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부터 자불리더니 오밤중 되니 오히려 잠은 다 달아나버리고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무료하니 TV 영화를 하나 본다. 바디 샷.
짧은 영어로 대충 몸으로 비벼대기 또는 육탄 돌격 쯤으로 짐작했는데 보아하니 제목 보다는 내용이 조금은 나은 편이다.
뭐 중간중간 늘씬한 여인네 젖가슴도 더러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노천에 자동차 본넷 위에서 거시기 하는 장면도 보여주고 하는 걸로 봐서 얼추 뭐 그렇고 그럴만 하게 후끈한 영화이긴 했지만 주제는 여차저차한 일로 술에 떡이 되어버린 남녀가 어찌어찌 우여곡절을 만들면서 속살 궁합을 맞추고야 말았는데 여자는 강간이라고 울고불고 남자는 화간이라고 박박 우기는 상황이 주제라면 주제다.
둘 다 침대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도대체 기억이 없습니다가 되어서 검사니 변호사가 난감해 하는 거며
술에 떡이 된 채로 과연 거시기가 가능하냐는 생리적인 디테일이야 뭐 그렇다손 치더라도
침대에 포개어 눕기까지의 기억이 서로 상반된 거 까지는 대충 뻔하게 상투적이라 그렇고 그런 영화의 소재로 딱 좋은데, 다만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 중에 서로가 변호사가 있어 죄없는 남녀 변호사끼리 법정에서 쌈박질을 하게 되어버린 게 또 다른 사단이다.
결국에는 일찌감치 좋아할 뻔 했던 변호사 둘이서 피차에 양쪽의 변호를 맡아 갑론을박 할 말 못할 말에 밑바닥 성질까지 뒤집고보니 사건 종결 후에 그동안 미뤄 왔던 거시기를 해 볼라고 침대에 나란히 눕어서 서로 만져도 보고 끌어안아도 보고 해봤지만 아주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하고 아리송한 이유 때문에 쓸쓸하게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라 그건 좀 그럴싸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곁다리로 나온 조연 배우가 술이 떡이 되어서 한 밤을 대로변 배수구를 끌어안고 자고 난 뒤에 다음날 쨍쩅 눈부신 늦은 아침에 깨어 아주 푹 젖은 걸레 꼴이 되어서 볕이 눈부시게 가득한 한적한 주택가 골목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한 방 얻어맞은 듯 띵 해져버렸다.
그거 나도 해 봤었지.
뭐 그거 해봤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다. 그거 뭔 자랑이라고.
다만 그거..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처럼 기분 더러운 경우도 참 별로 없다. 초저녁부터 새벽녘이 되도록 인사불성으로 처 부어 마시고는 다음날 깨어 도대체 얼토당토 않은 장소에서 눈을 뜨게 되는 그런 꼴.
태생이 모주꾼이라 그런 게 아니라면 그래도 젊은 날 세상 고민 다 끌어안고 나 잘났다고 퍼 마시고 댕기던 자들은 적어도 한 두 번 쯤은 겪어 봤음직한 곤욕스런 그 기분.
처음은 거룩하고 창대히 시작하였으나 그 끄트머리가 가까울수록 서서히 뭉개지고 지워지던, 그리하여 잠 깨어 일어난 아침의 오물 범벅으로 뭉개진 바지가랭이같이 그 더럽기 짝이 없던 그 기분.
지난 밤 고주망태로 어질러졌을 때야 그 시각 그 자리에 지친 몸을 눕혀야 할 절실하고도 절박한 그럴싸한 사연이 열두번도 더 있었겠지만 그거 깡그리 이자뿔고 잠에서 깨어난 그 눈물나게 더럽고 낯설은 이튿날 아침은 그럼 대체 누가 책임지냐는 말이지.
술도 덜 깬 어리둥절한 머리로 얼굴은 씨근씨근 여직 울긋불긋 시뻘건데다
머리카락은 마구잡이 쑤세머리로 축축한 아침 이슬에 눈 떠보니 아뿔사 길바닥이었다던지,
아니라도 어디 개 오줌처럼 전봇대에 기대어 어질러져 있다가
그 바쁜 아침 출근 길 서두르는 갑남을녀의 그 야릇한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애꿎은 전봇대만 손가락으로 석석 문지르고 앉았던 아, 그 말도 안되는 참혹함이라니.
그제서야 간밤의 낭만인지 방만인지에 대해 이를 갈며 후회를 하고 어금니를 물어봤자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골이 빠개지는 지독한 숙취에 술 깨는 드링크 하나 따 줄 손길 하나 없이 흙투성이로 어칠비칠 늦은 아침부터 약국찾아 두리번 거리는 그 절박함. 그렇다고 잘 난 드링크 하나 마셨다고 술이 금새 깨어 방긋 웃으며 상쾌한 아침을 맞게 되냐면 그것도 아니면서.
최소한 아직도 알콜에 푹 쩔어있는 뱃속이 그 놈의 싸구려 얄팍한 드링크 그거 웩웩 뒤집어 올리지만 않아도 감사한 일이지. 아무래도 한나절은 어딘가에 죽은 듯이 누워서 고스란히 앓고나서야만이 겨우 사람 흉내로 일어 설 일인데 그나마 하필 다음날에 잡힌 스케줄은 또 얼마나 빡빡했었던지.
게다가 그 빌어먹을 낯설음이 서서히 가시면서 슬금슬금 생각나는 간밤의 객기라든지, 특히 오랜만에 두둑했던 지갑이 빈털털이로 뒷주머니에 삐죽 꽂혀 있는 사연을 추적하다 보면, 아니, 빌어먹을, 원 별놈의 갑자을축이 다 나오는데, 그거 김장 담궜다가 훗날에 보험금 타 먹을 일은 개 코딱지만큼도 없을 순 껍디기들이더라는 것이 사람 심사를 가일층 더 헛개비로 맹글어버리지 않던가 말이다.
그것만이라면 그래도 다행이지.
행여나 들고있던 가방이나 이런 것들이라도 없어졌어 보라지. 욱신욱신 쪼개지는 골머리로 공중전화 박스에 붙어 앉아서 이놈 저놈 여기 저기 전화질을 해대면서 내 가방 못 봤냐 내 보따리 내놔라 이자뿔믄 안되는데 큰일났네 징징거리다 결국은 스케줄이고 뭐고 오만가지 핑계조차 만신이 귀찮아져서 어디 날 샌 심야다방 레지 아가씨들 눈치 봐가면서 겨우겨우 눈 좀 붙이다가 그래도 참 드물게 마음씨 착한 흥부 마누라가 있어서 라면 국물이라도 몇 숟가락 얻어 마시는 날이면 횡재하는 날이었지.
아, 그럼요.
그런 날이 잦으면 그거 아주 폐인이지. 사람 못되고 말고지.
그러니 나는 그거 아주 썩 자주 그러지는 않았다오.
그것 참, 어쩌다 이 나이에 쓸데없이 뭔 일없는 영화 장면에 휘둘려서 오래된 영사기 돌아가다 마냐고.
그래서 참 오랜만에 간밤에 혼자 한 잔 했지.
이런 저런 생각 좇다보니 불현듯
쓸쓸한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그런 시절이 그래도 그 때만큼 헛발질은 안하는 걸 보면 철 꽤나 들었지 뭘.
그런데 그런 날이면 왜 그리 맑은 하늘이니 햇볕이 싫었던지.
구름이나 잔뜩 끼고 빗방울이라도 부슬부슬 드는 날이면 그리 끔찍하기까지는 않아서 그나마 견딜 만은 했었는데 내가 무슨 양서류도 아니고 파충류도 아닌 것이 그만 화창하니 개인 날이면 정말 이가 갈리게 싫었던 것이 지금 생각하니 좀 이상하다.
거 참, 왜 그랬을까.
아는 사람 있으면 좀 갈차 주시든지. 아니, 뭐, 이제는 그리 마실 일도 없으니 애절복통으로 꼭 알아야겠다는 건 아니지만...
200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