 추락하는 클라리넷을 듣는다든지 퍼셀의 그라운드 따위에 중독 되면 

그만 억장이 무너지지. 

듣고 있노라면 기억이나 추억을 자극하는 노래나 파퓰러들은 좀 더 직설적으로 심장을 상하게 하고. 

아는 거 몇 개 없는 올드 팝이나 싸구려 감상 자극하는 베스트셀러 얹어 놔 봤자 그것도 득 되는 거 없고. 


하기야 음악마저도 없다면 더 야단이다만. 적막강산에 기억이나 생각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눈이 휙 돌아가 그만 사단이 날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제는 그런 것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사실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머리를 대패질하듯 부대끼는 일상에 묻혀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던 별별 기억이나 생각 가닥들이 알콜에 녹아서 흐물흐물 번지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 돼. 때로는 취한 김에 이대로 미친 듯이 달려가서 확 그냥 일 저질러버릴까. 그런 생각도 들고.
저지를 것이 뭔지는 나도 몰라요. 그냥 요즘 들어 사는 데 대한 기준이나 생각이 많이 바뀌고 흔들려서.
그러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깃발이 솟기도 하고 불 안 땐 굴뚝에 연기도 나고....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눈 질끈 감고 확 그냥....

아서라, 뒷감당은 어찌 할라고.


그러게 뒷감당 걱정할 정신이 있다면 애초에 저지르지도 못해요. 순전히 말만 동학당이지.
어쨌거나 하건 말건 간에 생각만으로도 사람이 상하니까.
그러니 모쪼록 건전하고 유쾌하게 살아야지. 결사적으로 유쾌하게. 눈물이 팍 쏟아지도록 행복하게.
 ....흥. 지나가던 개가 다 웃는다.


다시 영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속전속결 헐리우드 영화를 좋아한다. 질척한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탐미적이고 집요한 잉크 빛의 예술 영화라든지 제 3세계의 수준 높은 문화 영화들은 함량에 버겁다. 

그렇다고 걸핏하면 슝슝 날아 댕기는 중국영화는 취향이 아니고. 

그래도 혹시나 여자 주인공이 아주 멋지게 예쁘면 그것도 간혹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를 보라. 그 얼마나 재미가 좋은가.
때리고, 부시고, 죽이고, 보너스로 틈만 나면 아무데서나 거시기를...
게다가 첨단 하이테크가 빚어내는 그 현란한 영상까지.

그리고 다 보고 난 뒤에는 적어도 한 시간 이내로 그 영화의 내용이나 인상은 의식에서 지워진다. 그런 영화를 보았노라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가슴 속에 뭔가 질척한 것이 남아 있으면 이제는 힘이 든다. 기분도 칙칙해지고. 그러다보니 자꾸 가볍고 단순한 영화만 찾게 되고, 그러다보면 사람까지 얄팍해지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도 없지는 않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밤이 꽤 깊었다.
왜 술을 혼자서 마시냐고?
몰라서 그렇지 밤 깊어 혼자 마시는 술도 즐기려면 그 얼마나 깊고 오묘한 즐거움이 있는데. 다들 몰라서 하시는 말씀들이지.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창밖으로 설렁대는 밤바람에 선듯하니 가슴을 설레기도 하고 들 고양이 흘레붙는 소리에 머리칼이 삐죽 솟기도 하고. 대숲에 바람 쓸리는 소리 들리면 구신인지 도깨빈지 서성대는 듯도 하고. 밤늦게 안자고 있으면 공연히 뭐 하는 거 같은 느낌도 들고.

그래서 나는 혼자 술을 마신다. 독작이 끝나고 나면 나는 혼자 뭔가에 격앙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무척 깊이 가라앉아버리기도 하는데 그래봤자 오래 못가고 대부분 혼자 뭔가 흥얼대거나 주절대다가 어느새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리지.


그렇지. 아시는 분은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거야.
몸과 마음은 늘어지게 피곤한데 머릿속은 맹숭맹숭. 

그거 해 보면 참 못할 짓이다. 그러다 보면 또 그놈의 술을 찾는 거지.
그러다보면 더러는 생각지도 못한 부산물들이 잠자리까지 따라와서 저그들끼리 웅성대기도하지만 그래봤자 일단 알콜에 꺾인 몸을 이기지는 못한다. 계획대로 잘 진행이 되어서 눈꺼풀이 슬슬 내려오면 이제는 시디나 한 장 돌려놓고 불 끄고 자야지. 오디오야 뭐 지 혼자 벌겋게 달아서 날 샐때까지 헛바퀴를 돌든지 말든지.
내일 아침에는 또 내일을 만나야 하니까. 모두들 안녕.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대한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로부터 한 없이 초라해지려는 노력이다.
자진해서 헐벗어 남루해지려는 것이며.
애써서 자존과 자긍을 버리고 힘들여 초라하고 남루해지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그래도 그 무엇인가를 조건 없이 간절히 원한다면
애써서 그렇게 초라해져 볼 일이다. 눈물겨운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갈증을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죽어도 반성하지 않는 마른 가시처럼 메마르고 앙상한 고집같은 것들처럼.


/소금물을 마셔도 죽지 않는 바다 물고기가 되고싶은 날에.

 


오늘 새벽 블로그의 방문자 누계가 만 명을 넘어섰다.
재작년 여름 큰 아이의 권유로 처음 블로그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들이나 모아놓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것마저도 한 두달 만져보다가 이것저것 속 시끄러운 일들과 게으름, 의욕상실까지 겹쳐서 그만 다 닫아 걸어두고 일 년 반을 방치했었다.
하도 마음 고생을 하고 해서 나중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넌더리가 나드만.
에잇, 이만큼 정 떨어졌으면 다시 볼 일 있겠나 싶어서 아주 못질을 해 버렸었는데 지난 겨울 지나면서 까닭 없이 마음이 선듯하니 움직여서 쓸고 닦고 대충 손 봐서 문을 열었더라. 물론 목적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흩어진 글들 정리해두고 여기저기 남겨진 흔적을 지우고 정리할 목적으로.

별 생각 없이 글 옮기는 작업을 하던 중에 간혹 들여다보면 하루에 백 명 남짓, 생각보다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보여서 처음에는 그냥 조금 궁금하고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예상보다 너무 많은 숫자 때문에 좀 어리둥절하고 겁이 난다. 주소를 남긴 것도 내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대체 누가 여길 찾아오랴 하는 생각에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 여나믄 명에게 문자 날려 준 것으로 그만이었으니까.
아하, 물론 예상에 비해서 너무 많다는 뜻이다. 

그래도 개점 휴업보다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드나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도무지 흔적이 없어서 많이 궁금하다. 이런 개인 블로그를 만들어 보는 것도 처음이라 서투른데다가 겁도 좀 나고.

사람이 품위가 덜하다보니 걸려 있는 글들이 좀 사납기도 하고 때로는 삐딱하게 비틀기도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그럭저럭 온순한데다가 여리고 상처도 잘 받는, 그런 사람이오니 그래서 혹시라도 마음이 내키시면 망설이지 말고 오가는 길에 흔적이라도 한마디씩 남겨 주시면 아주 안심이 되고 행복할 것 같아서, 그래서 모쪼록 선처 부탁드린다고, 핑계 삼아 한 마디 걸어 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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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걸어 두었던 사이에 안팎으로 힘 든 일들이 있어 심신이 극도로 지치기도 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몇 달 동안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여태 접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도 조금 들여다보았고.
지지부진하던 일들을 접어버리고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해보자고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그 속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했던 일들과 몇 가지 생각이 우연히 겹치고 연결 되면서 오히려 내 생각을 되돌려 이전에 하던 일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그래서 다시 돌아 볼 일은 없을 거라고 2년 가까이 그냥 내던지다시피 방치해 두었던 것들을 다시 꺼내서 먼지를 털고 닦고 수선을 피는 중이다. 

다 늦어서 웬 야단법석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음. 어쩐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집어 든 것 뿐이다. 

아, 정말 몰라요. 아매 며느리도 모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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