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낀 날을 좋아한다.
내 고향도 안개가 많은 도시다.
하지만 이 곳의 안개는 내 유소년기의 추억 속에 있는 막막히 가라앉은 안개와는 다르다. 이 곳의 안개는 흐른다.
海霧다. 식은 바다로 부터 흘러드는.
초여름 새벽 일찌감치 집을 나서서 혼자 진주 망경산 위에 올라 내려다보던, 마치 구름 위에 올라 서 버린 듯 눈 아래 분지를 말끔히 지워버린 채 천천히 넘실거리던 안개.
안개 속에 있건 안개를 딛고 올라 서 있건 안개는 내게 어떤 위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적막하고 막막한 무엇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곳의 안개는 무슨 전설의 해룡이 뭍으로 흘러 드는 듯
낮은 곳을 따라 구불텅 구불텅 유유히 흘러 드는 움직이는 안개다.
이 곳에 발을 붙이고 살게 된 후, 뭍으로 슬금슬금 흘러드는 안개 뭉치를 처음 봤을 때 하도 신기해서
정말 저 짙은 안개 뭉치 속에 뭔가 숨어서 들어 오고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이 곳의 안개가 좀 더 짙다.
느낌 때문일까? 그래서 그런지 약간 짠 맛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여기는 강구항이다.
새벽에 마을을 까마득히 덮고 있는 안개를 보고는 서둘러 챙겨 나갔지만 욕심보다는 좀 늦은 시각이라 안개는 많이 걷혀버렸다.
카메라를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고 구계항으로 되돌아 갔다.
강구항 보다는 구계항이 우리 마을에서 더 가깝다.
물론 거대한 거미를 닮은 뻘건 게딱지들로 유명한 강구항 보다는 훨씬 덜 유명하며, 작고 조용하고 구석진 곳이다.
그러니 항구라기보다는 포구에 가깝다.
나는 강구항보다 이 곳을 더 좋아한다.
어촌의 원형질에 좀 더 가깝고, 조금 더 원초적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카메라를 들이댈 때 각도가 마음에 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뭐, 사실 이런 저런 이유는 내가 생각해서 만들어 붙인 것이겠지.
사랑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나는 이러저러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연유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멍청이가 어디있냐고.
눈에 꽁껍디가 덮이면 뭔 핑계를 못댈까.
그러니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는 거다. 쓸 데 없이 구질주질하게 사연을 갖다 붙이는 것도 습관이다.
늘 느끼지만
안개는 사진빨이 좋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 덕분에 사물의 채색이 좀 더 짙어지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뒷쪽의 배경들을 적당한 거리에서 아웃시켜서 과감히 정리해버리는 무지막지한 폭력성에서 더욱 그러하다.
안개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재주일지도 모르지.
아무도 모르게 배경을 쓱싹 지워버리고 각자의 낯선 상상력으로 뒷마무리를 맡겨버리는...
어쨌든 맑은 날의 그것 보다, 궂은 날의 그것 보다, 일껏 시간 맞춰서 시도 해 봤던 해 질녘의 그것 보다 안개 낀 구계항이 좀 더 마음에 들었다. 수십년이 지났어도 안개는 여전히 내게 위안인가 보다.
안개는 해가 머리 위로 오르면 꽤 빠르게 걷힌다.
안개 속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으로 어슬렁거리다 보면 어느 새 정수리 부근이 훤해지고
이내 쨍 하게 떠 올라버린 해가 안개를 흩어버리면
순식간에 무방비로 노출 되어버린 내 꼴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해서 짜증스러운 기분이 되고 만다.
혹,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사라져가는 안개의 끝자락을 붙들지 못해서 허무해지기 일쑤고.
그러니 모쪼록 그런 꼴을 당하기 전에 서둘러 멀쩡한 일상으로 돌아 갈 일이다.
아니라면 어디 포구 구석지의 선술집 포장을 들치고 들어가서 뜨끈한 해장국이라도 한 사발 들이키든지.
하마나 그 시간에 벌써 문을 열었을리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