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하도나 고요하시니난초는 궁금해 꽃피는거라

 


내가 서정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싯귀다.내가 가지고 있는 두껍고 낡은 미당 시집의 뒷 표지에 그림으로 그려진 시 이기도 하다.

글의 제목은 까먹었다.
까먹었으나마나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저항할 수 없이 좋아지기만 하는 싯귀이기도 하다.

더 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는.
사람의 눈으로 쓴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글의 매무새도 이렇듯 정방형의 결정체처럼 완벽할 수도 있구나. 이 글 쓸 때 그가 귀신에 씌었거나 아니면 그가 아주 귀신이었거나.


이 글을 볼 때마다 내 어릴 때 자라던 낡은 기와집 마당의 둥근 꽃밭에 오월 하순이면 노란 연두색으로 삐죽하게 솟아오르던 난초의 새 순을 생각한다. 간 밤에 비 내려 검게 젖은 땅을 숨막히게 데우던 늦봄의 뜨신 볕도 생각난다. 그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봄 볕 가운데 하얗게 풀 선 바지저고리 입고 몰라도 백 개는 넉넉히 넘어서던 갖가지 크고 작은 화분을 자식들보다 어쩌면 더 애지중지 하시면서 철 맞춰 때 맞춰 심고 물 주고 매만지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나지만, 어찌됐든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기분이 마음에 꺼려진다. ‘니 마음이 구리니 그따위 글을 좋아하는 것이니라’ 꾸짖는다면 감수해야지.
다만 그 인간의 행보가 좋지 않았으니 그 자의 글을 좋아하는 놈은 모두 같은 통속의 인간이리라, 날 세우고 우격다짐만은 없었으면 한다.

미당을 생각할 때 저 난초가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미당의 국물을 조금만 더 기울여 따뤄내면 그 아래 시커먼 건데기 ‘오장 마쓰이 송가’도 있다.
몇 줄 읽다 보면 더 읽고 싶지 않을만큼 참 고약하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詩才는 그런 참담한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풀어 나갈까 궁금한 마음에 에라 그래 똥 한 번 밟았다 생각하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아니나 다를까. .

 

당연한 이야기지만, 굳이 아세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 미당의 글이라고 모두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의 글 대부분이 그저 그러하고 내가 호감을 가지는 벌거스럼하니 묘한 정서를 갖고 있는 이전의 글들도 그렇다고 하나같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시건방진 말이지만 중간 쯤의 글들 몇몇에서는 서정주라는 자신의 이름에 기대어 대충 함부로 갈겨 쓴 것이 아닐까 의심 해 본 글들도 더러 있었다.


다른 이의 글 하나가 또 생각난다.

 

/화장터


몸 털고 선명하게 현신하는

한 켤레 신발

 

이 것은 미당의 글이 아니라 이전자전 소싯적 겁 없이 나잘났다 설치고 다니던 시절에 나랑 둘이서 콧구녕만한 찻집에서 詩展을 열었던 어느 무명 시인의 싯귀다.

후에 내 글 몇 편과 남의 글 다수를 지 글인양 슬쩍 등쳐서 얼렁뚱땅 제 시집 속에 끼워 출판해버렸던 어처구니 없고 괘씸한, 그래도 나름 그 지역에서는 시인행세를 하며 이름을 팔고 다녔던 엉터리 사이비 시인이다. 나 보다 연배는 훨씬 위였지만 그 일로 해서 이 천하에 본 데 없는 글도둑놈아 어쩌구 죽일 놈 살릴 놈 멱살잡이로 한 번 난리를 쳤던 반갑잖은 사람. 뭐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고 관심 둬 봤자 아이고 잘 난 글 몇 개 가져가면 어떻고 던져주면 또 뭐 어때서. 

아무튼 그 일 이후로 상종못할 망종이라 치부하고는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고
그 따위 도둑질이나 일삼는 인간이 詩는 무슨 詩! 하고 내쳐버렸지만 저 우에 ‘화장터’라는 글만은 참 흉내내기 어려운 시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 글에 나타난 남다른 감수성만큼은 지금도 인정한다. 단, 또 누군가의 글을 베껴먹은 것이 아니라면. 
서정주의 난초를 볼 때마다 겹치기로 생각나는 싯귀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안팎으로 비슷한 시각이고 비슷한 상황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무명 시인을 여지껏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각에서 詩仙이라 불리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세에 빌붙어 동포를 팔아 먹은 개자식으로, 아주 재활용도 못할 더러운 쓰레기 같은 늙은 개 취급을 받는 서정주를 싯줄 깨나 짓는답시고 또한 무조건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 맨 위의 난초는 누가 뭐래도 정말 사랑한다.
글 맛도 맛이려니와 내 기억 속의 무엇인가를 건드려서 촉발시키는 저 끔찍한 감수성은 진저리가 나도록 무섭고 아름답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하자면 안타깝고 아쉽고 화나고 떨떠름하고 얄궂지.
그 시절 세상에 매겨졌던 자신의 위치를 일찌감치 자각하고 미리 붓을 꺾었거나 택도 없는 강단이나마 버럭버럭 부려서 약간의 고초를 감내하였더라면.. 에구, 어림도 없는 아쉬움만 간당간당. 그런 아쉬움이 있다는 것 부터가 서정주가 남긴 글에 대한 미련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남긴 글에 비해 정작 그 자신은 제 시대의 시공에 대한 통찰이 치명적으로 어두웠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부족한 통찰력이 그의 말년이 오욕과 영예로 뒤범벅이 되어버린 단초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마쓰이 오장 송가가 쓰여졌던 1944년, 그것도 가미카제가 등장했을 무렵이면 이미 전세는 기울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내 몰리고 있음을 어지간만 한 지성이라면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그 귀기서린 文才 이외에는  아주 귀와 눈이 어두웠던 박약한 인격이었거나.

어느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화두 덕분에 오늘 하루 내내 그 생각이다. 그렇다. 미당인지 말당인지 하여간 더럽게 질긴 이름이다. 씹어도 씹어도 국물이 나오는...  그래서 김지하가 말했다는 인격과 글의 불일치에 대한 견해에 관한 한 나는 유보다. 맨 위에 쓴 난초처럼 어찌할 수 없이 아름다운 글을 보면 글 쓴 이가 누구이건 간에 그 글은 고스란히 박리되어 두둥실 떠오르는데 그걸 낸들 어쩌냐고. 그 인간의 생애는 용납 못하더라도 글은 글대로 아름다운데 어쩌란 말이냐고... 그렇다고 무슨 대의명분에 짓눌려서 흰 것을 검다하고 눙치고 넘어 갈 일도 아니잖은가 말이다. 밑도 끝도 없이 주절거리고 보니 또 회색분자가 되고야 말았다. 하여간에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뜬금없이 던진 화두에 대한 답장이 되고야 말았지만 모쪼록 어떤 꼴이든 민폐는 되지말아야 할 텐데.  




2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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