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뒷쪽의 다락논.



이른 아침 등산길에 내려다 본 부경리.



비 그친 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해 질 무렵 마을 뒷 산.




/2008년 2월 22일 강원도 정선 레일바이크 아우라지 역 부근에서/


산판 같은 곳에는 이 물건이 더러 현역으로 남아있다는 말은 들었었다.
듣기는 들었으되 정말 살아 있는 이 물건을 직접 내 눈으로 목격했을 때의 생경스러움이란.

전설의 육발이.
6,70년대 먼지 자욱한 유년의 신작로를 주름잡던
아니, 거 참,
도무지 전설로만 떠돌아 그 사실을 확인 할 방법은 막연하되
어쨌든 들리는 소문에 그 힘이 참 무지막지하여 천하에 견줄 짐차가 없더라던 그 육발이.

이 물건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은
애초에 이걸 만든 양키들이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라면 육이오때부터 굴러 다녔다던 이런 고물딱지를 내다버리지 않고
수십년동안 죽어라고 고쳐 쓰고 있는 우리가 지독한 건지
혹,
그만큼 오래 굴려 먹어도 괜찮을만큼 썩 훌륭한 물건이란 것을
정작 육발이를 만든 저것들은 모르되 안목 깊은 우리만 알아 챈 것인지
짐승이 오래 살면 요물이 되고
물건이 오래면 도깨비가 된다던데
이제는 이 물건은 바야흐로 고물의 경계를 넘어서 골동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글쎄 모르지.
간사하기 짝이없는 사람의 심사를 어떻게 믿어.
안그래도 수십년 굴러 먹다보니 이런저런 병통이 없지를 않을 것이니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시동이 불통이라거나
아니래도 뭐 어쩌다 털털거릴 날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목에 땀내 나는 수건 두르고
그 팔뚝 한번 건장하게 굵은 쥔장 심기 사나운 날이면
짜증스러운 담배 연기 한 모금에 목숨이 간당간당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폐차장에 끌려가 납작하게 눌려질 지 누가 알아. 
그나마 오래 된 쇳덩어리라고 아주 값나가는 미제 고물로 추켜 세워 줄 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 시대 한 두어번 타 본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시발 택시는 또 어디 없는지.
하기야 인자는 정말 골동품 수집가가 아니라면 그게 택시로 남아 있을 턱이야 없지.
어쨌든 이 숨차고 어지럽게 달려 가던 세월이 살짝 비껴 간 어느 한 귀퉁이
누가 오래 된 세월을 저리 붙들어 놨는지
저 물건이 꽤 멀쩡한 꼬라지를 하고 저리 서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잖아?
저런 물건에까지 공연히 뭉클해지는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이란 것이 때로는 참 끔찍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말이야. 




잠을 깨어 시계를 보니 열두시 반이다.
모로 누운 오른쪽 눈꼬리에 흥건하게 눈물이 괴어있었다.
......이것 참...  이나이에 꿈에 휘둘려서 잠을 깬단 말이가.

이야기도 그리 올바르지 못하여 어리둥절한 꿈 끝에
차를 운전해서 어디론가 가던 중에 좁은 길에서 마주오는 차를 만났다.
그리고 그 차와 교행하려고 차를 비끼는바람에 그 인근에 살던 친구를 만났다.
(앞뒤도 안 맞고 매우 이상하지만 꿈에서는 더러 생기는 인과관계다. 하여튼, )
그 친구는 당연히(?) 나를 청해서 이웃에 사는 친구와 함께 서로 안부를 묻고 맞절을 하고 즐거운 시간을 잠시 보냈는데 와중에 무슨 기별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나는 한없이 어지러운 어떤 헝겊 주머니를 뒤지면서 어어 소울음을 울었고 내 곁에 선 형제들도 슬피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왜 오마니는 이리 돌아가셔야하냐고 하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인 채로 잠이 깨었는데 열두시 반이다.
쉰 줄에 앉아 베개를 적신 눈물도 하도 어이가 없고 자다 깨던 서슬에 느끼기를 생시에도 두어번 울음을 삼키던 와중이라 열적고 남사스런 마음에 그만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드물게 어머니 꿈을 꾸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물론 나 역시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게 있어서 어머니의 얼굴은 하나 남은 흑백 사진 속의 서른살 남짓하던 젊은 얼굴 뿐이다.
당연하다. 서른 다섯에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내가 어머니보다 더 늙어버려서 시방은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어떠하셨을까 궁리도 해 볼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고 자식은 자식인지
이렇게 늙어버린 아들의 꿈에서도 어머니는 어머니로 나타나 갑자기 사라지시기도 하고
또 어젯밤처럼 억장 무너지게 홀연히 돌아가시기도 한다.  

내가 다섯살에 서른 다섯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쉰살이 넘어버린 아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꿈결에나마 나타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꿈에서건 생시에서건 살아 움직이는 어머니의 얼굴 한 번 보거나
그 뜨시고 푸근하다는 어머니의 품에 한 번 안기어보는 것이야 이미 생사를 달리하신 까닭에 일생에 이룰 수 없는 바램이지만 그래도 꿈결에서라도 한 번 못이긴체 그 인자하신 얼굴(얘기로 듣자하니 매우 인자하셨더라길래!)에 웃음 담아서 슬쩍이라도 한번 보여주시지를 않느냐고 밤중에 혼자 마루에 앉아 씽퉁한 생각만 되작였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작은 놈 곁에 누워 다시 잠이 들긴 했는데 자고 일어나도 그 꿈이 여운이 남아있어 혼자 삭이기도 마음에 좀 어색하다. 그래서 아내에게 어젯밤 어머니 꿈을 꾸고 하도 섧게 울었노라 말을 꺼냈더니 지난 주에 성묘 갈까 했다가 가지 못하여 섭섭해 나타나신 것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오라, 그도 그럴듯 하구나. 거 참, 한참 어린 아내가 나보다 궁리가 낫기도 낫네 열적게 웃는데, 원 참. 그렇다면 성묘가 미뤄진 사정을 모르시는 바도 아닐 것이고 그 한주일을 기다리지 못해서 다 늙은 아들의 꿈에 나타나 눈물을 쥐어짜게 만드시는지.
기왕에 그리하실려면 내, 그리도 목 늘어지게 바래는 얼굴이라도 한 번 보여주시든지. 맨날 그놈의 어이어이 초상치는 장면만 그래 연거푸 보여줘서 뭔 재미냐고. 귀신이 정말 귀신같은 귀신이 아니라 바보귀신인 모냥이다하고 혼자 피식 웃으면서 간밤의 눈물바람을 뭉개어보려하긴 하는데,
혼자 일요일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도돌아올까 고향 간 김에 하룻밤 자고 넉넉히 돌아올까 짧은 산수로 갑자을축하며 앉았던 생각을 바꿔서 그래도 며느리랑 손녀들도 대동해서 오마니 산소앞에 재롱이라도 떨고 오면 지리산 자락에 혼자 누워 늘 적적한 어머니 심사가 조금 뜨시게 되실라는지 궁리가 새로 분분하다.  
혼자 가거나 다 가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어쨌든지 성묘는 하러 갈 생각이지만 간밤 꿈때매 그렇기도 하지만
해마다 이맘때면 내사 싱숭생숭 별로 반갑지도 않고 기분이 얄궂고 그렇다.

설 연휴, 추석 연휴, 길이야 삼수갑산으로 미어터지든지 말든지 결사적으로 고향가시는 분들,
그리고 아직까지 갈 고향이 남아 있는 분들은 위로 삼대 내리 삼대 복을 지었거나 받았거나. 
쪼글쪼글 연로하셔서 뜨신 정밖에 안남았을 어머니가 목 늘이고 기다리시는 분들은 좋겠소.
그래 그 남아있는 고향 가시거든, 그래서 몹시 닭살만 아니시라면 이번 추석에 백줴 어마이 한 번 꼭 보듬어 보시고
어마이 볼태기에 뽀뽀도 한 번 하시고...  
뭐 어쨌거나 사돈팔촌 다 모여서 벅적거릴 수 있는 설이며 추석이며 그거,
때때로 번거롭고 부담스러울 때도 없지는 않지만, 조선 사람한테는 질긴 심줄이지.
아주 굵고 질긴 고래심줄이지.  


2005. 9.1


지금 생각하면 어릴 때 그럭저럭한 추억들은 지리산 아래 마을의 큰집이 있던 시골이 대부분이지만
그때는 시골이 참 싫었다.
전기불도 안들어오고 해만 지면 완전히 아둑시니..
마른 흙먼지 위에 멍석 깔고 앉아서 먹던 투박한 음식에다
어쩐지 거기만 가면 몸에 뭐가 나서 지독하게 가려웠던 기억.

어른들은 아마도 물이 맞지 않아 그런가보다 했었지만
이유가 어쨌든 그 새빨갛게 약이 오른 환부를 피가 나도록 긁어대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겨울이야 뭐 그럭저럭 지낼만 했었지만 
벌레와 모기와 땡볕... 그리고 끈적이는 목덜미와 따분하기 짝이 없던 매미 소리와
그리고 뜨뜻미지근 맛없는 싱거운 과일과 끝없이 지루하던 초록색 풍경의 여름은... 
하기야 거기가 어디든 여름은 지금도 싫지만. 

이유가 어쨌든 나는 내 발로 시골로 걸어 들어와 살고 있다.
무슨 고집인지
이 끝없이 지루한 녹색 풍경 속에서 아이들 얼굴 새까맣게 태우면서...

며칠 전에 쳐서 긁어 두었던 풀을 태웠다.
우습지만 내가 이 깡촌에 살아서 그 중 행복한 시간이 낙엽이나 마른 풀을 태우는 시간이다.
풀이 타는 냄새가 좋고 그리고 그 그림이 좋아서 그렇다.
그리고 이 일은 뭔가를 생각나게 한다.
아주 오래 전 지리산 아래 마을에서 맡았던 그 냄새 때문에.
다만, 그 시간은 저녁 무렵이어야 한다.

해가 막 지고 난 뒤의 박명.
풀이 타는 연기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그 옛날 해 지고 어두운 멍석 위에서
모기에 뜯겨 가면서 땀 범벅으로 뜨거운 수제비 먹으면서 맡았던 쑥불 냄새를 기억한다.
아래 위로 팔남매의 득시글거리던 땟국 절은 사촌들을 기억하고,
지금은 풍비 박산으로 흩어진 그 형제들을 기억하고,
그 많은 사촌들을 그 작은 몸으로 다 낳아 기른 오종종 키 작은 큰 어머니도 기억하고,
말 없는 세월을 살다 저수지에 몸을 던진 큰 아버지를 기억한다.

올 해도 여름은 오고
어김없이 세월도 흘러 간다.
세월이 나를 지나 가는 것인지
내가 세월 속에 왔다 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추억은 날이 갈 수록 점점 더 아리다.  


치과에서 충치 때우고 아빠 따라 MX 수리 하러 카메라 샵에 갔다가 뜻밖의 선물을 받은 우리집 열 살짜리 꼬맹이.
진열장 속에 오래 전에 잠깐 만져 봤던 미놀타 XD5가 보이길래 사장님과 몇 마디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꼬마야, 너 이거 장난감으로 쓸래?"


상태가 그다지 좋지를 않아서 찾는 사람도 없는데다가 팔아봤자 그거 몇 푼이나 되겠냐며 선뜻 꼬맹이 손에 쥐어 주십니다. 새 스트랩에 필터에 필름 두 통까지 끼워주시면서 하도 이뻐서 주는 거니 아빠한테 사진 잘 배워서 아빠 따라 다니라고 껄껄 웃으십니다.
파인더에 먼지가 좀 있고 셔터 스프링이 좀 헐거운 느낌이지만 제 짝인 로코 1.4까지 붙어서 그린 모드까지 다 되는 쓸만한 물건입니다.
뜻밖의 선물에 어리둥절 인사드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꼬맹이는 아주 입이 귀 밑에 걸렸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셔터를 몇 번 눌러보더니 녀석이 바짝 졸라댑니다.

"아빠, 카메라 배워줘요."

'철퍼덕!' 하는 셔터 소리가 너무 마음에 든답니다. 뭔가 느낌이 다르답니다.
...... 일 났습니다.
오후 내내 졸리다 못해 대충 간단하게 설명을 한 뒤 저녁나절에 같이 카메라를 들고 나섰습니다.
몇 컷 눌러대는가 싶더니 어럽쇼, 제법 자세가 나옵니다.


이거, 카메라 샵 사장님이 제대로 사고 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월요일에 학교에서 식물원 관찰학습 간다는데 들고 갈 거라고 아주 기세가 등등합니다.
마침 기숙사에 있는 큰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 줬더니 우와 대박이라며 부러워합니다.
뭐, 별로 좋은 물건은 아니더라도 큰 놈 것도 준비를 해 뒀으니 이제는 큰 아이 휴가때면 온 가족이 카메라를 짊어지고 단체 출사를.....
아..
애 엄마는 도무지 기계 만지는 걸 좋아라하지 않으니 그럼 애 엄마는 그냥 똑딱이 있는 걸로....
......
얄팍한 지갑에 필름 카메라가 세 대라....
돌아가는 판세가 앞으로 주머니 꽤나 털리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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