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바버를 올려놨다가 아차 싶어서 금방 꺼버리고 TV를 켠다.
밑도 끝도 없는 섹스 앤드 시티. 재미없어서 돌려버린다. 

이건 또 장총 들고 뛰어 다니는 구식 전쟁이네.
그렇고 그런 미국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느끼는 미국 놈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섹스, 돈, 주먹, 전쟁, 그리고 죽으나 사나 저그 나라 만세다.

게다가 이놈들은 길 가다가, 구두 사러 갔다가, 밥 먹으러 갔다가, 오줌 누러 갔다가, 

어디서든 배꼽 높이만 맞으면 아무데서나 한다. 무슨 개 아들 딸도 아니고.
화장실에서도 하고 차 안에서도 하고 길바닥에서도 하고 엘레베이터에서도 하고.
저런 드런 놈들. 

일생 살아가다 불같은 사랑을 하나 만나서 목숨 걸고 저질러 보는 건 차라리 처절하기라도 하다지만. 이거야 원.


안주는 냉장고 뒤져서 찾아 낸 반찬 토막들이다. 

빈속에 일단 한 잔 부어 넣어보니 식도부터 찌르르 한 것이 황홀하다. 이 맛에 겨울 소주를 마시는 거지. 여름 밤 독작처럼 비질비질 덥지도 않고.


밤에 혼자 술을 마시면서는 이제는 나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거의 절대로. 

생각에 빠지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 

아니, 생각에 빠지는 것이 무서워서 그렇다. 

어떻게든 눈을 번잡하게 해 두어야 잡생각이 덜 끼어 든다. 하다 못해 간장게장 홈쇼핑이라도 켜놔야 생각이 흐리멍덩해진다. 눈을 닫고 귀만 열어놓았다가는 뇌세포의 급격한 신진대사로 수명이 짧아진다. 생각에 치어서 죽고 싶은 때가 오기 전에는 이제는 아마도 이 버릇 안 바꿀 걸.

술에 조금씩 빠져들면서 브람스의 추락하는 클라리넷을 듣는다든지 퍼셀의 그라운드 따위에 중독 되면 

그만 억장이 무너지지. 

듣고 있노라면 기억이나 추억을 자극하는 노래나 파퓰러들은 좀 더 직설적으로 심장을 상하게 하고. 

아는 거 몇 개 없는 올드 팝이나 싸구려 감상 자극하는 베스트셀러 얹어 놔 봤자 그것도 득 되는 거 없고. 


하기야 음악마저도 없다면 더 야단이다만. 적막강산에 기억이나 생각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눈이 휙 돌아가 그만 사단이 날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제는 그런 것들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사실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머리를 대패질하듯 부대끼는 일상에 묻혀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던 별별 기억이나 생각 가닥들이 알콜에 녹아서 흐물흐물 번지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 돼. 때로는 취한 김에 이대로 미친 듯이 달려가서 확 그냥 일 저질러버릴까. 그런 생각도 들고.
저지를 것이 뭔지는 나도 몰라요. 그냥 요즘 들어 사는 데 대한 기준이나 생각이 많이 바뀌고 흔들려서.
그러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깃발이 솟기도 하고 불 안 땐 굴뚝에 연기도 나고....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눈 질끈 감고 확 그냥....

아서라, 뒷감당은 어찌 할라고.


그러게 뒷감당 걱정할 정신이 있다면 애초에 저지르지도 못해요. 순전히 말만 동학당이지.
어쨌거나 하건 말건 간에 생각만으로도 사람이 상하니까.
그러니 모쪼록 건전하고 유쾌하게 살아야지. 결사적으로 유쾌하게. 눈물이 팍 쏟아지도록 행복하게.
 ....흥. 지나가던 개가 다 웃는다.


다시 영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속전속결 헐리우드 영화를 좋아한다. 질척한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탐미적이고 집요한 잉크 빛의 예술 영화라든지 제 3세계의 수준 높은 문화 영화들은 함량에 버겁다. 

그렇다고 걸핏하면 슝슝 날아 댕기는 중국영화는 취향이 아니고. 

그래도 혹시나 여자 주인공이 아주 멋지게 예쁘면 그것도 간혹 들여다보기는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를 보라. 그 얼마나 재미가 좋은가.
때리고, 부시고, 죽이고, 보너스로 틈만 나면 아무데서나 거시기를...
게다가 첨단 하이테크가 빚어내는 그 현란한 영상까지.

그리고 다 보고 난 뒤에는 적어도 한 시간 이내로 그 영화의 내용이나 인상은 의식에서 지워진다. 그런 영화를 보았노라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가슴 속에 뭔가 질척한 것이 남아 있으면 이제는 힘이 든다. 기분도 칙칙해지고. 그러다보니 자꾸 가볍고 단순한 영화만 찾게 되고, 그러다보면 사람까지 얄팍해지는 건 아닌가 싶은 걱정도 없지는 않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밤이 꽤 깊었다.
왜 술을 혼자서 마시냐고?
몰라서 그렇지 밤 깊어 혼자 마시는 술도 즐기려면 그 얼마나 깊고 오묘한 즐거움이 있는데. 다들 몰라서 하시는 말씀들이지.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창밖으로 설렁대는 밤바람에 선듯하니 가슴을 설레기도 하고 들 고양이 흘레붙는 소리에 머리칼이 삐죽 솟기도 하고. 대숲에 바람 쓸리는 소리 들리면 구신인지 도깨빈지 서성대는 듯도 하고. 밤늦게 안자고 있으면 공연히 뭐 하는 거 같은 느낌도 들고.

그래서 나는 혼자 술을 마신다. 독작이 끝나고 나면 나는 혼자 뭔가에 격앙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무척 깊이 가라앉아버리기도 하는데 그래봤자 오래 못가고 대부분 혼자 뭔가 흥얼대거나 주절대다가 어느새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리지.


그렇지. 아시는 분은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그거야.
몸과 마음은 늘어지게 피곤한데 머릿속은 맹숭맹숭. 

그거 해 보면 참 못할 짓이다. 그러다 보면 또 그놈의 술을 찾는 거지.
그러다보면 더러는 생각지도 못한 부산물들이 잠자리까지 따라와서 저그들끼리 웅성대기도하지만 그래봤자 일단 알콜에 꺾인 몸을 이기지는 못한다. 계획대로 잘 진행이 되어서 눈꺼풀이 슬슬 내려오면 이제는 시디나 한 장 돌려놓고 불 끄고 자야지. 오디오야 뭐 지 혼자 벌겋게 달아서 날 샐때까지 헛바퀴를 돌든지 말든지.
내일 아침에는 또 내일을 만나야 하니까. 모두들 안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