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를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공연히 마음이 헛헛할 때면 나는 때때로 무작정 모르는 길로 밀고 들어간다.
길이 낯 설고 험할수록 나는 긴장하고, 그래서 길에 집중하다보면 번잡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저 생각이 번거로울 때는 몸을 혹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좁은 임도 곁에 무게를 못이겨 휘어진 주인 없는 돌감나무.




 
 


어머니 산소에 성묘 가던 길에 안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회3리로 들어가는 막다른 길


영양 화매리의 작은 교회

큰 아이를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삼의 계곡으로 빠져서 만났던 생경한 동네.
내가 본 교회 중 가장 아름다운 각도의 직선을 가진 교회.


인산인해(@@... ) 영덕 시외버스 터미널.


비가 꽤 내린다. 오전 내내 지붕에 꽂히는 빗소리.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인데도 빗소리는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궁금하지 않다. 이제는 대부분의 현상들에 대한 호기심이 다 그렇다.

욕실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니 빗줄기가 꽤 제법이다.
우리 집에서 빗소리가 제일 잘 들리는 곳은 욕실이다.

젖은 남새밭이 우중충해 보여서 몇 장 찍어 본다. 며칠만에 카메라를 들어본다.
매사에 무기력증이 스며드는 모양이다.
무기력해지건 무감각해지건 이제는 별로 걱정도 안된다.

 
컴퓨터에 사진을 걸어서 멍하니 보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나섰지만 다 늦은 시각이라 멀리도 못 간다. 앉은뱅이같이 이웃동네만 기웃거린다. 
그 사이 비는 그치고 풍경이 남았다. 

화진리 들어가는 길가에 보리를 심어 두었다. 이제는 보리도 관상용인지.
어쨌든 아직 익지 않은 풋보리가 남아있다. 참 오랜만에 보는 풋보리. 청보리. 고등학교때 아카데미 문집 이름이 풋보리였던가 싶다.
몇 몇 얼굴들이 생각난다. 


화진리를 지나서 월포를 돌아 나가는 길 옆 논두렁에 백로가 앉았다.
해 마다 이 때쯤이면 물 담은 논에 산천이 거꾸로 처박힌다. 
렌즈를 바꾸고 행여나 날아 갈까 조심조심 가까이 다가 가도 꼼짝을 안한다.
하긴 누가 먹을 게 없어서 백로를 잡아 먹지는 않을 것이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제는 얼추 서로 길들여지나보다. 


습기 머금은 바람에 홀려서 어슬렁거리다보니 그 새 해가 기우나보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오길 잘했다. 매일 비나 내렸으면 좋겠다. 지붕만 새지 않는다면.
그러게 비 새는 지붕은 언제 고치냐고... 






아침에 현관을 나서려던 애 엄마가 눈이 빨개져서 뭔 카드를 하나 들고 왔다.
아직 자고 있는 꼬맹이가 깰세라 얼른 보고 제자리에 둬야한다고 수선이다.
 


뭘, 꼬맹이가 스승의 날이라고 선생님에게 쓴 편지구만 뭘 그래.
이 사람도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엊그제는 큰 놈 편지를 보고 울었다더니.

보니, 작년 가을 쯤 폐원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간 피아노 선생님에게 쓴 편지다.
.........
생각보다 많이 자랐구나.
맨날 개구짓이나 하고 철딱서니 없는 놈이라 여겼는데 .

어제 밤에 선생님들한테 줄 선물 만든다고 법석을 떨더니 꽤 예쁘게 만들어놨다.
아마도 그걸 보고 애 엄마가 뭔가 하고 뒤져봤나보다.
그러게 애들 편지나 수첩은 왜 뒤져보고 그러냔 말이지.
......
그래서 또 이런 편지도 보고 가슴팍이 설렁거릴 수도 있지만 말이지....


그 무지개 학원 선생님도 우리집 꼬맹이에게 유난히 각별하긴 했었지만
꼬맹이도 지가 여섯 살 들면서부터였으니 꼬박 삼년 반을 내리 다녔던 피아노 학원이라 정이 많이 들었었나 보다.
헤어진 이후로 별로 말이 없길래 그저 그런가보다 생각에 두질 않았었는데
언제 한 번 짬 내서 그 선생님 보러 다녀와야 할 것 같다.    

.......
그래서 기특하고 대견하냐고?
당연하지.
당연하지만.
그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야.
큰 놈이 자랄 때도 똑 같이 느꼈던 거지만, 애들이 자라고 점점 생각이 커지고,
그래서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나 생각에 몇 번 감동 받고 하다보면
반드시 그 기쁨의 그늘 아래로 슬그머니 자리 잡는 아쉬움. 그 사이에 아이들은 품을 떠나고 그리고 곧 무릎이 허전해진다는 것.

어느 노래 가사가 그랬었지.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고.
하지만 반드시 괴롭고 힘들어서만 삶의 무게를 느끼는 건 아니야.
기쁨도, 오늘 아침과 같은 생경한 놀라움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생각과 깨달음, 거기에서 느끼는 세월의 무게는 정말.

뭐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지.
머리 끝이 닳고 닳도록 재고 싸우고 궁리하면서 살아 온 날들이 그리 헛되지는 않았더라는 그런 거.
그럭저럭 어디 내 놔도 그리 부끄럽지 않은 놈들로 만들어놨다는 뿌듯함 같은 거.
이것 봐.
그러길래 술은 왜 끊는다고 그러고 말이야.
이런 날은 그저 부부가 마주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혼곤히 취해보는 것도 참 좋은 일이지 않으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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