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사는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호가 장가를 갔단다, 처녀 장가란다.’
‘다 늙어서 장가는 왜 가지?’
실없는 소리로 몇 마디 웃다가 소식 주고 받다가 그 친구는 전화를 끊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와 통화를 한 끝이라 조금 마음이 들떴었나보다.
책상에 꽂힌 명함들을 뒤져서 서울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설 잘 쇠었냐. 한 살 더 먹었구나.‘
'그렇구나. 너무 빨라서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야기 못 들었지. 신경이가 죽었다. 얼마 안 됐다.'
'!.......'
'혈액 암이라던데 외국 있다가 들어와서 얼마 안돼서 그리 됐다.'
'.......'
몇 마디 탄식 끝에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갔다.
작은 놈은 피아노 두껑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고 애 엄마는 이불 감고 앉아서 책을 본다. 큰 놈은 밤늦게 뭘 하더니 아직 자는 모양이다.
아직 우리는 살아 있구나.
죽은 친구의 아내나 아이들은 본 적이 없다만 평범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는 지금 우리 집 거실 풍경도 그들에게는 다시 찾을 수 없어 피눈물 나는 추억이겠지. 언젠가는 너 나 없이 누구나 다 그리 될 테지만. 세상에 오고 가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나이 들어가면서 더러 이런 말을 전해들을 때면 한없이 쓸쓸해진다.
사는 것이 다들 분주하니 세세한 소식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대학 동창이라든지 누구누구가 어쩌다 세상을 떴다더라는 말들은 몇 번 들었었다. 그 때마다 그 친구들과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들의 귀퉁이가 조금씩 부서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이른 세월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조금씩 다 부서지고 나면 뭐가 남아있을까. 아니면 내가 먼저 친구들의 가슴 귀퉁이를 마모시키며 먼저 떠나게 될까.
'깨끗이 치워놔도 어질러지지를 않아서 쓸쓸해요.'
누군가가 그랬단다. 마루바닥이 반들반들하게 치워놔도 먼지만 곱게 앉을 뿐 다시 어지러워지지를 않아서 행복하지 않다고.
어질러 진 것 치우고 사는 게 넌덜머리가 나는 인생이라 그 무슨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소릴 하냐고 눈을 치뜨기는 했다만 그 말 들은 지 며칠 만에 그 말이 새록새록 다시 생각나는데, 아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것이 아주 빈말은 아닌 것 같아서 새삼스럽다.
어질러지지를 않는다는 것은 저지레를 할 아이들이 없거나 아니면 아주 장성하여 제 앞가림 제가 다 할 만큼 잘 키워놓았다는 역설도 되겠는데, 그렇네. 어린놈들과 싸우며 다투며 쉴 새 없이 치우고, 이놈아 그만 좀 어질러라, 집구석이 이게 뭐냐 치우다가 지쳐 늘어져서 혀를 석 자나 빼 물고 지청구를 하다 보면 글쎄, 입가에 기가 막힌 웃음도 같이 물리는 수도 없지 않으니 그것도 그럴싸한 행복이라고 수긍을 해야 할까. 이만한 나이에 남 다 가진 그 놈의 행복 나만 가졌다고 동네방네 유세하고 자랑 할 일은 아닌 듯 한데.
얼마 전에 세상을 뜬 그 친구는 가족과 함께 가졌던 행복을 다 갖고 떠났을까.
아니면 어떤 행복을 남겨두고 갔을까.
행복이란 것이 공유했던 사람이 떠나면 그 자리에서 모두 소멸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시 싹이 돋아서 조금씩 그 사람의 떠난 자리를 메우고 지우는 것일까.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조금씩 지워지고 무디어져야하는 것이겠지만
그럼 떠난 사람은 잊혀지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일까.
지친 육신을 땅에 눕히고 아주 떠난 사람들은
이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안식을 찾은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격리 된 것일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세상에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서 가족보다 먼저 가고 싶다던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먼저 격리되는 것은 두렵지 않은 일일까.
생명은 왜 일회용일까. 왜 한 번 더 고쳐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일까.
삶이니 행복이니 그런 진부하고 흔해빠진 단어들이 가슴에 낙인처럼 아프게 각인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