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밥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자는 듯 죽어 가는 듯
대롱대롱 시렁 아래 목 매달고 숨 찬 거미

창호지 문 밖으로는 먼지 바람이 후다닥 마당을 까 뒤집고
군불 식어 웅크린 삿자리 웃 목엔 늙은 호박과
갈라진 메주와 귀퉁이 튿어진 고구마 자루

딴에는 저마다 사연이 깊어 뭔가할 말이 있을 법도 한데
저 혼자 낙숫물 소리만 그럴 듯 한 콩나물 시루

봉창 아래 너덜너덜 국회의원 나리도 공화당 소싯적 이야기지
인자는 뉘가 뉜지
이 놈인지 그 놈인지

임자는 정지에 가서 고구마나 몇 개 쪄 오든지
어흠.

아, 테레비 쫌 꺼삐리고 고만 자빠져 자
어둑 구석에 무슨 배애지는 쳐 고프댜.
썩을 놈의 영감태기
뵈기 싫은 것들은 범도 안 물어 가.



북동 하늘에서 샛바람이 불면
전기 줄 위의 까치들은 그 곳을 본다
무엇을 그리워하고나 있는 듯이
풍향계처럼 일제히 바다 건너 그 곳을 본다

보이기나 하는지
보기나 하는지
그래도 떼 지어 줄 지어 나란히 앉아서
해가 지도록 하염없이 바람이 불어 오는 곳을 보고 있다

날이 흐리고
빗방울이 후두둑 듣는데 전기 줄 위의 까치들은
풍향계가 되어 바람이 불어 오는 곳만 바라보고 있다




/봄. 마당

남새밭에 핀 장다리 꽃 위에 노랑 나비가 앉았다
집을 보던 아이는
거울 조각으로 햇빛을 꺾으며 나비를 좇는다


/봄. 빈 방

어스럼 비어 있는 방
종일 비 오더니
혼자 앓는 잠 깨어 듣는 낙숫물 소리는 푸른 연두색


/초여름. 마루 끝

건너 건너 집 아기 울음 소리
먼 곳에 다듬 방망이 소리
하늘에 박힌 해는 왼 종일 그 자리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긴 긴 여름 낮


/여름. 개울

송사리 모래무지 기슭에 졸고
포플러에 걸린 해는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물살은 부서져서 온 종일 꿈 같은


/늦여름. 동구

멀리 기울어진 신작로
버스는 우당탕 누렇게 달리고
삼베 홑이불에 누운 아기
정자 나무 그늘에서 여름 한 나절 졸다


/초가을. 길

낮 잠 깨어 울며 달려 나간 대문 밖 큰 길
시장 갔다 오자던 엄마는 언제 가셨을까
뙤약볕만 가득 찬 눈 부신 초가을
저 놈의 소리개는 또 왜 떠서 가슴만 두근거리고


/가을. 역

허수아비 곁에는 허수 아기도 있다
철 늦은 채송화 맨드라미
사루비아 꽃밭도 예쁘다
꼬부랑 할머니 허둥지둥 철길 건너가고
덜커덩 달리다 삐꺽 멎은 시골 역에 익은 가을  한 낮


/늦가을. 들판

오후의 가을 들판은
종종
정물이 된다


/겨울. 마루

종일 흙바람 마당을 쓸어쌓더니
바람 먼지 곱게 앉은 대청 마루엔  아직 발자국도 없이
비껴 앉은 저녁 햇살에
인숙이네 굴뚝 그림자만 슬그머니 올라 서서



하냥 세상 일을 보듬고 달음박질 치기는 잠시 그만 두고
한가로이 강변에 앉아 억새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바라 봄도 좋을 일이로다

품은 뜻이 작아 고개가 숙여지리로다

하늘의 솜씨는 한 낱 억새 한 잎에도 우주가 숨어 있는 법
하물며 그 억새를 고개 숙이게 하는 그 밝은 바람임에야!


기차도 하나 지나가고
비행기도 셋 날아가고
풀이 마르는 가을에는 바람도 이리 좋은데
집 그늘에 앉아 하늘 바라고 이토록 무심타

아무라도 기다리다가 바라보다가
살아 가는 것이 검거나 희거나
희거나 말거나
그저 그럭 저럭 해는 지고
오늘은 찾아 오는 벗도 없구나

어두워지는 길 따라 자리 털고 일어서면
돌아 온 내 자리엔 묵은 냄새
되돌아 문간에 기대어 서서 산 그림자 보고
오늘은 아무에게라도 섭섭하다는 말 하고싶어 진다만


기찻길 옆 황가네 집은
밤 낮 오가는 기차 소리에 들뜨는데

식당차
침대차
시커먼 화물 열차
황혼에 흔들리는 통근 삼등 열차

육중한 바퀴 으르렁거리고 지나가면
황가네 집은 몸을 떨어 기차를 닮아 가는데.


한 낮에 중이 염불을 하는데
간 밤에 꿩 구워 먹었는지
당최 무슨 소린지




볕 바른 법당 기와 지붕에는
풀만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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