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입때껏 나는 나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무엇에 관심을 두고 무엇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는지를 모른다. 아니면 천성이 게을러서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도무지 귀찮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보면 매사에 그 때 그 때 순간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미지만으로 혼자 기초도 없는 공중누각을 짓고 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나는 일단 웅크리고 앉으면 표정이나 행동거지만 봐서는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다면서 니 노선이 뭐냐 정체를 밝혀라 그런 말을 더러 듣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포커페이스라는 이야긴데 아마도 살아 온 세월동안 이리저리 다치고 넘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습득한 방어본능이리라 짐작만 하고 있다. 다만 내가 직접 연관된 사안에는 포커페이스는 백리나 천리나 멀리 벗겨져 달아나버리고 도무지 중심조차 못 잡고 허둥댄다는 것은 일단 비밀이지만, 어찌됐든 나는 겉보기에 참 재미가 없고 닝닝한 사람이다.

무슨 신기한 볼거리가 있어 저것 좀 보라고 다들 난리법석 야단을 해도 어지간해서는 멀거러니 응 그렇구나 하고 맥 빠진 반응으로 일관해서 김을 빼버리기 일쑤고 온 나라가 들썩이던 축구나 야구를 볼 때도 가슴 속은 조마조마해서 자반 뒤집기를 하는데 겉으로는 도무지 표정이나 말로 나타내지를 못한다. 일부러 그런다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된다. 그러니 남들이 볼 때는 도대체 열정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밖에.

하지만 나 혼자 몰래 열어보는 가슴팍은 일없는 바람에 온 밤을 혼자 서성이기도 하고 인적 없는 골짜기의 마른 가랑잎처럼 저 혼자 풀썩 뒤집히기도 하는, 나름대로 나 홀로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다만 때에 따라서, 혹은 경우에 따라서 그런 변화를 섣불리 내보이기 싫어한다는 것 뿐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가슴팍까지 버썩 메말랐다고 손가락질 하지는 말자.

누구나 마찬가지로 나 또한 세상을 보는 기준을 나름대로 가지고는 있지만 나는 큰 줄기로 봤을 때 만사를 유기체로 이해하는 습관이 있다.
요 수삼년 안에 나라가 들썩일만한 일이 정치판에서 더러 있었다. 그 요란한 난리벅구통을 멀거니 지켜보면서도 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데도 일단은 크게 열성이 없었다. 그저 그 당시의 내 의사에 따라서 어느 한 쪽에 투표를 하든지 기권을 하든지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는 무효표를 만들어서 나름대로 야유를 하는 것이 내 정치 성향의 거의 전부다.

당시의 내 상황이나 오락가락하던 상태에 따라 사보타지를 하기도 하고 일단 머리부터 디밀며 쇠고집을 부릴 때는 있어도 나 또한 다중 속의 한 세포에 불과한 존재이므로 머리통이나 팔다리가 가자면 가고 서자면 설 수 밖에 없는 것이 소시민의 가장 온순한 삶의 형태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꼭 맞는 지도자를 선택한다.'
얼마나 멋진 말이냐. 개살구 민주주의에 관한 한 내가 금과옥조로 받들어 모시는 금언이다.

좋다, 저 놈은 분명히 때려죽일 놈이니 저 따위가 선민으로 뽑힌다면 멀쩡한 내 손에 장을 지질 것이라거나, 오로지 저 근사하고 멋진 놈을 보필하여 위대한 역사 창조에 일생을 걸어보리라, 뭐 이런 시나리오는 내 사전에는 애시당초 택도 없는 이야기란 거다.
혹시나 그렇다면 결과론에 기대어 면피를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 또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열정이나 의로움도 없이 흥타령이나 하고 자빠져서 이삭줍기나 하는 잡배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하지만 나도 젊어 피가 끓을 때는 같잖게도 뭔가를 도모해본답시고 꿍꿍이를 굴려도 보고 시대에 절망하여 소주병 꿰 차고 울분으로 밤을 하얗게 새어도 보고 그러다가 시껍을 먹고 꼬랑지가 빠져라 내빼기도 하고 뭐 그저 그런 남들 만한 청춘도 겪어 본 적은 있다.
다만 어느 한 시점에서 나름대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놈의 물 큰 정치노름판에서 오랫동안 얼쩡거리는 놈들은 그 심도의 차이가 다소 있을 뿐 일백 이십 프로 도둑놈 아니면 사기꾼이라는 가열찬 확신을 뼛골에 깊이 새겨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도둑질을 하건 사기를 치고 댕기건 내사 그럴 수 있는 재목도 아니고 능력도 없으니 도둑놈이건 사기꾼이건 제 식구들 먹여 살리는데 소홀하지만 않으면 가장으로 인정하겠다는 기특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사나희 이 세상 태어나서 한 살림 듬뿍 챙기고 싶거든 욕바가지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그 판에서 초지일관 얼쩡거려 보든지,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거든 잘난 체 흰소리 지껄이고 사는 대신 다소 배고프게 살 각오를 해야 한다.
흑묘든 백묘든 딴 짓 하지 말고 쥐나 잡으란 이야기다. 걸레쪼가리 같은 정치판에서 정의나 이상 따위를 기대하는 얼빠진 생각은 최소한 하지 않겠다는 각성이기도 하고. 

아, 그렇지만 지금도 그들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적지 않은 성원을 보내는 이들을 폄하하거나 업신여긴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만약 그 중 누군가가 날더러, ‘이 비겁하고 게으른 자야 너는 왜 위대한 역사 창조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거룩한 비난을 날린다면 나는 그에게 되묻고 싶다. ‘아침은 챙겨 드셨습니까?’ 

늬들이 존중받고 싶으면 늬들도 나를 존중하라는 이야기다. 먹고 살고 새끼들 기르고 하는 일에 궁리를 하다보면, 그 자질구레한 먹고 살기나 새끼들 기르는 일이 그놈의 위대한 역사 창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때때로 내게 골치 아픈 화두를 던지는 오디오만 해도 그렇다.
오디오라는 마물에 마음을 빼앗겨 삼십년 가까이 귀신 나올듯한 고물딱지들을 주물딱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태 내 취향이 어떠하므로 나는 반드시 그 소리를 향해 일로매진해야 한다는 그런 줄기가 아직 없다. 환경적인 여건이나 경제적인 이유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지간만 하면,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다. 다만 생긴 것에 많이 좌우가 되는 편이라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인이나 내 기준으로 가벼워보이는 물건은 아무리 소리가 좋아도 일단은 눈 밖에 난다.

물론 소리를 가리는 취향도 아주 없지는 않아서 늘씬하고 미끈한 소리보다는 조금 삭은 듯한 조금은 까칠까칠한 소리를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앞이건 뒤건 그 질만 우수하다면 싫어할 이유는 없다. 다만 어느 것이 조금 더 낫다는 정도에서 그치는 거지.
오히려 그러한 차이보다는 한 곡 얹어놓고 자다 깨다 눈을 들었을 때 내 시각적 욕구를 저으기 만족시켜주는 그런 편안한 색조나 질감, 적당히 감각 친화적인 모양들에 좀 더 민감한 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일까?

뭐 그렇더라도 싸구려 티가 역력한 천편일률 날림공사 판넬을 쳐다보고 있느니 나는 차라리 삐걱삐걱 고물딱지라도 감격시대의 그윽한 정취가 가득한 한 시대 이전의 쇳덩어리를 보듬고 사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생긴 것이 고만고만하고 무게가 그럭저럭 하다면, 그리고 좌우의 발란스가 깨지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만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다. 나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래도 어쩌다가 더러 한 번씩 뜬금없는 고집을 부리자 하면 주변 사람들이 복장이 무너져라 가슴을 칠만큼 어구쇠로 불통이기는 하다. 그것이 매우 보편타당하고 불편부당한 그런 만고불변의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 생각만으로 혼자 밥통을 굴려서 만든 고집일 경우에는 거의 반드시 삶의 한 귀퉁이가 너덜너덜 넝마가 될 때까지 끝을 보고야 만다. 한 번 꽂히면 모두 다 던져요.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는 말이다. 하긴 그 고집도 나이 들면서 웬만큼 무디어지고 마모가 되기는 했지만.

이 나이쯤 되면 내 맘대로 못한다. 내가 세상에 내 놓은 새끼들이 눈앞에 밟히면 그게 뭐든 끽 소리 못하고 접어야 한다. 발등에다 못을 박아놓고 싶어도 안돼요. 거기다가 살아 온 세월도 이고지고 가야하니까. 그러게 어느 날 한밤중 조용한 시간에 지나간 세월들이 나를 돌아보며 슬쩍 말을 걸더라.

-이것 봐, 온갖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누적이 만들어 낸 평범함의 무게가 장난인줄 아나? 그대의 지금의 고단하기 짝이 없는 꼬라지도 그 쓸데없는 똥고집의 파편에 부상을 입은 결과일지도 모를걸.-

하기사 그 무게에 납짝 깔려서 압사 당하지 않은 것 만해도 천만 다행인 일일 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나는 아직까지도 도대체 내 주된 관심사를 모른니다. 모른다는 것이 나를 찔러대거나 닦달 하지 않으므로 굳이 알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지만 생각의 저 밑바닥에서는 막연하나마 어떤 종류의 자괴감이 없지는 않다.
아직은 좀 더 살아가야할 이 세상에 내가 몸과 마음을 던져서 진력해야 할 그 무엇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나그네처럼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일까?

아니, 의식주나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에 관련한 삶의 당연한 명제는 일단 제껴 두기로 하자. 먹고 사는데 관계된 거룩한 일상이야 다시 말 해 뭐 할까. 그것마저도 다 던져버리고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방담을 하자면 잡배건 위인이건 간에 어지간한 경지에는 올라서야만 보도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뉘가 모르겠냐고. 
혹 조금 안다 치더라도 삶이란 것이 글이나 말로 풀어내기에는 너무 벅차지 않느냔 말이지. 아니면 뒷심이 딸려 그냥 모른 체하는 것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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