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에 기차는 떠나고
얼을 빼며 작열하는 저 금관 소리 북 소리에

조옷도,
이 순간만큼은 죽어도 좋아

적군의 총검에 심장이 뚫리고
날아 드는 포탄에 뜨거운 육신이 갈갈이 흩어져도 좋아.
띵띵 얼어 붙은 시베리아 벌판에 내 몸뚱아리를 묻어도 좋다니까.

나는 촌놈이야.
길다란 장총에 기대어
나뭇짐이나 짊어지던 어깨에 구리빛 겁나는 탄띠 두르고
내가 시방 아니면 언제 이런 비장하고 근사한 이별을 해 보겠냐고
사나희 가는 길에 그 무슨.

이름도 예쁘지 슬라비앙카
플랫폼에 얼어붙은 그 고운 얼굴에 눈물이 고여 흔들리고
굽이쳐 눈보라에 나부끼는 긴 머리는 얼굴을 때리는구나
잘 있어 슬라비앙카
혹 살아 돌아온다면 뜨겁게 안아보자

조국이니 이념이니 그런 건 개나 물어가라 그래
나는 단지 저 소리에 들떠 死線으로 떠나는거야
미친 듯이 불어 제끼는 눈보라 속에 사생 결단으로 울부짖는 저 나발소리 북소리에

아니 시부럴,
죽어도 좋다니까
유치해도 좋고 싸구려 감상에 나부끼는 선동 깃발이라도 좋아
저 소리 듣고도 피가 끓지 않으면 그게 죽은 목숨이지

슬라비앙카. 부디 잘 있어
혹시라도 살아 돌아온다면 뜨거운 맨살로 으스러지게 껴안아 보자
저 노래처럼 시뻘겋게 껴안아 보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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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비앙카는 슬라브 여인이라는 뜻이며 이 곡은 발칸 전쟁 당시에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내는 불가리아 여인들을 기리기 위한 노래랍니다. 하지만 러시아 말이라고는 굿모닝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노래 가사를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이 곡을 듣다보면 아무 이유도 없이 무슨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상되어 그냥 그걸 그대로 풀어 써 본 것입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주는 살냄새는 매혹적이지만 가사가 있는 음악은 간혹 이런 폐단이 없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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